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아이덴티티 (4)
“어, 도욱 씨. 문제 있어요?”
“아닙니다.”
도욱의 눈 밑이 조금 거뭇했다.
“오늘 촬영 끝나고 드릴 말씀 있는데 식사······ 괜찮으시겠어요?”
“도욱 씨와 식사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죠. 오늘 교실 씬 다 찍고 나면 여덟시 쯤 될 것 같은데······.”
“네. 그럼 이따가. 효원 형도 시간 되면······.”
옆으로 다가온 박효원의 얼굴이 피딱지와 멍으로 엉망이었다.
정환에게 맞은 효원을 표현하기 위한 분장이었다. 다음 씬은 분장을 한 채로 한 번 더 정환이 박효원을 무차별 폭행하는 씬이었다.
박효원도 촬영 전보다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 상태였다. 예민한 기운이 바깥으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사실 예민한 배우들 중에는 촬영 시작부터 끝까지 촬영 때 외에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만 앉아있는 배우도 있었다.
다행이 박효원은 그런 배우는 아니었다. 나름대로 촬영할 때와 안 할 때의 분리가 잘 되는 편이었다.
“난 안 부르나 하고 존나 빈정 상할 뻔했네.”
박효원의 말에 윤성아 감독과 도욱이 피식 웃었다. 그러다 윤성아 감독이 도욱에게 물었다.
“그런데 요즘 잠 많이 못 잤어요?”
“네? 아······. 조금.”
“설마 불면증?”
“아닙니다. 그런 것까진. 그냥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져서. 사실 활동할 때보단 훨씬 많이 자고 있어요.”
“정말이에요? 아니 아이돌들 활동할 땐 잠을 도대체 얼마나 못 자는 거예요. 지금보다 못 자면?”
도욱의 답에 윤성아 감독이 조금 놀란 듯 물었다. 박효원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이며 이야기했다.
“역시 쉽게 돈 버는 직업은 없구나. 십팔.”
“나도 불 좀.”
윤성아 감독도 담배는 꺼냈다. 박효원이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한 대만 피우고 바로 촬영 들어가죠.”
도욱이 끄덕였다. 도욱은 흡연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리에서 떨어져 자신의 의자가 있는 곳으로 가 대기했다.
<배우 강도욱>
도욱의 의자 뒤에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주요 스태프와 배우들이 대기하는 의자에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는데, 영화인들 사이에서는 촬영장에서 이러한 의자를 가져 보는 게 소원이라는 이들도 있었다.
도욱은 자리에 앉아 다음 촬영에 대해 생각했다.
최근 도욱은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무언가 달라지고 있었다. 잠을 못 자는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푸른 고래>를 선택했을 때, 도욱은 이 영화를 찍으며 자신의 내면에 뿌리깊이 존재하는 ‘폭력피해자 김보명’이 자극 받게 될 것을 예상했었다.
그러나 오히려 자극을 통해 완벽하게 김보명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소심한 성격 등 많은 부분들이 강도욱으로 살면서 고쳐지고, 극복되었지만 깊은 곳에 있는 우울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가해자 역할인 것에 대해서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피해자 역을 맡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피해자를 연기하면, 과거의 내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야 한다는 건데······. 비참해지기만 할 뿐 별 도움은 되지 않았겠지. 거기에 직접적으로 트라우마를 건드리게 되는 것이니까······. 하지만 안일한 생각이었다······.’
더운 바람이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도욱은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고등학생처럼 보이기 위해 앞머리를 길러 눈썹 근처까지 내려오게 한 상태였다. 머리를 올백으로 넘기고 무대에서 남성성을 어필하던 때와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타이 없이 단추를 잠그지 않고 풀어헤친 교복 셔츠까지. 도욱은 지금 완벽하게 방황하는 열여덟로 보였다.
‘내게도 이런 폭력성이 있었던 건가······.’
행인 역을 맡은 배우들에게 욕설을 하며 침을 뱉고, 친구였던 효원에게 발길질을 하고. 연기를 하면서도 연기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도욱은 그 역할에 완벽하게 몰입해서 연기를 하는 스타일이었다. 연기는 연기일 뿐이라고 되뇌어 봐도 소용없었다.
자신에게도 이러한 폭력성이 있었다는 것이 놀랍고 두려울 뿐이었다.
‘서강준과 같은 인간이 된 기분이다.’
그것이 도욱을 괴롭게 했다. 김보명이 약해서 괴롭힘을 당했을 뿐, 서강준과 같이 힘이 세고 집안이 좋았다면, 자신도 서강준과 같은 가해자가 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자, 다음 씬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조감독의 외침에 대기하던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도욱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
윤성아 감독과 박효원 그리고 도욱은 촬영장 근처의 허름한 고깃집에서 식사 자리를 가졌다.
“이모님! 여기 삼겹살 삼인분에 공깃밥 세 개랑······. 술은······. 소주? 소주 먹나?”
나서서 주문을 하던 윤성아 감독이 물었다. 박효원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박효원은 소주 다섯 병은 거뜬히 마시는 주당이었다.
“도욱 씨는 술은 먹어요?”
“아······. 네. 많이는 못 마시고 한두 잔 정도는요.”
도욱의 답에 윤성아 감독이 알았다는 듯 소주 두 병을 추가로 주문했다.
성인이 된 이후로 숙소에서 멤버들과 치킨을 먹으며 맥주를 나눠 마시거나, 회사 회식 자리에서 소주 한두 잔을 한 게 도욱이 가진 술자리의 전부였다.
이렇게 외부에서 술을 마시는 건 처음이었다.
술을 나서서 찾아다니는 건 이미지에 좋을 게 없겠지만, 앞으로의 사회생활을 위해서는 이런 자리에서 술을 마시며 어울리는 걸 배우는 것도 좋을 듯했다.
지글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고기가 익어가기 시작했다. 막내인 도욱이 알아서 고기를 굽는 중이었다. 벌써 한 판을 갈아 치운 후였다.
도욱은 반 병 정도 마셨으나, 테이블 위에는 소주 빈 병만 세 병째였다. 세 사람 모두 적당히 취기가 오른 채였다.
“이거, 계속 톱스타가 고기 굽게 놔둬도 되는지 모르겠네.”
윤성아 감독이 너스레를 떨었다.
“윤 감독님. 그 톱스타 다치게 한 건 생각 안 해요?”
박효원이 윤성아 감독에게 딴지를 걸었다. 윤성아 감독과 박효원의 시선이 동시에 도욱의 볼에 향해 있었다.
아까 촬영장에서 의자를 던지는 씬을 촬영하다 부서진 사물함 파편에 긁혀 도욱의 볼에는 상처가 생겼다.
“괜찮습니다. 살짝 긁힌 것뿐인데요.”
도욱이 머쓱한 듯 답했다.
“흉 안 지게 관리 잘해야겠네. 이렇게 순한 사람이 촬영만 되면 돌변해선······.”
윤성아 감독의 말에 집게를 내려놓던 도욱이 입을 다물었다.
“제가 원래 그런 사람일지도 모르죠.”
도욱의 말에 윤성아 감독과 박효원이 잠시 도욱을 쳐다보았다. 윤성아 감독이 고개를 저었다.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연기를 잘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 그럼, 그럼.”
윤성아 감독은 농담처럼 말했지만 도욱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그런 도욱을 보며 윤성아 감독이 잔에 소주를 스스로 따랐다.
“아, 제가······!”
“아니. 괜찮아요. 혼자 따라 마시는 게 더 편해요. 근데 그거 알아요?”
“네? 뭘······.”
“원래 그런 애들은 이 연기 못 해.”
윤성아 감독이 확신에 차서 말했다. 박효원도 끄덕이며 덧붙였다.
“맞아. 그런 새X들은 찔려서 그렇게 진짜로 연기 못 하지. 자기 자신이 들통 날 수도 있거든. 진짜니까.”
“정확해! 바로 그 말이에요. 진짜로 질 나쁜 애들한테 깡패 연기 시키잖아? 그럼 그냥 깡패야. 메쏘드 연기 이런 게 아니라 그냥 깡패가 돼버리는 거야. 그걸 지들도 또 알아요. 그래서 차마 그렇게 못해. 어설프게 흉내만 내게 되지. 근데 지금 도욱 씨 어때요. 완전 정환이 그 자체잖아.”
“아······.”
도욱은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아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것도 도욱 씨가 착해서 그래.”
윤성아 감독이 소주를 들이켜며 말했다. 박효원이 날카로운 얼굴로 말했다.
“몰입하는 것도, 그 자체라고 생각하는 것도 좋다 이거야. 그렇지만 배우는 배우일 뿐이야. 너는 너무 너라고 생각하고 있어. 너랑 비슷한 역을 하면서 연기를 배워서 그런 걸 수도 있고.”
도욱은 멍하니 박효원을 보았다. 어쩐지 얼굴이 뜨끈뜨끈하게 달아오르는 듯했다.
생각해 보면 처음 김보명에서 강도욱이 되었을 때, 도욱은 강도욱이라는 인물을 연기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 연기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니었다. 자신이 원했던 모습을 연기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자신이 절대로 닮고 싶지 않은 모습. 절대로 투영하고 싶지 않은 인물.
서강준과 같은 인물에 자신을 투영해야만 했다. 거기서부터 오는 혼란이었다.
“몰입이랑 매몰은 달라. 역할에 매몰돼서 너를 잃으면 안 되지.”
박효원의 말에 도욱은 어딘가 뒷통수를 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엉켜있던 실 뭉텅이가 데굴데굴 굴러가며 기다란 한 올의 실이 되고 있었다.
“아, 씹. 나 너무 꼰대 같아 지금! 저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요.”
박효원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고깃집 문 밖으로 나갔다.
도욱은 그런 박효원을 보며 편안한 표정이 되었다. 윤성아 감독이 도욱에게 잔을 들어 건배 제의를 했다.
“효원이 저놈이 도욱 씨를 정말 좋게 봤나 봐요. 저런 얘기 해주는 애가 아닌데.”
도욱이 작게 미소 지었다.
“그나저나 할 말이 있다는 건······. 그 얘기부터 했어야 되는데 다른 얘기만 해버렸네.”
“아, 다름이 아니라 저희 회사에서······.”
“촬영 일정 더 줄이라는 건 아니죠?!”
윤성아 감독이 놀라 물었다. 도욱이 얼른 손사레를 치며 부정했다.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저희 회사에서 영화에 투자를 하고 싶다고 해서요.”
“네?”
이제 영화 촬영은 중반부에 다다라 있었다. 일정 금액 투자를 받고 시작한 영화여서 촬영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추가 투자를 받는다면 보정 및 편집 등 후반 작업과 마케팅 등에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윤성아 감독으로서는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투자라니······.”
투자를 하겠다고 나선 건 권흥조 제작이사의 뜻이었다.
도욱이 예술영화에 출연하겠다고 나선 이후, 권흥조 이사는 바쁜 와중에도 시나리오를 직접 보고, 영화 관련 인물들을 찾아 영화가 어떤지 조언을 들었다.
결과적으로 긍정적인 답변들을 듣게 된 권흥조 이사는 조애니 부장과 협의 후 도욱이 출연하는 영화에 투자 결정을 내렸다.
본래도 힛 엔터테인먼트는 사업 영역을 확장할 큰 꿈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 자본의 유치와 케이케이의 성공으로 힛 엔터의 꿈은 가까워져 있는 상태였다.
때마침 좋은 투자처였다. 예술영화인지라 투자금액이 크지 않아 부담도 적었다. 물론 상업영화만큼의 성공은 못 거둔다고 해도, 예술영화로서 수익을 낼 수 있는 방법이 여러모로 있었다.
거기에 자신들의 주요 소속 연예인인 도욱이 출연하는 영화이니 어떻게 해도 홍보적으로 본전은 찾을 수 있을 거란 게 권흥조 이사의 계산이었다.
“도욱 씨······.”
“네.”
“덕분에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거란 자신이 드네요.”
윤성아 감독이 말했다.
“고민하고 있었는데 힛 엔터의 투자까지 받는다면 출품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출품이라면······.”
“국제 영화제 말입니다.”
***
몇 달 후, <푸른 고래>의 시사회 당일.
당일은 서강준 출연 드라마인 <신데렐라>의 첫 방송일이자 기자간담회가 있는 날이기도 했다.
오전, <푸른 고래>의 시사회에 가기 위해 샵에 들러 머리를 하고 있던 도욱은 샵 사람들이 모여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뭐야? 부정입학?”
“헐. 댓글 보니까 다 서준이래. 정황상 서준밖에 없잖아. 오늘 서준 무슨 드라마 방영일 아냐?”
“뭐야. 진짜야? 서준?”
<주원대 입학 비리, 유명 아이돌 그룹 멤버 S씨 연루>
<주원대 예술대학 부정입학.. 검찰 조사 중>
오늘 아침 뜬 기사의 헤드라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