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
새로운 서막 (2)
주민아가 걸그룹 활동을 하며 그룹뿐 아니라 주민아도 이름을 알리기 시작할 무렵. 주민아가 연습생 시절 사귀었던 전 남친으로부터 협박 전화가 온다.
전 남친의 휴대폰에는 주민아와 성관계를 한 동영상이 있었다. 사랑하는 사이여서 동영상으로 남기자는 말에도 응했던 주민아로서는 청천벽력과 같은 협박 전화였다.
돈을 요구하는 전 남친에 주민아는 벌벌 떨며 돈을 마련해 보냈다. 그러나 전 남친은 약속과 달리 계속해서 동영상을 삭제하지 않고 주민아에게 돈을 요구했다.
당시에는 정산을 받기도 전이었기 때문에 주민아에게는 그가 요구하는 큰돈이 있지 않았다.
계속된 협박에 시달리며 돈 문제로 남몰래 끙끙 앓던 주민아는 결국 매니저에게 이 사실을 알리게 됐다.
원래도 집이 잘살던 편이 아니라 돈을 마련하는 것은 더는 무리이기도 했고, 이런 식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느라 심신이 피폐해져 그룹 활동에도 영향을 주고 있었다.
결국 무언가 말할 곳이라고는 매니저뿐이었다. 매니저에게 대략적인 사실을 알리자 매니저는 곧바로 당시 전략기획실 실장이었던 서중원에게 내용을 보고했다. 많은 사람이 알수록 좋을 게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서중원에게 보고될 내용이었고, 해결도 서중원의 선에서 이뤄져야 할 것이라는 매니저의 판단이었다.
아라 엔터테인먼트 직원이자 주민아를 관리하는 매니저로서 매니저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간과한 것은 서중원이 악인이라는 점이었다.
서중원은 이제 겨우 스물한 살이 된 주민아를 불러다 놓고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내가 왜 너를 도와야 하지?”
주민아는 손발이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그룹에서 퇴출당하는 것은 아닌지, 끝까지 회사에는 알리지 말고 자신의 선에서 전 남친에게 돈을 주어야 했던 것은 아닌지······.
주민아 또한 어렵게 연습생 시절을 거쳐 데뷔한 것이었다. 이대로 끝이 나고 싶지는 않았다. 짧은 순간 주민아는 기절할 것만 같은 긴장감을 느꼈다.
서중원은 피곤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냄새나는 오물을 처리해 주면······. 나한테도 뭐 돌아오는 게 있어야 할 텐데······. 그냥 널 내보내는 게 가장 빠를 것 같거든. 그런 놈을 상대하는 것보단.”
“실장님! 하, 한 번만 살려주세요. 한 번만 도와주시면 정말, 정말로 열심히, 흐윽, 제발······. 제발 한 번만······. 흑. 뭐든지 할게요······.”
주민아의 얼굴은 이미 눈물로 범벅되어 있었다.
어린 나이에 혼자 너무 많은 짐을 지고 있는 상태였다. 주민아는 절벽에서 떠밀리기 직전이었다. 커다란 책상 앞에 앉아 냉정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서중원만이 자신을 구해줄 유일한 구원자처럼 느껴졌다.
서중원은 그때 계산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키우는 걸 그룹에 흠집을 낼 순 없었기 때문에 보고를 받은 즉시 그는 주민아를 협박한 남자를 처리했다.
사람을 시켜 집까지 샅샅이 뒤져 그가 가진 모든 영상을 삭제했다. 협박을 해 대가를 취했으니 고소를 하겠다고 도리어 남자를 협박했다. 주민아의 전 남친도 서중원이 어떤 사람인지는 충분히 깨달았을 것이다.
주민아의 전 남친이 가지고 있던 성관계 동영상 원본은 서중원의 손아귀에 들어와 있었다.
당시 서중원은 연습생을 하다 데뷔조에 속하지 못해 아라 엔터를 나가게 된 연습생들 중 몇을 데려다 후원자를 찾아주는 중개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내의 집안 말고는 기반이 전무했기 때문에 권력을 키워 나가기 위해서는 각 분야 고위층들의 힘에 빌붙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생각해낸 방법이었다.
고위 간부들은 돈만큼이나 여자를 데리고 노는 일에 환장한 족속들이었다. 짐승 같은 욕구를 풀어내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권력을 드러내는 방법 중 하나였다.
그들에게 서중원이 연결해 주는 아라 엔터테인먼트 연습생 출신들은 그냥 ‘술집 여자’가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실제 연예인보단 노출 위험이 훨씬 덜했다.
이렇게 알아서 약점을 자신의 손에 쥐어 주었으니 주민아는 맘대로 쓸 수 있는 카드였다. 심지어 꽤 잘나가는 연예인.
그러나 아직 활동 중이었기에 스폰으로 넘기긴 힘들었다. 서중원은 포주인 동시에 아라 엔터테인먼트의 실장이었다.
눈물을 흘리며 무엇이든 하겠다는 주민아를 바라보는 서중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주민아의 탱탱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가 눈에 들어왔다. 다른 멤버들에 비해 눈에 띄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혼자 있으니 꽤 그럴싸한 얼굴이었다.
떠올려 보면 평소 성격도 사근사근하니 감기는 맛이 있었던 듯했다.
소속사 관계자와 소속 연예인이니 크게 의심을 사는 일도 없을 것이다.
서중원 본부장은 웃음이 나는 것을 애써 참았다. 자신도 권력을 주무르는 맛을 누릴 때가 온 것이었다.
“뭐든지라······. 그럼 정말 뭐든지 할 수 있는지 얘기해 볼까?”
서중원 본부장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주민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렇게 시작된 관계였다.
서중원에게는 주민아와 전 남친이 관계한 동영상이 있었다. 오히려 전 남친보다 악질일 수 있었다. 서중원은 정말로 주민아를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주민아는 그 순간 무언가가 꺾이는 기분이었다. 자아의 일부가 뭉텅이째 썰려 나간 듯했다.
화려한 연예인의 삶. 주민아는 그 삶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어둠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서중원과 관계를 가진 후면 늘 구역질이 밀려와 씻는다는 핑계로 욕실로 도망치듯 가야 했지만, 그랬기 때문에 더 서중원이 대가성으로 주는 돈과 캐스팅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러한 관계였기 때문에 서중원은 주민아에게 스스럼이 없었다.
주민아가 서중원이 연습생들을 상대로 포주 노릇을 하는 것도, 여기저기 뇌물을 뿌리고, 심지어는 뇌물을 받기도 하는 일들을 알고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였다.
제 손안의 인형과도 같은 주민아가 의지를 가지고 무언가 할 수 있으리라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재 주민아 앞에는 도욱이 앉아 있었다.
“저에게 다른 걸 주세요. 서중원을 무너뜨릴 만한······. 그걸 대신으로 하죠. 적어도 민아 씨가 이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좋은 기회일 것 같은데요.”
도욱이 왜 서중원 본부장을 무너뜨리려고 하는지, 그런 것에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도욱의 곧고 진실한 눈을 보며 주민아는 그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무척이나 부끄러워졌다.
주민아는 잠시 생각한 뒤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도욱의 말이 맞았다. 서중원 본부장과의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였다.
자신은 더 이상 오롯한 피해자가 아니었다. 그 시작이 어떻게 되었든 어쨌든 자신도 서중원에게 대가를 받고 살아온 이였다.
더 지나면 서중원이 제공하는 돈과 명예에 완전히 취해 평범한 삶으로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몰랐다.
이제와 서중원이 전 남친과의 성관계 동영상을 공개한다거나, 자신과의 일을 폭로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돌이킬 수 있는 기회라면, 되돌리고 싶었다.
‘이미 평범해지기엔 너무 늦었지만······.’
주민아는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도욱의 예상대로 주민아에게는 서중원 본부장을 무너뜨릴 만한 키가 있었다.
후원이라는 명목으로 팔아넘긴 연습생들과 후원자들의 명단. 주고받은 뇌물 목록들.
검찰에까지 넘길 수 있을 만한 확실한 증거들이 주민아의 양재동 오피스텔에 보관되어 있었다. 주민아는 도욱에게 그것을 모두 넘기기로 했다.
“이 사진이 세상에 공개되는 일은 없겠지만······. 서중원 본부장을 조사하다 보면 민아 씨의 이름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럼 또 연예인인 민아 씨만 가장 큰 관심을 받을 수도 있고요······. 괜찮으시겠어요?”
도욱이 불편한 마음을 억누르며 덧붙였다.
이미 도욱이 서중원을 무너뜨리고 싶다고 했을 때 생각한 일이었다. 주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민아는 권력 관계의 피해자였다. 그 피해가 너무 오래되었고, 대가를 받았기 때문에 본인이 완벽한 피해자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듯했다. 물론 이 일이 공개되면 주민아 또한 사회적인 지탄을 피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조금 더 현명했다면 좋았겠지만, 당시 그녀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주민아는 무엇이든 감내하겠다는 표정으로 도욱의 앞에 앉아 있었다. 도욱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죠.”
도욱은 주민아에게 증거를 넘겨받은 즉시 목록을 정리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주민아와 관련된 목록은 거의 없었다. 서중원 본부장, 그 자신의 일이었기 때문에 따로 증거를 남기지 않은 것이다.
서중원 본부장만 입을 열지 않으면 주민아가 연루되는 일은 없을 듯했다.
도욱은 정리한 증거들을 서중원 본부장과 척을 지고 있는 정 이사 쪽에 보냈다. 이대형 팀장의 도움이 있었다.
그리고 유성패션 이유민 대표의 도움을 받았다. 연루된 인물들에 언론과 방송 쪽 고위급 간부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냥 신고를 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믿을 만한 검찰 쪽 인물이 필요했다. 도욱은 익명의 제보자가 되었다.
주민아는 시간을 맞춰 은퇴를 선언하기로 했다. 서중원의 보복이 두렵기도 했고, 처음부터 잘못된 시작이었으니 끝을 내고 싶었다.
모든 일들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가장 완벽한 시점. 도욱은 서중원을 무너뜨리기 위해 세워둔 첫 번째 도미노를 민 것이다.
그다음부터 도욱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됐다.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
아라 엔터테인먼트 이사회가 열리기 한 시간 전이었다.
대표와의 통화를 끝낸 후, 서중원 본부장은 아라 엔터의 사무실로 와 이사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그러나 무슨 연락들을 받은 것인지 이사들 중 아무도 서중원 본부장의 연락을 받는 이는 없었다.
자신에게 빌붙어 얻어먹은 이사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모르는 체를 하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으아아아악!”
서중원 본부장은 분기탱천하여 사무실에서 고성을 질러댔다.
그러나 서중원 본부장이 용서하지 않는다고 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해임이라니······. 해임이라니, 말도 되지 않는다!’
서중원 본부장은 여전히 현실을 부정했다.
‘개 같은 X이 날 배신해?!······.’
서중원 본부장은 정 이사 쪽에서 주민아에게 접촉해 주민아를 꾀어낸 것이라 생각했다. 정 이사가 뒤를 봐준다고 한 게 아닌 이상에야 주민아가 자신을 배신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동영상이 내 손에 있는데······.’
서중원 본부장은 문득 이상한 기시감에 휩싸였다. 서중원 본부장에겐 분명 주민아의 동영상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민아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것은······.
단 한 가지 상황일 때만 완벽하게 납득이 가능했다. 서중원 본부장은 서둘러 인터넷 창을 켰다.
서중원 본부장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주민아의 은퇴 선언이 인터넷을 달구고 있었다. 여배우 주민아의 인생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주민아가 그 ‘여배우’라는 타이틀에 목숨을 걸 때나 가능한 것이었다.
은퇴한 주민아의 동영상을 공개해 봐야 주민아 개인의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을지언정 무언가 대가를 얻어내긴 힘들었다.
‘작정을 했구나! 이런 씨X······. 동영상이야 뿌려서 외국에 나가든 뭘 하든 손가락질받게 만들어 버리면 그만이야. 하지만 당장, 당장······!’
서중원 본부장은 침착하려 애썼다.
‘잠깐만. 대표가 내가 그만두면 정 이사를 막아준다고 했지. 그건 내 비리 리스트를 폭로해 봐야 대표한테도 좋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정 이사는 대표와도 사이가 좋지 않아서 자기 사람을 대표 자리에 앉히고 싶어 해······. 이 점을 잘 이용해서 대표를 구스르고······.’
차분히 생각하니 답이 나올 것도 같았다. 이사회 시작 전에 대표를 이용해 오히려 정 이사를 압박할 구실을 만들어내야 했다.
똑똑, 그때 누군가 서중원 본부장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서중원이 답하자 오토바이 헬멧을 쓴 배달부가 들어왔다.
“퀵입니다!”
배달부가 서류 봉투 하나를 서중원에게 내밀었다.
배달부가 나가고, 서중원 본부장이 성마른 손으로 서류 봉투를 찢었다.
그 안에는 서류가 들어 있었다.
서중원의 아내가 보낸 이혼 서류였다.
서중원 본부장이 충격에 휩싸인 그때 다시 한번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서중원 본부장은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문이 열리며 양복을 차려 입은 사내들이 사무실로 밀려들어왔다.
검찰에서 보낸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