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
순간의 선택 (3)
다행히 추락하던 물체는 바닥이 아닌 아래층 발코니에 떨어졌다.
‘외계에서 온 남친’의 작가 오영지의 작업실은 서울 노원구에 위치한 2층짜리 단독 주택이었다. 보통 작가들이 사는 일산이나 여의도도 아니었고 강남 등 제작사들이 몰려 있는 서울 중심부와도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오영지 작가가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단독 주택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여의도, 일산 등지는 가격대가 너무 비쌌다. 1층은 보조작가들과 함께 작업하는 공간이었고, 2층은 오영지 작가의 거주지라고 볼 수 있었다.
어쨌든 그 2층 창문에서 떨어져 내린 물체는 1층 발코니 화단으로 처박혔다.
도욱과 오백호 실장이 놀란 얼굴로 그곳을 보았다.
화단에 처박힌 물체는 다름 아닌 노트북이었다.
“드······, 들어가도 되는 거냐.”
오백호 실장의 물음에 도욱도 대답할 수 없었다. 같은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약속은 분명 오늘이 맞았다. 5분 정도 일찍 도착하긴 했지만······. 5분 뒤, 정각에 올 걸 그랬다고 도욱과 오백호 실장은 생각했다. 아무튼 머리 위에 떨어지지 않은 것도 천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노트북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상상은 하기만 해도 끔찍했다. 오백호 실장도 같은 상상을 했는지 몸서리를 쳤다.
벨을 누를지 말지 더 고민할 것도 없이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도욱은 뒷걸음질 쳤다.
현관문을 열고 나온 건 단발머리의 여성이었다. 이십 대 후반 정도로 보였고, 반팔 티셔츠에 고무줄로 되어 있어 편안한 주름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등 뒤에는 커다란 백팩을 메고 있었다.
눈가가 울긋불긋한 것이 곧이라도 울 듯한 얼굴이었다.
“엇······.”
놀란 건 두 사람뿐 아니라 여성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놀란 얼굴을 하더니 눈이 마주치자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도욱도 반사적으로 인사를 하며 여자를 살폈다.
“그럼.”
여자는 인사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발코니 아래로 가 산산조각 난 노트북을 살폈다.
“하아······.”
깊은 한숨이 이어졌다. 한숨이 나올 만한 상황이긴 했다.
‘설마 떨어뜨린 건가?’
그렇게 도욱이 생각했을 때, 여자는 여러 갈래로 금이 간 노트북을 주워들었다. 키캡과 부서진 잔해가 흙바닥을 구르고 있었는데 그것까진 챙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도와주기라도 해야 하나 싶어 물끄러미 여자가 하는 행동을 보고 서 있는 두 사람을 향해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흠, 흠. 들어가세요. 선생님 보러 오신 거죠······? 안에 계세요.”
잠긴 목을 가다듬으며 여자가 겨우 말했다. 더 보고 있는 건 큰 실례가 될 것 같아 도욱은 얼른 대답하고는 열린 현관문 안으로 들어섰다.
현관문으로 들어서자 또 다른 여성이 깜짝 놀라며 나왔다. 이번에는 뿔테 안경을 쓰고 머리를 높게 묶은 여성이었다. 단발머리의 여자와 같이 20대 중후반 정도의 나이로 보였다.
“아, 안녕하세요! 오셨네요!”
“네, 안녕하세요.”
도욱이 꾸벅 인사를 하자 여성이 분주하게 주변을 둘러보고는 소파 쪽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두 사람이 소파에 앉자 여성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선생님은 지금 위층에 계셔서······. 자, 잠시만 기다리세요. 뭐 차라도······. 주스, 주스 드시겠어요?”
오백호 실장이 마침 잘되었다는 듯 뿔테 안경의 여성에게 사 들고 온 과일주스 세트를 건넸다. 여성이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주스를 받아들었다.
“저희는 물이면 될 것 같습니다.”
“아, 네. 잠시만요!”
오백호 실장의 말에 뿔테 안경 여자가 알겠다고 답하곤 후다닥 자리에서 벗어났다. 선생님이라고 하는 것을 보니 아까 전의 여자도, 뿔테 안경의 여자도 보조작가인 듯했다.
“분위기가 뒤숭숭하네.”
“그러게요.”
답하면서 도욱은 작업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TV, 소파, 냉장고 등이 평범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언뜻 보기엔 가정집 같기도 했지만, 열려 있는 큰 방 문 안으로 보이는 모습은 가정집의 것이 아니었다.
큰 방 안에는 커다란 작업용 책상이 놓여 있었고, 책상 위에는 A4 용지들이 두툼하게 쌓여 있었다. 노트북 세 대도 불이 켜진 채 돌아가는 중이었고, 화이트보드도 한편에 세워져 있었다.
‘작가의 작업 공간······.’
작가의 작업실에 온 것은 처음이라 신기한 기분으로 구경할 때였다. 한편으로는 아까 전 노트북과 단발머리 보조작가는 무슨 일이었던 건지 걱정스럽기도 했다.
뿔테 안경 보조작가가 내다 준 물을 한 모금 마셨을 때, 오영지 작가가 계단 아래로 내려왔다.
“어머, 안녕하세요! 여기까지 오시게 해서 정말 너무 죄송해요.”
오영지 작가의 꾀꼬리라고 해도 좋을 기분 좋은 목소리가 작업실을 울렸다.
“아닙니다. 저희가 작가님 찾아 봬야죠.”
오백호 실장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오영지 작가에게 인사했다. 도욱도 고개 숙여 인사하자 오영지 작가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머! 진짜 잘생겼네! 이렇게 봐서 너무 반가워요!”
“아, 저도 영광입니다. 작가님.”
“제가 영광이죠, 도욱 씨도 다 보구! 역시, 드라마 작가하길 잘했어. 이렇게 잘생긴 사람두 만나구 말이예요!”
오영지 작가의 말에 도욱과 오백호 실장도 편안한 마음으로 웃었다.
사실 작업실 문을 열기도 전 목격한 장면 때문에 무척이나 불안한 마음으로 대기하고 있던 두 사람이었다.
소녀같이 볼을 붉히며 말하는 오영지 작가는 자신의 이름으로 네 작품이나 한 경력 있는 작가였음에도 이제 갓 마흔을 넘긴 젊은 작가이기도 했다.
그녀는 보조작가 출신으로 서른 살 어린 나이에 입봉을 한 케이스였다. 입봉작 또한 공중파 월화 드라마였으므로 상당히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었다.
입봉작과 다음 작품까지 오영지 작가의 드라마는 승승장구한 편이었다. 주요 시청자들은 사오십 대 여성층이었다. 주부들을 겨냥한 로맨스가 잘 먹혀 들어간 것이었다.
그러던 재작년 말, 오영지 작가의 주 시청자가 주부들인 점을 알아본 방송사에서 그녀에게 주말드라마를 맡겼다.
주말드라마는 주 시청자의 나이대가 높은 만큼 작가들의 나이대도 꽤 높았다. 방송사로서는 나름 파격적인 선택이었고, 오영지 작가로서도 마찬가지였다.
드라마의 꽃은 미니시리즈라고 불렸다. 이름만 들어도 눈이 부신 것 같은 스타와 함께하는 월화드라마, 수목드라마와 달리 일일드라마나 주말드라마는 A급은 아닌 이들이 하는 드라마처럼 치부되어 왔었다. 배우든 작가든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고민하던 오영지 작가였지만, 고민 끝에 방송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오영지 작가를 입봉 시켜준 PD와의 의리를 저버릴 수 없었고, 원고료의 유혹도 있었다.
16에서 20부작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평일 드라마와는 달리 주말드라마는 50부작이 기본이었다. 대부분의 드라마 작가들은 회당 원고료를 받기 때문에 50회 원고료를 받으면 상당한 원고료를 받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오영지 작가의 첫 도전이었던 KVS 주말드라마 ‘넝쿨에 걸린 사랑’은 상상 이상의 큰 성공을 거두었다. 시청률 50퍼센트를 넘기고, 중장년층은 물론 젊은층에게도 사랑을 받으며 주말드라마를 재평가하게 만들었다.
다른 방송사에서도 앞다투어 실력 있는 젊은 작가들을 주말드라마나 일일드라마에 투입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였고, 실제로 투입된 작가들도 많았다.
그야말로 딸부터 엄마, 아들부터 아버지까지 즐겨볼 수 있는 국민 가족드라마를 써냈으니 오영지 작가의 기세가 상당했다. KVS에서는 다시금 주말드라마를 제안했으나 이번에는 오영지 작가 쪽에서 거절했다.
오영지 작가의 꿈은 역시나 평일 골든타임에 있었다.
‘넝쿨에 걸린 사랑’이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다고 하지만, 평일 황금시간대 드라마로 받는 사랑과는 종류가 다른 것이었다.
오영지 작가는 드라마의 꽃, 로맨틱코미디 분야에서도 이러한 사랑을 받아보고자 하는 욕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도 붙어 있었다.
그렇게 기획 및 집필 단계를 거쳐 나온 것이 ‘외계에서 온 남친’이었다.
‘외계인’이라는 독특한 설정 때문에 초반에는 오영지 작가가 소속되어 있던 제작사에서 반대가 있었지만, 오영지 작가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밀어붙였고, 결국 대본을 본 제작사 쪽에서 손을 들었다.
방송사의 경우에는 ‘캐스팅만 잘되면 고!’라는 분위기였다.
그렇다면 문제는 역시 캐스팅이었다. 로맨틱코미디는 캐스팅으로 반은 먹고 들어가는 부분이 있었다.
남자주인공의 캐릭터는 ‘잘생김’과 ‘멋짐’이 기본이었다. 그것을 표현해내는 건 연기력으로도 안 되는 부분이 있었고, 그 조건을 충족하는, ‘외계인’이라는 설정까지 무력화시킬 연기까지 잘하는 배우는 굉장히 한정적이었다.
게다가 또 하나의 문제는 여자 주인공과의 분량 문제였다. 주로 남자 배우가 중심이 되는 다른 드라마들과 달리 ‘외계에서 온 남친’은 제목과는 달리 중심축이 여자 주인공에게 가 있었다.
그러니 외계인이라는 소재의 벽을 넘는다고 하더라도 톱클래스 남배우들은 여배우에게 밀리는 게 싫어서 캐스팅을 고사했다. 당연하게도 오영지 작가가 처음 생각했던 배우 또한 거절이었다.
그렇다고 급을 아예 낮추는 건 말도 안 된다는 게 오영지 작가의 입장이었다. 그때 구세주처럼 나타난 게 도욱이었다.
도욱은 드라마 연기자로서 톱클래스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톱의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에 절대 밀리는 캐스팅이 아니었다.
방송국에서도 이 정도 캐스팅이면 분명히 오케이할 거라고 오영지 작가는 생각했다.
‘아직 여자 주인공 역할 배우가 명확히 답을 내려주지 않았지만······. 뭐, 강도욱 정도가 캐스팅됐다고 하면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겠지?’
오영지 작가는 웃으며 생각했다.
“아······. 그럼 여자 주인공은 아직 확정이 아닌 거군요.”
“네. 얘기를 나누고는 있는데. 그쪽에서도 외계인 설정이 걸리나 봐요. 외계인을 사랑하는 게 말이 되는가 싶다나.”
오영지 작가도 이해는 한다는 듯 끄덕였다. 그나마 그런 제약 속에서도 톱 중의 톱인 여자배우가 긍정적인 검토를 하고 있는 건 여자 쪽에 확실히 관심이 쏠릴 드라마라는 걸 그쪽에서도 알고 있어서였다.
도욱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작가님. 말만 외계인이지 돈도, 능력도, 초능력까지도 있는 남자인 거잖아요. 그런 남자에게 사랑에 빠지는 건 당연한 건데요.”
“어머, 역시. 내 대본 잘 봐주었군요. 고마워요.”
오영지 작가는 특별히 성격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 보였고, 모난 구석도 없어 보였다. 편안한 분위기가 계속되자 도욱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눈가가 울긋불긋하던 단발머리의 여성이 내심 계속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저······. 아까 노트북이 떨어지는 걸 봤는데······. 실수로 떨어뜨리셨나 봐요.”
“어머, 그거 봤구나. 놀랐죠? 놀랐겠다. 미안해요.”
“아니,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실수 아니에요. 제가 떨어뜨렸어요. 아니, 던져버렸다고 해야 하나?”
흘러내린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조용히 말하는 오영지 작가에 오백호 실장과 도욱은 멈칫했다.
“아니, 내가 너무 화가 나면 가끔 이성을 잃어서. 내 보조작가였던 앤데 아이디어를 써 오랬더니 엉망으로 써오잖아요. 벌써 몇 번째예요. 일을 하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아······.”
“이럴 거면 일하지 말라고 던져 버렸어요. 호호, 신경 쓰지 마세요. 처음에 제목 아이디어 좀 냈다고 유세를 부리는지. 아무튼 요즘 애들 금세 빠져 가지구······.”
오영지 작가가 고개를 저었다.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도욱의 눈이 커졌다. 그 순간, 이전에 있었던 ‘외계에서 온 남친’의 표절 논란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스치듯 고소를 당했다는 기사까지만 봤었는데.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