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
블록버스터 (5)
도욱이 술잔을 내려놓으려고 하자 크리스 무어의 얼굴이 대번에 험악해졌다. 그는 쉽게 웃는 만큼 쉽게 험악한 얼굴을 할 줄도 아는 이였다. 취한 상태라 더욱 그랬다.
파파라치들을 욕할 때와 같은, 짜증이 잔뜩 섞인 말투로 물었다.
“왜 안 마셔? 기껏 좋은 걸 줬더니.”
도욱은 얼굴을 굳혔다. 도욱을 깔보는 듯한 무어의 말투나 표정이 가관이었다. 그러나 취한 사람에게 바랄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마시라니까? 같이 좀 놀자는데 분위기 깨는 거야? 하여튼 이래서 뭘 모르는 애들은······.”
더는 무어의 말을 들어줄 수 없어 무어의 말을 끊고 도욱은 침착하게 답했다.
“가봐야 할 것 같군요.”
“뭐? 갑자기 가겠다구? 패 다 깔렸는데 뭔 소리야?!”
함께 포커를 하고 모여 들었던 이들이 무슨 일이냐며 웅성댔다.
“나한테 설설 기어도 모자랄 판에 조금 띄워줬더니 주제를 모르고······. 나를 무시한다고?!”
크리스 무어의 언성이 높아졌다.
도욱은 마른침을 삼켰다. 여기서 크리스 무어와 괜히 구설을 만들기는 싫었다.
바 테이블 쪽에 있는 헐버트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었지만, 헐버트가 주최한 파티에서 어떠한 폐를 끼치거나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다.
약을 가져온 건 크리스 무어이지만, 소란이 커져 바깥에 있는 파파라치들에게 걸려 기사라도 나간다면 피해를 입는 건 도욱이었다.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도욱에게는 의혹 어린 시선이 머무를 게 분명했다. 미국에서라면 모를까 한국에서 ‘약물 의혹’은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어쨌든 도욱은 이곳에서 이방인이었다.
잘못을 누가 했건 크리스 무어와 도욱이 맞붙었을 때 여론이 어느 쪽으로 형성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조용히 이 자리를 빠져나가는 게 최선이다.’
하지만 크리스 무어는 도욱을 절대 조용히 보내줄 기세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무어의 기분을 맞춰주는 척 약이 든 술잔을 마시는 건······. 내 스스로가 용납이 되지 않는다. 약을 마신 후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어떠한 반응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도욱은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욱이 일어서자 무어가 욕을 지껄이며 도욱을 따라 일어섰다. 곧이라도 도욱을 향해 주먹을 날릴 듯한 기세였다.
“진짜 간다는 거야? 건방진 새끼! 어린 계집애들 등에 업고 까부는 새끼일 줄 내 알았지.”
도욱은 위협적인 자세를 취하며 말하는 크리스 무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심하고 차가운 표정이었다.
도욱의 시선에 위화감을 느낀 듯 크리스 무어가 이를 갈았다.
처음에는 취해서라고 생각했지만, 크리스 무어의 언행을 보자 도욱은 깨달을 수 있었다.
애초에 크리스 무어는 도욱이 맘에 들지 않았던 게 분명했다. 무어가 권하는 술을 마셨더라도 포커 게임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 어느 순간에는 도욱에게 시비를 걸어왔을 것이다.
도욱은 ‘우주에서 온 연인’에서 만났던 정이욱을 떠올렸다. 그와 다를 바 없었다.
헐버트나 다른 배우들과 대화를 나누며 도욱은 ‘역시 할리우드는 여러모로 다르고 배울 점이 많다.’는 생각을 했었다.
한국의 연예계와 가장 다른 건 역시 스케일이었고, 그에 따른 경쟁이나 배우들의 삶이었다.
그러나 크리스 무어의 행동을 보며 도욱은 조소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것도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달린 것이다.
크리스 무어는 한국의 연예인들보다 많은 부와 인기를 누릴지언정 그런 생활에 젖어 안하무인에 열 살 꼬마보다도 못한 행동을 하는 유치한 인간이었다.
소란을 피우는 건 싫었지만 자신이나 자신의 팬들을 모욕하는 걸 내버려둘 생각은 없었다.
그때 도욱의 휴대폰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도욱이 휴대폰을 확인하고는 무어를 쳐다봤다. 대화 같지 않은 대화였으나 아무튼 대화 도중이었으니 전화를 받아도 되겠냐는 동의를 구한 것이었다.
무어는 도욱에게 더한 시비를 거는 대신 도욱의 시선을 피했다. 도욱이 도발에도 넘어오지 않고 너무 차가운 상태였던 데다, 벨소리에 환기가 되어 정신이 조금 든 모양이었다.
전화는 안형서에게서 온 것이었다.
안형서가 떠들썩한 목소리로 ‘뭔데? 뭐라고 쓴 거야?’ 하고 물었다.
도욱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멤버들이 있는 단체방에 메시지를 보냈었다.
화면을 보지 못한 채 보낸 메시지라서 아마 말도 되지 않는 모음과 자음의 조합들이 갔을 테지만, 도욱은 멤버 중 누군가는 빠르게 보고 전화를 해줄 것이라 생각했다.
누구보다 도욱에게 관심이 있고, 도욱을 잘 아는 멤버들이니 말도 안 되는 메시지도 허투루 넘어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었고, 사실이 맞았다.
늘 SNS를 확인하며 휴대폰을 들고 사는 안형서가 발견하자마자 도욱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멤버들과 함께 술자리를 갖고 있는지 전화를 받는 안형서의 뒤편으로는 멤버들의 시끌시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욱은 심각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뭐? 갑자기 왜 영어로······. 여보세요? 이거 장난 전화야?
안형서가 당황해하는 게 느껴졌지만, 도욱은 아랑곳 않고 계속해서 영어로 말했다.
결국 안형서가 김원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곧 김원이 전화를 바꿨다.
전화 내용을 듣고 있던 크리스 무어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의 표정은 굳어져 가고 있었다.
“아, 제가 도난당했던 물건 때문에 지금 경찰 조사를 받을 게 있다면······. 거기로 가도 되긴 하는데······.”
-조사? 지금 연기하는 거야?
영어로 중얼거리는 도욱에 김원이 재미있어 하며 물었다. 물론 도욱은 김원의 질문에 답해줄 수 없었다.
도욱은 부러 주변을 훑었다.
분명 이곳에는 미국에서 불법인 마약도 소지하고 있는 이가 있을 것이다. 카드 패를 돌리던 이의 동작이 눈에 띄게 굳어 있었다.
크리스 무어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제가 지금 바로 가긴 그래서요. 혹시 여기로 와주실 수 있나요?”
“이 새끼······. 어디서 수작······.”
약 기운이 완전히 도는 듯 중얼거리며 크리스 무어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그러나 카드 패를 돌리던 이가 다급하게 일어나 말했다.
“누굴 부르는 거야? 여긴 초대된 사람만 올 수 있는데. 그냥 네가 가. 무어, 이 자식 보내주자고. 분위기만 엉망 됐잖아.”
도욱은 전화 속 김원이 주소를 알려달라고 즐겨보던 미드의 형사 톤으로 중얼거리는 것을 들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그쪽으로 가죠.”
도욱은 그렇게 전화를 끊고는 크리스 무어와 무리를 둘러보았다.
분위기와 상관없이 여전히 약에 취해 여자들을 지분거리며 노는 이들도 있었다. 패를 돌리던 이가 자신의 옆에 있던 여자의 치마를 들쳤다.
여자는 이미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고 흐물거렸다.
“무어! 이거 보라고. 저런 따분한 놈은 보내고······. 재미있게 놀자고. 내기로 옷 벗기는 어때?”
확실히 가장 찔리는 게 많은 듯했다. 크리스 무어는 찌푸리면서도 더는 도욱을 잡지 않았다.
도욱은 빠르게 자리를 빠져 나왔다.
도욱이 나올 때쯤엔 헐버트도 2층으로 올라갔는지 바 테이블 자리에서 보이지 않았다.
파티장을 나서 멤버들에게 곧 가서 설명해 주겠다는 고맙고 미안하다는 메시지를 보낸 후, 도욱은 다니엘에게 곧장 연락했다.
다니엘을 기다리며 도욱은 곳곳에 렌즈를 대고 눈을 빛내는 파파라치들을 보았다.
배우들이 왜 뉴욕을 벗어나 햄튼의 별장에서 파티를 열고, 그 안에서 허울을 벗는지는 심정적으로 이해했다.
도욱도 너무 많은 시선 속에서 갑갑함을 느낄 때가 있었다.
그러나 갑갑함을 느낀다고 해서 인간으로서 적어도 가지고 있어야 할 이성을 모두 내려놓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도욱은 그랬다.
‘술이나 약에 정신을 빼앗기는 건 그런 점에서 위험하다······.’
스타가 될수록, 많은 명예와 부가 따를수록 유혹도 많은 법이었다. 화려해 보인다고 그것이 다 좋고 옳은 것도 아니었다.
도욱은 앞으로는 더 정신을 바짝 차린 채로 처음 꾸었던 순수한 꿈을 잃지 않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마 후 다니엘의 차가 별장 앞에 도착했다.
도욱은 차에 오르며 서중원을 떠올렸다.
서중원의 재판 상고심이 진행 중이었다. 마지막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실형을 살게 될 것은 분명했다.
그도 처음부터 부와 명예, 권력의 노예가 되고자 했던 것은 아닐 것이었다.
‘다만 점점 그것들에 잡아먹혔겠지······.’
***
다음 촬영일.
리얼맨이 본격적으로 히어로즈 활동에 합류하는 것을 고민하는 장면이었다. 도욱 단독 촬영이었고, 도욱은 감정 연기에 탁월한 재능을 발하며 장뤽 감독의 마음을 더욱 사로잡았다.
촬영을 마치고 도욱은 장뤽 감독에게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다.
“크리스 무어 씨의 모욕적인 언사들을 저는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습니다. 무어 씨의 사과가 없다면, 저는 크리스 무어 씨와 함께하는 촬영장에는 오지 못할 것 같네요.”
갑작스러운 촬영 보이콧 소식에 장뤽 감독의 표정이 굳었다. 도욱을 좋은 배우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별개로 건방지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듯도 했다.
그러나 도욱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명백히 결례를 범한 건 크리스 무어였다.
“무어 씨에게도 매니저를 통해서 이미 의견을 전달해 놓았습니다.”
“얘기를 들어 보니 물론 무어가 조금 무례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데이빗.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촬영을 안 하겠다는 건······. 프로가 할 일이 아닌 것 같은데요. 계약적인 문제도 있고······.”
역시나 도욱 쪽에서 이렇게 나서 봐야 좋을 것 없다는 식이었다.
도욱은 겸손한 인물이었지만, 그렇다고 우습거나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자신의 현재 위치에 대한 자부심도 상당히 있었다.
이번 기회에 ‘히어로즈 2’ 배우진이나 제작진들이 그 점을 알게 되길 바랐다.
장뤽 감독의 말에 도욱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계약적인 부분이 문제가 된다면, 언제든 위약금을 물도록 하죠. 저는 저를 동등한 배우로 인정해 주지 않는 이와 연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만둘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도욱이 생각보다도 더 강경하게 나오자 당황한 건 장뤽 감독이었다.
위약금은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단순히 배우라는 직업만으로 벌어들인 돈이라면 감당하기 힘들 수 있었다. 그러나 도욱은 케이케이라는 세계적인 그룹의 멤버였고, 프로듀서였다. 그 외에도 다양한 경로로 이미 많은 자본을 축적했다.
이제 와 도욱이 그만둬 생기는 피해라면 ‘히어로즈 2’ 쪽에도 만만치 않았다. 이미 상당한 프로모션이 도욱과 관련되어 있었다.
아마 그들은 그들의 위치에 너무나도 익숙해서, 오히려 도욱이 ‘히어로즈’라는 영화를 쉽게 포기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크리스 무어도 나를 쉽게 함부로 대했겠지······. 내가 간절한 쪽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장뤽 감독이 당황스러운 얼굴을 하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알겠어요. 그가 원래 좀······. 무례한 면이 있죠. 데이빗이 이해를 해주면 좋겠지만······. 다음 촬영이 있기 전까진 사과를 하는 게 맞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