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001화
"상계동으로 가주세요."
택시 뒷좌석에 탄 내가 그렇게 말하자, 기사 아저씨는 의아한 듯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상계동?"
"예."
아저씨는 요금기를 켜고 액셀을 밟았다.
"그 음침한 동네를 뭣 하러 가?"
"……하하, 그냥 좀 볼일이 있어서요."
"보통 그 동네는 잘 안 가려고 하거든. 이상한 탑이 있잖어."
"그렇죠."
오버레이 (Overlay) 현상이라고 하던가.
수년 전부터 갑자기 지구에 이계의 괴물들이 나타나고 본 적 없는 식물들이 자라는 이유를, 학자들은 지구에 또 다른 세계가 덧씌워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물론 지구에 동식물들만 전이 된 것은 아니다.
이계의 보물.
이계의 언어.
이계의 문명.
그리고 무엇보다 이계의 '유적'도 전이되었다.
고대 황궁, 공중정원, 용의 둥지, 수중도시 둥 그 안에 사람은 없었지만 틀림없는 이계 문명의 흔적이었다.
그리고 이 유적은 대한민국의 서울에도 하나 있다.
오버레이 사태와 함께 전이 된 거대한 '탑'.
서울시는 졸지에 남산 타워와 롯데 타워에 이른 세 번째 탑을 얻은 셈이었지만, 이 새로운 탑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별로 좋지 못했다.
"워낙 소문이 흉흉하잖어."
기사 아저씨가 말했다.
"몬스터들을 불러 모으는 탑이라느니. 그 안에 세상을 침략할 몬스터들이 우글거릴 것이라느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몬스터에 의해 씻을 수 없는 피해를 본 당시의 시민들은 이계의 것이라면 무엇이든 배척하는 성향이 있었다.
실제로 탑 주변은 몬스터들이 자주 출몰하는 통제구역이기도 했고.
"군대까지 나서서 탑을 철거하려 했다는데 글쎄, 총이든 미사일이든 탑에 흠집도 못 냈다는 거 아녀!"
"대단하네요."
"차림을 보니까 헌터인 것 같은데, 그래도 몸 조심혀."
나는 수다쟁이 기사 아저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이 아저씨에게 말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나는 헌터가 아니라 마법사다.
그리고 그 탑.
이제는 내 거다.
* * *
6개월 전.
지구와 다른 이계가 겹쳐졌다는 '오버레이' 사태 이후, 인류는 몬스터라는 새로운 천적과 맞닥뜨리게 됐다.
빈 공터를 그냥 내버려 두면 잡초가 무성하게 올라오는 것처럼, 몬스터들도 아무 이유 없이 불쑥 불쑥 나타나 버리는 이상한 시대가 됐다.
그리고 그 몬스터를 사냥할 수 있는 존재.
'플레이어 (Player)'.
말 그대로 게임을 플레이하는 캐릭터처럼, 몬스터를 사냥하고 능력치를 올려 무한히 강해질 수 있는 존재들이다.
다만.
모든 플레이어가 '프로 헌터'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름 : 김유신
고유 능력 : 탐지
개인 특성 : [과몰입 Lv.6] [분석Lv.1] [마나의 아이 Lv.1]
기본 능력치 : [마력 56] [순발 7] [근력 5] [체력 5]
특수 능력치 : [집중 3] [인내 2] [지능 2]
능력치 총합 : [80]
'오늘도 여전히 안 올랐구나.'
근력 능력치의 상승을 위해 값비싼 플레이어 전용 헬스장을 다니면서.
체력 능력치를 위해 고강도 스케쥴의 유산소 운동 병행까지.
다섯 달째 이 패턴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내 능력치는 좀 처럼 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플레이어로 각성한 지도 벌써 2년째. 성장이 더뎌도 너무 더 디다.
"후우우."
나는 피로에 찌든 얼굴로 턱을 젖혔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도시 전철 안.
여러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괴상한 신조어를 난발하며 웃고 떠드는 중학생들, 영상통화로 어린 딸에게 손을 흔들고 있는 가장, 이어폰을 끼고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아가씨 등.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일상이지만, 동시에 어제와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오늘의 풍경.
내게 있어 일상은,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정체를 뜻한다.
……나 또 뭐래냐.
괜히 기분만 우울해졌다.
기분 전환이나 할 겸, 숨이 턱턱막히는 내 상태창에서 스마트폰 화면으로 넘어갔다.
언제나 처럼 유명 헌터들의 소식이 포털 사이트 메인을 차지하고 있었다.
[김하진 팀장이 이끄는 오라클 길드 1팀. 드디어 '묵뢰의 신전'을 공략해내다!]
[집중 조명! 세 개 길드가 잇따라 공략에 실패한 '묵뢰의 신전'은 과연 어떤 던전이었나?]
[김하진 팀장, '나보다 탱커 포지션을 맡은 차영호의 역할이 커'.]
[묵뢰의 신전에서 발굴한 아이템 '암흑가의 반지' 시가 700억 추정.]
쓰읍, 부럽다.
나도 던전 좀 가보고 싶다.
사실 플레이어의 능력치 상승은, 지구의 훈련법을 따르는 것보다는 던전에서 몬스터를 사냥하는 쪽이 훨씬 효율이 높다.
그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헌터계에서 '전력 외'로 평가받고 있는 나는 던전에 들어갈 자격부터가 없었다.
왜 '전력 외'냐고?
간단하다. 현대의 헌터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고유 능력'.
해당 플레이어의 전투 스타일을 최종적으로 결정짓는 요소다.
그리고 내 고유 능력인 '탐지'는 타인의 상태창을 볼 수 있는 능력이다.
만약 어느 누군가가 '그래도 정보수집계열 능력이니까 쓸만하지 않나요?' 라고 묻는다면 나는 친절한 미소를 띤 채 이렇게 대답해 줄 것이다.
'그럼 제발 네가 상태창 보는 걸로 싸워보세요! 몬스터가 상태창이 있는 것도 아니고!'
……흠흠, 아무튼 헌터로서 밥 먹여주는 능력은 아니란 소리다.
어디 길드 스카우터 정도로 취업은 할 수 있겠지만 내가 원하는 건 현장에서 뛰는 진짜 '헌터'다.
나는 체념하듯 한숨을 쉬며 쳐다보기도 싫은 내 상태창을 다시 바라보았다.
기본 능력치 : [마력 56] [순발 7] [근력 5] [체력 5]
비루한 상태창이지만 그나마 장점을 꼽아보자면 마력 능력치다.
이거 하나만큼은 비정상적으로 높다.'마나의 아이'라는 개인 특성 때문인지 마력은 숨만 쉬어도 오르는 수준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있다. 플레이어의 '마력 능력치'는 고유 능력과 같은 이능을 강화해 주는 효과다.
예를 들어 불을 쓰는 능력자가 마력 능력치가 높다면 불꽃의 화력이 강해지거나 사거리가 늘어나고, 다양한 응용이 가능해지는 식이다.
남의 상태창을 훔쳐보는 내 능력?
상태창이 예전보다 더 잘 보이고, 더 빠르게 열리는 듯한, 그런 미묘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긴 한데 결론은 그냥 무쓸모잖아.
내 유일한 장점이 마력인데, 마력 능력치는 내게 있어 계륵이나 다름없는 상황.
꼬여도 이따위로 꼬일 수가 있을까.
내 상태창에 대해 들은 친구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비슷했다.
망캐.
마력에 몰빵한 전사캐릭터.
영원히 고통받는 상태창 셔틀.
그럼에도, 나는 프로 헌터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내가 헌터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뿐.
전투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근력과 체력 능력치를 올려서 몸으로 때우는 것뿐이다. 하지만 던전을 못가니 이것 또한 만만치가 않다.
상태창을 보며 한숨을 푹푹 쉬고 있는 사이, 전철의 안내 방송이 들렸다.
-이번역은 이 열차의 종착역인 상계역. 상계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한산한 열차에 짐을 챙기는 사람들로 분주함이 감돌았다.
나 또한 가져온 가방을 메고 몸을 일으키자 반대쪽 유리창으로 종착역의 전경이 비쳐들었다.
'그래, 불평하고 있으면 뭐하겠어.'
마음을 추스르고 마지막 역에서 내렸다.
* * *
서울시 노원구 상계동.
낡고 우중충한 회색빛 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고, 부서진 콘크리트 잔해들이 바닥에 어지럽게 굴러다녔다. 이곳은 아마도 현재 서울에서 가장 집값이 저렴한 동네일 것이다.
나는 고개를 들어서 그 집값 하락의 원인을 바라보았다.
"저거구만."
서울의 흉물로 통하는 거대한 회색탑.
이 동네에서는 아주 잘 보였다.
저 탑은 몬스터들을 불러 모은다느니, 안에는 마왕이 살고 있다느니 하는 소문들이 떠돌고 있었다.
대부분 검증되지 않은 도시전설에 불과하지만, 저 주변은 이계의 영향력이 강해서 몬스터들이 출현하는 '통제구역'이다.
위험 지역임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내가 이런 곳까지 온 목적은 하나.
스마트폰을 켜서 미리 링크를 걸어놓은 페이지로 넘어갔다.
-몬스터 헌팅 스팟.
-사냥 허가, 던전 면허, 헌터 자격증 없이 간단히!
-걸리지 않고 통제구역 내에 침입하는 방법.
맞다. 내 목적은 불법 사냥이다.
단순 신체 단련 같은 지구식 성장법으로는 이제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협회에서 '전력 외'랍시고 던전 출입을 허가해 주지 않겠다면, 억지로라도 몬스터를 잡고 능력치를 올릴 생각이다.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나는 통제구역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회색빛 콘크리트 건물들을 지나, 저 멀리 정글처럼 이계수들이 무성하게 자라나 있는 지점이 보였다.
철조망과 바리케이드로 둘러싸인 그곳은 위험구역임을 증명하듯 접근금지의 푯말이 가득 박혀 있었다.
당장 발을 돌리라는 무언의 경고.
무의식적으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좋아, 들어가자.'
나는 다시 한번 출입 위치를 체크했다.
뭐, 통제구역이라지만 경비가 아주 삼엄한 건 아니다.
기본적으로 통제구역의 몬스터들은 자기 영역 안에서만 지낸다. 가끔 헌터들이 들어가서 청소를 할 때도 있지만 몬스터들은 리젠이라도 되듯 끊임없이 불쑥 불쑥 생겨난다.
그래서 정부에서도, 헌터 협회에서도 포기한 골칫덩이 땅이 바로 이통제구역이다.
이런 곳에 정규 헌터를 수십 명씩 이나 파견한다는 것 자체가 전력 낭비인 셈.
협회에서는 대도시에 직접 생성되는 몬스터를 막는 것만도 벅차다.
나는 인터넷에 나와 있는 대로 인적이 드문 언덕을 타고 올라가서, 철조망을 넘어 통제구역 안으로 들어왔다.
다행히 카메라나 경비 인력은 보이지 않았다.
'좋아, 그럼 준비.'
둘러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하얀 진압봉 같은 것을 꺼냈다.
정식 명칭이 있긴 한데 나는 그냥 쇠파이프라고 부른다. 몬스터의 뼈와 금속을 섞어 제작해 마나를 머금게 할 수 있는 무기다.
눈을 감고, 집중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마나가 몸속에서 유유히 흘러가는 게 느껴진다.
그 흐름에 살며시 간섭하여, 흐르는 강물의 물길을 틀듯 마나를 유도 해 오른손에 쥐고 있는 쇠파이프에 천천히 밀어 넣었다.
우웅!
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더니, 쇠파이프의 겉면이 푸르스름한 빛을 띠었다.
성공이다.
이게 바로 플레이어들의 기본기인 마나코팅.
평범한 물건이라도 마나를 부여하여 몬스터를 쓰러뜨릴 수 있는 흉기로 둔갑시키는 기술이다.
모든 준비를 마친 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걸어갔다.
시간은 이제 19시쯤 됐으려나, 어둠에 물든 검은 숲은 음침하기 짝이 없었다.
아직 늦지 않았어.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해.
간헐적으로 떠오르는 그런 불안한 생각들을 애써 머리를 흔들어 비워냈다.
이제 곧 있으면 플레이어 평가일이다. 그때까지 근력과 체력 능력치를 올려서 어떻게든 '전력 외' 판정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 이후에는 정상적인 절차로 몬스터를 잡으면서 성장하면 된다. 그만큼 나는 절실했다.
사브작, 사브작.
수풀 너머로 기척이 느껴졌다. 최대한 발소리를 죽인 채 다가가 나무뒤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고개만 슬쩍 내밀어 보았다.
몬스터가 있다!
구르마 (Gurma).
눈, 코, 입이 규칙성 없이 제멋대로 얼굴에 붙어 있어 창조주가 만들다가 만 것 같은 생김새로, 오뚝이 같은 몸뚱이로 통통 튀어 다니다가 토끼처럼 생긴 커다란 귀를 팔처럼 이용해 사람을 공격하는 몬스터.
천만다행이다.
구르마는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최약체 1랭크로 취급받는 녀석이다.
만약 이 통제구역의 몬스터들이 2랭크 이상이었다면 나로서는 도저히 답이 없었을 것이다.
들키지 않게 접근해서 기습하고 싶었지만, 녀석이 먼저 나를 발견했는지 커다란 두 귀를 말아 주먹처럼 쥐고는 이쪽으로 통통 뛰어왔다.
'침착하게.'
나는 제자리에서 구르마의 동작을 끝까지 보고는 허리를 젖혔다.
부우우웅!
바람을 가르며 눈앞을 지나가는 공격에 온몸의 털이 삐쭉삐쭉 섰다.
위력은 있지만, 패턴은 정직하다.
다음 공격도 어깨를 뒤로 빼는 것으로 흘리듯 피해낸 나는 구르마의 옆구리 쪽을 향해.
빠아아악!
쇠파이프를 풀스윙으로 휘둘렀다.
놈의 옆구리가 젤리처럼 움푹 들어가며 회색으로 변했다.
-꾸루룩!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난 구르마가 재차 달려들어 연속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래 봐야단조로운 원투 패턴의반복. 나는 회피를 반복하며 생각했다.
녀석의 약점이 옆구리 말고 또 어디더라?
아, 그래.
고개를 젖혀 공격을 피한 나는 뒤편의 나무를 왼발로 디디며 몸을 띄웠다.
그리고 공중에 뜬 그대로.
부우우우웅!
몸무게가 실린 일격을 머리통에 가했다.
젤리 같은 것이 퍽! 하고 터지는 소리와 함께, 놈의 상반신이 절반넘게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나는 착지와 동시에 휘둘러져 오는 공격을 쳐내고, 몸을 뒤틀어 발차기를 날렸다.
꾸드드득!
마침내 구르마의 몸통 전체가 회색빛으로 물들더니 파스슥 소리를 내며 몸체가 무너져 내렸다.
……이겼다!
[마력이 1 올랐습니다.]
"허억! 허억! 후우!"
내가 몬스터를 잡았다!
보고 있냐? 협회 놈들아! 왜 내가 전력 외인 거냐고!
……잠시 자아도취 상태였던 나는 정신을 차리고 능력치를 확인했다.
다른 건 다 좋은데, 근접전투를 벌였음에도 근력이나 체력이 아니라 마력이 올랐다.
정말 빌어먹을 체질이다.
뭐, 그래도 이런 기세라면 다른 능력치가 오르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힘차게 몸을 일으키며 사냥을 재개했다.
* * *
한번 사냥의 맛을 본 이후, 밤이 늦는 줄도 모르고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오늘의 수확은 마력 2와 순발 1.
근력 1.
몇 달간 미친 듯이 운동해도 변화가 없었던 걸 생각하면 페이스가 엄청나게 빠른 편이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
사실 컨디션이 그리 좋지 못했다.
체력은 문제없었지만, 워낙 오랜만에 몬스터와 싸워서 그런지 체내의 마나가 불안하게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무슨 증상인지는 모르겠는데 조금 겁나긴 한다. 마나 역류로 죽는 플레이어들의 이야기는 인터넷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으니까.
이제 돌아갈 생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
정신없이 구르마를 사냥하다 보니 주위가 완전히 새까매졌다.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나무들이 사방에 쫙깔린 모습은 더 없이 음침했다.
이거 빠져나가는 것도 일이겠는데.
스마트폰을 켜고 GPS와 지도 앱을 실행시켰다. 위치를 확인해 보니 숲의 깊은 곳까지 들어와 있었다.
'……나도 참.'
안다.
나도 내 문제를 자각하고 있다.
무언가에 한번 꽂히면 좀 처럼 헤어나오질 못하는 타입이다.
플레이어로 각성하며 얻은 내 첫개인 특성이 '과몰입'인 것도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서두르자.'
나는 지도 앱에 의지하며 걸음을 옮겼다.
주위가 워낙 어두워서 플래시를 켜고 싶었지만, 다른 몬스터들의 이목을 끌 수 있으니 참아야 했다.
툭.
그때 발치에 뭔가 밟혔다.
맨땅과는 확연히 다른 감촉이 발끝을 타고 뇌리에 꽂힌다.
나는 다리를 들어 다시 한번 그곳을 밟아보았다.
"……!"
이번엔 맨땅이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재빨리 스마트폰을 끄고 뒤로 몇 발짝 물러섰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크르르르르'하는 낮고 음침한 울음 소리가 깔렸다.
망할!
구르마 같은 게 아니다.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소리가 들린 반대방향으로 달렸다.
-캬아아아악!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뒤에서 터져나오는 괴성.
재빨리 수풀 속으로 뛰어들었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 두 팔을 앞세워 돌진해야 했다.
몸 곳곳에 나뭇가지에 긁힌 생채기들이 생겼다.
우지끈! 콰직!
그리고 바로 뒤에서 나무들이 통째로 부러지고 뽑히는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강해 보이는 몬스터에게 쫓기는 상황. 게다가 아까부터 불안하게 끓어오르던 몸 안의 마나가 점점 더 강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허억! 헉!"
입 밖으로 거친 숨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능력치를 올려보겠답시고 했던 체력 훈련이 지금 이 순간에는 도움이 되고 있다.
하지만 결국 내 속도로는 놈을 따돌리지 못하고 따라잡힐 것이다.
이제 어쩌면 좋지?
어쩌면?
후웅!
별안간 등 뒤에서 들린 바람 소리에,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숙였다.
머리 바로 위에서 서늘한 감각이 스쳐 지나갔다.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위로 넘어가고 있는 검은 털의 괴물이 부릅뜬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미치겠네, 진짜!
촤아아악!
털북숭이 몬스터가 흙바닥을 긁으며 미끄러지더니 유연하게 재도약해왔다. 궁지에 몰린 나는 이를 악물고 쇠파이프를 내질렀다.
터업.
그러나 간단히 놈의 손아귀에 붙잡혔다.
기겁한 내가 쇠파이프를 놓고 물러나자, 놈은 보란 듯이 그것을 간단히 반으로 접어서 뒤쪽으로 던졌다.
……격이 다르다.
적어도 3랭크 몬스터는 될 듯하다.
놈이 재차 달려들어 팔을 휘둘렀고 나는 다급히 물러났다.
쿵!
공격은 피했지만, 급하게 물러나려다가 뒤쪽의 나무를 보지 못하고 부딪쳤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몸이 덜컥이며 순간적으로 힘이 빠졌다.
-크르르르르.
그리고 사냥감을 궁지에 몰아넣은 몬스터는 친히 사형 선고를 내려주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무기도 없는 맨손.
고유 능력은 탐지.
아무리 플레이어가 됐다고 한들, 저런 괴물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끄으윽!"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이 터졌다.
애써 무시하고 있었던 체내의 마나가 급기야 활화산이 폭발할 기세로 마구 끓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머릿속의 전등에 빨간 불이 켜졌다.
"……허억! 후우!"
이를 악물고 떨리는 팔을 몬스터쪽으로 뻗었다.
여기서 어떻게든 마나를 몸 안에서 비워내지 않으면, 놈에게 당하기 전에 내 몸이 폭발하는 게 먼저 일 것 같아서한 행동이었다.
어떻게든 방출해야 한다.
나는 몸 안에 들끓고 있는 마나를 손바닥을 통해 내보낸다는 느낌으로 유도 했다. 쇠파이프에 마나를 불어넣을 때와는 달리, 격렬하게 요동치는 마나가 기다렸다는 듯 팔뚝을 타고 흘러 나갔다.
그러자.
화아아아아악!
수년 묵은 변비를 해결한 것만 같은 해방감과 함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마나가 허공에서 형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뭐, 뭐야?'
마나는 선이 되고 계속해서 엮이며 하나의 도형을 완성해 갔다.
빛나는 광채는 어둠 일색의 허공을 물감으로 채워나가듯 유려한 원을 그렸다.
그것은 거대한 마법진의 모습이었다.
키이이이이이잉!
마법진에서 쏘아져 나간 빛의 기둥이 몬스터의 몸에 직격했다.
몬스터는 눈부신 광채에 휩싸여 단숨에 가시거리 밖까지 밀려나갔다. 나 또한 반동에 휩쓸려 바닥을 굴렀다.
쿠쿠쿠쿠쿠쿠쿠쿵!
멀리서 나무들이 쓰러지는 소리가 어지럽게 들려왔다.
'……이게 정말 내가 한 일이라고?'
멍하니 손바닥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회색 탑 바로 근처까지 와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탑의 몸체에 아까 내가 펼쳤던 것과 똑같은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
서울의 흉물.
몬스터들의 본거지.
온갖 나쁜 소문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나는 홀린 듯한 얼굴로 탑을 향해 걸었다.
논리적인 사고에 의한 결정은 아니었다.
지금 다리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그저 본능.
지금 저 안에 들어가지 않으면 평생을 후회할 것이라는 확신. 그리고 필연성.
마침내 마탑 앞까지 제 발로 걸어온 나는 굳게 닫혀 있는 정문에 손바닥을 댔다.
슈우우욱!
그러자 거짓말처럼 문 안으로 빨려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