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008화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니 절로 '억' 소리가 튀어나왔다. 시련에서 죽을 뻔한 피로가 온몸에 쌓여 있었다.
이 상태로 당장 시련에 도전하는 건 무리다. 그래서 몸도 추스를 겸, 새로운 작업을 하기로 했다.
나는 9층 책장에서 가져온 포션에 대한 책을 펼쳤다.
『어려우니까 포션이다.』
……책 제목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기본적인 포션들의 목록과 제조레시피가 실려 있었다. 제조 공정 또한 마탑에 있는 시설을 기준으로 명시되어 있었기에 편리했다. 그중에서 내가 시험 삼아 만들어볼포션은 다음과 같다.
<하급 레드 엘릭서>
효과 : 50 재생력. 중복 사용 시 효과 증가.
재료 : 흑산(1) 호송(1) 할리 (2).
흑산, 호송, 할리는 모두 식물형 몬스터들의 부산물로 한국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이었다.
몬스터의 가죽이나 뼈 같은 것들이야 장비 제작에 자주 쓰이지만, 저런 식물 잔여물들은 큰 수요가 없어서 시장가도 저렴한 편이다. 특히 '흑산'은 개당 200원 정도 하던가?
고작 이런 재료로 포션을 만들 수 있다니, 조금 오버해서 비유하면 굴러다니는 돌멩이로 황금을 찍어내는 수준이다.
'좋아. 바로 실전이다.'
우선 1층 창고에 가서 재료를 좀 찾아 봤다.
아쉽게도 포션 재료 쪽은 물량이 부족하거나 시간이 지나면서 썩은 것들이 많아 현지에서 보충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끈질기게 뒤지다 보니 몇병 만들 정도의 분량은 확보했다.
나는 재료들을 들고 다시 책 앞으로 돌아왔다.
'이건 솥을 이용해야 하는구나.'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얽혀 있는 관은 좀 더 상급 포션을 만드는 데 쓰이는 모양이었다.
나는 1층 구석에 놓여 있는 커다란 솥으로 다가갔다.
솥의 표면에는 마법진들이 이것저것 새겨져 있었는데, 마치 전자제품의 조작 버튼 같은 느낌이다.
나는 사용법을 충분히 숙지한 다음, 작업에 들어갔다.
먼저 '물의 룬'이 있는 마법진에는 손을 대고 마나를 흘려보냈다. 그러자 솥 내부에서 마법진이 발동하며 물이 콸콸 쏟아졌다.
"……오오오!"
이거 재밌다. 물을 길어오는 것도 아니고, 수도를 쓰는 것도 아닌 마법으로 솥의 물을 채우다니.
마법사들은 고즈넉하고 수수한 이미지일 것이라고 상상했는데 마법진 엘리베이터도 그렇고 나름 첨단이었다.
솥 안에 물이 충분히 차오른 후에는 솥 바닥에 있는 마법진을 작동시켜 불을 일으켰다.
물이 바글바글 끓기 시작하자, 책에 나와 있는 재료를 놓고 커다란 국자로 휘저었다.
포션 조제는 가끔 마법적인 수단이 필요한 게 특징이었다.'흑산'은 조제 마법을 사용해 가루를 내서 뿌려야 했고, '할리'는 끓는 물에 넣고 튀김처럼 표면이 둥글게 올라올 때 하나하나 마나 코팅을 해줘야 했다.
그렇게 한 시간 동안 솥 근처에서 이런 저런 작업을 거치니 액체의 색깔이 걸쭉한 붉은 빛으로 바뀌었다.
"완성이다!"
나는 솥을 기울여 내용물을 빈 포션병에 담았다. 사실 만드는 것보다 포장 작업이 더 힘들었다.
그리고 현인의 눈으로 완성품의 정보를 확인했다.
<하급 레드 엘릭서>
분류 : 포션
사용 효과 :
-[40 재생력]
-[중복 사용 시 효과 증가]
뭔가 공정에서 실수가 있었는지, 책에 나온 재생력에서 10이 줄어든 40의 결과물이 나왔다.
이거 은근히 세밀한 작업이 필요한 모양인데.
그래도 첫 작품치고는 만족한다.
이제 포션도 실제로 만들어냈으니 거칠 게 없어진 나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
포션 유통은 생각해 둔 적임자가 있었다.
"어, 나야. 혹시 오늘 밤에 시간 좀 있어?"
용무를 묻는 물음에 나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아, 별건 아니고 같이 사업이나 하나 해볼까 해서."
* * *
그날 밤.
나는 상계동 역 근처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왔다.'
차박차박.
차분한 발소리와 함께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잘 빠진 캐쥬얼 슈트에 지적인 느낌의 뿔테 안경. 젊고 트랜디한 영국 신사를 연상케 하는 차림이다.
"오랜만입니다. 유신이 형."
이 녀석의 이름은 정서진. 나보다 두 살 어린 스물한 살이고, 같은 중학교를 나온 후배다.
일단 나보다 어리긴 한데, 겉모습을 보나 몸가짐, 말투를 보나 닳고 닳은 회사원 느낌이 물씬 풍긴다.
"응, 오랜만이다. 서진아."
"사업을 하신다고요?"
……그래도 오랜만에 만났는데 바로 본론이냐. 저 깔끔하고 담백한 성격은 여전했다.
"맞아. 네 도움이 필요해."
"어떤 사업 아이템을?"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내가 어둠 속에 잠긴 길을 가리키며 말하자, 정서진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안경을 고쳐 썼다.
"약속 장소가 하필 통제구역 근처라는 점이 마음에 걸리네요. 혹시 장소가 사업 아이템과 관련 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관련 있지. 그리고 근처가 아니라 통제구역 안인데."
"……."
표정이 굳어진 녀석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떳떳하게 밝힐 수 있는 종류의 사업은 아니겠지요."
정서진이 제기한 의문은 불쾌하기 이전에 합리적이었다.
통제구역은 몬스터들이 출몰하는 위험 지역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의 접근이 없는 것을 이용하여 각종 범죄조직이 숨어들어서 마약이나 불법무기 제조등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빈번했다.
여기선 확실히 부정해야겠지.
"미리 말해두지만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들은 아냐."
"그럼 여기서 사업 내용을 말씀해주시죠."
"여기서 백날 설명해 봐야 넌 이해 못 해. 이건 직접 가서 봐야……"
"유신이 형."
정서진이 들고 있던 서류 가방의 버튼을 꾹 누르더니 바닥에 떨어뜨렸다.
찰칵.
가방이 열리면서 좌우로 벌어지고, 그 안에 수북한 돈다발들이 드러났다.
"사업 초기 자금 정도는 될 겁니다."
"……?"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이 자식 보게.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뭐, 사실 정서진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그동안 이 녀석의 배경을 보고 접근해서 뒤통수 치고 고혈을 빨아먹으려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사업한답시고 접근했다가 돈 내놓으라는 식으로 나오는 레퍼토리는 이 녀석이 살면서 가장 흔히 겪은 경우일 것이다.
하지만 정서진의 입장에서, 나는 그리 간단히 끊어버릴 수 있는 관계는 아닐 것이다.
녀석은 내게 빚이 있다.
그러니 이 돈은 은인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자 빚을 갚고 떠나겠다는 의미이리라. 이걸 받으면 녀석은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겠지.
나는 돈 가방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필요 없어."
"……예?"
"지금 내가 필요한 건 돈이 아니라 네 능력이야."
정서진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뭐, 배경 설명도 없이 무작정 불렀으니 오해할 만하지. 그럼 잠깐 맛보기로……"
나는 오른손을 펼쳤다. 정서진이 그게 뭐냐는 듯 보고 있자 오른손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며 마법진이 펼쳐졌다.
녀석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게 뭡니까? 분명히 형의 고유 능력은……"
"고유 능력이 아니라."
슈웅!
마법진에서 쏘아져 나간 마나 에로우가 근처의 돌담에 부딪히며 쾅!
소리를 냈다.
"마법이야."
"……."
정서진이 떨리는 손으로 안경을 고쳐 썼다.
"마법이라, 제가 그런 비과학적인 이야기를 믿을 것 같습니까?"
그렇게 내뱉은 정서진이 자조적인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라고 지껄이는 건 이젠 시대착오적인 말이 됐죠."
"흐흐, 잘 아네. 몬스터가 나오고 헌터가 활약하는 시대인데."
정서진 본인도 플레이어다. 그런 녀석이 눈 앞에 펼쳐진 이 광경을 부정할 리는 없다.
마침내 결심을 굳힌 듯 정서진은 서류 가방을 챙겨 들고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 * *
나는 정서진과 함께 통제구역을 돌파하여 마탑 앞까지 도착했다.
"이렇게 무모한 짓을 하는 건 오랜만이네요."
어둠에 잠긴 숲을 둘러보던 정서진이 감회가 새로운 듯 중얼거렸다.
"중학교 때는 툭 하면 같이 사고쳤잖아?"
"그때가 좋았죠."
"미국에서는 어땠냐?"
"그냥 저냥 있었습니다. 사실 공부만 죽어라 했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문 앞에서 멈췄다.
"잠깐 손 좀 줘봐."
"손이요?"
"마탑에 들어가려면 표식이 있어야 하거든. 아, 이거 설명을 안 했구나."
외부인이 마탑에 출입하기 위해 선마탑의 문양을 몸에 새겨야만 한다.
에아에게 들은 사실이지만, 이 문양은 통행 권한과 함께 특별한 금제마법이 걸려 있다고 한다.
현재 지정되어 있는 금제의 트리거는 '마탑의 정보 유출'.
이를 어떤 방식으로도 어길 시에는 즉각 마탑의 추적 마법이 발동하고, 대상에게는 마나 역류가 일어난다.
"보안마법의 일종이야."
"흠, 조금 무섭네요."
"강요하는 건 아냐. 하기 싫으면 어쩔 수 없고."
정서진은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사실 설명 안 해주고 찍으면 그만이었잖습니까. 이번엔 형을 믿겠습니다."
사실 아까 의심했던 게 좀 미안하긴 했던 모양이다.
나는 손가락 끝에 마나를 모아서 정서진의 손등에 댔다. 푸른빛의 표식이 도장처럼 새겨졌다.
"좋아. 들어가자."
내가 먼저 시범을 보였다. 손바닥으로 문을 짚는 순간 문 안으로 확 빨려 들어갔다.
마탑 안으로 들어온 나는 살짝 비켜섰고, 뒤이어 문에서 튀어나온 정서진이 균형을 잃고 우당탕 바닥을 굴렀다.
"하하! 괜찮냐? 나도 처음엔 그랬어."
"……예. 괜찮습니다."
옷을 탈탈 털며 몸을 일으킨 정서진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놀랍네요. 탑 안에 이런 공간이 있었다니……"
"탑주, 손님입니까?"
허공에 빛무리가 모여들며 에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서진이 깜짝 놀라며 뒷걸음질쳤다.
"누, 누구?"
"마탑의 관리를 맡고 있는 에아라고 합니다."
그녀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
애는 또 왜 이렇게 넋 놓고 있냐.
"아, 음. 정서진입니다."
두 사람이 가볍게 악수했다.
"에아, 우리가 접대할 만한게 있던가?"
"탑주가 편의점에서 사 온 커피믹스가 몇 봉 남아 있습니다."
"쩝, 그래. 그거라도 좀 부탁해."
에아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사라졌다. 나는 멍하니 있는 정서진의 얼굴 앞에 손가락을 튕겼다.
"헉!"
"답지 않게 왜 이리 멍 때려?"
"아, 죄송합니다."
우리는 로비 중앙에 있는 소파에 적당히 앉았다. 정서진은 번쩍거리는 황금빛 벽면과 각종 실험 도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서울의 끔찍한 흉물이라고 들었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곳일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흐흐, 그렇지?"
"오늘 나오지 않았다면 평생을 후회할 뻔했군요."
……평생? 이 녀석 갑자기 왜 이렇게 오버해?
그때 에아가 나타나서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내려놓았다.
"접대가 이래서 미안하네. 금수저 입에 맞진 않겠지만."
후릅. 정서진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셔보더니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달달한 게 기분 좋군요."
나를 보고 말해라 이놈아.
"그럼 이제 사업 이야기 시작해도 될까?"
"예, 시작하시죠."
나는 먼저 마탑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했다. 정서진은 언제 그랬냐는 듯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래서 1층은 포션을 만드는 포션조제층이야. 내가 미리 하나 만들어봤지."
내가 유리병에 담긴 포션을 꺼내서 올려 두었다.
"이런 게 정말로 상처를 회복시켜주는 겁니까?"
"시험해 봐도 돼."
"……음,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정서진은 바지를 걷어 올려 아까 구르면서 상처가 난 무릎을 드러냈다.
뚜껑을 열고 포션을 조금 부어보자까진 상처가 말끔히 회복되었다.
녀석의 경악한 표정이 볼만 했다.
"이 회복 포션 외에도 마나 회복이나 독이나 냉기 같은 상태 이상을 해제할 수 있는 포션도 만들 수 있어."
"…… 대단하네요."
정서진은 이리저리 포션을 살펴보다가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러곤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안경을 고쳐 썼다.
"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