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
뛰어넘다 (2)
“우리, 무대 하나 더 준비해도 될까요?”
조심스럽게 묻는 도욱에 신나서 치킨을 고르던 멤버들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치킨 고르라고 한 게 그렇게 싫었던 거냐······.”
안형서가 주섬주섬 도욱의 손에 있던 전단지를 다시 자신의 손으로 가져가며 물었다.
거센 기침 소리가 들려서 보니 정윤기였다. 정윤기가 억지로 기침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이고, 목이야, 하는 앓는 소리를 내며 딴청을 피웠다. 나오지도 않는 기침을 억지로 냈으니 목이 안 아픈 게 더 이상했다.
“Suddenly······. 나······. 한쿡말 몬 알아듣게써. Pardon?”
김원이 마치 도욱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는 듯 영어를 섞어 물었다. 누가 봐도 연기였기 때문에 우스울 수밖에 없었지만, 김원에게 핀잔을 주는 이는 없었다.
웃음이 터진 건 도욱 쪽이었다.
멤버들의 반응을 보니 무대를 하나 더 준비하는 건 역시나 부담스러운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찌푸리기보다는 에둘러 의사를 표현하는 멤버들이었다. 늘 군말 없이 도욱의 조금은 하드한 일정을 따라주었던 멤버들이었다. 도욱은 서운한 마음보다는 고마운 마음이 더 컸다.
‘방금 떠올린 아이디어는 역시 무리겠군.’
멤버들을 무리시킬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도욱은 마음을 접었다.
“치킨마저 고를게요. 저는 역시 황제올리브치킨이요.”
막내인 석지훈이 메모장에 각 멤버가 시킨 치킨을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멤버의 개성만큼이나 식성도 다양하다는 걸 석지훈은 새삼 깨닫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불고기천왕.”
“윤기 형은 불고기······ 천왕······. 그럼 다 정한 거죠? 저 이제 주문합니다.”
메뉴를 다 받은 석지훈이 한 곳씩 주문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멤버들은 치킨을 기다리며 TV를 시청하려 편안한 자세로 자리를 잡았다. 소파 구석에 앉은 채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던 정윤기가 전원 버튼을 눌러 TV를 다시 껐다.
멤버들의 시선이 일제히 뒤에 앉은 정윤기로 향했다.
“함 말해봐라.”
갑자기 꺼진 TV에 원망 어린 눈빛을 보내는 멤버들에게 답하는 대신 정윤기가 도욱을 향해 물었다. 도욱은 잠시 말뜻을 파악하지 못해 헤매다가 이내 정윤기의 질문을 이해했다.
“네 말 들어서 나빴던 적이 있어야 모르는 척을 하지.”
정윤기가 덧붙였다. 다른 멤버들도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대를 하나 더 하게 될 거라는 강력한 예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숨을 내쉬면서도 못내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던 사람들처럼 빠르게 포기하고는 도욱에게 귀를 기울였다.
사실 다른 멤버들의 마음도 정윤기와 다를 게 없었다. 케이케이가 여기까지 온 건 정상의 자리에 가고 싶은 게 도욱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멤버들 또한 몸이 힘든 것과는 별개로 늘 정상의 자리에 서고 싶고,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싶은 욕망으로 목말라 있었다.
“그래······. 어쩐지 올해 이상하게 너무 몸이 편한 것 같다고 생각했어.”
안형서가 장난스럽게 푸념을 늘어놓았다.
다른 가수들에 비하면 지금도 몸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케이케이의 연습량은 언제나 최고였다. 거기에 정규 활동과 투어를 돈 것만으로도 케이케이 멤버들은 바쁜 한 해를 보냈다.
그러나 이번 해 많아진 개인 활동으로 인해 단체 활동이 줄어든 게 사실이었다.
별다른 개인 활동이 없었던 안형서로서는 더욱 작년보다는 수월하게 느껴지는 한 해이기도 했다.
“연말에 쫌 고생하지 뭐! 무슨 고생하면 되냐!”
“아······.”
도욱이 잠시 머뭇거리다 이야기를 꺼냈다.
MC 제안을 받아 이야기를 나누게 됐고, 그러면서 TBN 큐시트를 봤다는 내용이었다. 조금 전의 일을 설명하며 도욱은 멤버들에게 자신이 왜 무대를 하나 더 하자고 했는지 또한 설명했다.
“아···, 아라가 힘이 세긴··· 센가 봐.”
가만히 듣고 있던 박태형 또한 아라 엔터테인먼트의 힘에는 못 이기겠다는 듯 조금 의기소침하게 중얼거렸다.
도욱이 이어 말했다.
“어차피 TBN 쪽에서 받아줘야 하는 거지만, 그래도 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기획사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는 무대의 힘을 대중들에게 보여주는 거죠.”
도욱의 말에 정윤기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의도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푸른 하늘’을 비롯해 다양한 활동으로 충분히 성과를 낸 멤버들이었다. 그것을 평가받는 날이 시상식이었다. 제대로 된 평가를 받고 싶은 게 당연했다.
‘딩동―’
때마침 벨이 울렸다. 인터폰에 치킨 배달원의 모습이 비쳤다.
“헉! 치킨! 누구야! 누구 거야!”
“My chicken!”
안형서와 정윤기가 버선발로 달려 나갔다.
그 후로도 다섯 번 더 치킨 배달원이 벨을 울렸다.
***
도욱이 생각한 건 특별 무대 역제안이었다.
작년, 이진리가 나왔던 것과는 다르게 이번 큐시트에는 별다른 특별 무대가 없었다. 리틀 스타가 데뷔 후부터 지금까지 자신들의 히트곡을 리믹스해 부르는 무대 정도가 특별 무대와 비슷한 형태였다.
그렇다면 케이케이 쪽에서 제대로 된 특별 무대를 준비하면 어떨까 싶었다. 보통 다른 가수의 특별 무대를 준비하는 건 그 해의 핫한 신인들이나, 특별 무대의 주인공이 되는 가수의 기획사 후배들이 하는 게 관행과도 같았다.
특별 무대라는 게 도욱이 전에 이진리와 했던 형태의 콜라보 무대가 아니라 단순히 커버를 하는 무대라면 사실 대부분의 가수들은 꺼려하는 게 맞았다.
자신들의 노래를 하는 것도 아니었고, 바쁜 연말에 따로 준비까지 해야 하니 방송국에서 하라니까 한다는 식이 많았다.
‘그러니 우리가 나서서 하겠다고 하면······. 시상식 입장에선 볼거리가 늘어나는 셈이니 거절하긴 힘들겠지. 거기에 그냥 무명의 신인이나 가수가 나선 게 아니라 케이케이라면······.’
도욱은 생각했다.
시청자들이 늘 좋은 무대를 보여주는 ‘믿고 보는’ 그룹인 케이케이의 무대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쯤은 방송국에서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실제로도 한 연말 설문조사에서 시상식에서 무대가 기대되는 가수 1위로 케이케이가 뽑히기도 했다.
그런 케이케이가 본무대도 아닌 새로운 무대를 준비한다고 하면 방송국에서는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아라 엔터 쪽에 케이케이의 무대 시간이 늘어난 것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좋은 명분을 만들어주는 셈이기도 했다.
‘무대 시간을 늘리고 싶다면, 더 많은 준비를 해서 늘리는 거야.’
조금 거창하게 말하자면 ‘쟁취’하는 것이었다.
오랜 기간 가요계에 힘을 써 온 아라 엔터 쪽에서 케이케이를 견제하고 나선다면, 기획사의 힘에서 밀린다고 해도 당하고만 있을 순 없었다. 할 수 있는 데까진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다.
멤버들의 동의를 얻은 도욱은 공연 담당인 권우찬 대리와 상의 후, 오백호 실장에게 특별 무대를 준비하면 어떻겠냐 제안했다.
오백호 실장은 도욱의 말을 귀기울여 들었다.
본래 방송국으로부터 시간을 배정 받으면 배정 시간에 맞게 무대를 구성하는 상의하달식 과정을 거치는 것이었지만, 역으로 제안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좋아. 이렇게까지 해야 된다는 게 조금 분하지만······.”
많은 가수를 맡아왔지만 사실 오백호 실장도 케이케이처럼 정점에 오를 만큼 잘된 가수를 맡은 건 처음이었다.
오히려 대형 가수를 키우려고 하다 보니 아라 엔터테인먼트나 대형 기획사의 힘에 대해서 깨닫는 중이었다.
그 아래에 있을 때는 단지 방송 뚫기 힘들다, 이 정도였는데 위로 올라오니 그들이 더 자리를 내어주지 않으려고 공고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그런데 이 원곡자들이 다 허락해주려나 모르겠네.”
“아마 해주실 거예요.”
“그래?”
“아니, 해주실 겁니다.”
도욱이 조금 더 확실한 어조로 답했다. 오백호 실장은 특별 무대로 구성할 곡 목록 등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긴 하네······.”
다행스러우면서도 당연하게도 케이케이 측의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TBN에서는 무대를 위해서라면 케이케이에게 무대 시간을 조금 더 할애할 수 있다고 반색을 해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케이케이의 무대 순서도 리틀 스타의 다음, 사방신화의 바로 앞으로 바뀌었다.
아라 엔터테인먼트의 눈치를 보면서도 이제는 이름 있는 가수가 된 케이케이 쪽의 편을 들어줄 명분이 TBN에게 생긴 것이었다.
멤버들은 곧바로 연습에 들어갔다. KVS 시상식 준비도 해야 했지만, TBN 가요 시상식이 먼저였기 때문에 사실 더 급했다.
게다가 원래 있는 곡들을 편곡한 KVS 시상식용 곡과는 달리, TBN에서 할 무대는 새로운 노래를 짧게 편곡했다지만 세 곡이나 더 해야 했다.
몇 주의 시간이 남아있었다곤 해도 빠듯한 시간이었다. 다행이라면 다른 스케줄을 비워 놓은 상태였다는 것이었다.
또 어느덧 활동을 하면서 실력이 늘고, 서로에 대한 이해도 늘면서 연습을 함에 있어서 ‘척하면 척’으로 합이 잘 맞는 상태가 된 것도 도움이 됐다.
데뷔 전, 연습생 신분으로 처음 케이케이라는 그룹을 구성했을 때만 해도 커버 댄스 하나를 완벽하게 춰 내려면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걸렸었다.
어느 멤버가 어떤 역할, 어떤 안무를 맡을지도 의견이 분분했고, 그것을 케이케이 멤버들에 맞게 수정하고 소화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3일 정도면 충분했다. 한 번 대충 보기만 해도 누가 무슨 역할을 하면 될지 감이 왔고, 소화 능력도 월등하게 발전한 상태였다.
도욱도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 무대를 기획한 것이었다.
[제목 | TO. 사랑하는 키링
작성자 | 케이케이_안형서
작성시간 | ..12.21. 07:34:21
(사진)
키링들! 일어날 시간입니다! 다들 학교랑 회사 잘 다녀오시고!
저희는 이제 연습 마치고 자러 갑니다!
키링들한테 더 좋은 무대 많이 보여줄 수 있게
끝장나게 노력하고 있으니까 이번 시상식 무대 기대 많이 해주세요
사랑합니다~! 캬캬캬캬 ]
연습을 마치고 아침 일곱 시 반에 올린 안형서의 셀카와 글은 팬들의 등굣길과 출근길 팬들의 마음을 울렸다.
팬들은 시상식 무대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노력하는 자신의 아이돌을 위해 무언가를 더 해주고 싶은 마음으로 불타 올랐다.
할 수 있는 것 첫 번째는 투표였다.
케이케이 팬들은 인기상 투표 총공세를 시작했다. 이미 투표 1위였지만, 2위 가수와의 차이가 5퍼센트 정보밖에 나지 않았다.
팬들은 완벽하게 압도적으로 투표에서 이겨 인기상을 비롯한 다른 상들을 케이케이가 가져갈 수 있도록 하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역시 음반 판매량을 늘리는 일이었다.
외국 팬들까지 끌어 모아 케이케이 팬들은 시상식에서의 케이케이를 빛내는 일에 열을 올렸다.
여기저기 인터넷 커뮤니티와 팬페이지가 시상식 관련 이슈로 뜨거워 지고 있었다.
***
그리고 그 시각 골머리를 앓고 있는 건 TBN 쪽이었다.
큐시트는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혀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문제는 대상이었다. 물론 성적에 따라 상을 받아야 하는 게 마땅했지만, 여러 가지 정치적인 상황을 생각해서 상을 잘 배분하는 것도 그들의 일이었다.
“사방신화는 몇 분을 줬는데도 맨날 하던 거나 하는데······. 케이케이 봐라 지들이 먼저 무대 꾸미겠다고 나오는 거.”
TBN 예능 및 음악채널 본부장을 맡고 있는 이가 투덜대자 옆에 앉아있던 시상식 담당 CP가 답했다.
“거긴 지금 내부 문제로도 시끄러울 거예요. 탈퇴를 하네 마네 하고 있으니까.”
“새로 키운다는 애들도 잘 안 되고······. 서준이 그거는 아예 매장당한 수준이고.”
“머리가 복잡하겠죠.”
“사실 지금 봐선 케이케이가 대상을 받아야 되는 건데······.”
그렇게 말하다가도 본부장은 고개를 저었다.
“개천에서 용 나려면 진짜 용이 돼야지. 호랑이 같은 성적으로는 뭘 받을 수가 없지, 절대.”
“뭐······.”
CP도 어느 정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내년에 있을 시상식을 미리 준비하러 한정식 집에 나와 있었다. 내년 시상식부터는 한국에서 아시아 전체로 시장을 넓히고, 시상식의 격을 높일 야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투자를 받아내는 일이 무척이나 중요했다. 특히 중국, 일본 시장을 제대로 뚫어야만 했다.
오늘은 그 시장 개척의 발판이 될 날이었다.
“도착하셨습니다.”
문이 열리고, 종업원이 두 사람에게 약속된 손님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두 사람은 대화를 중단하고, 앞에 놓인 물을 마시며 긴장을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