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
태산이 높다 하되 (1)
***
도욱의 예상대로였다.
주민아와 도욱을 지나쳐 간 정이욱은 그대로 벤 안으로 들어갔다. 야외 촬영인 터라 따로 대기 공간이 없었고 주연급 배우들은 자신의 차를 대기실로 이용하고 있었다.
카페 앞에 주차된 벤으로 들어간 정이욱은 촬영 시간이 되어도 벤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직도야?”
도욱과 주민아는 카페 가장 안쪽 테이블에 각각 앉아 20분째 정이욱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철환 감독이 도욱 쪽의 눈치를 보며 조금 곤란한 말투로 물었다. 남자 조감독이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이 아직 안 잡히셨다고······.”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안철환 감독이 고개를 저었다.
카페 씬은 특별히 감정이 중요한 씬은 아니었다. 물론 매 씬이 중요했지만, 중요도도 떨어졌다. 자신의 비서인 주민아와 함께 카페를 찾은 정이욱이 커피를 마시고 있던 도욱과 스치듯 만나는 장면이었다.
안철환 감독은 자세를 풀며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한두 시간은 버티겠네.”
다른 테이블에서 대본을 보고 있는 도욱 쪽에는 들리지 않게 안철환 감독이 중얼거렸다.
“이유도 말 안 해줘?”
“네. 그냥 감정 안 잡히신다고만······.”
안철환 감독의 물음에 조감독이 답했다. 카메라 앞에 서지 않는 건 가끔 가다 기분이 상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으면 배우들이 쓰는 방법이었다.
안 감독이 직접 나서 정이욱을 불러내는 방법도 있겠으나 괜히 첫 촬영부터 감독과 배우 간에 기 싸움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적정선만 지키면 괜한 감정 싸움하지 않고 내버려두는 게 안철환 감독 나름의 촬영장 노하우였다.
한두 명이 한두 번 그러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안철환 감독도 봐줄 의향이 있었다.
“하긴, 배우님들 고매하신 기분을 어찌 알겠나.”
“하아······.”
“그래도 십오 분에 한 번씩은 가서 체크해라. 체크 안 해주면 그건 그거대로 삐지니까.”
“네······. 아까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스태프 중에 잘못한 사람은 없는 거지?”
“네. 곧바로 촬영장 이동하느라 말 섞은 사람도 없어요.”
“그럼 뭐 첫 촬영이니까 괜히 꼬라지 부리나 보네.”
안철환 감독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방송이 시작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 ‘꼬라지’를 부리는 것보단 낫다는 게 안 감독의 개인적인 생각이었다.
“주연은 따로 있는데 선배라고······. 아무튼 강도욱이 아직 순진해서 저러고 기다리지.”
다행이라면 도욱이 정이욱과 맞불을 놓을 스타일이 아니라는 것 또한 다행이었다.
조감독은 한숨을 쉬며 다른 스태프들에게 일단은 대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장비를 두고 저마다 앉을 자리를 찾아 앉거나 바닥에 쭈그리고 휴대폰을 하며 대기를 하는 스태프를 둘러보던 도욱의 입매가 내려갔다.
벌써 여러 번 화장을 고친 옆 테이블의 주민아가 눈치를 보며 도욱에게 말을 건넸다.
“저······. 저 때문인 거면 어떡해요? 제가 인사를······.”
주민아는 내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근데 설마 그거 하나 때문에······.”
속이 타는 모양인지 주민아는 앞에 놓인 물을 한 모금 홀짝였다. 컵에 진하게 립스틱 자국이 남았다.
대기를 하게 된 것 자체보다는 그 모든 원인이 자신이어서 감독이나 스태프들의 눈총을 받게 되는 게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손톱 끝을 깨무는 주민아를 보며 도욱은 찌푸렸다.
설사 주민아의 인사 순서가 잘못되어서 화가 난 것이라면 주민아를 혼내면 그만인 일이었다. 그러나 정이욱이 택한 방법은 자신이나 주민아와 같은 배우는 물론이고, 스태프 모두를 기다리게 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무슨 일이 있거나 연기 준비가 안 되어서 그러는 것이라면 도욱도 충분히 기다릴 수 있었다.
‘인사 때문만은 아니지.’
도욱은 생각했다 아까 전 촬영에서 도욱에게 보인 태도만 보아도 이건 주민아의 인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런 배우들이 더러 있다고는 들었지만······. 이게 그 기 싸움인 거군.’
촬영을 하는 동안에 여러 대립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감독과 배우, 작가와 배우, 감독과 작가, 배우와 배우 사이에서까지 다양한 대립각이 생길 수 있었다.
단순히 자신의 이익만이 아니라 작품에 대한 의견도 저마다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촬영 현장에서의 싸움은 대체로 촬영 스케줄을 어떻게 잡을지, 누가 더 반사판이나 조명 등의 배려를 많이 받을지, 연기에 대해 누구의 의견에 따를지 등 자신이 배려받고,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한 기 싸움이었다.
촬영장의 왕은 감독이라지만, 안철환 감독은 배우들에게 최대한 맞춰 주는 스타일이었다. 거기에 <우주에서 온 연인>에서 가장 최고의 위치는 톱스타인 동시에 연차도 가장 높은 왕희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지금 정이욱은 촬영 현장에서 왕희진을 제외하고는 자신이 가장 위라는 점을 고지하고 싶은 것이었다.
주연 배우이지만 연기 경력은 한참 후배인 도욱을 꺾고 들어가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도욱은 선배인 정이욱을 존중할 생각이었다. 때문에 촬영 스케줄을 짤 때도 당연히 가장 효율적인 스케줄이 나오기만을 기다렸지 도욱 선에서 무언가 특별대우를 요구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촬영에 지장을 준다면······.’
도욱은 정이욱을 찾아가 보겠다는 주민아를 말렸다.
이대로 정이욱에게 휩쓸려 정이욱이 촬영장의 왕이 되어 버린다면, 앞으로도 기분 상할 때마다 이렇게 제멋대로 할 게 뻔했다.
40분이 지났을 때 도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 앉아 졸고 있던 도욱의 전담 매니저이자 막내 매니저인 남다우가 놀라 눈을 떴다.
“어, 어디 가세요?”
남다우는 고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아르바이트를 하다 매니저가 된, 이제 갓 스무 살 청년이었다.
“정이욱 씨한테.”
도욱의 대답에 백곰과 같은 체격에 단추 구멍만 한 눈을 가진 남다우의 눈이 커졌다.
오백호 실장이 경험 없는 남다우에게도 전담을 맡길 수 있을 만큼 도욱은 돌발 행동도 사고도 없는 연예인이었다. 오히려 도욱과 함께 다니면 관계자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현장에 대해 남다우가 많이 배울 수 있을 거라는 판단하에 남다우를 도욱에게 붙인 것이었다.
실제로 지난 Coco 화보 촬영 스케줄 때부터 함께해 온 도욱은 오백호 실장의 말 그대로였다. 남다우가 배울 일들뿐이었고, 신체적인 가드를 해주는 일 외에는 매니저로서 할 일이 없는 수준이었다.
정이욱 때문에 촬영이 대기 중인 상황에서 정이욱에게 간다는 이야기는 도욱의 표정을 보나 상황으로 보나 좋은 말을 하러 가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 정도는 남다우도 알 수 있었다.
“어, 형······.”
“괜찮아. 혼자 다녀올게.”
도욱은 그렇게 말하곤 걸음을 옮겼다. 남다우는 얼른 휴대폰을 들어 오백호 실장에게 연락했다. 모르겠으면 고민도 하지 말고 자신에게 연락하라는 오백호 실장의 가르침대로였다.
정이욱이 탄 벤의 운전석 문을 두드리자 창문이 열리며 정이욱의 매니저가 얼굴을 드러냈다. 조감독인 줄 알았던 정이욱의 매니저는 도욱이 직접 찾아오자 조금 당황한 모양새였다.
“잠깐 선배님이랑 할 말 있는데 자리 좀 비켜줄 수 있어요?”
여전히 예의 바른 어투였지만 평소 도욱의 낮은 목소리와는 비교가 되는 목소리였다. 매니저는 뒷좌석에 앉은 정이욱을 쳐다보았다.
정이욱이 손가락을 까딱하자 매니저는 얼른 운전석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다.
도욱은 뒷문을 열고 들어가 정이욱의 맞은편에 앉았다.
“뭐야? 안 그래도 집중 안 되는데 방해하러 온 거야?”
둘밖에 없는 벤 안. 정이욱은 아예 대놓고 시비를 거는 듯한 반말이었다. 도욱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유치한 기 싸움을 벌이는 사람에게까지 선배 대접을 해 줄 마음은 없었다.
“연기를 못 하시겠으면 배우를 하지 마셔야죠.”
“뭐?!”
정이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도욱이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건 정이욱의 예상 밖이었다.
도욱의 이미지는 바른 청년의 이미지였다. 거기에 아이돌. 이미지 관리가 다른 배우들보다도 중요했다. 그러니 거리 씬에서도 아무 말 않고 넘어간 것이라 정이욱은 생각했다.
새파랗게 어린 자식이 아이돌이라고 인기를 등에 업고 주연을 한 것도 못마땅했던 차였다.
안철환 감독의 예상대로 정이욱은 두 시간 정도 벤 안에서 휴식을 취하다 나갈 생각이었다. 그러면 다들 정이욱의 눈치를 보게 될 테고 그렇게 촬영 현장은 정이욱의 비위를 맞추는 데 최선을 다할 터였다.
“저나 수많은 스태프들이 선배님 하나 때문에 이렇게 대기하고 있을 이유를 저는 모르겠습니다. 선배님이 뭐라고.”
“말하는 싸가지 봐라? 너 다 가식이었구나? 모르겠으면 가. 촬영 접고 가면 될 거 아냐.”
“아······. 그럴 순 없죠. 그럼 선배님이 감정이 안 잡히셔서 무한 대기 중이라 힘들다······. 뭐 이런 글 제 SNS에 올려도 되겠습니까?”
“뭐?”
“솔직한 제 심정을 개인 SNS에 올리는 것 정도는 괜찮겠죠?”
정이욱의 표정이 아주 황당하다는 듯 구겨졌다. 간혹 감독이나 배우가 촬영 현장에서 배짱을 부려도 웬만해서는 소문이 나지 않는 것은 다 한 배를 탄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일로 작품이 구설수에 올라 봐야 도욱 스스로에게도 좋을 일이 없었다. 도욱이 나서서 SNS에 글을 올려 분란을 만든다고 하니 정이욱으로선 황당했다.
“올려, 올려! 해 보자는 거야? 인기 있다고 까불어? 그거 올려서 나 욕먹으면 넌 욕 안 먹을 줄 알아? 너도 똑같은 사람 되는 거야!”
“알아요. 그래도 앞으로 작품 하는 내내 선배님 기다리느라 애 쓰느니 욕먹고 말죠, 뭐. 선배님도 욕 한번 드시고 나면 지금처럼 벤 안에는 못 있으실 테고.”
도욱의 말에 정이욱은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한 줄로만 알았던 도욱이 의외로 강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자식이?!”
“못 할 것 같습니까?”
도욱이 주머니에서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관심은 도욱 쪽에 쏠리겠지만, 어쨌든 정이욱도 잃는 게 많아질 것이었다. 관계자들은 뻔히 이 상황을 알 텐데 후배에게 기나 세우겠다고 촬영 현장 분위기를 망친 자신의 모양새가 우스워질 것은 뻔했다.
정이욱이 머뭇거리자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도욱이 진지하게 말했다.
“선배님.”
조금 껄렁하던 말투는 다시 도욱 본래의 말투가 되어 있었다. 도욱이 자신을 부르자 정이욱이 씩씩거리며 도욱을 보았다.
“저 선배님이 출연하신 영화 <다이어리> 봤습니다. 선배님 연기하시는 모습 보면서 저도 선배님 같은 연기 한번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정말 멋졌어요.”
영화 <다이어리>는 처음으로 정이욱이 주연으로 출연했던 영화였다. 엉성한 시나리오 덕에 영화는 흥행에서 참패했고, 정이욱은 다시 조연급 배우가 되었다.
도욱은 <우주에서 온 연인>이 성공을 거두게 된다면 도욱 자신만이 아니라 정이욱 또한 큰 인기를 얻게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전에 정이욱이 작품 속에서의 역할처럼 정말 ‘멋진 사람’이 되길 진심으로 바랐다.
“······너 나 가지고 노냐?”
“이 작품 끝나고도 멋진 선배님으로 남아주세요. 부탁드립니다.”
“······.”
정이욱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도욱은 벤 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 5분도 되지 않아 정이욱은 기다리게 해드려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벤 안에서 나왔다.
도욱이 벤에 찾아간 것을 아는 스태프들은 정이욱이 오히려 기 싸움에서 패배했음을 알았다. 오백호 실장에게 전화를 넣고 안철환 감독과 상의를 하고 있던 남다우는 너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오히려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안철환 감독은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주연 배우면 저 정도 배포는 있어야지.”
도욱의 ‘깡’ 있는 모습이 퍽 안철환 감독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
무사히 촬영을 마치고, 정이욱은 가장 빠르게 촬영장을 벗어났다.
도욱은 그런 정이욱에게 깍듯이 인사했고, 정이욱은 조금 질린다는 표정을 짓고는 벤에 올라탔다.
도욱도 남다우와 함께 차에 올라타려던 때였다. 주민아가 헐레벌떡 도욱 쪽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도욱 씨!”
도욱이 돌아보자 주민아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정이욱 선배님께 잘 말씀해 주신 거~ 도욱 씨죠?”
“아닙니다. 다른 얘기를 나눴던 것뿐입니다.”
도욱은 주민아가 다른 오해를 하지 않게 얼른 부인했지만 주민아는 눈을 찡긋거리며 도욱에게 살랑거렸다. 주민아가 가까이 다가오자 깊게 패인 V넥 안으로 속살이 너무 적나라하게 보였다. 도욱은 시선을 피했다.
“고마워서 밥 한 끼 사고 싶은데 언제 시간 괜찮아요?”
인사보다는 밥이 더 목적인 듯했다. 도욱이 당연하게 거절하려던 그때, 주민아의 휴대폰이 울렸다. 주민아는 양해를 구하고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서중원 본부장님]
휴대폰을 보는 도욱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엇. 아, 도욱 씨 나중에 꼭 밥 한번 먹어요. 저는 그럼······.”
주민아가 황급히 도욱에게 인사하며 뒤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