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
블록버스터 (2)
***
다시 촬영이 재개되었다.
도욱은 위치로 가서 섰다. 헐버트는 돌아가서 쉬겠다는 말과는 달리 팔짱을 낀 채 스튜디오 밖에서 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촬영을 하는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부담스러운 존재감이었다. 장뤽 감독이 무어라 핀잔을 주었지만, 헐버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리얼맨의 배우가 가라면 가지. 내가 여기 있는 게 신경 쓰이나?”
오히려 헐버트는 도욱에게 자신이 신경 쓰이냐고 물었다.
도욱도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었지만 도욱은 고개를 저었다. 다음 장면은 곧바로 헐버트와 함께하는 씬이었다. 헐버트라는 대배우의 존재감에 차라리 미리 익숙해지는 게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도욱이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웃으며 답했다.
“하여튼 별종이라니까!”
헐버트는 그것 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고, 장뤽 감독은 고개를 저었다.
헐버트는 도욱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할리우드에 처음 온 신인들에게서 으레 느껴지는 위축되어 있다는 느낌은 도욱에게서 느껴지지 않았다.
담담하고, 담대해 보였다. 얘기를 나눠 보니 확실히 그런 인상이었다. 그런데 왜 긴장한 듯 몸이 굳어서 연기를 하는지 오히려 헐버트는 궁금해졌다.
그사이 특수 분장을 담당하는 이가 다가와 조금 지워진 도욱의 분장을 수정해 주었다.
이마 부근의 흉터는 데이빗 캐릭터의 주요 특징이기도 했다. 분장사가 몇 번 손을 대자 흐려졌던 흉터가 금세 진해졌다.
앞머리가 흔들릴 때마다 보이는 흉터는 도욱의 뒤에 많은 이야기가 있을 것만 같은 신비한 느낌을 더해 주었다.
도욱은 분장을 받으며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눈빛이 진해진 도욱의 분위기는 예사 사람과는 다른 깊은 분위기가 전해져 왔다.
카메라를 확인하며 장뤽 감독은 내심 감탄했다.
‘정말로 매력적인 페이스군. 다른 작품을 함께해 보고 싶을 정도야. 히어로즈 같은 액션 영화보단 깊은 감정을 담아내는 역을 만나면 확실히 더 살아날 분위기니까······.’
잠시 생각에 빠진 도욱을 바라보고 있는 건 장뤽 감독뿐만이 아니었다.
도욱은 헐버트를 포함해 주변의 스태프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촬영에 들어가진 않았지만, 촬영 직전이었고 카메라 앞에 선 이 씬의 주인공이니 당연했다.
무대 위든, 연기를 할 때든 꽤 오랜 시간 그런 시선을 받아왔기 때문에 도욱으로선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시선들이었다.
‘그래. 할리우드라고 해도 말이지······.’
도욱은 최상의 결과를 위해서 언제나 최선을 다해 왔다. ‘열심히’라는 부사는 도욱에게 가장 어울리는 부사이기도 했다.
열심히 한 결과는 언제나 그대로 도욱에게 결과로 돌아왔다. 그래서 더, 매일 ‘더 열심히’ 노력했다.
노력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정신적으로 ‘잘하자’고 되뇌는 건 도욱에게는 동기를 부여하는 어떤 주문과도 같은 일이었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였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기회가 아니었고, 언제 또 올지 모를 기회였기 때문에 더 잘해내고 싶다, 잘해내고야 말겠다는 생각들을 되뇌었다.
그러나 ‘히어로즈 2’ 촬영만큼은 그러한 마음가짐이 짐으로 작용했던 듯하다.
헐버트와 인사를 나누면서도 ‘잘해내고 싶다’고 평소처럼 생각하다 깨달은 것이었다.
상황이 달라졌다고 해도 이미 여러 번 연습해 온 동작을 하며 어색했던 건 넓은 스튜디오 탓도, CG용 연기나 액션 연기에 몸이 익숙하지 않았던 탓도 아니었다.
타인이 주는 시선보다도 잘해내고야 말겠다는 다짐들, 도욱 자신이 주는 부담감이 가장 컸던 것이다.
도욱은 헐버트의 ‘차라리 눈을 감고 연기하는 게 낫겠다.’는 말을 떠올렸다.
실제로 눈을 감고 연기를 할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도욱은 눈을 감고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
‘그래······. 몸에 긴장을 풀고······. 아이를 봤다. 구한다? 잠깐의 고민이 있지만······. 구해야 해. 날아오르듯이······. 빠르게 뛰어서······. 아냐. 느려······, 느리다!’
머릿속에서 조차 자신의 움직임은 굳어 있었다. 도욱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몇 번이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다.
물론 머릿속에서 수십 번 반복해도 실제로는 1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CG 처리가 가미될 부분이야. 내 움직임이 완벽하게 빠를 필요는 없다······. 다만 표정을 살려서······. 빠르게 반응하고······. 달려서······. 그래······!’
‘간다······.’
‘이건가!’
도욱의 눈이 확 떠졌다.
“앗!”
도욱이 갑작스럽게 눈을 뜨자 눈이 마주친 분장사가 당황스러움에 크게 ‘앗’ 하는 소리를 냈다. 콧등 부분에 음영을 넣고 있던 브러시를 만지던 손도 멈췄다.
생각이 끝나 눈을 떴을 뿐인데 분장사가 크게 당황하는 바람에 도욱이야말로 조금 민망해졌다.
“죄송해요. 갑자기 눈이 마주쳐서 놀랐어요.”
“아아······. 괜찮습니다.”
도욱으로선 눈이 마주치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싶어 의아했지만, 우선은 분장사가 무안하지 않도록 괜찮다는 말을 건넸다.
“수정 끝났습니다.”
“감사합니다.”
도욱에게 인사를 받으며 스튜디오 밖으로 나가는 분장사의 귓불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영어로 말했으니 ‘Thank you.’라는 두 음절의 간단한 말이었음에도 분장사의 귀에는 무척이나 달콤하게 들렸다.
분장사가 놀란 건 단지 눈이 마주쳐서만은 아니었다. 마주친 도욱의 눈과 얼굴에 심장이 빠르게 반응했던 것이다.
물론 도욱 주변에는 이런 식으로 도욱의 매력에 빠져 버린 남녀불문의 사람들이 한 트럭 있었다.
그러니 분장사의 뛰는 가슴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도욱은 방금 마친 이미지 트레이닝이 성공적이었다는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내 움직임이 완벽할 필요는 없다······.’
그러한 생각이 ‘잘해내려는’ 부담감을 반감시킬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 그려본 대로 하면 된다.’
도욱은 자세를 취하며 생각했다.
장뤽 감독의 사인과 함께 도욱은 거침없이 몸을 움직였다.
아까 전의 촬영과 다를 건 없었다. 다만 도욱의 마음가짐만이 달라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고스란히 움직임에도 드러났다.
부담을 내려놓은 도욱의 몸은 정말로 ‘리얼맨’ 같았다. 무척이나 빠르고 날렵했다.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한 바퀴 굴려 아이가 있는 지점까지 가는 순간.
“흡!”
거친 호흡을 내뱉던 도욱이 아이를 붙잡느라 숨을 참는 순간까지.
“컷! 좋아요!”
완벽했다.
여러 각도에서 촬영하기 위해 설치된 열 대의 카메라 어느 컷으로 보아도 흠잡을 데 없는 연기였다.
도욱은 콘티와 만화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완벽하게 표정으로, 몸으로 연기했다.
장뤽 감독의 컷 소리가 경쾌하게 스튜디오 밖으로 울려 퍼졌다.
단번에 이렇게 좋아질 수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의 연기였으나 재능도, 그에 따른 노력도 충분히 해왔던 도욱으로서는 잠시 초보처럼 굴었던 자신이 더 믿기 힘들었다.
사실 연기를 잘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CG를 입히기 전에 멋있게까지 느껴지기는 더욱 쉽지 않았다.
밖에서 보기엔 그야말로 퍼렇기만 한 배경, 허공에서 혼자 달리고, 뒹굴고 난리를 치는 일로 보이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방금 전 도욱의 연기를 보던 이들은 배경도 모두 잊은 채 도욱의 연기에 빠져들었다. 동작이 자연스러워지자 도욱에게 내재된 흡인력이 드디어 발휘될 수 있었던 것이다.
“와우······.”
“뭐야, 진짜 같아. 무너진 건물이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돈데.”
“멋있다. 왜 십 대 소녀들이 열광하는지 알 것 같아.”
스태프들의 입에서는 멋있다는 말들이 저절로 나왔다.
그냥 보기에도 이런데 CG가 들어가 실제로 건물이 무너지는 장면이 되면 어떨지 너무나 기대된다는 반응들이었다.
장뤽 감독과 스태프들의 반응을 살피며 도욱이 스튜디오 밖으로 걸어 나왔다. 장뤽 감독이 엄지를 치켜세우며 도욱에게 말했다.
“이겁니다! 바로 감을 잡다니······. 대단한데요?”
도욱이 첫 촬영인 만큼 사실 조금 더 촬영에 어려움을 예상했던 장뤽 감독이었다.
그리고 심지어 촬영 직전에는 도욱에게 액션 영화보다 더 감정을 다룬 영화가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장뤽 감독은 자신의 생각을 곧바로 수정해야 했다.
도욱은 액션 영화에서도 퀄리티 있는 연기를 충분히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배우였다.
팔짱을 끼고 있던 헐버트는 어느새 팔짱을 풀고는 도욱을 향해 지긋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도욱과 헐버트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헐버트는 다른 말을 하는 대신 시선을 돌려 촬영을 준비하기 위해 몸을 풀기 시작했다.
별다른 말을 나누지 않았지만, 잠깐 스친 헐버트의 표정만으로도 도욱은 헐버트의 평가를 알 수 있었다.
‘마음에 들었구나.’
도욱은 비로소 완전히 마음을 놓고 웃을 수 있었다.
곧바로 헐버트와 도욱이 부서진 건물의 잔해 위에서 만나는 장면의 촬영이 시작됐다.
헐버트와 도욱의 호흡은 그야말로 완벽한 것이었다.
이미 ‘빌리언맨’과 ‘히어로즈 1’ 촬영을 통해서 빌리언맨에 완벽하게 이입한 헐버트의 연기는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눈앞에 선 헐버트는 촬영용 특수 옷을 입고 서 연기를 하며 움직일 뿐인데도 함께 연기를 하는 도욱의 눈에는 빌리언맨의 모습을 한 헐버트가 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도욱도 지지 않고 뛰어난 연기로 헐버트의 연기에 응수했다.
“따라와, 꼬마. 맨몸으로 이 일에 뛰어드는 게 얼마나 멍청한 일인지 설명하기도 귀찮군. 내 연구실에서 기술력이 무엇인지 보여주지.”
“꼬마라니······. 집에 데려다 달라는 건 아니죠, 할아버지?”
“뭐?”
건들거리며 반항적인 눈빛으로 말하는 도욱에 헐버트가 진심으로 울컥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국인이 어려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한국인? 북쪽? 남쪽?”
“역시 그 질문. 제 이름은 데이빗 킴인데······. 어느 쪽일 것 같아요?”
“설마······.”
데이빗은 계속해서 빌리언맨을 당황시키고 있었다. 아이를 구할 때의 깊은 표정과는 전혀 다른 뻔뻔한 도욱의 연기에 장뤽 감독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절 데려가고 싶으면 보여주세요. 빌리언맨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는지······. 이렇게 민간인들이 다니는 건물을 부수는 일 말고요.”
데이빗과 빌리언맨의 첫 만남이었다.
데이빗은 빌리언맨의 히어로로서의 고민의 깊이를 더해 줄 캐릭터이기도 했다. 데이빗의 도발에 헐버트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렇게 다시 한번 장뤽 감독에게서 ‘오케이’가 나왔다.
스태프들 사이에서 잔잔하게 박수가 나올 정도였다. 그야말로 기가 막힌 호흡이었다.
연기에 들어가기 전 헐버트가 한 아마 리허설은 필요 없을 거라는 말을 모두들 이해할 수 있었다.
***
오늘 분량의 스튜디오 촬영을 모두 마치고, 인사를 하고 돌아가려는 도욱을 불러 세운 건 다름 아닌 헐버트였다.
“데이빗.”
데이빗이라는 이름에 도욱이 자연스럽게 반응하며 돌아보았다.
미국인인 헐버트로서는 도욱이라는 이름보다는 극중 이름인 데이빗이 더 부르기 편한 게 사실이었다.
“무슨 일······.”
“내일 밤에 파티가 있는데 오겠어?”
“파티요?”
“그래. 히어로즈 배우들이 모여서 한잔씩 하는 그냥 가벼운 파티야. 내일 이후로는 이틀 동안 촬영이 없으니까.”
이미 ‘히어로즈 1’을 찍은 배우들끼리 종종 모여 갖는 술자리인 것 같았다. 도욱으로서는 앞으로 함께 촬영할 이들과 친목을 다질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까칠한 성격의 헐버트로부터 받은 초대라 더욱 의미가 있는 초대였다.
“아, 저야 영광이죠.”
“좋아. 내일 밤에 보자고. 매니저 통해서 연락하지.”
헐버트는 곧장 상의 주머니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끼고는 촬영장을 빠져 나갔다.
장뤽 감독이 도욱에게는 잠시 남아 있어 달라고 했기 때문에 도욱은 다른 스태프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장뤽 감독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때 촬영장 문이 열리며 다섯 명의 남자들이 흥분된 기운을 안은 채 들어왔다.
케이케이 멤버들이었다.
멤버들을 본 도욱은 무척이나 놀라서 입을 벌린 채 자신에게 다가오는 멤버들을 바라보았다.
“도욱이 형!”
“도욱아!”
“우리 왔다. 아이가!”
도욱은 얼떨떨한 채 물었다.
“여······. 여기에 어쩐 일로······.”
반가움과 놀라움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멤버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며 피실피실 웃었다. 도욱의 궁금증이 더해졌다.
그 뒤로 오백호 부장이 들어서며 도욱에게 인사하곤 답했다.
“무슨 일이겠어. 촬영하러 왔지.”
“네? 촬영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