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
역습 (1)
그러나 창이 불투명했기 때문에 도욱에게는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더 자세히 보면 보일 듯도 했지만 도욱은 뒤로 물러섰다. 단순히 친구들과의 술자리일 수도 있는데 도욱이 괜히 의심을 하는 것일 수 있었다. 이대형 팀장의 사생활까지는 간섭해서는 안 됐다.
‘불안하긴 하지만······. 이대형 팀장을 믿기로 한 지 얼마 안 됐다.’
도욱은 원래 자신이 있던 이유민 대표와 정진 지사장이 있는 룸으로 들어가며 생각했다.
한번 믿기로 한 사람이었다. 힛 엔터테인먼트로 이직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대형 팀장은 최선을 다해 일하고 있었다.
‘이쪽에서 신의를 보여줘야 상대도 신의를 지키는 거다.’
도욱은 생각했다.
이대형이라는 사람을 믿는 게 아니었다. 이대형 팀장을 힛 엔터테인먼트로 움직이게 한, 그 열정과 욕심을 믿는 것이었다.
도욱이 룸으로 다시 돌아오자 시켰던 칵테일을 다 마신 이유민 대표와 정진 지사장이 칵테일 바 매니저를 호출했다.
정진 지사장은 100대 기업 중 하나인 전자회사의 차남으로 이유민 대표와는 어린 시절 기업가 모임에서 만나 친분을 유지해온 이였다.
두 사람 다 패션과 예술 쪽에 관심이 많고 조예가 깊어 나이 차가 있었음에도 말이 잘 통했고, 친한 동생인 정진 지사장이 Coco에 입사하기까지 여러모로 도운 것도 이유민 대표였다.
정진의 집안에서 차남이지만 전자회사를 물려받을 것을 강력히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정진과 같은 인재는 패션 업계에 있어야 한다며 정진의 부모를 설득한 게 이유민 대표였다.
자식 문제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하고 싶다가도, 유성가문과의 친분을 이어가는 것도 그들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이유민 대표의 말을 흘려들을 수만도 없었다.
결국 좋은 게 좋은 것이라 생각하며 자식인 부모는 정진의 손을 들어주었다.
두 사람의 인연에 대해 들으며 도욱은 ‘있는 집 사람들’의 세계에 대해 생각했다.
그들도 똑같이 각자만의 꿈이 있고, 목표가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보통 사람들보다 더 많은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혹은 복잡하게 엉켜 한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서중원 본부장이라는 엔터계 거물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그 수많은 이해관계의 그물들을 잘 이용해야겠지.’
도욱이 잠시 생각할 때 매니저가 조용히 룸의 문을 열며 들어왔다.
매니저가 오자 두 사람은 각자 취향대로 칵테일을 주문했다. 보통 칵테일 바에서도 볼 수 있는 메뉴들이 많이 있었지만, 이곳에서는 원하는 맛이나 향, 들어갔으면 좋겠는 술 등을 말하면 바텐더가 취향에 맞게 칵테일을 제조해주었다.
도욱은 가장 낮은 도수의 과일향 칵테일을 한 잔 더 시켰다.
“흐음······.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음. 요즘 아시아에서 한국 시장도 패션 업계에서 무시할 수 없는 시장이 됐습니다.”
정진 지사장의 말에 이유민 대표가 다리를 꼬며 끄덕였다.
이유민 대표는 오늘도 무척이나 화려한 차림이었다. 엄지손가락만 한 호박색 보석이 목 위에서 조명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정진 지사장은 흰색 셔츠에 아주 작은 Coco 브로치를 달고 있었는데 딱 보아도 무척이나 고급스러워 보였다.
두 패션업계의 거물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패션에 대한 공부가 되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자본 규모 자체는 일본이나 중국······. 중국에 비해 너무 작지 않아? 중국 쪽은 진짜 하루가 다르게 커져. 우리 유성패션 영업이익도 이제 중국 매출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정도니까.”
“그건 사실 어디든······. 음. 그런데 그 중국 고객들 중에 한국 배우나 가수를 좋아하는 이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도 한국에 영향력이 생긴 겁니다.”
말을 하며 정진 지사장이 도욱을 바라보았다.
“도욱 씨 같은 한류스타 덕분인 겁니다.”
이유민 대표도 도욱을 보며 웃고 있었다. 도욱은 갑작스럽게 쏠린 시선에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아······. 아닙니다.”
“이 친구는 너무 겸손해서 탈이라니까.”
이유민 대표가 일부러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자기, 이제는 누가 뭐래도 톱인데? 거만하게 좀 굴어 봐요.”
“하하. 그렇게 말씀하시면 인정하겠습니다. 제 덕분인 거죠? 세계 패션 시장에서 한국의 영향력이 전부 다.”
도욱의 너스레에 이유민 대표와 정진 지사장 모두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까지 하면 내가 또 할 말이 없네.”
이유민 대표가 고개를 저었다.
정진 지사장이 웃음을 멈추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입니다. 도욱 씨.”
도욱은 정진 지사장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정진 지사장의 짙은 눈썹이 미미하게 움직였다.
“이번에 Coco 본사에서 올해 F/W 새 남성 뮤즈를 찾고 있습니다. 아시안으로요.”
“······그렇습니까?”
정진 지사장이 말하는 ‘뮤즈’란 F/W 시즌에 새로 나올 광고 캠페인의 메인 모델을 말하는 것이었다.
한 패션 브랜드에서도 나라별, 라인별로 수많은 광고가 쏟아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메인이 되고, 브랜드의 색깔과 목적 의식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광고 캠페인이었다.
한국 Coco 화보 모델 정도를 생각했던 도욱은 생각보다 큰 스케일에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음. 한국 지사에서도 모델을 추천할 겁니다. 한국 지사의 영향력을 넓히고 제 프로모션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한국 모델이 발탁될 수 있게 할 거고요.”
정진 지사장은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도욱 씨만 나쁘지 않다면 도욱 씨를 추천할까 합니다.”
어떤 톱스타라고 해도 Coco의 뮤즈가 되는 일을 마다할 이는 없을 것이었다. 그러니 이 만남은 도욱의 의사를 물어보는 자리였다기보단 정진 지사장이 도욱을 시험하는 자리라고 할 수 있었다.
도욱은 정진 지사장을 바라보았다. 정진 지사장은 자신이 말한 대로 한국 쪽에서 추천한 이가 Coco의 뮤즈가 되게 할 자신이 있어 보였다.
그리고 사실 정진 지사장의 입장에서도 도욱만 한 추천인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추천해주신 보람은 있게 하겠습니다.”
도욱의 말에 정진 지사장은 표정을 풀고 웃었다. 확실히 겸손하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감까지 없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좋아요. 음······. 광고 모델로 도욱 씨만 한 사람 없다고 여기 대표님이 그랬습니다. 문제 일으킬 걱정도 없다고 말입니다.”
이유민 대표가 도욱에게 맞지 않냐는 듯 턱짓으로 물었다. 도욱은 웃음으로 답했다.
“당분간도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 두 사람 모두를 위해서.”
“네. 알겠습니다.”
***
도욱은 오백호 실장에게 Coco 뮤즈 건에 대해 간단히 내용을 전달했다.
오백호 실장을 통해 팬-마케팅팀인 이대형 팀장에게 전달하긴 했지만, 도욱은 사무실을 지나다 팬-마케팅팀 이대형 팀장과도 잠시 얼굴을 보게 되었다.
이대형 팀장은 자신이 일하지 않아도 도욱 스스로가 마케팅 방법 그 자체라며 감탄했다.
“아직 결정된 것도 아닌데요.”
“그런 식으로 말한 거면 뭔가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그런 거겠죠. 이 일은 우선은 저랑 오 실장님, 그리고 조 부장님만 알고 있기로 했습니다.”
“네······.”
“지난 LIL과의 작업 때처럼 새어 나가서 괜히 일을 그르칠 수도 있으니까요.”
이대형 팀장이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도욱은 문득 며칠 전 칵테일 바에서 이대형 팀장을 보았던 것이 떠올랐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일단 현재 이대형 팀장에게서는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혹시’라는 것이 있었다.
‘만약 이 컨택 건이 외부에 알려진다면 그때는 이대형 팀장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오백호 실장에게도 전혀 내색하지 않았지만, 도욱은 옅은 경게심은 유지하고 있었다.
Coco의 뮤즈가 된다면 도욱으로서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설사 일이 잘못되어 뮤즈가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가수나 연기자로서의 도욱이 잃을 것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대형 팀장을 믿고 도박을 걸어보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대형 팀장을 시험하는 것이니 완전히 그를 믿는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를 믿기 때문에 시험도 해볼 수 있는 일이었다.
“곡 작업은 어떻게 잘돼 가요? Call you the love가 지금도 파인애플 차트 상위에 머물러 있던데······. 케이케이 다음 앨범도 더 잘될 것 같아요.”
이대형 팀장의 말에 도욱이 답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심 팀장님, 멤버들이랑 여러 가지로 의견 나누고 있는 중이에요.”
“5월 컴백이 목표죠?”
“네. 그때까지 될 수 있으면······.”
“뭐 이제 케이케이 팬층이 탄탄하긴 하지만 공백기가 길면 좋진 않으니까······.”
이대형 팀장의 말에 도욱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빨리 컴백 준비를 하는 이유도 이탈하는 팬들을 막기 위해서였다.
“조급하게 생각하란 소리는 아닙니다. 그래도 우리 팀에서 주에 한 번은 주기적으로 비하인드 영상 업로드하고 있으니까요!”
자신이 괜한 소리를 했다고 생각했는지 이대형 팀장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건강 챙겨가면서 일하라는 이야기를 주고받은 후 도욱은 앨범제작팀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오늘은 다음 케이케이 정규 앨범 컨셉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수차례 회의는 있어왔고, 오늘은 몇 개의 후보 중 드디어 컨셉을 결정하기로 했다.
***
“팀장님! 여기 오늘 뜬 인터뷰 기사입니다.”
팬-마케팅팀 남효진이 프린트한 기사를 서류철에 정리해 이대형 팀장에게 가져다주었다.
인터넷 기사는 워낙 많기 때문에 사원인 남효진이 스크랩해두고 이대형 팀장에게는 링크 정도만 보내지만, 오늘처럼 내용이 많은 중요 기사가 날 때에는 따로 프린트해 보고하는 게 원칙이었다.
다른 업무를 보고 있던 이대형 팀장은 남효진에게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서류철을 건네받았다.
오늘 난 기사는 유력 연예 신문인 뉴스패치와 진행한 케이케이 단독 인터뷰 기사였다.
[단독) 케이케이-LIL 콜라보 작업 비하인드 스토리 “먼저 연락 온 LIL, 꿈만 같았죠.” (1)]
[단독) 케이케이-LIL 콜라보 작업 비하인드 스토리 “케이케이 멤버라는 것에 자부심 커..” (2)]
[단독) 케이케이-LIL 콜라보 작업 비하인드 스토리 “세계시장 진출? 한국에 집중하면 언젠가 성공할 거라 생각해..” (3)]
무려 세 페이지에 걸쳐 난 인터뷰 시리즈였다. 포털사이트 메인에도 당당히 걸려 있었다.
LIL과의 콜라보 작업과 ‘Call the love’의 성공으로 세간의 이목이 다시금 케이케이에게 집중된 상태였다. 이 기세를 컴백 전까지 이어가기 위해 이대형 팀장은 뉴스패치와 협력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뉴스패치 쪽에서야 단독 기사를 낼 수 있다고 하니 무조건 콜이었다. 힛 엔터에서 제공한 미국 작업 시 사진도 메인에 띄워져 있었다.
이대형 팀장은 꼼꼼하게 프린트된 인터뷰를 정독했다. 이미 메일로 간략한 질문과 답변 내용들을 확인한 후였지만, 기사에 디테일이 추가되면서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은 없는지 확인해야 했다.
“어?······.”
기사를 읽던 이대형 팀장의 눈이 도욱의 답변 부분에서 멈췄다.
[이번 LIL과 작업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회사 차원에서의 노력이 있었다. 우리 회사 마케팅팀 이대형 팀장님께서 많은 수고를 해주셨다. LIL이 케이케이의 노래에 호감을 가졌던 게 맞지만, 그러려면 일단 음악을 들어 봐야 했지 않겠나. 그런 의미에서 마케팅팀에 무한한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이 팀장 본인의 이름이 올라가 있었던 것이다.
“하하······.”
이대형 팀장은 여러 감정을 느꼈다.
며칠 전 서중원 본부장을 만났던 일이 떠올랐다. 서중원 본부장이 직접 이대형 팀장을 다시 스카우트 해가기 위해 연락을 취해온 것이었다. 순수하게 이 팀장을 스카우트하려는 것만이 목적은 아니었다.
“이것 참.”
책상 위의 휴대폰을 집어든 이대형 팀장은 휴대폰 목록에서 오백호 실장을 찾았다.
완벽하게 케이케이의 성공을 위해 함께 달릴 힛 엔터테인먼트의 일원으로서 자신이 품고 있는 의문에 대해 말해야 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