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
What is your name (3)
***
“와······.”
노트북 화면에 LIL의 얼굴이 뜨자 한 자리에 모여 있던 멤버들은 모두 넋을 놓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LIL 쪽에서는 아직 케이케이의 얼굴이 뜨지 않았는지 LIL은 카메라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LIL의 옆에는 LIL의 매니지먼트 회사의 이번 콜라보 앨범을 기획한 기획자도 함께 있었다.
“진짜 LIL이야? 리얼 LIL?”
“뭐야······. 지금 라임을 만드는 거야?”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린 김원에 안형서가 어색한 농담을 던졌다. 안형서도 LIL과의 첫 인사를 앞두고 잔뜩 어깨가 굳은 채 긴장한 상태였다.
콜라보 작업이라고 하면 서로의 장점을 끌어 모아서 시너지를 발휘해 케이케이와 LIL, 둘 모두가 윈윈해야 하는 작업이었다.
장점을 잘 드러나게 하려면 서로를 잘 아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었다.
물론 꼭 콜라보를 한다고 해서 콜라보 참여진 간에 활발한 교류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비즈니스 파트너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경우에는 프로듀서를 통해 곡만 받고 녹음까지도 따로 작업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비즈니스 파트너가 아닌 음악적 교류라고 생각하면 확실히 서로 감정적인 교감을 하는 게 곡 퀄리티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이 되기도 했다.
“영상 통화라도 해서 LIL의 얼굴을 보면 좋을 것 같아요.”
현실적인 거리 때문에 당장 만나서 페이스 투 페이스로 대화를 나눌 순 없었지만 인사도 하지 않은 채 곡 제작에 들어가기 보다는 영상으로나마 인사를 하고 얘기를 해보는 게 좋겠다는 게 도욱의 생각이었다.
곡 작업에 대한 의견 교류를 위해 계속해서 메신저를 하거나 전화 통화를 하게 되겠지만, 얼굴을 보고 표정을 읽어 가며 대화를 해 보는 게 앞으로의 소통을 위해서도 좋을 듯했기 때문이었다.
영상 통화를 제안한 건 도욱이었고, LIL쪽에서도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았다.
LIL의 스케줄과 한국, 미국 간의 시차 때문에 영상 통화 스케줄을 잡기도 쉽지만은 않았지만, 이대형 팀장의 진행 하에 오늘 이렇게 첫인사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
-Hello!
드디어 제대로 연결이 됐는지 노트북 화면 속 LIL이 손을 흔들며 케이케이 멤버들을 향해 인사했다.
약간의 끊김은 있었지만 비행기로도 열네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만큼 생생했다.
LIL은 턱수염이 까슬하게 자라난 데다 비니를 쓰고 있는 편안한 행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마저 멋으로 느껴질 만한 포스가 있었다.
사실 LIL의 나이는 케이케이의 큰형인 정윤기보다 한 살 더 많은 정도였다.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음에도 LIL은 30대처럼 보였다. LIL이 심각한 노안인 것도 아닌데 확실히 동양인에 비해 서양인이 나이 들어 보이는 게 맞았다.
LIL이 보기에 케이케이 멤버들은 고등학생 정도로 보일 게 분명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케이케이 담당자 이대형입니다. 여기 멤버들을 소개할게요.”
케이케이의 담당자로는 우선 이대형 팀장이 와 있었다.
앨범제작은 심준 팀장의 영역이었지만, 오늘은 간단히 인사만 하는 자리인 데다 심준 팀장의 영어 실력은 현지인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수준의 것은 아니었다.
도욱은 뉴욕 패션 위크 기간 때 숱하게 봐왔지만, 다른 멤버들은 이대형 팀장의 유창한 영어에 잠시 감탄했다.
감탄도 잠시, 멤버들은 허겁지겁 자신의 이름을 말하며 인사를 건넸다. 마음만 급했지 어색해하며 ‘Hello, Hi, Nice to meet you’ 정도만 정직한 한국식 발음으로 인사했다.
교과서대로 ‘How are you?’ 하고 묻는 멤버가 없는 게 이상할 정도의 정직한 인사들이었다.
인사하는 멤버들은 수줍은 소녀처럼 보였다.
“어엄······ 아이 엠 형서.”
안형서가 이름을 말하는 것으로 영어를 잘 말하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영어 ‘알못’들의 인사가 끝이 났다.
도욱이 준비해 온 인사를 LIL에게 건넸다.
“저는 도욱입니다. 이렇게 함께 작업하게 돼서 너무 기쁘네요. 좋은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LIL의 눈이 조금 커지며 도욱에게 말을 건넸다.
“오······. 도욱! 당신이 LAST DANCE의 작곡자가 맞나요? 무척이나 인상 깊었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함께할 곡도 그런 곡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미 이대형 팀장이 보내 온 메일을 통해 그 내용을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LIL에게서 칭찬을 들으니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도욱이었다.
자신이 도욱인 것도 아닌데, 멤버들 또한 도욱을 칭찬하는 LIL에 입술이 저절로 올라가며 자랑스러운 표정을 했다.
“좋은 기회인 건 나한테도 마찬가지입니다. 재밌게 작업합시다!”
LIL의 말에 도욱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남은 사람이 멤버들과 LIL이 교류하는 데 큰 역할을 해야 할 김원이었다. 멤버들 중 유일하게 네이티브와 아무런 문제없이 대화가 가능한 인물이었다.
김원이 무척이나 흥분한 듯 빠르게 인사했다.
“김원입니다! 케이케이의 래퍼고요. LIL의 빅팬이었는데 목소리로만 듣다가 이렇게 통화를 하게 되다니······ 꿈만 같네요. 이런 기분이라면 하늘을 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LIL이 즐거운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답했다.
“하늘을 날게 되면 연락 줘요. 그걸로 더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으니까.”
LIL의 농담에 김원이 웃었다.
이대형 팀장도 함께 웃으며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실 영상 통화를 제안했을 때만 해도 LIL쪽에서 거절할 것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대형 팀장이 알기로 두루두루 평판이 괜찮은 팝 스타는 사막에서 바늘 찾기에 가까웠다.
표면적인 이미지가 좋아도 막상 대화를 나누면 상대에 따라서 구분 짓고 거만한 태도로 일관하는 팝 스타가 여럿이라는 얘기를 들었었다.
인성의 문제라기보다는 수많은 세계인들의 관심을 받으며 누구보다 화려한 삶을 살면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대접받으며 살다 보면 그에 휩쓸리기 마련이었다.
동시에 그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황금알을 낳아야 했기 때문에 별수 없이 예민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적인 스타였음에도 불구하고 LIL의 태도가 거만하지 않았기 때문에 케이케이 멤버들이 불쾌해지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LIL이 누구에게나 호의적인 태도를 취해서라기보단 케이케이의 음악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고, 함께 작업해야 할 아티스트로 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불과 일 년만에 세계를 휩쓴 LIL도 다른 팝 스타들과 마찬가지로 거만하고 예민한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앨범에 실릴 곡 얘기를 러프하게라도 하고 싶은데······. 그래야 곡 작업에 들어갈 수 있을 테니까요.”
도욱이 더듬더듬 영어로 말하자 LIL의 옆에 앉아있던 뿔테 안경을 쓴, 역시나 백인 남성인 기획자가 LIL 대신 답변했다.
“이번 앨범은 당신들 말고도 여러 가수가 참여합니다. 콜라보 앨범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LIL의 앨범이에요. LIL의 색이 죽어서는 안 되죠. 누구와 어떤 곡을 하든 LIL의 독특한 음색을 기반으로 LIL의 색을 드러내는 게 이 앨범의 컨셉, 그 자체입니다.”
도욱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보면 굉장한 자신감이었다.
‘앨범 컨셉이 가수 그 자체라니. 자신의 색이 뚜렷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다.’
LIL의 허스키하면서도 편안한, 그만의 음색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도욱은 감탄하면서도 부러워졌다. 언젠가 케이케이나 도욱 자신도 그런 가수가 될 수 있으면 좋을 듯했다.
이대형 팀장은 대화를 어느 정도는 따라갈 수 있도록 뒤에 서 조용하고 간단히 다른 멤버들에게 통역을 해주었다.
“LIL이 케이케이와 하고 싶은 음악은 명확해요. 세련되면서도 신나는 음악을 하고 싶어 하죠. 케이케이의 에너지를 좋게 보았기 때문에. 굳이 분위기로만 따지자면 LIL의 곡 중 ‘IN THE DARK’ 정도가 되겠네요. 펑키한 리듬감을 살렸으면 좋겠다는 거죠.”
“그렇군요······.”
도욱은 중요한 키워드들을 머릿속에 입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 영상은 녹화가 되고 있었으므로 이후에 곡 작업을 하면서 돌려보면 되는 것이었지만, 어쨌든 도욱은 통화를 하면서도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어내고 싶었다.
‘자칫하면 작업비만 받고 무산될 수 있으니까······. 그렇게 만들 수는 없다.’
앉아있던 LIL이 의견을 덧붙였다.
“LAST DANCE에서 화음을 쌓아가는 부분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솔로가 아닌 그룹의 힘이라는 걸 느꼈달까.”
LIL의 말에 도욱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그러나 화면에 티가 날 만큼은 아니었다.
도욱은 단번에 LIL과 기획자가 원하는 곡 스타일이 무엇인지 캐치해낼 수 있었다.
“고마워요. 음······. 설명을 들으니 LIL이 원하는 곡의 전체적인 색깔은 알 것 같아요.”
LIL이 활짝 웃으며 엄지를 치켜 세웠다.
“역시 듣던 대로 훌륭한 프로듀서군요. 결과도 기대가 되네요.”
“으음······ 빠른 시일 내에 작업한 가이드를 보낼 수 있도록 할게요.”
도욱의 말에 기획자 쪽에서도 좋다는 답변을 보냈다. 뒤에 있던 이대형 팀장은 과연 잘 되어가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도욱이 감을 잡은 듯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대충 곡에 관한 이야기가 마무리 되어가자 김원이 분위기를 풀며 LIL에게 물었다.
“LIL, 마지막으로 하나 질문해도 될까요?”
“뭔가요? 답해줄 수 있는 거면 해줄게요.”
LIL이 흔쾌히 답했다.
“가슴에 단 브로치, 그거 어디서 난 거예요? 너무 스타일리쉬해서 나도 하나 갖고 싶어서요. 어디서 사면 될까요?”
김원의 물음에 LIL의 표정이 이전과는 완벽하게 달라지며 화색을 띠었다. 비즈니스용 미소가 아닌 진심이 담긴 미소라는 것은 화면을 보고 있던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믿을 수 없게도 이 브로치에 관심을 가져준 건 오늘 당신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건 살 수 없어요.”
서울은 오전이었지만, LIL이 있는 곳은 늦은 밤이었다. 즐거운 표정을 하고 있어도 조금 가라앉아 있던 LIL의 목소리가 브로치를 설명하면서는 한 톤 올라갔다.
“이름이 뭐라고 했죠? 원? ‘only one’의 그 one이 맞나요?”
“네 맞아요.”
김원의 답에 LIL이 역시 브로치를 알아본 ‘단 하나’라며 즐거워했다.
브로치는 LIL이 직접 디자인한 것이었다. 패션에 관심이 많은 LIL의 취미 중 하나가 패션 소품을 직접 디자인하는 일이었다. 대충 원하는 모양을 스케치해 넘기면, 그대로 제작해 줄 지인이 LIL의 위치 정도가 되면 주변에 널려 있기 마련이었다.
김원은 LIL의 그런 취미를 미리 조사해 와 알고 있었다.
조금 허술한 듯하면서도 시선을 강탈하는 독특한 모양의 브로치를 보자 분명히 LIL이 제작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욱에게 전달되는 곡 작업 이야기를 들으며 김원도 어느 정도 LIL쪽에서 어떤 곡을 원하는지 캐치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김원도 이제 도욱을 꽤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였다.
도욱이 아무리 LIL이라고 한들 끌려가기만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건 쉽게 예상됐다.
LIL에게 조금 더 호감을 사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건 그래서였다. 어차피 사람이 하는 일······. 호감이 클수록 조금 더 상대방의 의견에 귀 기울여 주기 마련이었다.
빨리 녹음 날이 되어 김원과 포옹을 하고, 김원에게 직접 브로치를 전해주고 싶다는 이야기까지 한 상태로 LIL과의 통화가 끝났다.
통화가 끝난 후.
도욱은 김원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김원 덕분에 LIL에게 확실히 케이케이의 이미지가 더 좋아진 것만은 분명했다.
“아냐, 고맙긴. 나도 LIL 정말 좋아하니까······. 그런데 LIL이 원하는 곡이······.”
김원은 말을 골랐다.
대화가 너무 빨라 제대로 통역을 들을 수 없었던 멤버들은 눈을 빛내며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 어서 듣고 싶다는 신호를 보냈다.
“맞아요. 완전히 LIL이 메인이고, 저희는 서브. 물론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보니까 그 이상이에요. 저희를 완전 코러스로 쓰겠다는 수준이에요.”
굳이 예로 든 ‘IN THE DARK’는 완벽하게 LIL의 곡이었다. LIL의 곡들 중에서도 LIL이 아니면 다른 이가 부르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곡이라는 뜻이었다.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LIL의 목소리는 제목만 들어도 자연스럽게 귀에 울려 퍼졌다.
“그렇게 가야겠지?”
한국에서 최고의 가수인 것은 확실했지만, 확실히 세계적인 가수에 비할 것은 아니었다. 시장의 규모가 달랐다.
김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역시나 도욱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LIL의 앨범이니까 그가 메인이 되어야 하는 것은 맞아요. 코러스든 뭐든 우리는 이름만 올려도 영광이어야 할 입장일 수도 있고요. 그렇지만······.”
도욱은 고심했다
“그렇게 안 할 거예요. 안 하게 만들어야죠. 케이케이가 나란히 이름을 올리는 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