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
복마전 (3)
‘소녀들’은 당연하게도 오늘이 방송국 첫 방문이었다. 모든 것이 신기했다.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어서 오빈 선배도 보고, 오빈 선배의 대기실도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자신들도 모르게 안쪽을 힐끗 거리던 소녀들은 안쪽에서 준비를 하고 있는 화려한 의상의 밸런타인을 보게 되었다.
오빈과 함께 대기실을 쓰는 이들이 오늘 자신들과 같은 날 데뷔를 하게 된 밸런타인이라는 것 정도는 소녀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함께 데뷔하는 신인이어도 다 같은 신인은 아니었다.
아무도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소녀들과 달리 밸런타인은 이미 상당수의 팬을 보유하고 있었다. 아라 엔터테인먼트는 연습생으로 들어가기도 힘든 곳이었고, 그곳에서 데뷔조 연습생들이 된 연습생들에게는 당연하다는 듯 팬들이 따라붙었다.
이미 기획사 내부에서 치열한 경쟁을 거쳐 올라와 데뷔를 하게 된 것이었기 때문에 아라 엔터테인먼트에서 데뷔하는 가수들은 ‘아라 엔터 소속에서 데뷔한다’는 자부심이 상당했다.
실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부심이 자신감 정도에서만 끝나면 좋으련만 데뷔 전부터 상당한 관심과 인기를 누리고, 이후에도 어느 정도의 인기는 보장되기 때문에 이미 스타가 된 것인 양 착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밸런타인 멤버들의 경우가 딱 그러한 경우였다.
더군다나 아라 엔터테인먼트가 완전히 자리를 잡은 상태에서 연습생으로 들어온 이들이었다. 때문에 데뷔조 때부터는 다른 기획사의 연습생들은 누리기 힘든 고급 빌라에서의 숙소 생활과 품위유지비 등을 지원받았다.
그러니 생활적인 면에서는 웬만한 가수들과 같은 생활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소녀들의 막내인 다혜는 밸런타인의 한예리와 눈이 마주치자 저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문 쪽을 바라보는 한예리의 눈빛이 너무나도 차가웠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눈을 피하는 게 아니라 인사를 했어야 하는데······. 에고······.’
다혜가 ‘어떡하지.’ 하는 걱정으로 소녀들의 리더인 윤지 쪽을 바라볼 때였다.
오빈에게 인사를 하러 왔다고 말했던 윤지는 밸런타인의 매니저와 마주 보고 있었다.
“지금 없는데요.”
밸런타인의 매니저가 무심한 말투로 대답했다.
“앗, 그럼 이따가 다시 찾아뵐게요!”
잠시 당황한 윤지였지만 배운 대로 싹싹하게 답했다.
“뭐······.”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무성의하게 대답하는 밸런타인의 매니저에도 윤지는 당황하지 않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런 후 뒤쪽에 쪼르르 줄지어 서 있는 멤버들에게 돌아가자고 말했다.
처음이기 때문에 원래라면 소녀들도 매니저와 함께 왔어야 하는 인사 자리이만 매니저는 인생가요의 PD에게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하러 간 상태였다.
소녀들이 문을 닫고 나가자 한예리가 문 쪽에서 다시 시선을 떼고는 거울을 봤다.
“시끄럽게.”
딱히 눈이 마주친 다혜가 맘에 안 들거나 한 건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할 만큼의 관심도 없었다. 단지 대기실 안이 잠시 번잡스러워졌던 게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었다.
“누구지?”
한예리의 옆에서 휴대폰을 하던 핑크색 머리를 한 밸런타인의 멤버가 혼잣말을 하듯 물었다.
“오늘 데뷔하는 애들 같은데? 그······. 소녀들?”
“소녀들? 소녀들이 이름이에요?”
“응. 그럴 거야.”
매니저의 대답에 핑크색 머리가 조금 찌푸렸다.
“에······. 엄청 수수하게 생겼네······. 시골에서 올라 왔나? 어디 소속이에요?”
핑크색 머리의 질문에 매니저가 난감한 듯한 얼굴을 했다.
“어디였더라······.”
“오빠가 매니저인데 그런 것도 모르면 어떡해요?”
핑크색 머리의 핀잔에 매니저가 조금 민망한 표정을 짓고는 이내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혜성! 혜성 엔터야.”
“혜성 엔터? 처음 듣는데.”
“신생이래.”
“아아~ 오빠가 모를 만했네요. 어쩐지~”
방금 전 핀잔을 줘 놓고서는 애교 섞인 말투로 대답하며 코를 찡긋거리는 핑크색 머리에 매니저는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지만 그냥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한예리가 조용하고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라면 핑크색 머리는 발랄하고 변덕스러운 성격이었다.
두 사람 다 대하기 쉬운 성격은 아니었다. 그러나 3년이나 아라 엔터에서 버틴 그였다. 이직이 잦은 매니저 업계를 감안하면 엄청난 끈기였다. 밸런타인의 데뷔 앨범만 잘되면 승진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 핑크색 머리의 변덕스러운 성격은 애교로 느껴졌다.
그때 다시금 노크와 함께 대기실 문이 열렸다.
“엇!”
의자에 등을 기대고 편안하게 앉아 있던 매니저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를 발견하고는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셨습니까!”
그가 허리까지 숙여가며 인사한 사람은 아라 엔터테인먼트 전략기획팀 진국선 실장이었다. 전략기획팀은 기획팀을 총괄하며 전체적인 인사 업무까지도 관여하는 아라 엔터의 알짜배기 팀이었다.
진국선 실장은 아라 엔터 내에서도 실세 중에 실세라고 할 수 있었다.
각자 무대를 준비하고 있던 밸런타인 멤버들도 일어나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아라 엔터테인먼트 소속 가수가 데뷔 무대를 설 때면 진국선 실장을 비롯한 기획팀의 팀장들까지 주요 실무진들이 오는 것은 관례와도 같았다.
그때 진정원 실장 뒤로 서중원 본부장이 대기실 안으로 들어섰다.
“보, 본부장님?!”
밸런타인 매니저는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진국선 실장이라면 모를까 서중원 본부장이 콘서트도 아닌 방송 무대를 찾는 일은 정말로 드물었다.
무서울 것 없어 보이던 밸런타인 멤버들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돌았다.
그럴 만도 했던 것이 아라 엔터테인먼트의 소속 연예인들에게 서중원 본부장이 미치는 영향력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서중원 본부장의 한마디에 차은호와 같이 생각지 못한 데뷔를 한 이가 있는가 하면, 그의 눈 밖에 나 별다른 방송 출연을 못 하고 있는 이도 있었다.
그러니 서강준이 눈에 보이는 것 없는 폭군처럼 굴어도 다들 쉬쉬했던 것이었다. 서중원 본부장은 실제로 아라 엔터에서만큼은 왕이나 다름없었다.
굳은 이들은 보며 서중원 본부장이 부드러운 미소를 띠웠다.
“이거 내가 너무 갑작스럽게 와서 다들 놀랐나 보네? 미리 연락 못 하고 와서 미안해요. 연락하면 너무 부담스러울까 봐.”
물론 그는 자신을 보고 굳은 이들을 보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자신의 말에 벌벌 떠는 사람들 앞에서 왕 노릇을 하는 일은 언제나 즐거웠다. 그가 돈과 권력에 심취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아, 아닙니다! 어떻게 여기까지······.”
매니저가 바싹 얼어선 답했다.
“어떻게는 격려차 나오신 거지.”
진국선 실장의 말에 매니저와 밸런타인 멤버들이 감사 인사를 올렸다.
“그래. 리허설들은 잘했고?”
“네! 데뷔인데 무대도 잘하고 팬들도 많이 왔다고 피디님이 칭찬도 해주셨어요~”
밸런타인 멤버들 중에서는 그래도 붙임성 좋은 핑크색 머리가 발랄하게 답했다. 서중원 본부장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밸런타인 멤버들을 훑었다.
“허허. 무대까진 못 보고 가겠지만 여기 진 실장이 지켜 볼 거니까 본무대도 잘하고. 내가 아주 기대가 커요.”
“네. 감사합니다.”
리더인 한예리가 차분하게 답했다.
“얘들아, 본부장님도 오셨는데 사진 한 번 찍어야지. 본부장님이랑 실장님이랑 같이······.”
밸런타인의 매니저가 분위기를 띄웠다.
아라 엔터테인먼트 공식 계정에 사진을 올리기 위해서였다. 직책 높은 실무진이나 임원, 대표와 연예인이 사진을 찍어 올리는 일은 종종 있는 일이었다. 소속 연예인을 얼마나 잘 관리하고 있는지를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어디 그럼······.”
서중원 본부장이 진국선 실장 옆에 섰다.
“본부장님이 가운데로 오시는 게······.”
“하하. 오늘은 이 친구들이 주인공인 날이지 않나.”
진국선 실장의 말에 서중원 본부장이 기분 좋게 답했다. 밸런타인 멤버들은 단체사진을 찍을 때 찍기로 되어 있는 지정된 자리에 가서 섰다.
밸런타인 매니저가 얼른 휴대폰 카메라 어플을 켜 사진을 찍었다.
‘인생가요’ 생방송 시작 한 시간 전이었다.
***
데뷔 무대 임에도 불구하고 밸런타인은 ‘스페셜 루키’라는 타이틀을 달고 1위 후보의 무대 직전 한 곡 반을 부르기로 되어 있었다. 초특급 대우였다.
아라 엔터테인먼트 소속 연예인들이 데뷔를 할 때마다 특별대우라고 다른 팬덤의 팬들로부터 빈축을 사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나 스포트라이트를 확실하게 받을 수 있었고, 대중들에게 확실하게 각인되었다. 약간의 빈축을 사는 정도는 감수할 만한 선택이었다.
무대가 뒤쪽이라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밸런타인과 달리 방송을 한 시간 앞두고, 소녀들의 대기실은 분주하기 그지없었다.
오프닝 바로 다음 무대였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소녀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2분 남짓. 타이틀곡인 ‘우리들의 시간’을 배정된 무대 시간에 맞게 편집해야만 했다.
데뷔 무대. 짧은 시간 안에 어떻게든 시청자들에게 ‘소녀들’이라는 이름을 각인시키고 강렬한 인상을 주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아아!”
“으으으. 나 떨려서 토할 것 같아. 무대에서 토해도 됨?”
“레알? 야아, 지금 화장실 가서 그냥 다 토하고 와.”
“얘들아. 너희 이제 걸그룹이야. 그런 얘기 입 밖에 내지 말자!”
리더인 윤지의 말에 멤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소녀들의 대기실에도 대표인 정혜성이 와 있었다. 서중원 본부장의 방문과는 분위기부터 달랐다. 정혜성 대표는 현재 멤버들의 삼촌 같은 분위기였다.
“정신없다. 다들 침착해!”
그런 말을 하는 정혜성 대표도 떨려하긴 마찬가지였다.
“와······. 근데 의상 진짜 예쁘다.”
“어, 나두 맘에 들어.”
무대 의상으로 모두 갈아입은 멤버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소녀’들이었다. 프릴이 잔뜩 달린 블라우스에 각자의 개성을 살려 핫팬츠나 스커트 등을 입은 체였다.
‘돈의 차이’가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는 부분이 의상이었다.
값싼 무대 의상은 디테일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그러나 현재 소녀들이 입은 무대 의상은 명품에 버금갈 만한 것이었다.
도욱이 자신의 투자금으로 앨범은 물론이고 무대 세트, 의상 등의 퀄리티를 높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구체적으로 투자의 쓰임새를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데서 차이가 나기 시작하는 거겠지······.’
정혜성 대표는 의상에 까지 돈을 쓸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확실히 의상에 돈을 투자하고 나니 같은 안무를 해도 동작이 더욱 잘 드러나고, 고급스러워 보였다.
보여지는 게 중요한 아이돌인 만큼 확실히 투자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정혜성 대표였다.
무대를 하러 나갈 시간이었다.
멤버들과 스태프들이 화이팅을 외치기 위해 둥그렇게 모였다.
“오늘 너희를 보려고 인생가요를 시청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야. 너희에게 관심도 기대도 없다. 그렇지만.”
정혜성 대표가 냉정하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래서 더 좋은 기회인 거다. 놀라게 해주자. 어? 너희들이 어떤 소녀들인지 보여주자고!”
“네에―!”
“넵!”
정혜성 대표의 말에 소녀들이 힘차게 외쳤다.
***
그 시각. 도욱은 라스베이거스의 한 카지노 입구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