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
블록버스터 (4)
그는 ‘솔저 아메리카’였다.
빌리언맨과 함께 ‘히어로즈’에서 중심 역할을 맡고 있는 히어로 중 하나였다.
미국 군인 출신을 히어로화한 솔저 아메리카 역을 맡고 있는 배우는 크리스 무어였다.
크리스 무어 역시 오늘 헐버트의 파티에 초대되어 온 모양이었다.
크리스 무어는 금발의 파란 눈을 한, 높은 콧대와 시원한 입매를 자랑하는 전형적인 미국 미남의 얼굴이었다. 미국을 대표하는 히어로로 캐스팅될 만한 얼굴이었다.
거기에 영화에서 보았던 것처럼 곧이라도 근육이 터질 듯한 건장한 몸을 하고 있었다. 촬영을 위해 평소보다 한껏 근육을 키워 놓은 상태인 듯싶었다.
도욱도 180센티미터를 넘는 장신에 탄탄한 몸을 자랑했지만, 어쩔 수 없이 체구에서 차이가 났다. 무어의 옆에 서자 상대적으로 도욱은 작게 느껴졌다.
그래서 더욱 도욱은 헐버트보다 더 실제 ‘히어로즈’ 속 ‘솔저 아메리카’를 만난 듯한 기분을 느꼈다.
“크리스 무어 씨?”
도욱의 부름에 무어가 인상을 쓰며 도욱을 내려다보았다.
도욱은 무어의 뒤편을 보고는 무어의 신경이 왜 곤두서 있는지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역시 할리우드 스타······.’
크리스 무어의 뒤쪽에는 그냥 보아도 두세 명 정도 되는 파파라치가 따라붙어 있었다.
한국에 비하면 비교적 미국에서 사생활이 보장된 생활을 하고 있는 도욱이었지만 도욱도 무어의 짜증을 이해했다.
한국에서는 도욱도 사생팬들에게 꽤 시달린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는 강도욱이라고 하는데······. 인사는 들어가서 하는 게 좋겠네요.”
“······아! 도욱! 아아, 그러죠.”
뒤늦게 도욱이 누구인지 알아차린 듯한 무어가 잠시 반가운 얼굴을 했다가 이내 얼굴을 굳히고는 답했다.
무어 역시 도욱의 말대로 우선은 들어가서 인사를 나누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파파라치에게 찍힌다고 해도 문제가 될 것 없는 만남이었지만, 어쨌든 촬영장이 아닌 극히 사적인 공간에서 사진을 찍히는 일은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두 사람은 서둘러 헐버트의 별장 벨을 눌렀다.
곧 두 사람의 신원을 확인한 안쪽에서 문을 열어 주었다.
별장 안쪽으로 들어와서야 크리스 무어가 완전히 표정을 풀고는 도욱에게 말을 건넸다.
“헐버트한테 이야기는 들었어요! 반가워요! 내가 첫 만남에 실수를 할 뻔했어요. 하아······. 종일 따라붙으니 짜증이 나서!”
극중에서는 너무 신중해 답답하다는 이야기까지 듣는 크리스 무어였으나 실제로는 꽤 말수도 많고 가벼운 분위기를 내는 인물인 듯했다.
많이 말을 하지 않아도, 당장의 표정이나 말투만으로 충분히 파악 가능했다.
도욱의 영어는 그사이 해외 활동을 하며 꾸준히 늘어오다 영화를 준비하면서는 거의 김원과 같은 수준이 되었다.
덕분에 크리스가 쓰는 단어들이나 억양이 격식을 그다지 따지지 않는 가벼운 투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헐버트의 성격은 완전히 ‘빌리언맨’ 그 자체였기 때문에 도욱은 크리스 무어의 성격 차이에 신기한 기분마저 들었다.
“종일이라면 그럴 만도 하시겠네요. 햄튼까지 따라오다니······.”
“그러니까. 지독한 것들. 내가 사실 요즘 같이 노는 여자가 하나 있는데 그 냄새를 맡았는지 달려들어서는······. 정말 지긋지긋해.”
정말로 질렸다는 듯 파파라치에 대해 화를 내는 크리스 무어의 이야기를 들어주다 보니 금세 별장 본관 앞이었다.
본관의 현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도욱은 현관문으로 들어서기 직전, 시간을 확인하고 케이케이 멤버들의 단체방에 메시지를 보냈다.
멤버들은 멤버들끼리 뉴욕의 밤을 즐기러 공연을 보러 가 있었다. 끝나면 함께 한잔하러 간다고도 했다. 도욱은 멤버들에게 늦을 것 같으니 숙소에서 자신을 기다리지 말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이미 파티가 시작된 듯 실내는 시끌벅적했다. 뉴욕 클럽에서 요즘 가장 이름을 날린다는 DJ가 가운데에서 디제잉을 하고 있었다.
파티에 초대된 이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따로 고용된 웨이터들이 가져다주는 샴페인을 홀짝이며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설마 벌써 시작한 거야?”
“무어, 오랜만이야!”
“오랜만은 무슨, 엊그제도 촬영장에서 봤잖아.”
“인사치레야.”
무어에게 인사를 해온 건 ‘샤크’의 배우였다.
‘히어로즈’의 주요 히어로들이 모두 초대된 자리임에는 틀림없어 보였다.
그러나 초대된 것은 히어로들만이 아니었다. 노출이 꽤 심한 드레스를 입은 미녀들이 여기저기 배우들과 어울려 웃고 있었다.
‘샤크’의 배우 옆에도 은은한 애쉬색 머리를 한 여인이 다리를 꼬고 요염한 자태로 앉아 그의 허벅지를 미묘하게 쓰다듬고 있었다.
별장에서의 파티라고 했을 때 도욱이 생각했던 건 이것보다는 차분한 분위기였다. 샴페인보다는 와인이 어울리고, 디제이보다는 왈츠가 어울리는 파티 정도였다.
헐버트가 주최하는 파티가 이렇게 정신 사나울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배우들이랑 이야기를 나눌 만한 자리는 아닌 것 같은데······.’
도욱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무어는 아랑곳 않고 도욱의 팔을 잡아끌었다.
“자, 여기 도욱! 이 앞에서 만났어. 왠지 호기심이 드는 친구지 않아? 동양의 미라는 건 이런 건가? 왜 마틴이 그를 리얼맨에 직접 섭외했는지 알 것 같아.”
무어가 수다스럽게 도욱을 소개했다. 미국의 정석 미남이 수다스럽게 구는 모습은 계속 보아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제야 샤크의 배우가 여자로부터 벗어나 정식으로 악수를 청해 왔다.
“오······. 반갑군요. 제이크요.”
“아, 반갑습니다.”
마침 헐버트가 2층 계단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편안한 옷차림의 헐버트의 손에는 독한 술이 병째로 들려 있었다.
“헐버트는 뭐······. 거의 알코올릭이라고 할 수 있지. 같이 술을 마셨다가는 살아남지 못해. 같이 술을 마신다니, 생각만 해도 토할 것 같아.”
무어가 말했으나 이미 헐버트의 눈에 도욱이 띈 상태였다.
헐버트는 도욱을 바(bar) 자리로 불러 놓고선 함께 술을 마시자 청했다. 무어와 제이크는 헐버트와 대작하기 싫다며 도망을 가 버렸다.
헐버트와 술을 마시는 게 싫었던 것인지 초대된 미녀들과의 시간을 즐기고 싶었던 것인지는 알기 힘들었다.
어쨌든 도욱은 그렇게 헐버트와 둘이 앉아 술을 마시게 되었다.
도욱은 술을 즐겨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자기 관리 차원일 뿐, 도욱의 몸은 꽤 알코올에 강한 몸이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거기에 걱정과는 달리 헐버트는 도욱에게 술을 강권하지 않았다.
대신 적당히 도욱이 분위기를 맞춰주기만 하면 되는 듯했다.
헐버트는 도욱에게 첫 촬영 때 어떻게 갑자기 연기가 좋아질 수 있었는지부터 묻기 시작해서는 케이케이에 대해서도 물어왔다.
칸 상영작이었던 ‘푸른 고래’를 보았기 때문인지 세계적인 보이밴드 출신이라는 것에 대한 호기심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헐버트는 도욱에게 꽤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도욱은 헐버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도욱의 연기 경력이 얼마 되지 않는 것에 비하면 헐버트는 십여 년이 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할리우드에서 배우 생활을 하며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 잔뼈가 굵은 배우였다.
거기에 ‘그 할리우드’였다. 한국과 차원이 다른 경쟁률이었다. 그 속에서 ‘빌리언맨’이 되기까지 헐버트는 갖은 고생을 해야만 했다.
“정말 포기하고 싶을 때 기회가 찾아오더군. 이러다 길바닥에 나앉는 거지가 될 거라고 주변에선 반대가 심했지만······. 거기서 그만두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더군. 뭐, 똥고집이라고 해도 좋고······. 어쨌든 똥고집이 승리한 거니까.”
헐버트의 말을 들으며 도욱은 고개를 깊게 끄덕였다.
도욱은 ‘이미 포기해 버렸을 때’ 기회가 온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동의하는 바였다.
‘한 번쯤은······. 정말이지 한 번쯤은, 기회는······. 온다.’
대화를 하며 도욱은 헐버트에게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이대로 ‘히어로즈 2’가 개봉하고 큰 문제만 없다면 앞으로 도욱은 한국만이 아니라 할리우드에서도 배우 생활을 할 기회가 주어지는 셈이었다.
도욱은 할리우드에서의 배우 생활뿐 아니라 미국에서 스타로서 산다는 것에 대해, 겪어 보지 않으면 모를 세세한 것들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역시 와 보길 잘했다. 앞으로 활동하는 데 있어 이곳의 분위기나······. 많은 것을 알 수 있었어. 헐버트 외에 배우들과 친해지는 것은 어려울 것 같지만······. 연기는 촬영장에서 맞춰 봐도 충분하겠지.’
그러나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시끄러운 분위기 속에서도 호스트인 헐버트에게 배우들이 종종 인사를 하러 왔고, 그때마다 헐버트는 취한 발음으로도 도욱을 제대로 소개했다.
덕분에 도욱은 ‘히어로즈 2’의 히어로 역이 아닌 악역이지만 할리우드에선 연기파 배우로 무척이나 정평이 나 있는 배우와도 꽤 다양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는 도욱을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도욱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눠 보고는 ‘보통은 아니군.’ 하는 평가를 내렸다.
그 말을 들은 헐버트가 취해선 평소 목소리의 두 배 정도 크기의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그래! 보통은 아니지. 있어. 뭔가가. 이건 그냥 검은 눈을 가졌기 때문에 느껴지는 기운이 아냐.”
“검은 눈이야 나도 가졌다구.”
“당신은 검다기보단······ 탁한 것 아닌가?”
“뭐, 하여튼 무례하긴!”
두 사람이 한참 어린 데다 이제 갓 할리우드에 온 도욱에 대해 후한 평가를 내릴 때였다.
헐버트보다 더 취한 듯한 크리스 무어가 다가왔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눈을 풀려 있었다. 무어가 앉아 있는 도욱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젊고 잘생긴 친구가 왜 이런 늙다리들이랑 어울리고 있는 거야, 어? 즐기자구!”
그 말에 도욱은 당황했으나 오히려 헐버트는 놀랍지도 않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헐버트는 찌푸리며 손사래를 쳤다. 상대해 주기 귀찮으니 어서 도욱을 데리고 가라는 식이었다.
도욱은 무어에게 끌려서는 응접실 소파 쪽으로 오게 되었다.
그곳은 한산했던 바 테이블 쪽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로 어지러웠다. 소파 위에는 도욱도 얼굴을 아는 조연 배우가 금발의 미녀와 진한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자, 우리 포커 칠 건데, 같이 한 게임 어때? 어이, 에릭! 나머지는 위층 손님방에 가서 해라!”
취해서 얼굴이 벌게진 채로도 무어는 조연 배우에게 제법 멀쩡한 말을 했다.
크리스 무어 역시 도욱이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자신과 친해지려고 포커 게임을 하자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도욱은 응접실에 도는 음란한 기운 때문인지 무어의 취기 가득한 얼굴 때문인지 꺼림칙한 기분을 지우기 힘들었다.
“술이 센가 봐? 헐버트랑 마시고도 멀쩡하네. 일단 이거 한잔 더 해.”
도욱이 무어의 옆 자리에 앉자 맞은편의 남자가 빠르게 카드를 돌리기 시작했다.
무어가 도욱에게 사이드 테이블 위에 있던 붉은 술을 권했다.
“아······.”
술잔을 건네받은 도욱이 우선은 술을 마시려고 할 때였다.
헐버트와의 대화에서 들었던 ‘아무거나 주워 먹지 말라’는 말이 스쳐 지나갔다. 급하다고 해도 아무 배역이나 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다 비유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그리고 도욱의 머릿속에 오랜만에 이전에 보았던 기사가 떠올랐다.
꺼림칙했던 이유가 명확해져 있었다.
‘마시면 안 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