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
첫 번째 승부 (2)
“녹화 마지막에 하기로 했던 무대······. 앞에 할 수 있을까요?”
박태형의 말에 멤버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왜? 피디님이 그렇게 하재? 뭐 순서 바꾸고 싶으신가.”
안형서가 물었다.
어차피 녹화 방송이었기 때문에 순서는 상관없었다. 관객 반응을 위해 편의상 방송 흐름대로 녹화를 진행할 뿐 무대는 언제든 하고 편집해 넣으면 그만이었다.
케이케이로서는 어차피 할 무대였지만, 현재는 패널로서의 편안한 의상이었기 때문에 무대 의상과 화장으로 바로 바꿔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었다.
도욱은 복도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이야기하며 박태형이나 케이케이가 심사위원의 자격이 있다는 것을 무대로 증명하자고 이야기했다.
“어? 아니 감히 우리 태형이르을?! 아, 좋아. 오늘 무대 바닥에 무릎 갈아본다!”
“마, 오버하지 말고. 하던 대로 해라. 하던 대로. 그래도 된다 아이가.”
안형서의 말에 정윤기가 대꾸했다. 물론 정윤기도 약간 심기가 불편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좋아요! 앞에 하든 뒤에 하든 상관없죠.”
“와이 낫~!”
곧 기분을 풀고 대답하는 멤버들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이 정도 여유는 당연한 것이었다. 숱한 노력으로 이 자리까지 온 케이케이였다. 누구의 앞에 서더라도 부끄럽지 않을 무대를 할 자신이 있었다.
자만은 아니었다. 온전히 노력에서 오는 자신감이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감으로 멤버들은 이미 V TV에서 제안한 게릴라 공연에 참여하기로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오늘, 전국에서 모여 든 춤꾼들 앞에서의 공연은 한 달 후면 있을 뉴욕 게릴라 공연에 비하면 그야말로 ‘씹어 먹을’ 자신이 있었다.
***
<댄싱댄싱> 녹화 현장은 커다란 무대를 중심으로 계단 형식의 객석이 있었다.
객석에 앉는 이들은 일반 관객이 아닌 심사위원과 참가자들 본인이었다.
다른 참가자들의 무대 내용과 심사 내용을 낱낱이 지켜볼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다른 이들의 무대와 비교해가며 참가자들 스스로 본인의 실력을 점검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참가자들이 먼저 차례대로 앞에서부터 객석을 채워나갔다.
모두 곧바로 무대를 할 수 있는 차림새였으므로 무척이나 개성 넘치는 모습이었다. 딱 보아도 무슨 무대를 할지 예상이 되는 정도였다.
큐 사인이 떨어졌다.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에 빨간불이 켜졌다. 참가자들과 심사위원, 무대를 담을 카메라가 수십 대 설치되어 녹화장 안에 사각지대가 없을 정도였다.
참가자들은 긴장된 모습으로 모여 자유롭게 오늘 팀 결정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이러한 모습도 프로의 재미를 더하는 일부였다.
“나는 하정운 선생님 팀 가고 싶어.”
“나두. 뽑혔으면 좋겠다.”
댄스 스포츠를 전공한 앳된 얼굴의 남녀가 속닥였다. 그 옆으로는 조정민이 있었다.
“조정민 씨는 어디 가실 거예요?”
조정민과 팀이 되고 싶어 하는 옆자리 여자가 조정민에게 물어왔다.
“글쎄요. 어느 쪽이든 좋은데.”
조정민이 답하자 여자가 끄덕였다. 그 뒤로는 굳은 얼굴의 참가자들이 있었다. 박태형과 도욱을 복도에서 만난 이들이었다.
굳었던 것도 잠시, 저들끼리 넌 잘할 거다 북돋아준 이들은 오만한 표정으로 무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미 박태형보단 자신들의 춤이 나을 거라는 사전 인터뷰까지 한 상태였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진심이었다. 복도에서 본 멍한 얼굴의 박태형보단 자신들이 춤을 더 잘 출 게 분명했고, 실력으로 보여주면 그만이었다.
세 명의 참가자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박태형의 무대를 봤냐고 조정민이 물었음에도 불구하고 대기 시간 동안 무대를 찾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곧 심사위원들이 입장했다.
참가자들이 모두 기립해 심사위원들을 향해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심사위원이 참가자들이 앉은 자리 앞 돌출된 세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중앙에 앉은 댄스 스포츠의 하정운이 마이크를 잡고 멘트를 했다.
“자. 오늘 기다리고 기다리던 새 심사위원이 오시는데요.”
옆에 앉아있던 발레리나 출신이 손을 꼭 모으는 리액션을 하며 기대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객석에서도 술렁이며 ‘오.’ 하는 소리를 냈다.
“새 심사위원을 소개합니다!”
성량 좋은 하정운의 목소리가 녹화장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녹화 전, 피디를 따로 찾아가 박태형은 더듬더듬, 그러나 똑바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저를 인정하지 못하는 참가자들이 있는 것 같아요······. 모든 사람이 저를 인정해야만 한다······. 이런 건 아니지만······. 제 춤을 제대로 본 적도 없고······. 그런 상태에서 심사위원을 따르고······. 팀을 정하는 게······.”
연출은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간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케이케이 전 멤버가 한 회 분량을 채워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무슨 요구든 들어줄 의향이 있던 피디였다. 요구하는 내용이 과한 것도 아니고, 충분히 들어줄 수 있는 요구였다.
<댄싱댄싱>의 피디가 케이케이 무대를 오늘 녹화 마지막에 넣은 건 팀을 정한 후 앞으로 점점 더 치열해질 경쟁의 화려한 막을 연다는 의미로 연출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방향을 수정했다.
심사위원 소개를 하며 케이케이와 박태형의 무대를 처음에 배치해 프로그램 시작부터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박태형이 참가자들에게 심사위원으로서 인정받는 서사를 넣기로 한 것이었다.
어차피 <댄싱댄싱>의 첫 화 시청자 절반 정도는 케이케이의 팬들일 것이란 점을 생각하면 박태형을 프로그램 스토리텔링 중심에 넣는 것은 오히려 나은 선택이 될 수 있었다.
객석의 참가자들이 박수와 휘파람을 불어대며 조금 전보다 더 격한 환호를 보냈다.
무대 조명이 단번에 켜지며 녹화 현장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드라이아이스가 무대 아래로 옅게 깔리며 ‘Continue’의 전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Connection’보다는 ‘Continue’가 <댄싱댄싱>의 프로그램 취지나 분위기와 더 잘 맞다는 생각에서 멤버들이 고른 곡이었다.
전주가 흘러나오자 참가자들, 특히나 여성 참가자들이 입을 틀어막으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어떻게!”
“케이케이 전부 나오나 봐!”
사실 케이케이의 무대가 있을 예정이라는 건 참가자들도 알고 있었지만 진행 보조의 말에 따라 놀라는 리액션을 하고 있는 참가자들이었다.
그러나 알고 있었음에도 케이케이가 등장하자 여성 참가자들에게서는 진실된 리액션이 나왔다. 눈앞에서 케이케이를 보니 호들갑을 떨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Con, Con, Continue!”
전주가 끝나자 곧바로 웅장한 사운드와 함께 후렴구에 진입했다.
케이케이 멤버들은 대형을 맞춘 채 무대에 집중했다.
“우리는 계속해서 전진―!”
평소 음악 방송에서 올라이브로 무대를 소화하던 케이케이였다. 그러나 오늘의 무대는 퍼포먼스 위주의 무대였기 때문에 라이브가 아니었다.
노래를 부르는 데 신경 쓰느라 분산되던 에너지를 안무를 하는 데에만 집중하자 그 시너지가 엄청났다.
“와아!”
“진짜······! 할 말을 잃게 만드네요······.”
참가자들에게서는 물론이고 심사위원석에서도 넋을 잃은 채 무대에 집중했다. 방송을 위해서는 무대 중에도 무어라 많은 코멘트를 넣는 것이 좋겠지만, 입을 벌리고 무대를 보는 것 외의 리액션은 하기 힘들었다.
“저게 진짜 하나 된 무대죠.”
“앞으로 여기 뒤에 계신 분들이 보여줘야 할 무대.”
“에너지가 정말 남다르네요.”
새로운 대형을 다시 만드는 과정에서야 심사위원들이 한마디씩 코멘트했다.
<댄싱댄싱> 무대에 이 정도 퀄리티의 무대가 올라온다면 더 바랄 게 없다는 것이 장르를 불문한 공통된 심사위원들의 생각이었다.
센터에 선 도욱의 표정에선 카리스마가 넘쳐흘렀다.
안무를 소화하는 능력뿐 아니라 무대 위에서의 표현력까지 완벽했다.
“너를 언제까지나 부를게, 나는 언제까지나 달릴게―”
고음 파트로 올라가며 안형서가 윙크를 날리자 마치 팬들이 모인 공연장인 듯 여성 참가자들에게서 ‘꺄악.’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원래대로라면 케이케이 멤버들이 단체로 군무를 춰야 할 간주 파트였다.
“오오오―!”
멤버들이 순식간에 무대에서 사라지며 박태형이 중간에 섰다.
그리고 박태형의 독무가 시작됐다.
‘Continue’의 전주에 맞춘 파워풀한 왁킹 댄스에 참가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박태형의 팔이 빠르게 움직였다. 절도와 유연함이 동시에 느껴졌고, 힘도 빠지지 않았다.
“진짜 잘한다.”
스트릿 댄스팀 출신 참가자 하나가 감탄하며 말했다.
그는 박태형을 무시하고 있진 않았지만 그 또한 ‘아이돌 댄스’ 전문가라고 생각했지 자신과 같은 분야에서 박태형이 자신보다 월등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고 있었다. 대단한 연습량이 느껴지는 실력이었다.
박태형의 실력을 알고 있던 조정민 또한 놀랐다.
‘정말 엄청나게 늘었어! 내가 알고 있던 건 새 발의 피 수준이야.’
짧았던 케이케이 무대를 보고도 이미 놀란 상태였다. 타고난 재능에 노력까지 더해지면 현재의 박태형은 물론이고 케이케이 멤버들 전부가 괴물과도 같은 실력자가 된 것이었다.
리믹스된 음원에서는 간주 부분의 사운드가 점점 더 빨라졌다.
현란한 왁킹을 선보인 박태형은 빨라진 사운드에 맞춰 브레이크 댄스를 선보이고는 ‘쾅.’ 하는 효과음과 함께 무대 위에서 날아올랐다.
무대에 손을 짚으며 완벽하게 착지한 박태형을 향해 박수가 쏟아졌다.
진행 보조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참가자들이 제자리에서 일어서며 환호했다. 한두 명씩 일어나기 시작해 전체가 일어서 열광하자 굳은 얼굴로 무대를 보고 있던 세 명의 참가자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들이 박태형보다 나을 거라고 생각했던 게 얼마나 큰 오만이었는지 깨닫지 않으려고 해도 깨달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기술적으로도 대단했다. 그런데 심지어 박태형에겐 엄청난 무대 경험으로 인한 노련함까지 있었다.
어느 카메라에서 빨간 불이 들어오는지조차 느낄 수 있었으므로 시선 처리 하나까지 완벽했던 것이다.
케이케이 멤버들이 환호를 받고 있는 박태형 곁으로 모여들었다. 심사위원들까지 일어나 박수를 쳤다.
그들은 상당한 내공이 쌓인 프로였기 때문에 케이케이와 박태형이 보여준 무대가 얼마나 많은 노력이 들어간 무대인지 더 잘 알고 있었다.
쑥스러운 듯 웃던 박태형이 객석 쪽을 바라보았다.
아까 전 박태형을 얕잡아 보았던 참가자와 박태형의 눈이 마주쳤다. 세 명의 참가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박태형과 눈이 마주치가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숙였다.
계산적인 행동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실력 앞에 굴복한 것이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보던 도욱은 피식 웃음 지으며 박태형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 그럼 태형 씨는 심사위원석에 앉아 주시고-! 3분만 쉬었다가 녹화 다시 진행할게요!”
조연출이 소리쳤다.
케이케이 멤버들이 계단을 통해 무대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에도 참가자들은 케이케이를 보며 웅성거렸다.
여운이 길게 남는 무대일 수밖에 없었다.
도욱은 무대에서 내려오며 잠시 조정민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조정민이 복도에서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고맙다. 네가 내게 화를 내지 않았다면, 난 평생을 오만한 쓰레기로 살았겠지. 마치 서강준처럼······.”
그렇게 말한 조정민은 서강준이 떠올랐는지 말을 덧붙였었다.
“그 자식은 그러고도 또 연예계에 복귀할 모양이니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조정민의 말에 도욱은 잠시 눈살을 찌푸리곤 물었었다.
“복귀를······, 한다고요?”
조정민이 끄덕이며 답했다. 잘은 모르지만 아라 엔터에서 사귄 연습생들에게서 전해 들었다고 했다.
서강준이 맨투맨 멤버들에게 자신이 곧 한국에 돌아갈 것이며, 금세 다시 예전의 위치를 찾을 거라며 떵떵거렸다는 것이었다.
‘서강준이 돌아온다라······.’
서강준이나 서중원 본부장. 뉘우침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뻔뻔한 부자를 생각하면 언젠가 서강준이 다시 얼굴을 내비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었다.
그러나 너무 빨랐다.
‘너희들 맘대로 되지 않을 거다.’
도욱은 생각하며 조정민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