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
소녀들 (4)
도욱에게 그룹 소녀들의 활동 방향 등에 대해 설명하며 대화를 이어 나가던 정혜성 대표가 물었다.
“그럼 오신 김에 멤버들 연습하는 거라도 한번······.”
“아. 아닙니다. 괜히 연습하는 데 방해가 되면 안 되죠.”
“아니에요. 잠깐 인사만 하는 건데요. 오히려 도욱 씨가 바쁜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정혜성 대표의 말에 도욱이 끄덕였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연습실 쪽으로 향했다.
혜성 엔터테인먼트의 연습실은 지하에 있었다. 엔터테인먼트가 위치한 건물은 10층짜리 건물이었지만 대표실은 8층, 관련 사무실은 7층에 그리고 연습실은 지하에 있는 형태였다. 소규모 기획사라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연습실이 지하에 있네요.”
“네. 아무래도 방음 문제나 그런 것 때문에요. 열악한 환경이라······.”
도욱의 말에 정혜성 대표가 조금 부끄럽다는 듯 말했다. 도욱은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는 듯 답했다.
“앞으로 더 키워 나가시면 되죠. 여기까지 끌고 오신 것도 대단하세요, 대표님.”
“허허······. 그나마 최근에 도욱 씨가 투자해주신 덕분에 환경이 많이 나아졌어요.”
정혜성 대표가 고맙다는 듯 도욱을 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자신에게 고마워하는 정 대표를 보고 있자니 역으로 자금 문제로 얼마만큼 시달렸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과거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들을 어느 정도까지 성공시켰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도욱은 진심으로 정혜성 대표가 제약 없는 상태에서 소녀들을 더 높은 위치로 올려 주기를 바랐다.
소녀들은 현재 소형 기획사라는 약점, 동시에 데뷔 시에는 스토리텔링에 사용하기 좋은 강점을 가지고 있었다. 동시에 이전과는 달리 후반 투자금이 들어온 상태라 앨범 퀄리티는 오히려 높일 수 있을 것이었다.
유리문으로 된 연습실 안을 바라보자 멤버들이 한창 몸을 풀고 있는 게 보였다.
아직까지 타이틀곡이 나온 상태는 아니어서 소녀들은 기본기를 다지며 케이케이가 그러했던 것처럼 여러 가지 댄스 커버 레퍼토리를 만드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정혜성 대표가 문을 열자 유리문에 달아 놓은 작은 종에서 딸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로 허리를 눌러 주며 스트레칭을 하고 있던 멤버들의 눈이 문 쪽으로 향했다.
정혜성 대표의 깜짝 방문에 놀란 눈을 하고는 이내 바짝 기합이 들어선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인사를 하는 멤버들의 목소리가 우렁찼다. 정혜성 대표가 대충들 하라는 듯 손을 젓고는 말했다.
“어어, 다들 아직 연습 전이지? 오늘 인사할 분이 계셔서······.”
정혜성 대표의 말에 멤버들이 토끼눈을 했다.
소녀들의 멤버는 모두 일곱 명으로 가장 큰 언니인 리더의 나이가 스물두 살이고, 나머지는 모두 열여덟, 열아홉, 스물로 구성된 그룹이었다.
모두 아직 정돈되지 않은 풋풋함이 살아 있었다.
정혜성 대표의 뒤편에 서 있던 도욱이 나서며 멤버들을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러운 도욱의 등장에 ‘소녀들’ 멤버들이 그야말로 소녀처럼 놀라며 소리 질렀다.
“어머!”
“꺄악!”
케이케이의 팬들이 낼 법한 소리를 내는 멤버도 있었다. 열여덟 막내였고, 실제로 케이케이를 좋아해서 아이돌이 되고자 연습생을 시작한 멤버였다.
“지난번에 말했던 투자자분. 다들 인사해.”
멤버들이 한 명씩 나와서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며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어찌나 깍듯이 인사하는지 허리를 굽히자 뒷머리가 다 앞으로 넘어올 정도였다.
도욱은 부담스러운 마음이었지만 어쨌든 멤버들의 인사를 받았다.
“진짜 너무······. 만나뵙구 싶어써요······. 이이······. 어떡해······.”
케이케이의 팬이었던 막내 다혜가 울먹거리다시피 하며 말했다.
멤버들은 다른 기획사에서 연습생 생활을 하다 온 한두 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혜성 엔터테인먼트 오디션과 길거리 캐스팅을 통해 발탁된 경우였다.
신생이었으므로 길게는 2년, 짧게는 1년의 연습생 생활을 했다. 다른 대형 기획사 출신 멤버들의 연습생 기간을 생각하면 짧은 편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데뷔를 못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더 컸기 때문에 더욱 연습에 몰두했고, 기간만 짧았지 연습량으로 따지면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죽기 살기로 연습했고, 멤버로 확정되었음에도 불투명했던 데뷔였다.
나이는 어렸어도 꼭 데뷔해서 케이케이와 같은 무대에 서겠다는 의지가 강했던 다혜는 도욱의 얼굴을 보자 어쩐지 울음이 쏟아질 듯했다.
겹겹이 쌓여있던 안개 사이로 햇살이 비치는 느낌이었다.
“아······.”
도욱이 당황하며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서 있었다. 정혜성 대표는 다혜가 평소 케이케이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상 가능한 반응이라는 식이었다.
다혜의 옆에 있던 멤버들이 울지 말라며 다혜를 달래주었다.
“저도 만나서 반가워요. 연습하느라 많이 힘들죠······.”
도욱이 다정한 어투로 묻자 다혜가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꼭······. 꼭 한 무대에 서려구······.”
“다혜, 다혜 씨 맞죠? 열심히 하면 곧 그렇게 될 수 있을 거예요.”
도욱의 말에 다혜는 입술을 꽉 물고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난 의지가 엿보이는 눈빛이었다. 도욱은 한 명, 한 명 차분히 다른 멤버들을 둘러보았다.
다혜뿐 아니라 다른 멤버들도 도욱이 자신들을 돕는 투자자였다고 생각하자 데뷔까지는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든 모양이었다.
정혜성 대표 한 사람만 믿고 달려온 소녀들이었으니 도욱의 존재는 그럴 만도 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멤버들의 눈에는 성공적으로 데뷔를 하고자 하는 열망이 가득했다.
‘이렇게 직접 얼굴을 보길 잘했어······.’
과거에는 그저 TV를 통해 시청자로서 소녀들에 대해 알았던 것뿐이었다. 물론 TV를 통해서도 멤버들의 투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직접 만나 보니 그 눈빛의 생기가 생각 이상이었다.
‘자본의 한계로 인해 정혜성 대표의 기획에 한계가 있었듯이 멤버들의 능력 또한 더 발전될 가능성이 막혀버린 거다.’
도욱은 생각했다. 소녀들이라는 그룹이 단지 아라 엔터에서 곧 나올 게 분명한 ‘밸런타인’의 라이벌 정도가 되는 것이 아닌 세계적인 그룹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까지 계산해 보았다.
거기까지의 미래는 도욱도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해볼 만한 계산이었다.
그룹이 거기까지 성장한다면 도욱에게도 상당한 부와 명예가 따를 것이었다.
“다들 잘해낼 수 있을 거예요. 이렇게 보니까 더 그럴 것 같다는 확신이 드네요.”
도욱의 말은 멤버들을 비롯한 정혜성 대표에게까지 힘이 되는 말이었다. 찬 공기가 감돌던 연습실의 온도가 훈훈하게 올라갔다.
짧은 만남 뒤로 도욱은 연습실을 나섰다.
도욱은 새삼 자신의 위치를 확인했다. 대중들의 인기를 받는 것은 물론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누군가에게 꿈을 심어줄 수 있다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왔다.
도욱은 어느새 꿈을 꾸는 사람에서 꿈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멤버는 저 일곱 명으로 확정인 거죠?”
1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으며 도욱이 물었다.
기분 좋은 미소를 얼굴에 띠우고 있던 정혜성 대표가 미소를 지우곤 되물었다.
“어. 그런데······. 별로······, 였습니까?”
정혜성 대표로서는 최선을 다해 꾸린 팀이었다.
끼 넘치고 실력 있는 연습생들은 대형 기획사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혜성 엔터테인먼트를 찾아오는 이들은 아무래도 그들보단 부족한 감이 있었다.
그러나 혹독한 트레이닝을 견뎌낸 멤버들이었기 때문에 이제는 어디에 내놔도 좋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 자신감이 자신만의 자만이었나 싶어 정혜성 대표는 가슴이 내려앉는 듯했다.
“아닙니다. 전혀요. 다들 의지가 뚜렷해서 정말 보기 좋았어요. 제 연습생 시절도 생각이 나고요.”
도욱의 말에 정혜성 대표의 표정이 겨우 풀어졌다.
“그런데······.”
“······그런데요?”
정말로 투자만 할 생각이었던 도욱이었지만 도욱은 약간의 의견을 보탰다. 누구든지 낼 수 있는 의견이기도 했다.
“한 명 더 있으면 좋을 것 같긴 해요. 해외 출신이 있으면 어떨까 해서요.”
한국 내에서의 활동만 생각하면 필수적인 일은 아니었지만, 해외 시장에서도 성공을 거두려면 꼭 한번 고려해 보아야 할 일이었다.
도욱도 해외 활동을 하며 왜 아라 엔터 쪽에서 팀을 짤 때 그런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확실히 영어를 비롯한 언어가 되는 멤버가 있으면 해외여도 활동에 제약이 반 정도로 줄었다.
거기에 아예 자국 국민이 있을 때 그 국가의 팬들은 그룹에 대한 경계심이 상당히 허물어졌다.
물론 K-POP, 한국 그룹을 좋아하는 것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들도 같은 나라 멤버에게 더 많이 마음의 문을 열었다.
케이케이의 경우에는 외국인 멤버 없이 유학파만 있었지만, 너무나 독보적이었기 때문에 모든 것에서 예외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해외파라······.”
정혜성 대표가 고개를 주억였다.
이미 케이케이는 한국에서 가장 해외에 알려진 가수였다. 그런 도욱의 말이었으니 투자자인 점을 떠나서도 정혜성 대표로서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애초에 정혜성 대표도 당연하게 생각했던 구성이었지만, 국내에서도 알려지지 않은 신생 기획사에서 외국인 멤버까지 데려오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가능만하다면 저도 좋겠어요.”
정혜성 대표의 말에 도욱도 이해한다는 듯 끄덕였다.
“네. 게다가 지금의 팀워크나 분위기가 깨어져선 안 되니까······.”
“그렇죠. 제가 사람 보는 눈을 더 길러 보겠습니다.”
정혜성 대표의 말에 도욱이 웃었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의견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이었다.
***
혜성 엔터테인먼트에서 돌아온 도욱은 멤버들과 둘러앉아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도욱이 역시 크게 될 사람.”
“이미 크게 됐지 뭐.”
안형서와 정윤기가 감탄하며 말했다.
멤버들에게도 여자 아이돌 그룹 제작에 투자금을 댔다는 사실을 밝힌 후였다.
대부분의 멤버들은 정산을 받은 돈으로 부모님께 집을 사 드리거나 작은 상가 건물을 샀다. 남은 돈은 통장에 들어 있었다.
“뭐, 제가 제작한 것도 아니고 그냥 돈만 댄 건데요.”
“그래도 그런 데 투자할 생각을 한 게 대단한 거지. 나중에 그 아이돌 그룹 나와서 같이 무대하면 신기한 기분일 것 같아. 그룹명 뭐라고?”
“소녀들이요.”
“와우, 소녀들······. 프리티?”
김원의 물음에 멤버들이 일동 김원을 노려보았다.
“형도 참 캐릭터 확고하네요.”
막내 석지훈이 날린 일침이었다. 김원은 어깨를 으쓱했다. 도욱도 웃어 넘겼다.
“아무튼 기분이 이상하더라고요. 저희를 보고 아이돌을 꿈꾼 친구도 있다는 게······.”
“심지어 그 친구의 꿈을 이루는 데 네가 도움을 주는 거잖아.”
“하하. 그것도 그렇네요.”
정윤기의 말에 도욱이 답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박태형도 덧붙였다.
“내 꿈······. 이루는 것도 많이 도와줬어······.”
박태형의 말에 도욱은 가슴이 뿌듯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꿈과 목표만 쫓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강도욱으로서 살아가는 삶이 더 의미 있게 느껴졌다.
“우리 롤모델인 거네.”
김원의 말에 멤버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롤모델!’
정확했다. 케이케이 멤버들은 아직 밥을 뜨지도 않았는데 배가 부른 듯한 기분을 느꼈다. 직접적인 성취에서 오는 것과는 다른 성취감이었다.
“보람 있네요. 더······. 열심히 해야겠어요.”
한창 앨범 준비를 하면서도 곡 작업 공부를 하고 있는 석지훈이 말했다. 다른 멤버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종업원들이 다가와 준비한 음식들을 서빙하기 시작했다.
“그래. 마, 내일도 잘해 보자.”
리더의 말에 멤버들은 내일 스케줄을 떠올렸다. 청와대에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