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006화
"네가 말한 게 이거 맞지?"
내가 일기장을 흔들며 물었다.
"예, 탑주."
에아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내 독서를 방해하지 않기 위함인지 사라졌다. 홀로 남은 나는 책상에 앉아서 거뭇거뭇하게 손때가 탄 노트를 펼쳐보았다.
『제국력 191. 10. 09. 내 이름은 안톤 악시무스. 차기 마탑주가 될 사람이다. 이 글은 마탑주가 되는 나의 영웅담을 기록한 것으로 이후 마탑주가 될 후배들의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을 기대한다.』
역시나 이상한 언어로 되어 있었지만 '현인의 눈'을 가진 내가 읽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제국력 191. 10. 10.
귀찮은 마탑주의 시험이 시작됐다.
스승님은 굳이 전통대로 마탑에 대규모 봉인을 걸어놓은 후 떠나셨다.
이제 나는 내 힘만으로 모든 층의 봉인을 풀어내야 한다.
꼰대들은 왜 이런 쓸데 없는 일에 집착하는 걸까? 이 모든 게 진정한 마탑주가 되는 과정이라고 하는데, 그냥 개똥 같은 소리다. 대체 이런 걸 왜 시키는 거냐고!』
……이거 설마 세대 갈등?
그쪽이나 이쪽이나 사람 사는 건 어디든 비슷비슷한 모양이다.
그보다 저 안톤이라는 사람의 상황은 지금 내가 처한 상황과 비슷했다. 첫 층과 마탑주의 9층을 제외하고 기능이 정지된 마탑.
나는 여러 의문을 품은 채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명색이 동료라는 것들은 장기 휴가받았다며 몇 달간 놀다 올 생각에 들떠 있다. 두고 봐라, 이것들아! 내가 마탑을 장악한 뒤에도 너희 자리가 남아 있을 것 같냐? 대숙청의 시간이다! 캬하하하.』
일단 내 선배가 정상인이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겠다.
이 뒤의 내용은 대부분 동료들에 대한 험담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누가 짜증 나고 누가 아니꼬웠는지.
욕설로 추정되는 부분들은 대거 건너뛰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 보았다.
『……그렇게 2층으로 올라가서 첫번째 시련을 치렀다. 3대 기본 마법만으로 클리어해야 한다는 제한이 걸려 있는데, 참으로 가소롭다. 상위마법에만 의존하는 꼰대들이었다면 꽤 고생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역대최연소 마탑주 후보인 나는 재도전도 없이 바로 통과했다.』
'시련?'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왔다. 다음 층의 봉인을 해제하려면 그 시련인가 뭔가를 통과해야 하는 모양이다.
다른 장들도 계속 살펴보았지만, 정작 시련에 대한 세부 내용이 없었다.
서론에서는 마탑주가 될 후배들의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을 기대한다고 썼으면서, 길잡이는 커녕 본인이 얼마나 우수하며, 얼마나 훌륭한 마법사인지에 대한 고찰, 즉 본인 자랑이 대부분이었다.
'웬 뽀글머리 아저씨가 설명 없이 휙휙 그림을 그려놓고는 참 쉽죠? 하는 느낌이라 묘한 좌절감만 들 뿐인데.'
큰 참고는 안 될 것 같았기에 반쯤 읽은 일기를 덮어버리고 지금까지의 정보들을 종합해 보았다.
이 마탑은 '에렌델 대륙'이라는 곳에서 온 마법의 요람이다. 마법 공학의 실리콘 밸리라고나 할까.
그리고 마탑에는 한 가지 전통이 있었다. 차기 마탑주가 선정되면 현마탑주는 마탑에 대규모 봉인을 걸고, 각 층의 봉인마다 시련을 집어넣는 것이다.
차기 마법주는 혼자서 이 모든 시련을 극복해야하고, 아홉 개 층의 모든 봉인을 해제한 후에야 비로소 진정한 마탑주로서 전 대륙민들의 인정을 받게 된다.
음, 좋아. 이제 좀 정리가 되네.
"그러면 에아. 나도 그 마탑주들의 전통대로 시련을 극복해야 한다는 거야?"
내가 허공에 대고 묻자, 빛무리와 함께 나타난 에아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대답했다.
"현재의 상황은 조금 성격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대규모 봉인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었습니다. 비상시에 마탑의 기술과 지식의 보호를 위해 자동으로 발현되는 '긴급봉인'이었습니다."
"마탑이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전체 봉인을 선택했다는 거야?"
"긍정. 그렇게 말할 수 있겠군요."
어째서 이계의 구조물이 지구에 전이되게 됐는지, 그리고 어째서 내가 마탑주로 선정이 됐는지는 아직 의문이지만, 해야 할 일은 명백했다.
강해지고, 시련에 도전해서, 마탑의 전 층을 개방한다.
1층의 포션 조제만 해도 기존 헌터들의 패러다임을 크게 뒤흔들 수 있을 정도다. 다른 층들도 세상에 변혁을 가져 올 수 있을 만한 기술들이 가득 할 것이다.
'좋아, 좋아.'
동기 부여는 확실하다.
드디어 내게도 기회가 왔다.
이 마탑에 틀어박혀 혼자 꿀 빨면서 지낼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재미가 없다.
나를 중심으로 세계가 돌아가도록 만들 것이다. 내게 전력 외 판정을 먹였던 헌터계에 보란 듯이 크게 한 방 먹이고, 꼭대기에 우뚝 서고야 말 것이다.
그리고 '시련'.
분명 재도전이라는 말이 있었다.
아마도 여러 번 도전이 가능하다는 거겠지.
2층의 시련에서는 3대 기본 마법만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은 내가 익힌 '건틀릿', '쉴드', '마나에로우'를 뜻했다.
'저 세 마법은 거의 마스터했고, 더 센 마법을 익혀도 저 안에서 쓰지 못할 테니까……'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나는 바로 '2층 개방'에 도전하기로 했다.
* * *
마탑의 1층은 무척 크고 방대했다.
내가 밖에서 본 마탑의 구조는 아래층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탑의 둘레가 줄어들며 뾰족해지는 형태였다.
1층은 그만큼 탑에서 제일 넓은 공간이었고, 계단도 많고 방도 많아서 길을 헤매기도 했다.
그리고 마탑창에서는 이 포션조제국을 '1층'이라고만 표시했지만, 정확히는 3층 정도의 구역이 전부 포션조제국에 포함되어 있었다. 층의 개념이 아닌 구획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그렇게 나는 1층의 꼭대기에 있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도착했다.
우우우우우우!
계단 위에는 2층으로 향하는 문대신 블랙홀을 연상케 하는 새까만 포탈이 차지하고 있었다.
[시련의 마법이 공간을 잠식하고 있습니다.]
[다음 층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시련을 통과해야 합니다.]
[시련에 도전하시겠습니까?]
그러려고 왔다.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도전한다."
슈우우우우욱!
대답과 동시에 내 몸은 검은 공간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 * *
"……."
어지럼증이 멈추고 눈을 떴다.
생소한 공간이었다.
일단은 탑의 내부인 듯 벽과 천장이 보였지만, 바닥은 흙이었고 잔디가 나 있었다. 키가 큰 나무들도 곳곳에 보였다. 지면은 울퉁불퉁해서 큰 언덕들을 이루었다.
굳이 묘사하자면 음침한 분위기의 텔레토비 동산 같달까.
[2층 시련에 도착했습니다.]
[시련 참가자의 데이터 확인 중.]
[시련 참가자의 마나를 본 시련에 적합하게 보정합니다.]
[본 시련의 규칙이 적용됩니다. 3대 기본 마법 외의 현재 보유한 모든 마법 봉인.]
[목적지 큐브까지 이동하십시오.]
안톤의 노트에서 본 대로였다.
출발하기 전에, 나는 점검 차원에서 건틀릿, 쉴드, 마나 에로우 마법진을 한 번씩 사용해 보았다.
마법진은 잘 완성됐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점은, 마법을 써도 몸에 전혀 부담이 없다는 것이었다.
몸에서 마나가 빠져나가는 느낌은 들었지만 빠져나간 만큼 금방 다시 채워지는 느낌.
지금 이 몸 상태라면 마법을 무한으로 펑펑 사용해도 괜찮을 것이다.
'시련 참가자의 마나를 본 시험에 맞게 보정한다는 게 이런 뜻인가?'
아무튼 좋다. 각오를 다지고, 잔디가나 있지 않은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일단은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목적지 큐브까지 이동하라고 했지? 어디쯤 있으려나.'
-키키키키킥!
-크크크큭!
소름 끼치는 웃음 소리가 들렸다.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웃음 소리도 뚝 끊겼다.
다시 앞을 보고 몇 발짝 걷기 무섭게 또 이상한 웃음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기다리고 있다가 바로 고개를 돌려 웃음 소리의 원인을 포착했다.
괴이한 생명체들이 나무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채 키득거리고 있었다.
7세 아이 정도 되는 작은 체구에, 특징 없이 새까맣기만 한 몸. 두 눈만이 붉어 도드라져 보였다.
아카데미에서 기본적인 몬스터들의 정보는 통째로 암기했지만 저런 건 처음 본다.
-키킥! 키키키!
세 마리의 소악마들이 내게로 접근해 왔다. 손으로 추정되는 부위에서 손톱이 길쭉하게 늘어나는 것을 보니 결코 호의적인 태도는 아니었다.
'침착해.'
모르는 몬스터라고 해도 문제 될 건 없다. 눈을 감고 집중력을 끌어올리며 오른팔을 뻗었다.
<마나 에로우>
손바닥 앞으로 전개된 마법진에서 즉시 마나로 이루어진 화살이 쏘아져 나갔다.
퍽!
한 놈 머리통에 마나 에로우가 정확히 박혔다.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던 소악마가 이내 자리에 픽 쓰러졌다.
생각보다 쉬운데?
-키킥!
-키끼기기기기!
쉽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나무 뒤와 언덕 등 사방팔방에서 시뻘건 눈들이 휙휙 나타났다.
그 수는 오십, 백, 아니 이제는 거의 수천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명색이 마탑주 후보를 대상으로 하는 시련인데 쉬울리가 없다.
급박한 상황이지만 이 사태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마탑의 시련은 던전과는 달리 사람이 만들었다.
출제자의 의도가 있을 터.
그 점을 미루어 본다면 십중팔구저것들은 잡으라고 만든 게 아닐 것이다.
범위 마법도 없이 건틀릿과 마나에로우만으로 어떻게 수천 마리의 몬스터를 쓰러뜨리란 말인가.
여기선 도망치는 게 맞다.
그런 판단을 마친 나는 즉시 앞으로 내달렸다.
-키키키키킥!
내 뒤로 소악마들이 쓰나미처럼 밀려 들었다. 그것은 몬스터 떼가 아니라 출렁이는 새까만 파도와 같았다.
동산 전체가 한 순간에 시커멓게 물드는 모습은 끔찍할 정도였다.
"제길!"
이 와중에 소악마 몇 마리가 바로 내 등 뒤까지 따라붙었다. 쉬지 않고 달리면서 팔만 뒤로 뻗어 마나에로우를 난사했다.
몇몇 놈들이 나가떨어지며 효과를 봤지만 두 번 마법을 쓰면 한 번 실패할 만큼 집중력이 흔들렸다.
몸을 움직이며 마법을 쓰는 건 아직 익숙지 않다. 거기에 숨까지 차올랐다.
'미치겠네! 큐브란 곳은 대체 어디야?'
나는 필사적으로 주위를 훑었다.
이제는 천장과 벽면도 중력을 무시하고 기어 다니는 소악마들에 의해 새까맣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온 세상이 검게 물들고 있다.
종말을 앞둔 천재지변 영화 주인공이 이런 기분일까. 실시간으로 내가 살아남을 확률이 줄어드는 걸 손 쓰지 못하고 지켜봐야만 하는 건 상당한 고역이었다.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놈들의 움직임은 일정한 방향으로 정해져 있다. 이 같은 속도로 지역전체가 새까맣게 물든다고 가정했을 때, 가장 마지막에 검게 물드는 지역은…….'
찾았다! 오솔길에서 벗어나 조금 떨어진 위치에 이동 마법진이 있었다.
나는 캐스팅을 중지하고 전력 질주했다. 뒤따르는 몬스터들의 공격 때문에 몸에 상처가 났지만 애써 신경을 두지 않았다.
덥썩!
이제는 소악마 몇 마리가 내 몸에 대롱대롱 달라붙었다. 다리와 허벅지가 놈들에게 난도질당하고 있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순식간에 몇백 미터를 주파한 나는 결승점을 앞둔 육상선수처럼 힘껏 발을 뻗어 마법진의 끝에 가져다 댔다. 이어서 중심을 잃은 내가 바닥에 쓰러졌고 소악마들의 새까만 파도가 내 몸을 집어삼켰다.
[1 스테이지 클리어. 큐브로 이동합니다.]
슈슉!
내 몸이 텔레포트 되어 다음 장소에 도착했다.
다행히 다른 공간으로 넘어가자 소악마들도 덩달아 사라졌다.
"……허억, 헉!"
주위를 살필 여력도 없었다. 나는 바닥에 엎드려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시작부터 장난 아니네, 이거.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상체를 세웠다.
어느새 나는 푸른 막으로 이루어진 정육면체의 공간 안에 갇혀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주먹으로 막을 두들겨 보았지만, 밖으로 나갈 수는 없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공간에서 몇백 미터쯤 떨어진 거리에 커다란 벽이 사방을 감싸고 있었다. 정확히는 벽이 아니라 타일 같은 것이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은 형태였다.
[큐브에서 20분간 생존하십시오.]
[시련을 포기하려면 출구 마법진을 밟으십시오.]
한쪽 끝에 푸른 빛을 띠는 마법진이 있었다. 나는 출구의 위치를 확실히 머릿속에 넣어두었다.
[시련을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