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슈퍼스타-215화 (215/225)

# 215

Hero (3)

마틴의 대리인이 먼저 나와 도욱과 이대형 팀장에게 인사를 건넸다.

마틴의 대리인 사라가 인사 후 대본부터 두 사람에게 전달했다.

‘히어로즈 2’의 초안이었다.

‘히어로즈 2’는 1의 인기에 힘입어 내년 말에 개봉이 결정된 상태였다. 사실 ‘히어로즈’와 같은 영화의 경우에는 촬영 기간보다 CG 작업 등 후반 작업을 하는 기간이 훨씬 더 길었다. 실제 촬영은 한두 달이면 충분했다.

대본을 미리 전달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극비리에 진행되고 있는 대본 작업이었다. 원본 파일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마틴을 비롯해 영화 총감독, 시나리오 작업을 도운 작가들 등 열 명도 되지 않는 인물들뿐이었다.

사라는 도욱의 경우 아직 출연 여부가 결정된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며 양해를 구했다.

“아, 이해합니다.”

도욱이 충분히 이해한다는 반응을 보이자 금발의 미녀인 사라가 시원하게 웃었다.

“사진으로 본 대로 정말 미남이시군요.”

사라의 칭찬에 도욱이 조금 멋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라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역시 어려 보여요.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믿겠어요.”

“감사합니다. 사라 씨야말로······. 출연하는 배우분이신가 했습니다.”

도욱의 칭찬에 사라가 빈말이라도 고맙다며 웃었다. 그러나 도욱이 빈말로 한 말은 아니었다. 170센티미터는 훌쩍 넘어 보이는 키에 늘씬한 체구, 서양인다운 글래머러스함까지. 시릴 만큼 푸른 눈은 투명한 구슬과 같았다.

일을 하며 그런 모습을 보인 적 없는 이대형 팀장조차 사라를 이성적인 눈으로 힐끔거리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거기, 하이라이트 펜으로 그어 놓은 부분이 도욱 씨가 하게 될 역할이에요.”

도욱과 이대형 팀장은 끄덕이며 떨리는 마음으로 대본을 펼쳤다.

‘David Lee.’

도욱에게 들어온 역할의 본명이었다.

그리고 도욱이 극 속에서 불리는 이름은 다름 아닌 ‘리얼맨’이었다.

‘리얼맨?!······.’

도욱은 이름을 확인하고는 기억을 더듬었다.

제의를 받고 미국에 오는 길, 도욱은 비행기 안에서도 틈틈이 제네럴 코믹스의 원작 ‘히어로즈’를 읽었다.

시간이 짧아 전권을 다 읽지는 못했지만, ‘히어로즈’의 팬인 박태형이 추천한 에피소드들을 다 읽을 시간은 됐다. 그것만 읽어도 현재 주요 캐릭터들의 전사(全史)와 영화의 맥락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라 박태형은 말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리얼맨’이라는 캐릭터는 생각나지 않았다.

옆을 보니 도욱보다는 ‘히어로즈’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이대형 팀장도 전혀 모르는 캐릭터라는 눈치였다.

원작에 나오지 않는 캐릭터를 영화에 쓰는 일은 없었으므로 두 사람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표정을 본 사라가 이해한다는 듯 캐릭터에 대한 설명이 정리되어 있는 페이퍼를 따로 내밀었다.

페이퍼에는 가면을 쓰고 몸에 붙은 수트를 입은 일러스트가 나와 있었다.

일러스트를 보아도 처음 보기는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조금 얼굴이 찌푸려지기까지 했다. 검은색을 바탕으로 한 가면의 모양새가 무척이나 기괴했다.

“아, 리얼맨은 사실 몇 년 전 만화에 딱 한 번 등장한 역할이에요. 빌리언맨이 상대와 싸우느라 뉴욕의 공공시설들이 파괴됐을 때 나서서 시민들을 구조했죠. 그런데 별다른 인기를 얻지 못해서······. 그 뒤로는 등장하지 않고 있어요.”

역시나 정식 히어로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역할에 대해 도욱과 이대형 팀장이 실망한 것은 아니었다. ‘히어로즈에 나오는 히어로’라고 하더라도 엄청나게 중요한 히어로는 아닐 것은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다.

오히려 의문인 것은 굳이 인기가 없어 만화에도 단 한 번밖에 나오지 않은 캐릭터를 영화에 출연시키려는 의도였다.

“사실 마틴이 꼭 크게 키우고 싶어 했던 히어로 중 하나예요. 솔저 아메리카가 이전 시대를 대변하는 히어로라면, 리얼맨은 새로운 시대에 꼭 필요한 히어로라고 생각하고 있죠. 도욱과 같은 매력적인 인물이 리얼맨을 맡아준다면, 만화에서는 살리지 못했던 매력을 영화에서 살리지 않을까······. 그런 효과를 기대하고 있어요.”

“그렇군요······.”

도욱이 끄덕였다.

“네. ‘히어로즈 2’에서는 정식 히어로는 아니지만, 반응만 좋다면 정식 히어로가 되어 따로 영화 ‘리얼맨’을 제작할 큰 그림까지 그리고 있고요.”

“오······.”

이대형 팀장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설명을 들으니 제네럴 코믹스 쪽에서 도욱을 정말로 좋게 봤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사라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로 큰 기회였다. 지금 당장은 작은 역할일지 몰라도 앞으로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는 캐릭터였다.

“도욱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매력을 가지고 있죠. 이미 미국의 소녀들이 열광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대형 팀장이 도욱 쪽 관계자답게 도욱을 어필하며 말했다. 사라가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럼요. 저도 도욱을 보고 있으니 신비로운 검은 눈에 빠져드는 기분인데요. 왜 마틴이 가면 속 리얼맨의 모습을 검은 눈의 동양인으로 하자고 했는지 이해가 가요.”

“하하, 그렇습니까.”

도욱이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캐릭터 설명을 훑는 도욱의 표정은 이내 무척이나 무거워졌다.

도욱은 꼼꼼하게 페이퍼를 통해 ‘리얼맨’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다. 도욱의 입매가 진중했다.

사라는 그러한 도욱의 모습을 보고는 캐릭터와 대본을 살펴야 할 두 사람을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

만화 속에서 데이빗은 빌리언맨이 싸우다 건드린 건물이 붕괴하기 직전, 빠르게 달려와 쓰러진 구조물에 깔릴 뻔한 어린아이를 구하고, 누군가 ‘살려 주세요.’ 하고 소리치자마자 매캐한 먼지 사이를 뚫고 달려와 수십 명을 대피시키는 등의 일을 한다.

그는 너무 빠르기 때문에 아무도 데이빗의 얼굴을 본 이가 없다. 그에게 도움을 받은 이들은 ‘검은 물체’, ‘검은 바람’이 자신을 구했다고 생각할 정도다.

데이빗이 사라진 후, 빌리언맨이 상황을 파악하고, ‘검은 바람’의 정체를 찾으려고 했을 때는 너무 빠른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진 ‘기괴한 가면’만 놓여 있을 뿐이었다.

여기까지가 만화 속의 내용이었다.

마틴은 이후 사람들이 호기심을 갖고 ‘기괴한 가면’의 정체를 찾으려 하면 그 이야기를 풀어내려 했으나 다른 사건들에 묻혀 ‘기괴한 가면’의 정체는 뒤로 물러나게 됐다.

마틴이 생각했던 데이빗의 이야기는 캐릭터 설명과 대본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었다.

데이빗은 미국으로 유학 온 한국인으로 스무 살 이후 내재되어 있던 유전자가 발현하며 누구보다 빠른 반응속도를 갖게 된다.

동체 시력, 달리기 능력, 청력까지 무엇이든 빠르다. 빨라도 너무 빠른 돌연변이적 능력이었다.

그러나 데이빗은 주목받는 걸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고 자신의 능력을 절대로 세상에 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사건이 있던 날, 도저히 아이가 죽는 것을 볼 수 없어 공연을 하느라 땅에 떨어져 있던 아무 가면을 집어 들고 나서게 된 것이다.

이후 데이빗은 빌리언맨에게 불려가 빌리언맨이 가진 온갖 기술이 담긴 새로운 가면을 얻게 되고, 히어로즈의 일을 돕게 된다.

주목받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 탓에 처음에는 히어로즈의 일을 돕지 않으려고 하지만, ‘히어로즈 2’의 최종 악당이 북한과 손잡고 핵을 떨어뜨리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한국인으로서 어떠한 숙명임을 깨닫고 히어로즈를 돕는다는 내용이었다.

‘히어로즈 2’에 나오는 리얼맨의 부분은 그 정도였다.

최종 악당도 아닌 최종 악당의 협력자인 북한과 맞설 때 돕는 정도였다.

도욱과 이대형 팀장이 캐릭터 설명과 대본을 다 읽어 갈 때쯤 사라가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사라의 뒤에는 백발의 노인도 함께였다.

“다 보셨나요?”

테이블에 고개를 박을 듯 집중하고 있던 두 사람이 사라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사라의 뒤쪽을 확인한 도욱이 미간을 모았다.

‘어?······.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세계 곳곳을 다니다 보니 만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외국인이라고 하더라도 그랬다. 익숙한 얼굴에 도욱이 잠시 고민할 때였다.

“여기는 마틴 씨예요. 이 집의 주인이자, 제네럴 코믹스의 주인이시죠.”

“아!”

도욱과 이대형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도욱은 마틴을 어디에서 보았는지 기억해냈다. 카지노였다. 카지노에서 소매치기를 당했던 노인이었다.

마틴의 얼굴은 잘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도욱이 마틴을 알아보지 못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껄껄. 날 기억하겠어요?”

“네! 그때, 라스베이거스에서 뵌······, 맞으시죠?”

“맞아요, 맞아. 덕분에 바보 같은 일을 당하지 않아도 됐죠. 정말 고마웠어요.”

마틴이 손을 내밀자 도욱이 마틴의 손을 정중하게 맞잡았다. 사라가 두 사람이 악수하는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사라는 이미 마틴에게서 도욱의 이야기를 들은 터였다.

라스베이거스에서 긴 휴식을 마치고 돌아 온 마틴은 ‘리얼맨’ 캐릭터를 다시 부활시킬 방법을 찾았다고 했다.

그 방법이 바로 도욱이었다.

마틴이 생각한 리얼맨은 백인이 아니어야 했다. 마틴이 처음 ‘히어로즈’를 그렸을 때와 지금의 시대는 완전히 달랐다.

‘히어로즈’는 더는 마틴 혼자 만들어 낸 작품도 아니었다. 만화에도 영화에도 수많은 이들이 참여하고, 누군가의 우상이자 꿈이 될 히어로를 만들어 내기 위해 애썼다. 덕분에 지금의 히어로즈가 있을 수 있었다.

그들 중에는 백인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동양인도, 흑인도 있었고 남자도, 여자도 있었다.

앞으로도 ‘히어로즈’가 전 세계 다양한 연령층의 히어로가 되기 위해선 변화해야 했다.

그 때문에 일부러 정체를 밝히지 않은 히어로, 리얼맨을 만화에 넣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동양인 히어로를 넣으면 분명 어떤 독자층에선 거부감을 나타낼 수 있었다. 그 거부감을 줄이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만화의 의도는 실패로 돌아가 버렸고, 다른 캐릭터들에 밀려 리얼맨의 이야기는 아직까지도 제대로 그리지 못한 채였다.

마틴은 빠르게 소매치기의 행동을 눈치채고, 달려 나가는 도욱을 보며 바로 그 리얼맨을 떠올렸다.

마침 도욱이 케이케이라를 세계적인 보이 밴드 멤버에, 심지어 칸에서 인정받은 배우라는 점은 마틴에게는 운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마틴은 본래 생각했던 캐릭터에 도욱을 모델로 리얼맨을 영화에 넣기 위한 작업에 돌입했다.

‘히어로즈 2’의 리얼맨이 나오는 부분은 그렇게 나온 대본이었다.

마틴이 자리에 앉으며 도욱에게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어떻습니까?”

도욱이 주름진 마틴의 얼굴을 보았다. 잘게 진 주름마다 갖가지 이야기가 넘실대는 듯한 느낌이었다.

“너무 좋았습니다. 히어로즈 1도 정말 놀라운 스토리였는데······. 2의 스케일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네요. 당장에라도 히어로즈 2를 보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런 영화의 대본을 먼저 보게 돼서 영광이라는 말밖엔······.”

“그래요?”

도욱이 답하자 마틴이 되물었다. 마틴은 조금 더 자세한 도욱의 감상을 원하는 듯했다.

“네. 특히 리얼맨을 비롯해서 미래를 보는 초능력자까지······. 다양한 히어로들이 활약하는 모습이, 그야말로 ‘히어로’가 아닌 ‘히어로즈’던데요. 숨 쉴 틈이 없을 느낌이었요.”

‘다양한’ 히어로들의 등장은 ‘히어로즈 2’의 핵심 주제 중 하나이기도 했다. 도욱의 정확한 소감에 마틴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미 도욱에게 한눈에 반해버린 마틴으로서는 하늘이 내린 리얼맨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좋아요, 좋아. 어때요. 리얼맨이 되어 보겠어요?”

마틴이 도욱에게 물었다.

“진심으로 죄송하지만······. 제 대답은 거절입니다.”

도욱의 말에 옆에서 계약서류를 꺼내려던 사라가 당황한 듯 행동을 멈췄다. 이대형 팀장도 마찬가지였다.

히어로즈의 히어로를 거절할 수 있는 배우가 전 세계에 몇이나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었다. 특히나 동양인 배우에게 자주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었다.

차별적인 내용이 들어 있어도 거절하지 못하고 할리우드에 진출하는 이유는 그래서였다. 어떻게든 진출이라도 하자는 마인드였다.

이대형 팀장이 보기에 몇몇 농담이 섞인 이야기들을 제외하고는 크게 문제되는 부분이 없었다.

마틴만이 예리한 눈으로 도욱을 보며 물었다.

“이유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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