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
순간의 선택 (4)
오백호 실장은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지지 않게 우선은 오영지 작가의 편을 들어주었다.
“작가님 마음이 많이 상하셨겠어요.”
물론 ‘잘못 걸린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오백호 실장의 머릿속에서는 떠오르고 있었다. 오영지 작가에 대한 업계의 평판은 평범한 편이었다. 작가들 중 종종 있는 기행을 일삼는 스타일도 아니라는 게 오백호 실장이 건너 들은 소문이었다.
‘노트북 던지는 것 정도는 기행에 끼지도 못하는 건가? 참나.’
오백호 실장은 생각했다. 차라리 지금 오영지 작가가 화난 얼굴이라도 하고 있으면 나을 것 같단 생각도 했다.
오영지 작가는 방금 전 노트북을 던진 사람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친절하게 도욱과 오백호 실장을 대하고 있었다. 모르면 모를까 그게 더 사람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겠다는 느낌이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나저나 도욱 씨는 이강연 선생이랑은 어떻게 인연이 있으세요?”
“입시 연기 지도를 받았었습니다. 현재도 도움 주시고 계시고요.”
“어머, 그렇구나. 연기과에 진학했어요? 도욱 씨 가수라······, 의외네. 어느 학교인지 물어봐도 돼요?”
“아, 대한예술종합학교요.”
“정말?! 저도 그 학교 나왔는데. 물론 과는 다르겠지만.”
“아! 몰랐어요. 선배님이셨군요.”
‘외계에서 온 남친’ 작품을 하기로 선택한 이상 오영지 작가와는 좋은 관계를 쌓을수록 좋았다. 때마침 학교도 같다고 하니 도욱도 반가운 표정으로 답했다.
“우리 미현이, 아, 우리 보조작가도 대예종 나왔어요. 미현아!”
“하하, 이거 저도 그 대학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요.”
오백호 실장이 너스레를 떨었다. 오영지 작가가 ‘미현이’라는 사람을 부르자 방 안에 들어가 있던 뿔테 안경을 쓴 보조작가가 나왔다. 보조작가는 통화 중이었는지 손에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선생님?”
“아니, 너도 정식으로 도욱 씨랑 인사 좀 하라고······.”
“네에······. 근데 선생님, 전화 받아보셔야 할 것 같은데.”
“응? 무슨 전환데? 지금 손님도 오셨는데 나중에 해야지.”
미현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지금 받으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어쩔 수 없이 오영지 작가가 실례한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휴대전화를 건네 받았다.
오영지 작가가 방 안으로 들어가고 나자 남은 건 미현과 도욱, 오백호 실장이었다. 미현은 도욱과 눈이 마주치자 어색한 듯 시선을 피했다.
“작가님도 잠시 앉아 계세요.”
“아, 괜찮은데······. 그럼······.”
미현이 쭈뼛거리며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잠시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오백호 실장이 물었다.
“전화가 길어지나 보네요.”
“그게······. 저희 여자 주인공 쪽 매니저한테 전화가 온 거라서······.”
미현의 대답에 오백호 실장이 이해한다는 듯 끄덕였다. 여자 주인공 자리는 도욱에게도 중요한 일이었다. 여자 주인공이 중심적으로 극을 이끌어 나가야 하는 만큼 연기력 뛰어난 톱스타가 아니면 극이 살기 힘들었다.
‘원래대로라면 왕희진일 텐데······.’
도욱은 왕희진을 떠올렸다. 고등학생 때부터 20대 후반까지 단 한 번도 톱의 자리에서 내려온 적 없는 미모의 여배우였다. 연기력에 대한 논란은 왕왕 있어 왔지만, 그러한 논란을 잠식시켜 버릴 만한 미모와 매력이 그녀에게는 있었다.
‘여자 주인공 역할은 왕희진이 아니면 생각하기 힘들 정도다.’
도욱은 조금 걱정스러웠다. 남자 주인공 배역이 자신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여자 주인공 역할도 바뀔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미 한 번 이 드라마에 출연한 왕희진의 연기를 본 적 있는 이상, 도욱은 반드시 여자 주인공 역할을 왕희진이 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당장 도욱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일단 도욱은 현재 논의 중인 여자 주인공이 누군지도 알지 못하는 상태인 게 맞았다.
그것보다 먼저 오영지 작가와 아까 전 보조작가의 일에 대해서 물을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욱은 열릴 기색 없는 방문 쪽을 흘끗 보고는 미현에게 물었다.
***
오영지 작가와의 미팅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숙소는 조용했다.
석지훈을 제외한 멤버들이 모두 각자의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러 나간 상태였다. 평소 숙소에서 조용히 영화를 보는 것으로 휴식을 하던 박태형마저도 오늘은 약속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형 오셨어요?”
“넌 안 나갔어?”
도욱이 묻자 석지훈이 다용도실에서 캐리어를 꺼내며 대답했다.
“내일 촬영 있어서요. 짐도 싸고, 컨디션 관리도 하려고요.”
‘캠핑 48시간’ 촬영을 말하는 것이었다. 석지훈은 작년 KVS 예능대상에서 신인상을 받았을 만큼 ‘캠핑 48시간’에서 활약 중이었다. 물론 웃기는 걸 전문으로 하는 직업은 아니니 분량이 적을 때도 있었지만, 늘 평타 이상은 간다는 게 네티즌들의 ‘캠핑 48시간’ 내 석지훈에 대한 평가였다.
석지훈의 대답에 도욱이 흐뭇하게 웃었다. 처음에는 삼촌이 조카를 바라보는 정도의 시선 차이가 있었는데 현재는 형으로서 팀의 막내를 보는 마음이 되어 있었다.
도욱이 ‘강도욱’으로서의 삶에 적응한 것도 있었고, 석지훈을 비롯한 멤버들이 저마다 나이를 먹고 경험을 쌓으며 성장한 것도 큰 이유였다.
케이케이가 활동을 접은 이때, 김원과 정윤기는 오케이 유닛 디지털 음원 발표를 위해 준비 중이었고, 안형서는 밀려드는 OST 요청을 받고 있었다. 석지훈은 ‘캠핑 48시간’에서 활약하며 종종 패션 프로그램에 패널로 출연할 예정이었다. 석지훈, 안형서, 박태형은 여행 예능 출연도 잡혀 있었다.
도욱에게도 예능 출연 섭외나 OST 요청 등이 물밀듯 밀려들고 있었지만 도욱은 모두 고사 중이었다. 짧은 휴식 사이에 연기 활동에 집중하기도 바빠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당분간 전 멤버가 함께할 일은 광고 촬영 정도가 전부일 듯했다.
석지훈은 보기만 해도 눈이 시린 형광 노란색의 캐리어를 거실에 펼쳐 두고 옷들을 차곡차곡 개어 정리하기 시작했다. 반팔 티셔츠들이 각이 잡힌 채 일렬종대 했다. 고개가 내저어질 만큼 빈틈없는 캐리어 정리였다.
그 모습을 보던 도욱이 물었다.
“이번에는 어디 멀리 가나 봐?”
평소보다 옷이 많은 것 같아서 물은 것이었다.
“아뇨. 이제 더워져서 계곡이나 바다에 많이 가더라고요. 입수시키고 하면 옷도 모자라고 해서.”
“아······.”
“덥긴 한데 그래도 겨울 촬영보단 나은 것 같아요. 물에 들어가도 시원하고.”
석지훈의 설명에 도욱이 기분 좋게 웃었다.
“형은 드라마 들어가면 바다 한 번 못 가고 여름 끝나는 거 아니에요?”
사람 좋게 웃는 도욱을 향해 석지훈이 안타깝다는 듯 물었다. 멤버들 모두 나름대로 바빴지만, 시간을 쪼개 쓰느라 가장 바쁜 건 역시 도욱이었다.
“뭐······. 촬영 중에 바다 가는 장면 없으려나?”
도욱의 대답에 석지훈은 조금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작가님 만나고 온 거죠? 어땠어요? 외계인이 실제로 있다고 믿어요? 좋은 분 같아요?”
석지훈 답지 않게 연달아 질문을 던졌다. 도욱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그런 거 아니야. 작가님은······.”
도욱은 오영지 작가에 대해 쉽게 정의내리지 못했다. 사람이 원래 한 가지 면만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다.
“좋았어. 잘해 주시고.”
“다행이네요.”
도욱은 석지훈에게 답하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럼에도 도욱은 오영지 작가가 어떤 사람 같냐고 물으면 좋은 사람 같다는 대답을 할 것이다. 친절하게 대해 주었고, 오백호 실장이 알아온 업계의 평판대로 그다지 모난 구석도 없어 보였다.
‘적어도 그 보조작가에겐 아닐지도.’
확실히 오영지 작가는 성격이 불같은 구석이 있었다. 화나면 앞뒤 재지 않고 분노를 표출하는 스타일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자신의 보조작가에게 했던 행동들을 오영지 작가 본인이 생각하기에 합당한 분노였다. 그렇기 때문에 도욱이나 오백호 실장에게도 솔직하게 제가 한 행동임을 밝혔던 것이다.
자신이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월급까지 주며 고용한 보조작가였다. 그 작가가 시킨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으니 업무 태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표출하는 방법이 과했던 것뿐이라는 입장도 맞았다.
도욱은 미현이라는 보조작가에게 들은 이야기를 통해 대충 이전에 일어났던 표절 시비가 어떻게 된 일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미현은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도욱의 질문에 답했다. 괜히 잘못 입을 놀렸다가는 노트북이 박살 난 보조작가처럼 화를 입을 수 있었다.
들어 보니 그 보조작가가 실제로 게으름을 피운 것은 맞는 듯했다. 미현은 ‘지영이가 요즘 조금 슬럼프였는지······.’라는 표현으로 에둘러 좋게 얘기하려 했지만 들어 보면 아이디어도 내지 않고, 시킨 자료 조사도 하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그렇게 된 이유에 대해 설명할 때 미현은 ‘아마도······.’라는 단서를 붙였다. 자신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미현은 단정 짓지 않고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미현의 설명에 믿음이 갔다.
그러면서도 미현은 어쩔 수 없이 보조작가 동료였던 지영을 두둔하느라 오영지 작가가 알리고 싶지 않아 할 사실까지도 도욱에게 털어놓았다.
방금 지영이 뛰쳐나갔으니 미현도 여러 가지로 혼란을 겪고 있는 게 분명했다.
미현의 설명에 의하면 ‘외계에서 온 남친’이라는 제목의 아이디어를 낸 것과 외계인인 남자 주인공이 조선에 떨어지게 된 이유가 ‘UFO 추락 사고’라는 설정은 지영이라는 보조작가의 아이디어였다. 추가로 여자 주인공의 과거에 대한 설정도 지영의 아이디어가 차용되었다.
오영지 작가 역시 지영을 무척이나 칭찬했다고 한다. 문제는 지영이었다. 오영지 작가가 지영에게서 얻은 아이디어를 자신이 생각해낸 것처럼 PD와 제작사에게 설명하는 것을 들은 지영이 허탈함을 느낀 것이었다.
보조작가이니 아이디어를 내는 것이 당연했고, 그 아이디어를 메인 작가인 오영지 작가가 쓰는 것도 문제될 게 없었다.
심지어는 자신이 생각한 것처럼 말해도 할 말이 없었다. 억울하지만, 그런 세계였다. 그것을 알았음에도 처음 보조작가를 해본 지영으로선 그런 지점에서 타격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아이디어를 전혀 내지 않게 된 거고······. 오영지 작가로선 화가 나 쫓아낼 수밖에 없었겠지. 쫓겨난 보조작가는 악의를 품고 참고 자료 등을 이용해 표절 시비를 제기했던 거고······.’
저절로 한숨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누가 완벽하게 잘못했다고 시시비비를 가리기도 도욱으로선 힘들었고, 그럴 입장도 아니었다. 도욱에게 중요한 건 자신이 출연할 작품이 구설수에 휘말리지 않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도욱은 휴대폰을 꺼내 오백호 실장에게 연락을 넣었다. 왕희진에게 연락하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