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005화
흠흠.
조금 오버해 버렸다.
처음엔 적당히 하고 나올 생각이었는데 괜히 뒤에서 쑥덕거리면서 사람 신경 긁는 놈들이 짜증 나기도 했고, 무엇보다 막상 시작하니까 재미있어서 한계까지 가보고 싶었다.
새로운 고유 능력인 '현인의 눈'에 더해, 그동안 마나를 움직여 마법진을 만드는 훈련을 해온 게 도움이 된 것 같다.
나는 자리로 되돌아와 가방을 둘러멨다.
"……."
"……."
사실이 학교에서 내 이미지는 '나대는 비전투계 열등생'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 나를 바라보는 동급생들의 눈빛은 180도 바뀌어 있었다.
하나같이 '저거 뭐야?' 하는 표정이다.
내가 슬쩍 고개를 돌리자 녀석들은 흠칫 어깨를 털며 내 시선을 피한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다 오는구나.
"야! 김유신!"
소란스럽게 내 앞으로 달려온 갈색머리의 여자애가 경악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너 진짜 김유신 맞아?"
……얘는 또 뜬금없이 뭐래.
"사흘 내내 톡도 씹고 전화도 안받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이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맞다. 이 녀석이 내게 문자를 보낸 녀석이다.
이름은 한윤정. 이 녀석도 비전투계열 고유 능력자라서 열등생끼리 으쌰으쌰하며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사정이 있었어. 밖에 나가서 설명해 줄게."
그때 눈치를 보고 있던 주위의 녀석들이 갑자기 우르르 몰려 들었다.
"아, 앞에 비켜봐! 유신아! 아까 네가 쓴 그 기술 말인데……"
"다시 봤다, 야. 어떻게 한 거야?"
"우리도 좀 가르쳐 주면 안돼?"
"우리 점심 먹으러 차 타고 나갈건데 같이 갈래요?"
사방에서 사람들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한윤정은 바로 뒷전으로 밀려났다.
……이것들은 진짜 얼굴에 철판이라도 깔았나?
그동안 그렇게 사람 깔보던 놈들이 이제 와서 콩고물이라도 받아보려고 다가오는 꼴이 좋아 보일 리가 없다.
아, 물론 그런 것과는 별개로 기분은 좋다.
이게 바로 권력의 맛이로구나!
항상 풀뿌리만 씹어먹고 다녔다가 갑자기 혀에 단맛이 들어와서 조금 놀랐다.
아무튼, 나는 몰려든 날파리들에게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말하며 얼른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한적한 교내 카페에서 한윤정을 불러냈다.
우리는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유 능력이 바뀌었다고?"
"그래."
나는 오른쪽 눈에 낀 렌즈를 벗었다. 푸른 빛으로 넘실거리는 눈동자를 본 그녀는 화들짝 놀란 얼굴로 입을 틀어막았다.
"지, 진짜네? 무슨 능력인데?"
"간단히 말하면……"
나는 손바닥 위로 쉴드 마법진을 펼쳐 보였다.
"이런 걸 쉽게 만들 수 있는 능력."
"……와!"
한윤정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마법진을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녀석의 반웅이 재미있어서 나는 나머지 두개의 마법도 선보였다.
놀라서 왁자지껄 떠들어대던 그녀의 입가에 한 순간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마나는 손전등. 고유 능력은 렌즈라고 했었지. 좋은 고유 능력은 마나로 이런 것도 만들 수 있는 거구나."
글쎄.
나는 그 의견에는 회의적이다.
마법사가 된 지 나홀째니 아직 확신할 단계는 아니지만, 마법은 고유 능력과는 별개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마나만 쓸 수 있다면 누구든지 사용할 수 있는 기술.
고유 능력에 구애받지 않는, 후천적노력으로도 향상될 여지가 충분히 있는 기술.
이 힘의 근본이 알려지면 아마도 헌터계가 통째로 뒤집히지 않을까.
"뭔 생각을 그리 심각하게 해?"
"아니, 아무것도 아냐."
상념을 털어내고 앞을 바라본 나는 깜짝 놀랐다.
이름 : 한윤정.
고유 능력 : 좌표 추적.
개인 특성 : [정밀계산 Lv.3] [수집가 Lv.1]
기본 능력치 : [마력 16] [체력10] [순발 6] [근력 4]
특수 능력치 : [지능 5] [인내 5]
능력치 총합 : [46]
타인의 상태창이 보인다.
고유 능력이 바뀌면서 당연히 탐지 기능은 사라진 줄 알았는데, 여전히 계속 보이잖아? 이런 생각지도 못한 이득이…….
"야, 김유신."
한윤정이 싸늘한 표정으로 앞섶을 가렸다.
"너 어딜 보냐?"
"네 상태창."
"방금 고유 능력 바뀌었다며! 이 변태 쓰레기가 진짜!"
……진짠데.
경멸하는 눈빛으로 쏘아보던 그녀가 한숨을 푹 쉬며 커피를 쪼로록 들이켰다.
"암튼 축하해. 이제 성적 올리면 던전 출장도 갈 수 있겠네."
"이번 달 안에 졸업하려고."
"……어엉?"
그녀가 그건 또 뭔 소리냐는 듯 인상을 구겼다.
"너 설마……"
"맞아. 조기졸업 시험에 도전할 생각이야."
"야! 김유신!"
그녀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너 그게 무슨 시험인지는 제대로 알고……"
웅성웅성.
갑자기 주위가 소란스러워지면서 그녀의 목소리가 끊겼다.
카페에 있던 사람들이 빠르게 짐을 챙기고 카페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한윤정도 손목시계를 보더니 흠칫한 표정을 지었다.
"아, 늦었다! 좀 이따 이야기해! 제발 막장 짓 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 알았지?"
한윤정은 다음 수업을 준비하러 서둘러 떠났다.
그녀와 헤어진 나는 홀로 학생회에 들렀다. 그리고 종이 한 장을 발부받아서 열심히 써 내려갔다.
바로 조기졸업 시험 신청서.
한윤정에겐 미안하지만, 마탑주가 된 이상 여기서 2년을 더 있는 건 낭비다.
이번 달 안에 졸업하고 헌터 자격을 따내주마.
신청서를 모두 작성하고 제출을 위해 학생회 사무실에 들어갔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갔고 어려 보이는 인상의 여학생 한 명만 남아 있었다.
"하, 학생회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1학년인가? 짬밥이 부족해서 남아 있는 모양이다.
나는 약간의 동정심을 느끼며 서류를 내밀었다.
"여기 내는 거 맞죠?"
그녀는 내서류를 건네받고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서류와 내 얼굴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뭔가 문제라도?"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붉혔다.
"아! 죄, 죄송합니다! 조기졸업 신청서네요. 행정 조교 쌤 오시면 말씀드릴게요."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서류전면에 보이는 '2학년', '전력 외', 그리고 마력 제외 근순체 합이 20도 안 되는 능력치의 학생이 조기졸업 시험을 치르겠다니.
이 녀석이 제정신인가 생각했을 것이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물론, 내가 남의 눈치 볼 부분은 아니다.
지금 자신감은 최고조였다.
* * *
나는 다시 마탑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적응안 되는 1층의 휘황찬란한 황금빛 로비와 실험기구들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마법 연구도 좋지만, 일단 이곳이 뭘 하던 곳인지 정확히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내가 생각해도 그동안 너무 경계심이 없이 마법진에만 몰두해 있었다.
"에아."
내 부름에 허공에 빛무리가 모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아름다운 은발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르셨습니까? 탑주."
"마탑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려줘."
그녀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이제야 물어보시는군요."
"……나도 순서가 바뀌었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
내 성격상 뭔가에 한번 빠지면 헤어나오지 못한다. 마법 연구에 들어가기 전에 이곳에 대해서 좀 파악해둘 생각이다.
"제 기억에는 없지만, 기록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설명드리겠습니다. 처음 영상에서 설명해 드린 것처럼 마탑은 에렌델 대륙의 마법 총괄 기관이었습니다."
"에렌델 대륙이라고 하는구나."
다른 세계의 몬스터가 출몰하기 시작한 오버레이 (Overlay) 현상의 핵심은 지구와 어떤 이계가 '겹쳐졌다'는 것이다.
그 다른 이계의 정체가 에렌델 대륙이란 걸까?
"당시 마탑의 영향력은 제국이나 왕국을 포함한 전 대륙에 뻗어 있었습니다. 제국의 황제라고 해도 마탑주에게 반기를 들 수는 없었습니다. 마법이 곧 경제력이고, 군사력이자, 문화 그 자체인 시대였으니까요."
"음."
"마탑은 마법의 발생지이자 요람이었습니다. 수 많은 주문과 마공학 기술의 근본이 마탑에서 처음 출현했고,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어 왔습니다."
"그 기술들이 이 마탑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거지?"
"긍정. 행성마다 마나의 성질이 달라 지구에서 에렌델의 기술을 100% 완벽하게 재구현할 수 있다고는 장담하지 못하지만, 상당 부분은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탑주께서 3대 기본 마법진을 지구에서 재현한 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성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후후. 이렇게 띄워줘도 뭐 안 나오는데.
"그럼 이 1층은 뭘 하던 곳이었어?"
내가 어지럽게 얽힌 관과 실험도구들을 보며 물었다.
"1층은 주로 포션을 조제하던 층이었습니다."
"포션?"
이거 점점 게임 같아지네.
사실 마나도 나오고, 초인도 나오고, 마법사도 나왔으니 이제 포션이 나와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보다 핵심은 이거다.
포션의 가치는 얼마나 할 것인가?
아직 지구에선 마시면 상처가 회복되는 그런 마법 같은 액체는 등장하지 않았다.
간혹 회복 계열의 고유 능력을 갖춘 '힐러'들이 있지만, 그들은 정말로 극소수다.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긴급조치를 위한 구급상자 정도를 들고 다니는 게 전부였고,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길드라면 전문 의료팀을 대동하고 다녔다.
거대 길드급 정도는 되어야 회복 능력자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내가 포션을 팔기 시작하면?
'두말할 것도 없이 대박이지.'
돈 벌 생각을 하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어떻게 포션을 팔아먹을지에 대한 청사진이 저절로 머릿속에 펼쳐졌다.
이번 일에 딱 맞는 적임자도 생각났지만, 돈벌이에 관한 문제는 내일 생각하기로 했다.
일단 오늘은 이 마탑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는 게 목적이니까.
"그러고 보니 여긴 탑 형태의 구조물이잖아? 1층이 포션 제조라면…… 층마다 담당하는 게 다른 거 아냐?"
"역시 탑주. 정확한 추론입니다. 마탑은 층마다 기능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눈이 번쩍 뜨이는 이야기였다.
그럼 층이 총 아홉 개 있으니까, 꼭대기인 마탑주의 방을 제외해도 여덟 개의 신기술이 있다는 소리다.
그냥 포션 제조만 해도 몇 대가 먹고살 돈을 벌 정도인데, 다른 층들은 또 얼마나 대단하다는 거야?
"그럼 다음 2층은 뭔데? 3층은?"
"저도 모릅니다."
"……네가 모른다고? 탑 전체를 관리하는 호문쿨루스라며?"
"현재 마탑은 2층부터 봉인되어 있습니다. 저 또한 다음 층에 대한 데이터와 관리 기능이 잠겨 있는 상태입니다."
봉인이라니.
탑의 봉인이라면 내가 마탑주가 되면서 다 풀린 게 아니었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녀가 내 이마에 살짝 손을 얹자, 눈앞에 새로운 화면이 떠올랐다.
<에렌델의 마탑>
영주 : 김유신.
발전도 : 하.
총인원 : 1명.
보유 마력 : 7, 550, 000
제1층 : 포션조제국 / [포션조제관: 없음]-직위를 부여해 주십시오.
제2층 : ???
제3층 : ???
제4층 : ???
제5층 : ???
제6층 : ???
제7층 : ???
제8층 : ???
제9층 : 마탑주의 방 / [마탑주 : 김유신]
<영지 고유 능력>
마력 동력 : 마력 발전소가 영구히 작동하고 있습니다. 탑의 마력이 일정량으로 유지됩니다.
형상 기억 합금 : 마탑의 벽은 큰충격을 받아도 시간이 지나면 원래의 형태대로 돌아오는 특수 합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자연 재생 : 마탑의 소속원들은 마탑 내부에서 체력과 마력의 재생 효과를 받습니다.
"이건 상태창이 아닌데?"
"비슷한 종류입니다. 영지의 현황올 알려주는 영지 버전의 상태창입니다."
"오호. 이런 것도 있구나."
창을 한번 살펴보았다. 에아가 말한 것처럼 2층부터 8층까지는 ???' 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럼 다른 층의 봉인을 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자세한 설명은 저에게 듣는 것보다 서적을 참조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같이 9층으로 가시죠."
나와 에아는 마탑주의 방으로 이동했다.
나는 마법진 엘리베이터를 타서 올라왔고, 그녀는 허공에서 빛무리가 모여드는 효과와 함께 등장했다.
그녀는 나를 책장 쪽으로 안내했다. 마법의 정석이 꽂혀 있던 바로 그 책장이었다.
나는 책 몇 권을 뒤적거리다가 조금 특이한 것을 발견했다.
서적이라기보다는 낡은 노트.
누군가의 일기장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