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슈퍼스타-177화 (177/225)

# 177

태산이 높다 하되 (2)

***

“여어! 히사시부리!”

촬영을 마치고 도욱이 숙소에 돌아온 시각은 밤 11시였다. 거실에 나와 있던 안형서가 가장 먼저 도욱을 반겼다. 안형서는 정말로 오랜만에 도욱을 보는 느낌이었다.

도욱은 촬영에 들어간 이후 숙소에서는 잠만 겨우 자고 촬영장에 가 촬영을 하거나 대기를 하기 바빴다.

작가가 인고의 노력으로 빚어낸 캐릭터가 입체화되고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배우의 연기력이 중요했다. 드라마 속에서 캐릭터가 살아나려면 그 캐릭터 자체가 되어야 했다.

도욱은 ‘천민준 실장’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되기 위해 몰입하고 있었다. 단기간 촬영으로 끝이 났던 <푸른 고래> 영화 촬영과 달리 드라마는 세 달 정도를 ‘천민준’으로 살아야 했다.

현장과 숙소를 왔다 갔다 하면서도 몰입감을 깨지 않기 위해서 도욱은 최대한 강도욱으로서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했다.

도욱이 안형서와 오랜만인 이유에는 촬영 스케줄도 있었지만 숙소에서 멤버들과 보내는 시간을 자제하며 방에 들어가 대본을 외우고 부족한 잠을 보충하며 ‘천민준 역할에 몰입’해 있는 상태였던 것도 이유였다.

“어, 형. 그게 대체······.”

강도욱으로서 웃고 떠드는 시간을 줄이다 보니 말수는 적었어도 딱딱한 느낌은 없었던 도욱은 근래에는 마치 ‘천민준 실장’처럼 딱딱하다는 인상마저 주는 경우가 있었다.

그 때문에 며칠 전 본 오백호 실장도 ‘배우 다됐다.’는 말을 했었다.

소위 아이돌 그룹 멤버들이 ‘연기병’에 걸렸다고 구설에 오르는 이유를 도욱도 알 것 같았다. 촬영 현장에서 치열하게 캐릭터에 몰입해 있는 이들을 보다가 현실감 넘치는 멤버들을 보면 어쩐지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몰입이 깨질 것 같았기 때문에 역할이 어떻든 현실에서는 말수가 줄어들기 마련이었다.

물론 몇몇 깨달음이 부족한 이들은 촬영이 끝나고도 그러한 태도를 유지하기도 했고, 연기와 상관없이 겉멋처럼 연기하는 자신에 빠져 허세를 부리기도 했다.

그런 이들 때문에 연기병이라는 말까지 생겨나며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지만, 도욱의 주변 사람들 중 도욱이 그런 우스운 허세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그런 병에 걸릴 거면 칸에 진출했을 때 벌써 걸렸을 거라는 게 대부분의 반응이었고, 오백호가 말한 ‘배우 다됐다.’는 말은 표면 그대로의 진심이었다.

이전에도 기민한 구석이 있는 도욱이었지만 최근 더 눈이 예리하게 살아 빛나고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천민준 실장’처럼 굳어 있던 도욱도 반가운 얼굴을 하며 이상한 일본어 말투로 인사하는 안형서를 보니 어쩔 수 없이 풀어지고 말았다.

푸핫, 하고 도욱이 웃음을 터뜨리자 안형서가 마음에 든다는 듯 더욱 과장되게 팔을 올려 손가락을 흔들었다.

“여어~! 히사시부리이이~!”

“형······. 대체 뭐 하는 거예요. 하하.”

도욱의 물음에 안형서가 그제야 팔을 내리며 답했다.

“요즘 일본어 공부하잖아.”

“아······. 도대체 뭘로 공부를······.”

“뭐, 말만 통하면 되는 거 아니야?”

“맞아요.”

도욱이 웃으며 답했다. 내년에 한 번 더 있을 돔 투어와 일본 활동을 대비해 휴식기에도 꾸준히 일본어 공부를 하고 있는 안형서였다.

“오늘은 촬영 일찍 끝났네?”

“네. 빨리 끝났어요.”

“촬영은 잘돼가? 너 괴롭히는 사람은 없지? 내일은 또 언제 나가?”

오랜만에 보는 도욱에 궁금한 것이 많은지 안형서의 질문들이 쏟아졌다. 도욱은 마침 오늘 있었던 일이 떠올랐지만 이내 피식 웃으며 답했다.

“네. 잘돼가고, 괴롭히는 사람도 없어요. 아침에 다섯 시에 나가야 해요.”

“헐. 얼른 들어가서 씻고 자야겠네! 또 새벽에 나가려면 피곤하겠어.”

걱정스러운 얼굴로 얼른 들어가라고 도욱의 등을 미는 안형서에 도욱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방 안에 들어와서도 도욱은 바로 잠들 수 없었다.

도욱은 메시지를 보내 최성준 기자에게 통화가 가능한지 물었다. 곧바로 최성준 기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최성준 기자는 뉴스패치 내에서 케이케이 담당자로 통했다. 취재는 최성준 기자의 후배가 도맡아 했지만 큰 기획 기사의 맥락을 잡고 기삿거리를 물어오는 것은 최 기자의 몫이었다.

팬-마케팅팀 이대형 팀장에게 오백호 실장이 언질을 던져둔 이후부터 쭉 그래왔다. 케이케이에 관련한 단독 보도 기사 거리를 최성준 기자에게 줌으로서 최성준 기자가 뉴스패치 내에서 어느 정도 입지를 다질 수 있게 하는 것이 도욱의 목적이었다.

실제로 최성준 기자는 뉴스패치에서 최근 꽤 인정을 받고 있었다. 덕분에 걱정했던 서강준 건 소스를 흘린 일에 대한 서중원 본부장 쪽에서의 외압도 일단은 넘어가고 있는 듯했다.

“아, 기자님. 아직 안 주무셨네요.”

-기자가 밤낮이 어디 있겠습니까. 거기에 도욱 씨한테 메시지가 왔는데 자다가도 일어나는 게 맞습니다. 근데 무슨 일이십니까?

최성준 기자는 도욱의 가장 강력한 조력자가 되어 있었다.

도욱은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최 기자님 혹시 주민아 아십니까?”

-주민아요?

“네. 아라 엔터 소속 연예인인데······”

-아! 이번에 도욱 씨가 하는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죠? 걸그룹 출신······.

“네. 맞아요. 혹시 그 주민아 씨에 대해서 들으신 것 없나요. 서중원 본부장 관련해서요.”

-서 본부장이요?

되묻는 최성준 기자의 목소리가 금세 가라앉아 있었다. 서강준을 키워낸 괴물. ‘서중원’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여전히 이가 갈리는 듯했다.

잠시 생각하는 듯 말이 없던 최성준 기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글쎄요. 굳이 관련이 있다면······. 사실 그때 대학 비리 사건 파면서 들은 게 있긴 합니다.

“어떤······. 말씀하세요.”

-더 알아보고 확실해 지면 도욱 씨한테 말하려고 했던 건데. 서중원이 스폰을 주선한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피곤으로 감겨 가던 도욱의 눈이 크게 뜨였다.

서중원 본부장이 맡고 있는 주력 가수는 맨투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심 수입원은 아닌 주민아와 자주 연락을 하는 것 같아서 무언가 이상한 낌새가 들었던 것뿐이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스폰을 말입니까?”

-지금의 서중원이 있기까지······. 현재 아라의 상당한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데 그 돈과 권력 모두 어디에서 나왔겠습니까.

물론 서중원이 능력이 있었던 것도 부인 못 할 사실이지만 최성준 기자의 말도 납득이 가는 이야기였다. 아무리 실력이 있다고 해도 한국 기업 구조상 대표 자리까지 노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스폰서들과 연예인들 사이에서 포주 역할을 하고 있었다면, 서중원의 각계각층에 퍼진 인맥들 또한 이해가 됐다.

사실이라면 도욱이 서중원 본부장을 끌어내리는 데 상당히 유용한 카드가 될 것이었다.

그러나 쉽게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의심해야 한다. 확실한 것은 없어. 괜히 섣부르게 나섰다가는 일을 그르칠 수 있어.’

도욱은 생각하며 말했다.

“증거는······.”

-아직입니다. 캐다 보니 나온 입소문이니까요. 그런데 서중원이랑 주원대 쪽 놈들이랑 만났던 장소들을 보면······, 대충 각은 나옵니다.

“그렇군요. 여러모로 수고가 많으시네요, 최 기자님이.”

-수고는요. 그런 새끼들은 싸잡아서 콩밥을 처먹이든······. 후. 죄송합니다. 마음이 격해져서······. 사실 증거를 잡는다고 해도 아예 뿌리 뽑지는 못 할 겁니다. 엮여 있는 인사들이 많을 테니.

사회의 악이 서중원 하나뿐만이 아닐 거라는 건 도욱도 알았다. 더 악한 사람도, 덜 악하지만 악한 사람도 발에 채일 만큼 있었다.

그러니까. 그래서 더. 도욱은 서중원이라는 도욱이 가장 잘 아는 ‘악’을 처단하고 싶었다.

“아니에요. 최 기자님 마음 이해합니다.”

-하하. 주민아 쪽도 알아봐야겠네요. 뭔가 연관이 있는지······.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부탁은 제가 항상 드려야 하는 거죠. 이번 드라마까지 잘되면 몇 번째 대박입니까?

최성준 기자가 무거웠던 분위기를 풀며 말했다.

“최 기자님까지 왜 그러세요.”

도욱이 가볍게 말하자 최성준 기자가 드라마 기대하겠다는 말을 건넸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도욱은 겨우 잠들 수 있었다.

***

[우주에서 온 연인, 첫 방송! 역대급 대작의 냄새가 난다!]

[왕희진 이렇게 연기를 잘했어? 왕희진의 화려한 복귀...]

[강도욱, 배우로도 눈도장 확실히 찍었다! 초능력을 쓰는 듯한 연기]

[시간을 멈춘 천민준, 시청자들의 채널도 멈췄다!]

[우주에서 온 연인, 천민준 씨 저의 연인도 되어 주세요 (포토)]

[드라마 리뷰 : <우주에서 온 연인> 새로운 로맨스 장르의 탄생]

[SVS 방송사, 오영지 작가 믿고 편성한 덕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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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률 고공 행진, <우주에서 온 연인> 인기 어디까지?]

[15%에서 35%까지! 2주 만에 대한민국 여심 휩쓴 우주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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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의 반응과 인기는 이미 예상을 뛰어 넘고 있었다.

이미 <우주에서 온 연인>이 잘될 것을 알고 있었던 도욱이었지만, 도욱의 예상과도 또 달랐다. 주인공이 바뀌고, 제목이 바뀌었으며, 1화의 설정이 바뀌었다.

그런 변화들이 더 큰 인기를 불러온 것이다. 시청률도 도욱이 원래 알고 있던 것보다 이미 더 높은 상태였다.

‘당시에도 국민적인 드라마이긴 했지만······.’

도욱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현재 드라마 촬영은 9화까지 진행된 상태였다. 다른 드라마에 비해 상황이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촬영 속도를 방송이 빠르게 따라잡는 것을 생각하면 여전히 촉박했다.

오영지 작가와 오영지 작가의 작업실 사람들은 이미 작업실 문 밖으로 발을 디딜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대본을 쓰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고 있었다.

10화 대본을 손에 쥔 채 도욱은 숙소에서 멤버들과 함께 4화 방송을 보았다.

박태형은 본가에 간 상태라 다른 나머지 멤버들만 한 자리씩 차지하고는 도욱의 드라마를 함께 시청했다.

2, 3화를 놓친 정윤기와 김원은 내용을 따라잡지 못하고 시청 도중 자꾸만 질문을 해서 안형서의 핀잔을 들었다.

“와, 진짜 대박이다. 다음 화 내용 어떻게 되는데. 나한테만 살짝 알려주면 안 돼?”

“형······. 진짜 알려주세요.”

4화가 끝난 후, 드라마의 팬이 된 안형서와 석지훈이 도욱을 졸랐다. 도욱은 알고 보면 재미없지 않겠냐며 답해주지 않고 있었다.

“세상에 너무해. 너 그거 대본 줘봐!”

안형서가 도욱이 쥔 대본을 빼앗으려 하자 정윤기가 한숨을 쉬며 안형서를 말렸다.

먼저 다음 내용 듣기를 포기한 석지훈이 오백호 실장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근데요 오 실장님. 시간이 늦었지만······. 떡볶이······. 먹으면 안 될까요?”

습관적으로 눈을 부라리던 오백호 실장도 잠시 말이 없었다.

<우주에서 온 연인>에서 왕희진은 슬플 때마다 떡볶이를 먹었다. 4회에선 도욱에게 고백을 했다가 차인 후 눈물을 흘리며 떡볶이를 먹는 장면이 나왔다. 슬퍼하면서도 너무나 맛있게 먹는 게 웃음 포인트였고, 왕희진이 너무나 먹는 연기를 잘했기 때문에 군침이 절로 나오는 장면이었다.

“하아······.”

잠시 고민하던 오백호 실장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석지훈은 신이 나 휴대폰으로 떡볶이 4인분과 순대, 튀김, 오뎅 등을 주문했다.

도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형은 안 드세요?”

“도욱이는 또 촬영 있잖아.”

석지훈의 물음에 오백호 실장이 대신 대답했다. 그 말에 석지훈이 잠시 떡볶이에 눈이 멀어 도욱의 생각을 못 했다는 것에 난처한 얼굴을 했다. 신나하던 멤버들도 당황한 눈빛이었다.

“어······. 형······.”

“괜찮아. 난 신경 쓰지 말고 먹어. 난 촬영장에서 소품으로 나온 거 많이 먹었어.”

도욱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자 그제야 석지훈이 안심한 기색을 내비쳤다.

“지금 바로 가나.”

정윤기가 물었을 때, 마침 도욱을 데리러 차를 가지고 온 남다우에게서 휴대폰이 울렸다. 답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멤버들이 도욱을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잘하고 오라고 배웅했다. 드라마를 재미있게 봐준 것만으로도 도욱은 이미 멤버들에게 고마웠다.

***

그 시각, 이미 퇴근을 하고도 남았어야 할 시간이었음에도 SVS 콘텐츠사업본부 사무실의 불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아암······. 계약서 수정 완료했어?”

콘텐츠사업본부 부장이 하품을 하며 담당자를 향해 물었다. 법무팀에서 차출되어 온 담당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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