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
From the Universe (2)
“마······.”
정윤기는 문득 어떤 불길함을 감지했다. 도욱이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 듯 모를 듯했다.
“곡을 하나 더 내죠.”
“어?”
“······으응?”
“이번엔 윤기 형 곡으로요.”
조금 미안한 듯한, 하지만 즐거운 듯한 도욱의 말에 멤버들이 모두 의아한 표정으로 서로를 보았다. 조수석에 앉아있던 구철민이 술렁이는 뒷좌석의 분위기에 무슨 일이 있느냐는 듯 돌아보았지만,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멤버들조차 도욱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
두바이에서의 강렬했던 ‘Continue’ 뮤직비디오 촬영은 3일 동안 진행되었다.
사막 촬영을 마쳤으니 이제 서울로 돌아가 스튜디오 촬영이 남아 있었다. 스튜디오 촬영은 일주일 후에 있었다.
그사이에 도욱에게 개인 스케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바이국제공항에서 인천으로 향하는 멤버들과 달리 도욱과 이대형 팀장 그리고 구철민의 아래로 새로 들어온 막내 매니저는 샤를 드골 국제공항으로 향했다.
파리였다.
얼마 전 이유민 사장과 함께 만났던 정진 지사장이 정식으로 힛 엔터테인먼트를 통해 연락을 취해왔다. 도욱을 Coco의 새 시즌 뮤즈로 발탁하고 싶다는 연락이었다. 이미 도욱에게서 이야기가 오간 것 정도를 알고 있었던 이대형 팀장이었지만, 실로 대단하다는 생각이었다.
도욱 개인에게는 분명히 엄청난 이력으로 남을 일이었다. 개인으로 보지 않고 팀으로 보아도 어떻게든 득이었다. 스케줄이 안 돼도 되게 해야 한다고 이대형 팀장은 생각했다.
다행이 조금 빠듯하긴 했지만 활동기도 아니었기 때문에 영 말도 안 되는 스케줄은 아니었다.
Coco 측에서는 심지어 본격적인 화보 촬영 이전에 Coco의 수석 디자이너이자 디렉터인 사울 니게스와 식사 자리에 도욱을 초대했다.
Coco를 만든 창업자는 따로 있었지만, 지금 Coco의 시그니처 색상이 된 블랙과 화이트의 이미지를 만든 건 사울 니게스라고 할 수 있었다.
마흔의 나이에 Coco의 수석 디자이너가 된 사울 니게스는 백발의 노인이 된 오늘날까지도 왕성하게 활동하며 패션 업계에서는 ‘bombe’의 편집장 조이 윈투어와 함께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로 손꼽혔다.
그런 사울 니게스가 도욱을 뮤즈로 선택하고, 만나보고자 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비즈니스 프로세스일 수 있었지만, 정진 지사장은 사울 니게스가 도욱의 얼굴과 분위기에 매료되어 도욱의 노래까지 들어 보았다는 이야기까지 첨언했다.
사울이 도욱에게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자세한 스케줄을 정리하며 이대형 팀장에게 이야기를 전하는 정진 지사장의 기분은 무척이나 좋아보였다.
정진 지사장으로서도 큰 무리 없이 한국에서 대표로 올린 모델이 발탁되었으니 기분이 좋은 게 당연했다. 덕분에 계획대로 도욱과 함께 본사로 가 본사의 윗선에게 눈도장을 찍을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진 셈이었다.
‘Coco의 뮤즈 자리가 이미 정해졌다면······. 무언가 더 얻을 수도 있는 자리야······.’
이대형 팀장은 생각했다.
그러한 생각을 한 건 도욱도 마찬가지였다.
사울 니게스와 단독으로 식사 자리를 갖는 건 정말로 흔한 일이 아니었다.
투자의 귀재라고 불리는 워렌 버핏과의 한 시간을 돈으로 사기도 하는 건 잘 알려진 일이었다. 사울 니게스와의 식사 자리 또한 만약 돈 주고 살 수 있다면 사겠다는 사람이 줄을 설 것이다. 패션 업계 사람이거나 패션 쪽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말이다.
그렇게 두바이에서 파리로 넘어간 도욱은 정진 지사장과 현지에서 만났다. 정진 지사장과 만나 간략한 이야기를 나눈 도욱은 곧바로 사울 니게스와의 점심 식사가 약속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사울 니게스가 한국에서 오는 도욱을 위해 직접 추천해 가게 된 곳은 에펠탑이 잘 보이는 시내의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이었다.
레스토랑으로 들어서자 직원이 예약 여부를 물어왔고 정진 지사장이 사울 니게스의 이름을 말했다.
직원이 잘 정돈되어 세팅된 테이블로 두 사람을 인도했다.
“너무 긴장하지는 마요.”
“아······. 네.”
“하하. 사실 내가 긴장되네.”
정진 지사장이 가벼운 말로 도욱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도욱이 조금 긴장한 데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었다. 사울 니게스가 대단한 사람이기도 했지만, 프랑스인이라는 것이 도욱으로서는 걱정되는 부분이었다.
‘영어로 대화한다고 하니 의사소통의 큰 문제는 없을 거고, 정진 지사장도 있으니 괜찮을 거다.’
도욱은 생각하며 착석했다.
기다린 지 5분쯤 지나자 레스토랑의 문이 열리며 사울 니게스가 들어왔다. 약속 시간 정각이었다. 사울 니게스는 자신의 수행비서인 안나와 함께였다. 수행비서일 뿐인 데도 장신의 키에 마른 몸, 시원한 이목구비까지 모델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프랑스 미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도착한 이들과 악수, 가벼운 포옹을 나누며 도욱은 첫 인사의 시간을 가졌다.
“Bonjour!”
두바이에서 파리로 오는 길 도욱은 비행기 안에서 열심히 입 안으로 불어 인사말을 연습했다. 이어폰을 꽂고 최대한 원어 그대로의 발음을 따라 하기 위해 애썼다.
“Enchanté de vous rencontrer.”
만나서 반갑다는 형식적인 인사였지만 도욱에게서 기대하지 않았던 불어가 흘러나오자 사울 니게스의 표정이 밝아졌다.
불어 할 줄 아냐는 듯한 물음을 던지기 전, 정진 지사장이 센스 있게 도욱이 연습을 해온 것 같다고 말했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워낙 훌륭한 발음이었어서 깜박하면 정진 지사장조차 도욱이 불어를 할 줄 안다고 착각할 뻔했다.
그제야 사울 니게스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금 악수를 청했다.
“앙, 녀흥···. 하쉐요······?”
사울 니게스의 한국어에 도욱은 기쁜 표정을 지으며 “Merci.” 하고 고마움을 표했다. 한국말로 된 인사는 이전에 자신의 친구에게서 배웠다고 했다.
어쨌든 식사를 하며 그다음 대화부터는 영어로 진행되었다.
의사소통에 대한 도욱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도욱의 영어 실력은 더 발전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하고 상대에게 건네고, 상대의 말을 듣는 데 아무런 제약도 없었다.
LIL과 작업을 하면서 언젠가 세계 시장에 진출하게 된다면 세계 공용어인 영어는 필수라는 것을 도욱은 더욱 더 깨달았었다. 아이돌 그룹에 팀마다 영어 등 외국어가 가능한 멤버를 넣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때문에 작업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김원과 영어로 대화하거나 동영상 등을 보며 영어 실력을 쌓아나갔고, 현재는 웬만한 유학생 수준의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언어의 장벽도 없다시피 한 상태이다 보니 식사 내내 사울 니게스는 물론이고 그의 비서인 안나까지 도욱의 정중하면서도 겸손한, 그러면서도 자신을 너무 맞추지 않는 태도에 자연스럽게 빠져들었다.
까다롭기로는 전세계에서 손꼽히는 사울 니게스였지만 도욱은 자신이 직접 뽑은 Coco의 뮤즈였다. 이미 도욱에게 호감이 있는 상태에서 가진 만남이었다.
사울 니게스는 직접 만나 보니 자신이 사진에서 보고 느꼈던 분위기가 더욱 진하고, 삶을 사랑하는 사람의 향기가 고스란히 묻어나온다는 말로 도욱을 칭찬했다.
그런 그의 표현 속에는 ‘삶을 두 번 산 듯한 깊은’ 분위기라는 말이 있었다.
도욱은 그 순간 조금 뜨끔했다.
‘단순한 표현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역시······. 거장의 시선이라는 건가.’
사실 사울 니게스가 도욱과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한 건 Coco 새 시즌의 분위기와 과연 직접 보아도 잘 맞을지 최종적으로 판단하기 위해서였다.
말하자면 최종 면접이었다. 이미 결정된 사항이라고 해도 사울 니게스의 성정이라면 발탁을 취소시키고도 남을 인사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식사 자리는 면접 이상의 자리가 되어 있었다.
사울 니게스는 진심으로 동양에서 온 스타에게 인간적인 호감을 느꼈다. 어린 외모와는 사뭇 다른 깊이와 독특한 분위기. 가벼운 웃음 속에서도 흘러 나오는 건강한 에너지.
사울 니게스가 도욱에 대해 조금 더 호기심을 보일 때, 도욱은 자신을 소개하기 위해 케이케이를 소개했다.
도욱의 영상을 보긴 했지만, 솔로 무대 영상을 잠시 본 게 전부인 사울 니게스는 보이밴드냐고 물으며 케이케이에도 호기심을 보였다.
도욱은 때를 놓치지 않고 케이케이의 뮤직비디오 중 가장 영상미에 신경을 많이 쓴 ‘LAST DANCE’를 보여주었다.
정진 지사장은 도욱이 보통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사울 니게스와도 매끄럽게 대화를 이어나갈 줄은 몰랐다. 거기에 자연스럽게 자기 PR까지 하고 있었다.
정진 지사장이 속으로 감탄하는 동안 사울 니게스가 케이케이의 영상을 보곤 감상을 내놓았다.
“오······. 좋네요. 아름다워요.”
사실 으레적인 칭찬이었다. 긍정적인 평가임은 사실이었지만, 엄청나게 사울 니게스의 눈을 사로잡을 만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사울 니게스에게 K-POP은 너무 생소한 장르이기도 했다.
도욱은 조금 실망스러웠지만, 이후에는 사울 니게스 같은 인물에게도 극찬을 받을 만한 음악 또한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사울 니게스는 좋은 음악을 알게 해줘서 고맙다며 이후에 케이케이에게 의상 선물을 하고 싶다는 말을 해왔다.
정진 지사장의 눈이 커졌다.
물론 사울 니게스는 패션 디자인을 하는 예술가였지만 동시에 비즈니스 전문가였다. 도욱이나 케이케이에 대한 사전 정보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고, 비서인 안나를 통해서 아시아 시장에서 영향력이 꽤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이미 들은 상태였다.
Coco 같은 명품 브랜드에게 인기만큼 중요한 건 품위였다. ‘명품’이 괜히 명품이 되는 게 아니었다. 도욱을 만나고 나니 케이케이라는 그룹에 의상을 주어도 될 듯했다.
도욱은 사울 니게스의 제안을 감사하게 받아드렸다.
***
“Coco에서 촬영 의상 전부를 받아오는 거예요. 케이케이에 맞춰 제작된 한정판으로요.”
“아, 너 모델이었지······. 근데 우리까지?”
“네.”
안형서의 물음에 도욱이 답했다.
멤버들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도욱의 말을 경청했다.
도욱은 ‘Continue’의 반응이 뜨거운 지금, 미주권에서도 반응이 오는 지금이 바로 더 몰아쳐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앨범을 하나 더 낼 생각은 없었다. 현재 앨범은 최고의 판매고를 올리고 있었다. 이럴 때 괜히 추가 앨범을 내 앨범 판매량을 분산시킬 필요가 없었다. 수익도 중요했지만 기록이라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었다.
‘기록이 역사를 만든다.’
그래서 도욱이 일전에 정규 3집 앨범을 내며 앨범제작팀과 이야기를 했던 게 리믹스 버전 디지털 음원을 내는 것이었다.
만약 ‘Continue’가 기획 의도대로 세계 시장에서 먹힌다면, 그다음 발판을 마련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도욱은 리믹스 버전을 만들 곡으로 정윤기가 작곡한 앨범 수록곡인 ‘Go low, Go high’였다.
‘Go low, Go high’는 오케이 앨범에 실었던 ‘Go high’의 확장판이라고 할 수 있는 곡이었다.
도욱이 정윤기의 곡을 생각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케이케이가 잘하는 것. 그것을 찾아서 ‘Continue’를 만들어냈다. 최상의 퍼포먼스를 뽑아낸 곡이었다.
그다음으로 세계인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건 케이케이가 늘 기본 베이스로 깔고 해 왔던 장르, 힙합이었다.
힙합은 90년대 후반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국을 비롯한 세계 시장에서 확실한 주류로 자리 잡은 장르였다.
거기에 Coco의 의상과 정진 지사장이 소개해 준 Coco 출신 비주얼디렉터의 힘을 빌려 뮤직비디오를 고급스럽게 뽑아내면 ‘Continue’의 기세를 충분히 이어갈 수 있을 거라는 도욱의 판단이었다.
‘케이케이의 다양한 매력 전부를 발산할 때다.’
도욱의 설명을 모두 들은 멤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피곤했던 것도 잠시 잊고 모두 빨리 이 기세를 이어가 보자는 화이팅 넘치는 분위기로 바뀌어 있었다.
열정으로 정상의 자리에까지 올라온 케이케이다웠다.
그러나 정윤기의 얼굴만은 다른 멤버들과 달리 무척이나 어두웠다. 단순히 자신의 곡으로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 아니었다.
“도욱아······. 프로듀서로서 내 곡을 내세우겠다는 네 생각은 고마운데.”
“······네?”
“작곡자로서 반대야.”
“혹시 부담돼서 그런······.”
“아니. 마, 부담이 아니라. 나가려면 곡을 아예 뒤집어야 할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