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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마탑주-17화 (17/337)

나 혼자만 마탑주 017화

"탑주님."

"응?"

웬일로 정서진이 내가 머무는 9층에 올라왔다.

녀석은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옷가 지와 빈 컵라면 용기로 엉망인 주위를 쓱 둘러보았지만 별 관심은 두지 않고 시선을 되돌렸다.

"돈이 필요합니다."

…… 이렇게 갑자기?

"유통 루트 구축 중에 사소한 트러블이 생겨서 예산 외의 추가 비용이 필요하게 됐습니다."

정서진은 이번 마탑 사업에 사활을 걸었다는 스스로의 말을 증명하듯, 정말로 밤낮없이 일하고 있었다.

본인 사비로 사업 예산을 꾸렸고, 그 한정된 예산으로 마탑의 유통체계를 구축하고 포션 자재를 사들였다.

그 외에도 사업체 등록, 경리 업무, 세무사 및 변호사 연동까지 그야말로 수십 명이 해야 할 일을 혼자서 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게 직접적으로 도움을 요청해 온 적은 없었기에, 조금은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필요한데?"

"자세한 사항은 곧 보고서를 올리겠습니다만, 대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유통 업체 변경으로 인해 생긴 손실 좀 메꾸고 사후처리에 필요한 급전 입니다."

"그래? 다행이다. 그래서 금액은?"

"3천입니다."

……잠깐 내 뇌에 과부하가 왔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3천 원은 아니겠지?"

"하. 하. 하. 역시 탑주님. 농담도 잘 하십니다."

그런 처세는 전혀 기분 좋지 않아.

"큰돈이 필요했다면 다른 수단을 강구했겠지만, 딱 빵꾸 메우고 말 정도의 금액이라서요. 내일모레까지 부탁드립니다."

이 미친 놈.

3천만 원이 무슨 땅 파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그런 큰돈을 어떻게 마련하란 소린지 모르겠다.

정서진은 결코 날 떠보거나 시험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재벌 중의 재벌인 이 녀석은 정말로 순수하게,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래. 뭐, 재벌에게 3천만은 껌이겠지. 일주일 식사비도 안 되겠지.

그러니까 쪼르르 올라와서 용돈 달라는 투로 내게 지껄이는 거겠지.

근데 3천만 원은 웬만한 기업 초봉 수준이라고!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나는, 애써대수롭지 않다는 듯 팔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야. 근데 그 정도 금액이면 그냥 기업 대출받으면 안 되냐?"

"오버레이 사태 이후 대출 절차가 까다로워져서요. 마탑과 사업의 정체에 대해 까발려야 할지도 모르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 괜찮을 리가 없지. 그냥 못하겠다고 말할까?

아니다. 연 매출 천억대의 회사를 경영했던 저 녀석이 고작 3천만 원도 벌어오지 못하는 대장을 뭐라고 생각할까.

이건 리더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다.

"알았어. 삼 일 안에 3천이면 되지?"

"예, 잘 부탁드립니다."

정서진이 등을 돌려 걸어가자마자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후회에 빠졌다.

자신 있게 말하긴 했는데. 진짜 어쩌냐?

"아, 탑주님."

마법진 엘리베이터를 타려던 정서진이 등을 휙 되돌렸다. 나는 얼른 좌절 자세를 풀고 근엄한 척 대답했다.

"아직 용무가 남았어?"

"생각해 보니까…… 아무리 푼돈이라지만 갑자기 마련하려면 조금 막막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오, 다행이다. 내 심정을 이해해줬구나!

"한 가지 도움을 드리자면, 이 마탑의 지식과 마법이라는 학문은 현대 사회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입니다. 그 점만 잘 활용한다면 3천 정도의 목돈은 간단히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서진아……"

너무나도 당연한 소리를 그럴듯하게 지껄이는 재주가 있구나. 서진아.

날아다니는 자동차를 만들면 간단히 돈을 벌 수 있을 거라는 소리랑 뭐가 다르냐?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탑주님."

그렇게 정서진은 내 멘탈을 깨부수고는 2층으로 복귀했다.

'하, 어떻게든 되겠지. 고민해 보자.'

하지만.

아무리 고민을 거듭해도 현실적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만약 몇 주 정도 시간을 주고 안정적인 자금 확보를 위한 장기 프로젝트를 짜보라고 했더라면 이렇게까지 막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돌발적으로, 오늘 포함 3일 안에 3천을 벌어와야 하는 미션.

계획과 전략을 중시하는 내게 이런 돌발상황은 고역이다.

"에아야. 있어?"

허공에 빛무리가 모여들며 아름다운 은발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예, 탑주."

"3천만 원을 벌어오라는데 어쩌면 좋을까?"

"검색 중입니다."

그녀가 눈을 감고 있다가 말했다.

"검색 완료. 총 의견 7, 599, 872개. 그중에서 가장 신용도가 높아 보이는 닉네임 '무한긍정' 님의 의견입니다."

"……뭔데?"

갑자기 그녀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님들 님들! 믿올 만한 세력 썰 풀어요! BQ 그룹에서 코인 투자자 모집한대요. 일단 회원가입만 하면 100 코인 지급하고, 회원이 추천인이 되면 100 코인올 추가 지급……."

"안 해!"

나는 다시 책상에 엎어졌다. 조금이라도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의문. BQ 그룹 코인은 정말로 상승이 유력한……"

"그만 해라."

"예, 탑주."

나는 스마트폰을 켜서 끄적거렸다.

"하아, 어쩌지? 막 마법을 팔 수도 없고……"

그 말을 지껄이는 순간 머릿속에 스위치가 켜졌다.

"그래! 마법을 파는 거야!"

"……?"

나는 재빨리 스마트폰의 일정표를 켰다.

"에아. 헌터 협회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내가 말하는 던전 정보들 전부 띄워줘."

"알겠습니다."

"추적자의 광산, 잊혀진 성터, 한기의 사원, 용암굴."

이번에 클럽장들에게 따온 출장 가능한 던전들이었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검색하다가, 허공에 상태창과 유사한 스크린을 띄워주었다.

그중에서 내 눈에 딱 들어오는 던전이 있었다.

명칭 : 용암굴.

구분 : 필드 던전.

특징 : 화 속성 몬스터 / 용암 필드.

난이도 : 2랭크 몬스터 출몰.

기한 : 3일 차 던전. 3일 차 17시에 보스 몬스터 출현 예정.

위치 :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

나는 얼른 플레이어 정보 공유사이트와 커뮤니티에 들어가서 용암굴에 대한 반응을 살폈다.

-용암굴 솔직 후기. 최악의 던전.

-1일 차 선발대입니다. 괜히 3일권 입장료만 날렸네요.

-열기 문제 심각함. 정상적인 사냥이 불가능할 정도.

-3일 차 보스전에는 사람 좀 몰리겠는데, 이래서야 보스 잡기 전에 더위 먹어 죽겠다.

바로 이거다!

나는 저 용암굴에 가서 열기를 막는 마법을 팔 생각이다.

최근에 익히고 있는 2공정 마법을 응용해, 방열의 룬과 유지의 룬을 결합하여 2공정 마법을 만들 수 있올 것이다.

그중에 유지의 룬은 마나를 제자리에 붙잡아 최대 두 시간 동안 유지하는 효과다.

이론상 이 두 개의 룬을 결합하면 화염 저항을 두 시간 부여하는 마법진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리고 이 마법진을 물건에 붙여서 판다면?

용암굴의 열기만 막아준다면 사냥속도가 확 달라질 것이다. 플레이어들의 마정석 수입을 생각해서 가격은 한 장에 5만 정도로 측정한다면 던전 입장 3일권 끊은 사람들은 입장비 본전을 생각해서라도 사주겠지.

그리고 200장이면 천만 원이다. 딱 600장만 만들어 팔면…….

으, 토 나와.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하고 싶어졌다.

나는 아득해져 가는 정신을 다시 붙잡았다. 어차피 마법 숙련도는 올려둬야 했다. 앞으로도 방열의 룬과 유지의 룬은 두고두고 쓰일 테니까.

"에아야. 보라한테 9층에 좀 올라오라고 해."

"예, 탑주."

에아가 사라지고 잠시 후.

"부르셨어요, 선배니이임!"

진보라가 언제나 처럼 꿀 떨어지는 목소리로 인사하며 등장했다.

"와아……"

그러곤 각종 쓰레기와 옷가지로 엉망인 주위를 보며 우아하게 입을 가렸다.

"꼬락서니가 이래서 미안하다. 좀 깨지?"

"이게 왜요?"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남자들 방은 보통 이런 느낌 아녜요? 저는 오히려 이런 거에 로망있어요. 한 가지 일에 우직하게 집중하는 남자 같아서 멋있기도 하고, 막 보면 내가 가서 치워주고 싶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그녀에게서 평소 같은 가식이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진심이냐.

"선배님도 이제 내조 잘 하는 여자만 잘 만나시면 되겠는데요? 헤헤."

웅. 일단 넌 아니라고 생각해. 얼른 화제를 돌렸다.

"보라야. 나 던전 일정 좀 바꿔줘."

"네?"

"내가 클럽장들 잡고 딴 던전 출장권리 중에서 '용암굴'이라는 곳이 있거든. 거기로 보내줄 수 있어?"

"어렵지 않죠."

그녀는 내 노트북을 빌려서 학생회 아이디로 로그인했다.

"어머, 선배님. 여기 그냥 필드 던전인데요? 선배님이 따온 출장권 중에서는 인스턴스 던전도 있는데 왜 굳이 용암굴을……"

"실은 던전 공략이 문제가 아니라 거기서 돈을 좀 벌까 해서."

"돈이요?"

나는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3일 안에 3천만 원……. 쉽지 않겠네요."

"아무튼 용암굴 파견으로 바꾸는 거 가능하지?"

"가능해요. 그보다 선배님."

"왜?"

"저도 같이 가서 도와드릴까요? 혼자서 300장 파는 거 힘드실 텐데."

도와준다고? 그래 주면 땡큐지.

"근데 너도 내일 용암굴 파견이야?"

"아뇨. 그냥 다른 사람이랑 바꾸죠, 뭐."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니냐?"

던전 출장은 그리 쉽게 바꿔주지 않을 텐데.

진보라는 내일 용암굴 파견 예정인 학생들리스트를 쭉 훑어보더니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곤 스마트폰을 열고 주소록을 샥샥 내렸다.

"……와, 저게 다 남자 이름이야?"

그녀가 쉿, 하고 입술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이내 수화기에서 '여보세요?' 하는 목소리가 들리자 그녀의 목소리가 180도 바뀌었다.

"여보세요? 아, 안녕하세요. 오빠! 저 진보라에요오. 네, 네. 저야 잘 지내죠. 오호호! 저번에 차 태워주셔서 너무 감사했어요."

잔뜩 몰입하고 있는지 그녀는 통화를 하면서도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사랑에 빠진 소녀 연기를 하고 있었다.

"내일 용암굴에 출장 가신다고 들었어요. 네, 네. 실은 제가 사정이 생겨서 그쪽에 가고 싶은데 추적자의 광산이랑 바꿔주시면 안 될까요오오?"

와, 옆에서 보니 좀 소름 돋는다.

"어머, 정말요? 네! 감사합니다! 나중에 제가 꼭 답례할게요. 네, 들어가세요! 오늘 하루도 화이팅!"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그녀가 짜게 식은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됐죠?"

"…… 좀 너무 한 거 아니냐."

"헤헤, 여자가 너무 순둥순둥하기만 하면 매력이 없잖아요? 영악한 면이 있어야 귀엽죠."

그런 식으로 합리화를 하기엔 너무 멀리 왔다고 생각한다만.

"어쨌거나 내일 용암굴 확정! 선배님은 마법진에 집중해 주세요. 다른 준비는 다 제가 할 테니까요."

"그거 말고 준비할게 뭐가 있어?"

"마법진 만들어서 사람들한테 어떻게 팔건데요?"

아, 그건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젠데.

"그냥 대충 돗자리 깔고 앉아서 팔면……"

그녀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그거 봐요! 그거 봐! 제가 알아서 준비해 올게요!"

"그럼 그쪽은 믿고 맡길게. 던전은 여주에서 열린다니까 늦지 말고."

"지방출장이네요? 그래도 여주면 가까워서 다행이다. 내일 뵈어요!"

척! 하고 경례 자세를 취한 그녀가 종종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졌다. 나도 겉옷을 챙겨 입고는 스마트폰으로 지도 검색을 했다.

'보자, 여기서 가까운 도매상가가 어디더라……'

마탑주의 힘을 받은 뒤 첫 던전 출장.

여러모로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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