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012화
"탑주. 일어나십시오, 탑주."
시련에서 나온 이후 얼마나 잠들어 있었는지 모르겠다. 내 잠을 깨운건 이제는 귀에 익은 미성이었다.
천천히 눈을 뜨자, 지척에서 아름다운 은발 여인의 얼굴이 보였다.
"일어나셨습니까? 탑주."
"……에아구나. 나 얼마나 이러고 있었어?"
그녀는 천천히 허리를 세우고는 대답했다.
"시련에서 나온 이후 줄곧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현재 시각은 낮 12시. 빠르게 준비하시면 아카데미 오후 수업에 지장 없을 것이라 사료됩니다."
에아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나는 벌써 눈을 감고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탑주. 일어나셔야 합니다."
그녀가 내 어깨를 흔들었다.
"……30분만 더."
그냥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웬만하면 나도 일어나고 싶은데 오늘은 도저히 버틸 수가 없다. 누적된 피로감이 가시지 않았다.
"안됩니다. 어젯밤 탑주가 무슨 소릴 해도 정시에 깨워 달라고 명하셨지 않습니까."
"……그럼 새로 명한다. 제발 날 그냥 내버려 둬."
"어제의 탑주가 오늘의 탑주보다 더 제정신이므로 기각합니다."
……뭐 이런 제멋대로인 호문쿨루스가 다 있어.
반항심이 생긴 내가 끝까지 항전태세를 유지하자, 에아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어떻게 깨워드려야 일어나시겠습니까?"
"아, 몰라. 갑자기 어디서 내 신부가 짠하고 나타나서 깨워주면 일어날지도 모르지."
대충 둘러대며 몸을 뒤척이던 나는 딱 잠들기 좋게 이상적으로 웅크린 자세를 찾았다.
'하으으, 좋다.'
졸음이 쏟아진다.
눈꺼풀이 무겁다.
그렇게 기분 좋은 안락감을 느끼며 잠들려는 순간, 귓가로 어떤 목소리가 들린다.
"자기야- 아침밥 다 됐어-"
온몸에서 소름이 쫙 끼친 나는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으아악! 뭐야 너!"
난데 없이 에아는 앞치마 차림이었다.
그것도 그, 어디 서브컬처에서나 유행하던 알몸에 뒤가 다 트여 있는 바로 그 에이프런이다.
"탑주를 깨우기 위해서 탑주의 취향에 맞춰보았습니다."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그건 그냥 해본 말이고!"
"기분 좋지 않으십니까?"
얘가 큰일 날 소리 하네. 내가 격렬히 부정하자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의문. 남자들은 모두 새신부 복장에 판타지를 가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널 어쩌면 좋니. 이 검색 요정아. 세상을 인터넷으로 배우다 보니 가치관도 판타지가 된 것 같다.
"다른 걸 다 떠나서 네 복장을 봐! 세상 어떤 신부가 그런 옷을 입어?"
그녀는 자신의 차림을 한번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신혼으로 검색하니 이런 차림이었습니다만."
"네가 지금 입고 있는 건 만화나 성인 잡지에서나 가끔 나오는 거야. 코스프레에 가까운 거라고!"
"납득. 시정하겠습니다."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다시 본래의 차림으로 돌아왔다.
……음, 쪼끔 아쉽긴 하네.
에아가 뿌듯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그래도 일어나 주셨군요. 탑주의 명령을 성공적으로 이행했음을 선언합니다."
"……그것참 고맙다."
뭔가 당한 기분이지만 쇼크로 졸음이 달아나긴 했다. 그녀가 건넨 냉수를 한잔 마시자 정신이 한결 맑아졌다.
"조금 늦었지만, 2층 개방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탑주."
아 참. 나 어제 시련 클리어했었지.
그 사실을 떠올리자 기분이 급격히 좋아졌다.
원격 시전에, 나만의 오리지널 마법까지 손에 넣었다. 하루 치 성과라고 생각하기엔 지나칠 정도로 좋다.
"저 또한 2층의 관리 기능을 회복했으며, 호문쿨루스로서 새로운 기능이 추가되었음을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새로운 기능?"
-바로 이겁니다.
움찔.
머릿속에서 에아의 목소리가 바로 들리고 있었다.
-저는 이제 언제 어디서든 탑주와 소통이 가능하며, 탑주의 현인의 눈을 이용해 시야를 공유할 수 있습니다.
'오, 검색 요정의 상시 오픈인가.'
내 생각을 읽었는지 그녀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검색뿐만이 아닙니다.
"그럼 또 무슨 기능이 있는데?"
-탑주가 처리해야 할 마법 연산의 일부를 제가 대리 연산할 수 있습니다.
"……뭐?"
나도 모르게 벌떡 몸이 일으켜졌다.
"지, 진짜야?"
-물론입니다.
"한번 해보자."
내가 지금 오버하는 게 아니라, 이게 가능하기만 하면 마법사에게 있어 정말로 혁명 같은 일이다.
나는 두 손을 펼치고 오른손에는 쉴드 마법진 준비를, 왼손에는 건틀릿의 준비를 했다.
"필드는 깔아뒀어. 내가 오른쪽을 맡을 테니까 네가 왼쪽을 마무리해줘."
-예, 탑주.
"간다."
스릉!
나는 평소처럼 빠르게 오른손의 쉴드 마법진을 완성시켰다. 그리고 침을 꼴깍 삼키며 슬그머니 왼손을 보았다.
"……!"
정말로 왼손에 건틀릿 마법진이 완성되어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내가 만든 마법진과 거의 같은 수준이었다.
-탑주와 호문쿨루스는 의식 체계를 일정 부분 공유합니다. 탑주가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라면 저도 그와 비슷한 숙련도로 전개가 가능합니다.
"와……!"
에아의 이 힘을 바포메트전에 쓸 수 있었더라면 정말로 큰 도움이 됐었을 텐데.
그건 그렇고 정말로 상당한 수확이다.
에아와의 분업을 통해 대형 마법의 시전 속도를 크게 줄일 수 있고, 한 번에 두 개의 마법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게다가 내 마법 숙련도는 에아와 공유된다. 내 성장이 곧 에아의 성장이기도 하니까 성장 효율도 크게 높아지는 셈이다.
"최고야, 에아. 앞으로도 잘 부탁해."
그녀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네, 탑주."
"그건 그렇고 너도 이제야 바깥세상을 구경할 수 있게 됐네. 7년 동안 탑 안에서 인터넷 검색만 했었잖아."
"긍정. 저는 마탑 밖으로는 나가지 못하니까요."
"기분이다. 뭐 바깥세상에서 보고 싶은 거라도 있어?"
그녀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호문쿨루스의 감정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탑주가 원하시는 거라면 저도 좋습니다."
"에이, 그렇게 말하지 말고. 7년간 인터넷 하면서 보고 싶은 게 하나 정도는 있을 거 아냐."
그녀는 꽤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룹 엑시오 콘서트가 보고 싶습니다."
대략 정신이 멍해진다.
"엑시오는 정말 훌륭한 보이 그룹인…… 왜 그러십니까?"
"아, 아니. 예상외로 너무 현실적인 요구라서. 아무튼 알았어. 콘서트 일정 있는지 확인해 볼게."
"감사합니다!"
그녀의 목소리 톤이 급격히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도 좋을까.
나는 에아와 함께 1층으로 내려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1층 로비에 앉아서 모닝커피와 함께 노트북을 두들기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넌 또 여기서 뭐 하냐?"
"출근했습니다."
후릅. 정서진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마시며 대답했다.
"저기 샐러드와 커피를 좀 사놨으니 드시죠."
"어, 진짜? 고맙다."
나는 설렁설렁 걸어가 테이블 구석에 자리했다.
유명 프렌차이즈 빵집의 포장 샐러드 세트가 놓여 있었다. 주섬주섬 플라스틱 뚜껑을 열고 동봉된 사과 드레싱을 세 바퀴 정도 뿌렸다.
"이제 여기로 출근하려고?"
"예. 제대로 된 컨설팅을 하려면 마탑이 어떤 역량을 가졌는지 정확히 파악해야 하니까요."
"네 일로도 바쁠 텐데 그래도 돼?"
"대부분 정리했습니다."
정서진이 안경을 밀어 올리며 말했다.
"……결국, 유닉스의 일이니까요. 당분간은 마탑에 올인할 생각입니다."
"그래 주면 나야 좋지."
나는 일회용 포크로 샐러드를 잘 섞어서 한 입 떠먹었다.
닭가슴살 샐러드였다. 에아가 물을 가져다주었다.
"에아 님도 좀 드시죠."
정서진이 재빨리 말했다.
"권유는 감사합니다만, 저는 음식물을 섭취하지 않아도 생명 유지에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그 말은 섭취 가능하단 건데. 맛이라도 좀 보시죠."
정서진이 노트북에서 손을 떼고 내려와 주섬주섬 샐러드 세트를 꺼냈다. 에아가 당황하며 말했다.
"저는 음식물을 섭취해도 마나로 환원될 뿐인……"
"괜찮아."
내가 말했다.
"인간들도 꼭 생명 유지를 위해 음식을 먹는 건 아니야. 그리고 맛은 인터넷 검색으로는 체험할 수 없는 부분이고."
"탑주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결국, 에아가 내 맞은편에 다소곳하게 앉았다.
으음.
아까 본 에이프런 복장이 생각나서 자꾸 코가 시큰거린다.
"자, 여기 있습니다."
정서진은 친절하게 케이스를 벗기고 드레싱까지 잘 뿌려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에아는 감사를 표하고는 플라스틱포크를 들고 먹기 시작했다.
기껏해야 치킨 샐러드일 뿐이지만, 그녀는 한 입 먹고 눈을 크게 뜨더니 허겁지겁 입에 넣기 시작했다.
거참 복스럽게 먹네.
그리고 옆에서 그 모습을 세상 행복하게 바라보고 있는 정서진이 보였다.
"야, 서진아."
"예."
"너 혹시……"
"예?"
"아니, 아무것도 아냐."
아니겠지. 나는 샐러드를 조금 먹다가 말했다.
"근데 너도 에아 에이프런 복장 봤냐?"
털썩.
갑자기 정서진이 나라 잃은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뭘?"
"에아 씨의 무슨 복장이요? 하, 하하하하!"
이제는 아예 넋을 놓고 헛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일찍 왔어야 했는데!"
나는 잠시 내가 알고 있던 정서진이라는 인물에 대해 고찰했다.
……얘가 원래 이런 캐릭터였던가?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정서진이 안경을 고쳐 썼다.
"잠시 부끄러운 꼴을 보였습니다. 탑주님."
"…… 잘 아네, 미친 놈아."
"그건 그렇고, 밤사이에 뭘 하면 그렇게 될 수 있는 겁니까?"
정서진은 내 구멍 난 셔츠와 바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제 말했잖아. 사무실 확장."
"……확장이라기보다는 전쟁이라도 치르고 오신 것 같습니다만."
"비슷해. 그보다 유통 라인 쪽은 어때?"
정서진은 내가 보기 좋게끔 노트북 화면을 돌려서 파일을 실행시켰다.
"외주 계약 현황입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에아도 궁금했는지 내 옆으로 슬그머니 날아왔다. 물론 손에는 샐러드 용기를 들고 있었다.
"……와, 이걸 하루 만에 다 했다고?"
정서진은 부도난 물류 창고를 사들였고 세 군데의 유통업체와 계약을 맺었다.
"내일부터 유통업체가 시장을 돌면서 포션 재료들을 긁어올 겁니다. 흑산, 할리, 호송 순으로요."
"좋아. 좋아."
역시 유능한 녀석이라니까. 일이 술술 풀린다.
"근데 이거 계약금은 다 어디서 난거야?"
"많진 않지만 제 사비를 털었습니다."
이야, 이건 좀 감동인데.
"미안해서 어쩌냐."
"탑주님 사정 빤히 아는데요, 뭘. 마탑의 성장을 위한 투자금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그때 내게 보여준 돈들 전부 마탑에 쓰기로 한 모양이다.
재벌 3세와 계약하는 것으로, 나는 핵심 인재와 사업 자금까지 동시에 얻은 셈이다.
'자, 그럼 보자. 다음은 뭘 해야 하지?'
포션의 재료 공급과 유통 루트 쪽은 정서진이 있는 이상 문제없다.
이제 문제는 포션을 만들어줄 사람이다.
뭐, 마탑주인 내가 해도 되겠지만, 언제까지고 계속 포션에 매달려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쪽도 전담자를 뽑는 게 나을 것 같다.
"좀 씻고 바로 아카데미에 가야겠어."
내 말에 정서진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도 아카데미에 미련이 있으십니까? 탑주님은 무려 포션을 제작할수 있는 시설을 얻으셨는데요."
"조기졸업 전까지만 다닐 생각이야. 그리고 아카데미에 점 찍어뒀던 녀석이 있거든."
내 말에 정서진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과연, 그렇군요. 확실히 인재를 구하신다면 아카데미만 한 곳이 없죠."
포션 쪽 인원뿐만 아니라, 마탑을 제대로 굴리기 위해선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 적어도 각층에 관리자 한 명 정도는 반드시 배치하고 싶다.
그럼 그 인재를 어디서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
우선 프로 헌터를 고용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들이 전력 외 판정을 받은 일개학생의 말에 귀 기울여 줄 리 만무할 뿐더러, 귀 기울여 준다 한들 헌터들은 이미 길드와 계약된 상태다.
계약 해지에 따른 막대한 위약금을 구할 방도가 없다.
그렇다면 아직 길드와 계약하지 않은 플레이어들을 찾아야 하는데, 절대 다수가 어중이떠중이들이라 발굴이 쉽지 않다.
온종일 사냥터 돌아다니면서 한 사람 한 사람 상태창 열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아카데미야말로 인재 영입 최적의 장소다. 길드에 계약되지 않았으면서도 가능성있는 새싹들이 넘치는 곳.
괜찮은 유망주를 뽑고, 나랑 같이 성장도 해나가면서, 다 함께 마탑을 발전시켜 나가는 그림이 지금으로 써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다.
나는 겉옷을 걸치고 뒤를 돌아보았다.
"인재 찾으러 갔다 올게. 에아."
입술에 드레싱까지 묻혀가며 샐러드를 먹던 그녀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머릿속으로 대답했다.
-다녀오십시오, 탑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