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슈퍼스타-172화 (172/225)

# 172

50X100X200 (1)

***

왕희진과의 만남은 청담동의 한 카페에서 비밀리에 성사되었다.

왕희진은 ‘외계에서 온 남친’ 출연을 고려 중일 뿐이었고, 도욱도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두 사람 모두 상당한 톱스타였다. 접점 없는 두 사람이 만났다는 것을 알면 당연히 ‘왜 만났는가’ 하는 기사가 나가게 될 것이었다.

미리 기사가 나면 화제는 되겠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만 내는 수가 있었다. 그 때문에 조심스럽게 접촉을 한 것인지 여배우를 만나는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도욱은 스캔들 걱정까지는 하지 않았다. 실제 나이로 8살이나 차이가 나는 데다 왕희진이 1년 전 결혼한 기혼자였기 때문이었다.

배우, 특히 여배우의 경우 결혼을 하게 되면 배역의 폭도 좁아지고, 로맨스나 멜로드라마 섭외가 거의 들어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 보니 아무리 잘나가던 왕희진이라고 해도 본격적인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섭외가 들어오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거기에 오영지 작가가 여자 주인공을 자신을 모델로 했다고 하니, 외계인이라는 난해한 설정에 SF 로맨스라는 장르가 마음에 걸림에도 단번에 거절하지 않고 검토 중인 것이었다.

확실히 오영지 작가가 쓴 여자 주인공은 왕희진, 그 자체였다. 너무나 사랑스러웠고, 통통 튀는 매력으로 가득해 왕희진 또한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는 역할이었다.

도욱이 직접 여주인공 역할을 제의받은 배우를 만나 얘기를 나눠보고 싶다고 하자 오영지 작가는 무척이나 놀라면서도 좋아했다.

결혼 후, 첫 복귀작. 무척이나 부담되고 그 부담만큼 신중할 수밖에 없는 왕희진을 도욱이 직접 설득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남자 배우가 캐스팅에 적극적으로 나서는데 싫어할 작가는 없었다.

그렇게 도욱과 왕희진, 두 사람은 따로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만날 수 있었다.

눈앞에 앉은 왕희진을 보고 도욱도 조금 놀란 게 사실이었다.

여태껏 많은 여자 연예인을 만나 왔지만 도욱이 정말로 예쁘다고 생각한 건 설레임 정도였다. 왕희진을 보고 있자니 ‘급’이 다르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 것도 같았다.

왕희진의 얼굴 뒤에서 그야말로 후광이 비치고 있었다. 화장기가 거의 없는 얼굴에 흰색 셔츠와 청스키니진을 입었을 뿐인데 감탄이 절로 나왔다. 움직이느라 긴 생머리가 흔들릴 때마다 어느 숲에서 청량한 기운의 바람이라도 부는 건가 싶은 착각이 일 정도였다.

그러나 감탄할 때가 아니었다.

왕희진과 인사를 나눈 후 도욱은 본격적으로 드라마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도욱이 왕희진을 설득하겠다고 나선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설득은 하나의 구실이었다.

왕희진이 드라마 출연을 주저하는 이유를 없애면서 동시에 오영지 작가와 보조작가 사이에 남은 논란의 씨앗을 제거할 방법이 도욱에게 있었다.

“…그 부분이 마음에 걸리셨군요. 저희 실장님도 처음엔 황당해하셨어요.”

“그쵸? 저희 소속사 식구들도 쫌 웃었어요. 역할은 너어무 맘에 드는데.”

왕희진이 커피를 홀짝이며 중얼거렸다. 도욱은 이해한다는 듯 미소 지었다.

왕희진은 도욱의 미소를 보고 눈썹을 올렸다. 무대를 하는 모습을 보긴 했지만, 막상 만나 보니 도욱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생각보다도 더 무게감이 있었다.

왕희진 입장에서는 자신보다 상당히 어린 배우였지만, 도욱과 작품을 같이하게 되면 안정감 있게 자신의 연기를 받아줄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칸에도 갔다 왔다더니…….’

왕희진은 매니저가 해준 얘기를 기억하곤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돌아가면 도욱의 연기를 찾아봐야겠다는 생각 또한 하고 있었다.

도욱은 왕희진이 자신을 만나기로 했을 때는 이미 반 넘게 출연을 확정 지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지 않고서는 완곡하게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니까요. 외계인……, 외계보다는 우주에서 온 남친이나……. 뭐 그러면 좀 나을 텐데요.”

“우주?”

도욱은 LIL과 함께 불렀던 ‘Call you the love’를 떠올리며 말했다. 왕희진이 도욱의 말을 곱씹으며 생각했다.

‘Call you the love’는 노래도 노래였지만 가사 자체로도 많은 사랑을 받았던 곡이었다. ‘Call you the love’의 가사 내용은 우주의 연인을 표현한 것이었다. 우주든 외계든 실은 다 같은 지구 밖을 칭하는 말이었다.

‘단어에 따라서 느낌이 완전히 달라지니까…….’

작사를 하며 생각했던 것이었다. 작곡 선생님이었지만, 작사를 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던 김숨에게서 배운 방법이기도 했다.

김숨은 유의어를 사용해서 여러 단어를 한자리에 넣어 보고 가장 분위기에 맞는 단어를 쓰라고 조언했었다.

오영지 작가는 자신이 만들어 낸 ‘외계인’ 설정에 무척이나 심취해 있는 상태여서 이런 세심한 부분은 놓친 것 같았다. 또는 ‘외계인’이 주는 기이함을 내세우고 싶었던 걸 수도 있었다.

“그러게요. 우주에서 온 남친이라고 하니까 좀…… 나은가? 나은 것 같기두 하네요.”

왕희진이 말하며 덧붙였다.

“하긴. 외계인이라고 안 하고 초능력자라고 하면 E.T 얼굴은 안 떠오르네요. 적어두.”

“하하. 저희 실장님도 E.T 떠올리셨대요.”

도욱의 말에 왕희진이 역시 다들 그럴 줄 알았다며 웃었다. 그러더니 문득 왕희진이 말했다.

“우주에서 온 애인은 어때요? 남친보단 애인이 더 어울리지 않나? 도욱 씨한테?”

“네? 아…… 좋은데요. 애인?”

“오 작가님 말로는 남친이 더 귀여워 보여서라고 했는데……. 도욱 씨한테는 안 어울리는 것 같아서 말해 봤어요.”

왕희진의 말에 도욱이 끄덕였다.

“좋은 것 같아요.”

도욱이 정말 마음에 드는 표현이라는 것을 티내며 좋은 것 같다고 몇 번이나 중얼거리자 의견을 낸 왕희진도 활짝 웃으며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매니저를 불렀다.

“최 실장, ‘우주에서 온 애인’ 어때? 그 드라마는 나 시켜줄래?”

“어엉?”

옆 테이블에 앉아 분위기 좋은 두 사람을 보며 선남선녀가 따로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왕희진의 매니저 최 실장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했다.

실장 직책을 달고 있지만 왕희진의 경력이 경력인 만큼 왕희진이 최 실장에게 지시를 하는 입장이었다.

회사에서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왕희진이 결정하면 별수 없이 ‘외계에서 온 남친’ 촬영에 들어가게 될 터였다. 왕희진 본인이 가장 그렇겠지만, 회사 또한 왕희진이 성공적으로 복귀하길 바랐다.

그렇다면 되도록 성공 가능성이 높은 쪽으로 작품을 만드는 것도 중요했다. 도욱 쪽에서 연락이 왔을 때 거절하지 않은 건 그러한 미래에 대한 계산까지 바탕에 깔려 있었다.

“으음……. 일단 외계 어쩌고 안 하니까 나은데요.”

“그치? 도욱 씨도 좋대. 나도 너어무 맘에 들어. 내가 오 작가님한테 한번 말을 해봐야겠어.”

분량이나 대사 한 줄, 간접 광고 씬, 의상 등……. 별거 아닌 일로도 대본을 고치라고 작가에게 전화를 넣는 배우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제목에 대해 의견을 내는 것 정도는 왕희진 정도의 배우라면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오영지 작가도 왕희진을 두고 대본을 쓴 만큼 왕희진 캐스팅을 위해서 그 정도는 물러날 수 있을 것이었다.

“인물도 외계인이라고 하지 말구 별에서 온 능력자, 뭐 이렇게 바꾸자고 하면 좋겠는데?”

왕희진은 사실 제목부터 마음에 걸렸었다며 도욱과 말해 보니 속이 다 시원하다고 좋아했다.

오래 배우 생활을 한 데다 기본적인 센스가 있는 터라 왕희진은 어떻게 하면 대중들에게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지 알고 있는 듯했다. 도욱은 말이 잘 통하는 배우라는 생각에 안도했다.

까탈스러울 것 같았지만, 말도 잘 통하고 알려진 대로 털털한 면이 많았다.

“최 실장, 대표님한테 연락 넣어봐.”

왕희진의 말에 최 실장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

“택배 왔습니다!”

이제 스물여섯이 된 김지영은 대학 졸업 후 드라마 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방송 아카데미에 들어갔다. 아카데미를 수료하고 처음 보조작가로서 일하게 된 곳이 오영지의 작업실이었다.

이미 오영지는 ‘넝쿨에 걸린 사랑’으로 이미 스타 작가의 반열에 올라서기 시작한 때였다. 기업으로 따지자면 30대 기업 안에 들어가는 기업에 입사하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의욕에 가득 차 있었다.

열심이었다.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보조작가의 운명이라는 것이 아무리 잘해 봐야 ‘보조’라는 것을 너무 빨리 깨달아 버렸다. 선배이자 동료였던 이미현은 오영지 작가조차도 이렇게 생활하다 지금의 메인 작가가 된 거고, 다 그런 거니 너무 상심하지 말라고 했지만, 현실과 꿈의 괴리 앞에서 김지영은 무너졌다.

오영지 작가로서는 당연한 일들이었을 테니 상심한 김지영을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김지영이 칭찬 좀 해줬더니 나태하고 게을러졌다고 생각했을 테고, 화가 난 것도 이해했다. 김지영 또한 고용된 입장에서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은 부분은 자신의 잘못이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사람인지라 자신의 입장이 더욱 와 닿았고, 노트북까지 내던진 오영지 작가에 대해서는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커져 갔다.

작업실을 떠나 고향 집으로 돌아와 방 안에 웅크리고 있다 보니 더욱 모든 일들이 분노할 거리였다.

오영지 작가가 대본이 잘 나오지 않자 삼 일 동안 밥을 먹지 않아 같이 사는 이미현과 김지영이 엄청나게 눈치를 보고 안절부절못하며 죽이든 주스든 뭐라도 드시라고 했던 일들조차도 분노의 거리가 되었다.

그때 김지영 앞으로 택배가 도착했다.

“택배 시킨 거 없는데…….”

중얼거리며 문을 열자 택배 기사가 이름을 확인했다.

“김지영 씨 되시죠?”

“네. 맞는데요.”

묵직한 상자를 건네받으면서도 김지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러다 뒤늦게 오영지 작가가 보낸 노트북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돈으로 보낸다고 하셨는데.”

오영지 작가는 김지영이 아이디어가 겨우 두 줄 정도 적힌, 빈 파일이나 마찬가지인 파일을 보내자 불같이 화를 내며 아무것도 든 것 없는 노트북은 가지고 있어서 뭐 하냐 소리치며 창밖으로 노트북을 내던져 버렸었다.

충격에 말을 못 잇는 김지영에게 조금 화를 가라앉힌 오영지 작가는 돈을 보내줄 테니 노트북은 그걸로 다시 사라는 말을 했었다.

띵똥, 그때 휴대폰으로 일백만 원이 입금되었다는 알림과 함께 오영지 작가의 이름이 떴다. 함께 오영지 작가에게서 그날 일은 미안했고 나중에 밥 한번 먹자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감정적인 부분을 누르고 생각해 보면 오영지 작가가 극악무도한 작가였던 것만은 아니었다. 이전부터 내려오던 메인과 보조 간 도제식 관계를 김지영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뿐.

“그럼 이건 뭐지…….”

김지영은 얼른 집으로 들어와 상자를 풀었다. 내용물은 최신형 노트북이었다. 김지영은 당황하며 보낸 이의 이름을 확인했다.

강도욱.

김지영은 자신의 부서진 노트북을 황망한 얼굴로 바라보던 도욱을 떠올렸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 제대로 인사도 못 했는데, 문득 부끄러워졌다. 노트북이 든 상자에는 짧은 메시지 카드가 동봉되어 있었다.

[김지영 작가님, 언젠가 좋은 작품으로 만나 뵙게 되길 기대합니다.]

“김지영 작가님…….”

자신에게 ‘작가님’이라고 해주었던 사람이 있었던가. 김지영은 어쩐지 눈가가 뜨끈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

[<우주에서 온 연인> 제작발표회 현장 - 여전히 상큼한 왕희진의 윙크]

[소행성 충돌로 지구에 온 강도욱? 능력자의 눈빛!]

[왕희진, 강도욱의 차기작 <우주에서 온 연인>은 어떤 작품?]

[오영지 작가, “왕희진 염두에 두고 집필. 강도욱은 하늘에서 떨어진 선물 같은 존재”]

[<우주에서 온 연인>, 과연 <넝쿨째 걸린 사랑>의 인기 넘어설 수 있을까?]

[우려 반, 기대 반! 국내 최초 SF로맨스 드라마..]

.

.

팬-마케팅팀 이대형 팀장은 오늘 오후 도욱이 참여했던 <우주에서 온 연인> 제작발표회 현장 관련 기사들을 모니터링했다.

왕희진과 강도욱의 만남, 거기에 오영지 작가의 새로운 도전이라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었다. 베스트는 잘되는 것이었지만, 조금 시청률이 안 나온다고 해도 도욱으로서는 잃을 것이 없다는 게 이대형 팀장의 생각이었다.

작가가 오영지였고, 여자 주인공이 도욱보다도 오래 톱스타였던 왕희진이었다. 도욱이 발연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드라마의 실패가 도욱의 탓이 될 경우는 없다고 볼 수 있었다.

‘그래도 잘되면 좋겠지……. 첫 방송이 언제더라…….’

기분 좋게 캘린더를 확인하며 드라마 관련 모니터링을 마친 이대형 팀장은 가요 쪽 기사들을 클릭했다. 힛 엔터 소속 가수 중 활동 중인 가수는 없었지만, 기본적으로 해두는 것이었다.

[맨투맨 또 1위했다! 상상 못 할 질주!]

[맨투맨 채은호, “저희 1위 했어요!” 맑게 웃는 모습 (사진)]

오늘 있었던 음악방송에서 맨투맨이 또 1위를 한 모양이었다. 무서운 기세로 치고 올라오고 있었다. 이대형 팀장은 새삼 서중원 본부장의 저력을 느꼈다.

그리고 그때 이대형 팀장의 메일에 알림음이 울렸다. 동시에 휴대폰 메시지가 수십 개 도착했다. 자리에 앉아있던 남효진이 벌떡 일어났다.

“팀장님! 이, 이 팀장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