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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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욱은 도욱의 손을 잡지 않은 채 고개만 까닥여 도욱의 인사를 받았다. 도욱은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자연스럽게 손을 빼며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세트장에서의 촬영이었다면 한마디쯤 더 해 보았을 텐데 야외 촬영이었기 때문에 보조 출연자를 비롯한 구경꾼들이 많이 몰려 있었다. 괜한 잡음은 내지 않는 게 좋았다.
다만 지난번 대본 리딩 당시만 해도 정이욱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도욱의 인사를 받아주었었다.
대본 리딩 당시만 해도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물론 도욱이 껄끄러워하는 주민아도 현장에 있었지만, 배우 자체가 껄끄러운 것이 아니라 그녀의 소속사가 아라 엔터라는 것이 불편한 것뿐이었다.
거기에 대본 리딩 후 제작발표회 현장에서도 도욱을 ‘후배님’이라고 칭하며 후배님이 연기를 정말 잘하는 것 같다고 기자들 앞에서 칭찬했던 정이욱이었다.
그런데 막상 촬영 현장에 오니 싸한 분위기의 정이욱에 도욱은 무슨 일인지 감을 잡기 힘들었다.
제작발표회 후 따로 연락을 한 적도, 만난 적도 없었기 때문에 그사이 정이욱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생긴 것인지 아니면 오늘 기분이 나쁜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도욱이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 것은 도욱을 스쳐 지나간 정이욱이 너무나 웃는 얼굴로 왕희진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술 취한 분장하신 거예요, 누나?”
“누나? 아니, 누나라고 부르지 말랬지!”
“하하. 알겠어요. 선배님.”
“아니, 선배님도 안 돼! 희진 씨라고 불러.”
“제가 선배님 이름을 감히······.”
“이게 진짜.”
왕희진이 밉지 않게 정이욱을 흘겼다. 5년 전쯤 같은 드라마에 출연해 친분이 있는 두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 배우이긴 했지만, 왕희진이 빠른 년생이어서 정이욱이 누나라고 부르며 장난을 치는 듯했다.
‘흐음······.’
도욱은 그런 정이욱에게 한 번 시선을 주고는 이내 자신의 대사들을 머릿속으로 플레이하며 촬영을 준비했다.
촬영이 시작되자 정이욱과 떠들던 왕희진도 무섭게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번 <우주에서 온 연인>에 대한 부담은 확실히 도욱도 도욱이었지만, 왕희진에게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왕희진은 어떻게든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며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 덕분인지 바쁜 촬영 속에서도 왕희진의 미모는 나날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결혼 전 전성기 때보다 오히려 더 빛이 나는 듯했다.
왕희진이 술 취한 척을 하며 비틀거리고, 사람들이 몰려든다.
보조 출연자가 한 번 대사였던 ‘한송희다’를 어색하게 말하는 바람에 NG가 났지만, 왕희진의 술에 취한 연기는 진짜 소주 냄새가 날 것처럼 리얼했다. 안철환 감독이 만족스러워하며 OK 사인을 보냈다.
다음은 도욱이 왕희진의 매니저 역할을 하는 장면이었다.
도욱과 왕희진은 이미 1, 2회 촬영을 하며 호흡을 완벽하게 맞춘 상태였다. 왕희진은 도욱이 드라마 촬영 경험이 얼마 없음에도 불구하고 웬만한 경험자들보다 능숙하게 연기를 맞춰줄 줄 안다며 무척이나 뿌듯해했다.
왕희진은 이미 도욱과 첫 번째 만남에서 도욱에 대한 호감을 느낀 상태였다. 그런 데다 도욱이 촬영 현장에서까지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도욱에 대한 신뢰는 이미 상당했다.
두 사람은 완벽한 호흡으로 NG 한 번 내지 않고 해당 장면을 마쳤다. 바스트 샷도, 클로즈업 샷도 동선이나 손가락의 움직임, 표정 모든 것이 완벽했다.
심지어 도욱이 약간의 초능력을 쓰는 장면도 있었는데, CG를 입히지 않은 상태라 손가락만 허공에 대고 움직이는 무척이나 연기하기 우스꽝스러울 수 있는 장면조차 도욱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마치 정말로 초능력을 쓰는 사람처럼 연기해내고 있었다.
컷, 컷, 컷―!
‘컷’ 소리를 내는 안철환 감독의 목소리가 경쾌하게 현장을 울려 퍼졌다.
도욱은 컷 소리를 들으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도욱은 ‘실장’이라는 극중 역할에 걸맞게 회사원들이 입을 법한 셔츠에 정장 바지,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다. 가을 햇살 아래에서 입고 있기엔 약간 더운 감이 있었다.
“좋았어, 좋았어! 해 떨어지기 전에 다 찍을 수 있겠어!”
안철환 감독이 다음 장면에 들어가기 전 기분 좋게 말했다. 촬영이 일찍 끝날수록 좋은 건 일당을 받은 스태프들도 마찬가지였다. 보조출연자들과 구경꾼들도 저마다 모여서 왕희진과 도욱의 외모와 연기를 칭찬하기 바빴다.
이어 정이욱의 등장 씬이었다. 정이욱이 왕희진을 사람 없는 쪽으로 데려가는 도욱을 제지하는 장면이었다.
“송희야?! 한송희! 그렇게 혼자 나가면 위험······.”
성큼성큼 다가오는 정이욱의 모습은 흡하 모델 런웨이를 방불케 했다. 재벌 3세 역에 맞춰 명품으로 온몸을 도배해 놓아 더 그렇게 느껴졌다.
조연 배우였지만 잘생긴 외모로 많은 사람들의 호감을 얻은 배우답게 도욱과 한 화면에 잡혔을 때도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오히려 두 사람이 한 컷에 잡히자 모니터링을 하고 있던 여자 조연출이 감탄했을 정도였다.
왕희진 쪽으로 다가와 비틀거리는 왕희진을 붙잡던 정이욱이 도욱을 발견하고는 날을 세웠다.
“당신 뭐야? 뭔데 송희 옆에서!”
“그러는 그쪽은 뭡니까.”
도욱이 기분 나쁘다는 듯 눈썹을 치켜 올리자 정이욱의 표정일 구겨졌다.
“그 손 못 놔?!”
“놔도 제가 놓고 싶을 때 놓겠습니다.”
“아니, 그게······. 아, 머리 아파. 조용히 좀 해에······.”
왕희진은 취한 상황이라 머리가 아프다고 딴소리였다. 딱딱한 도욱의 목소리에 더 열이 받은 듯 구겨지던 정이욱이 왕희진의 손목을 붙잡고 있는 도욱의 어깨를 밀어냈다.
“윽―!”
무방비 상태였던 도욱이 밀려나자 두 사람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컷! NG!”
안철환 감독이 NG 사인을 보냈다.
안 감독의 사인에 연기를 하고 있던 세 사람이 힘을 풀고 감독 쪽을 바라보았다.
“도욱 씨, 좋았는데 그, 너무 과장된 것 같아.”
안 감독의 말에 도욱이 끄덕였다. 크게 밀치는 상황이 아니라 살짝 밀치면 왕희진의 손목을 놓칠 만큼만 밀려나면 되는 상황이었다. 아슬아슬하게 놓치는 손목이 영상에서의 포인트였다. 그런데 도욱이 너무 크게 오디오에 잡힐 만큼 아파하는 신음을 냈던 것이다.
“네가 너무 세게 민 거 아냐?”
왕희진이 정이욱에게 농담처럼 물었다. 정이욱이 예의 그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으며 부드러운 말투로 답했다.
“어? 그럴 리가. 누나도 참. 도욱 씨 아팠어요?”
눈웃음까지 지으며 물어오는 정이욱에 도욱은 멍하니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사실 소리를 낸 건 연기가 아니었다. 가볍게 미는 척하면서 정이욱은 무척이나 세게 도욱을 밀쳤다. 그야말로 예상치 못한 힘에 도욱은 아픔을 느끼고 표정을 구긴 것이었다.
도욱이 답을 미루는 사이 촬영이 재개되었다.
“······!”
혹시 이번에도 그럴까 싶었는데 역시나였다. 의도적이었다.
이번에는 미리 생각해두었기 때문에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반사적으로 어쩔 수 없이 얼굴이 일그러졌던 것이다.
‘대체 왜······.’
도욱은 속으로 생각하며 안철환 감독에게 피드백을 들었다. 안철환 감독은 여태 잘해오던 도욱이 별로 어렵지도 않은 부분에서 NG를 내자 의아하다는 반응이었다.
“도욱 씨, 이번에도 조금 과해. 캐릭터가 그렇게 감정이 큰 캐릭터가 아니라서······.”
“네. 조심하겠습니다.”
“그래요. 더 살살 밀기도 힘들다구!”
안철환 감독은 기분 나쁘지 않게 농담을 덧붙였다. 정이욱이 도욱을 미는 모습은 겉보기에는 전혀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기 때문에 도욱이 진짜로 아프다는 생각은 잘하지 못하는 듯했다.
왕희진이 이 정도 NG는 괜찮다는 듯 도욱에게 눈짓하고는 잠시 선 채로 코디에게 얼굴을 맡긴 채 수정 화장을 받았다.
도욱은 앞에 선 정이욱을 보았다. 정이욱의 표정은 평범했다. 도욱을 세게 밀치고 있는 이라고는 상상 못 할 평온함이었다.
“찡그린다고 다 연기가 아니잖아? 섬세하게 표현을 해야지.”
정이욱이 조용한 목소리로 도욱에게 조언했다. 조언이라고 하지만 현재 상황에서는 시비나 다름없었다. 도욱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이유는 알기 힘들었지만 일부러 도욱을 자극하고 있었다. 사람 많은 촬영 현장에서 안 좋은 이야기가 나오면 손해는 인기 많은 도욱이 더 크게 입을 게 뻔했다.
거기에 상대는 나이 많은 연기자 선배에, 조연이었다. 공경해야 할 위치에 있으면서도 대중들의 시선에는 약자로 비쳐지기 쉬웠다.
촬영이 끝나고 정이욱과 이야기를 나누든 단판을 짓든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도욱은 정이욱에게서 시선을 뗐다.
몇 번의 NG 끝에 해당 씬 촬영은 끝이 났다.
“수고하셨습니다!”
도욱이 허리 숙여 인사하자 촬영 장비들을 정리하던 스태프들도 도욱에게 수고 했다는 말을 건넸다.
다음 촬영은 거리 바로 앞의 카페에서 이루어지는 촬영이었다.
카페는 도욱이 새로 CF를 찍게 될 프랜차이즈 카페의 지점 중 하나였다. 국내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인 ‘봉주르’는 <우주에서 온 연인> 제작 지원을 하는 동시 도욱을 모델로 발탁했다.
카페 씬은 왕희진의 촬영 분량이 없었기 때문에 왕희진은 거리 씬이 끝나자 벤을 타고 돌아갔다. 카페 씬은 도욱과 정이욱, 그리고 서브 여자주인공 역할인 주민아 셋의 촬영이었다.
주민아는 정이욱의 비서로 <우주에서 온 연인>에 출연하게 되었다. 정이욱을 좋아해 왕희진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역할이기도 했다.
근처에서 대기하다가 거리 씬 촬영이 끝나간다는 소식에 카페 쪽으로 온 주민아가 벤에서 내리자마자 안철환 감독에게로 돌진했다.
“감독니이이임~!”
“어어, 우리 민아 씨 왔어?”
안철환 감독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도욱은 주민아와 이미 ‘준비하라 1999’ 촬영을 하며 연기 호흡을 맞춰본 적 있었다. 아라 엔터테인먼트 소속 연예인이라 도욱 개인적으로 경계하는 대상이긴 했지만, 당시에도 주민아는 밝고 붙임성 좋은 성격으로 감독이나 특히 나이 많은 남자 배우들의 예쁨을 받았었다.
“안녕하세요~ 조감독님!”
애교 섞인 말투로 안철환 감독 옆에 있던 남자 조감독에게 주민아가 인사하자 조감독이 얼굴을 붉히며 인사를 받았다.
‘준비하라 1999’ 때보다 주민아의 미모는 더 물이 오른 상태였다. 가슴골이 보이도록 깊게 팬 V넥 셔츠에 짧은 정장 스커트, 살이 비치는 검은 스타킹에 하이힐까지 신은 모습이 무척이나 섹시했다.
연출진에게 인사한 후 주민아가 인사를 해 온 상대는 다름 아닌 도욱이었다.
“도욱 씨! 반가워요~!”
“아. 안녕하세요.”
주민아 역시 이번 촬영장에서는 처음이었다. 도욱이 주민아의 인사를 받자 주민아가 ‘준비하라 1999’ 때와 마찬가지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도욱과 친해지려 애썼다.
도욱은 적당히 주민아와 대화를 이어 나가면서도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했다.
“흠.”
뒤에서 주민아의 인사를 기다리던 정이욱이 헛기침을 했다. 도욱과 친해지려는 마음이 앞서 정이욱을 뒤늦게 발견한 주민아가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리고는 놀란 눈을 하고 정이욱에게 인사했다.
훨씬 더 선배인 정이욱을 두고 도욱에게 먼저 인사를 한 일은 예의에 맞는 일은 아니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정이욱은 차가운 눈으로 주민아를 내려다보곤 한마디 했다.
“덕분에. 별로.”
정이욱의 대답에 일순간 세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주민아가 웃어넘기려고 했지만 정이욱은 그대로 주민아를 지나쳐 자신의 벤으로 갔다. 주민아가 당황해하며 ‘선배님.’ 하고 불렀지만, 정이욱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도욱은 그 순간 정이욱의 속내를 완벽하게 파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