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
아이덴티티 (1)
***
“마, 어떠나.”
“Be honest.”
케이케이의 연습실, 도욱은 정윤기과 김원을 마주한 채였다. 정윤기과 김원의 볼 아래로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석지훈은 ‘캠핑 48시간’ 녹화를 떠난 상태였고, 안형서와 박태형도 각자 개인 레슨이 잡혀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도욱 한 명뿐이었다.
“아······.”
“왜 구리나.”
도욱이 잠시 답을 지체하자 정윤기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도욱에게 무어라 하는 것이 아니었다. 도욱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실망감이 울컥 치솟은 탓이었다.
“아니에요!”
도욱이 얼른 부정했다.
방금 전 정윤기와 김원은 두 사람의 유닛, 오케이의 2집 앨범 타이틀곡을 도욱의 앞에서 선 보였다.
아직 녹음 전이었기 때문에 MR을 깔고 두 사람이 라이브로 랩을 했다.
곡이 나왔다는 얘기는 도욱도 건너 들어 알고 있었다. 도욱이 솔로 활동에 박차를 가하는 동안 두 사람은 곡을 받아 자신들의 앨범을 제작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프로듀서는 외부 프로듀서로, 최근 한국 힙합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인물이었다. 이제 힙합 유닛인 오케이 앨범은 도욱의 손을 떠난 상태였다.
정윤기와 김원도 어느덧 경력이 쌓였고, 음악 세계가 탄탄하게 구축된 만큼 두 사람이 원하는 뜻과 방향대로 앨범을 내는 것도 좋을 듯했다. 스스로 발전해나가는 과정이었다.
“아니에요, 전혀. 좋아요. 가사가 슬프면서도 동시에 리듬 때문에 신나는 것 같기도 하고.”
“진짜가? 니 괜히 우리 상처받을까봐 그러면 안 된다.”
“브로, 아직 녹음 전이니까 수정할 수 있어.”
도욱은 픽 웃으며 답했다.
“제가 빈말은 안 하잖아요. 진짜로 좋아요.”
그제야 조금 안심한 듯 김원과 정윤기가 서로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머리를 싸매 고민하고, 고생했는지 여실히 느껴지는 곡이었다.
“가사 모르고 들었는데도 귀에 다 들려요. 특히 원이 형 발음 진짜 좋아진 것 같아요.”
도욱이 디테일한 부분들에 대해 칭찬하자 두 사람의 얼굴이 더욱 밝아졌다. 김원이 신나서 되물었다.
“그래? 나 일부러 영어랩 거의 안 썼어!”
“네, 진짜 많이 늘었어요. 그렇지만······.”
“어?”
“형은 영어 랩할 때 목소리가 장점이기도 하니까 끝 부분에 읊조리듯이 한 마디 넣어도 될 것 같은데······.”
“거 봐! 내가 넣으라고 했는데 얘가 뺀 거야!”
김원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그럼 다시 넣어야겠다며 휴대폰을 뒤적거려 가사를 찾았다.
현재는 랩메이킹 중이었고, 본격적인 녹음은 내일부터였기 때문에 충분히 수정 가능했다.
“그리고······.”
“뭐가. 니 우리 전체 그룹 프로듀서기도 하다. 터놓고 말해봐라.”
정윤기가 재촉했다. 도욱은 고민 끝에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멜로디 부분이 조금 약한 것 같아서. 멜로디 나올 때 뒤에 베이스음을 줄이고, 멜로디 라인을 키우면 어떨까 싶은데······. 곡 전체엔 지금이 더 나을 거라 그 프로듀서분이 의도하신 그대로 가는 게 맞을 것 같기도 하고······.”
아무래도 장르나 가치의 차이인 것 같았다.
도욱은 후렴구에서 청중을 후킹(Hooking)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곡 전체의 완성도도 중요하지만 어쨌든 곡이 더 많이 알려지는 게 대중가요 가수인 도욱으로선 더 중요했다.
도욱의 말에 정윤기와 김원이 가만히 듣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은 생각해보긴 해야겠네.”
“네. 형들이 원하는 방향대로 가는 게 최우선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도욱이었지만, 정윤기와 김원도 욕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오케이 1집 앨범을 낼 수 있었던 것도 도욱의 덕분이었다.
도욱의 입김이나 영향력이 없었다면, 자신들이 하고 싶은 힙합 음악으로 유닛 앨범을 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번 2집 앨범은 더욱 잘 해내고 싶었다. 그러한 평가는 아무래도 음원차트 순위 등으로 받게 돼 있었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도욱의 말이 맞을 듯했다. 멜로디 라인을 더 세게 살려서 청중의 귀에 꽂아야 했다.
정윤기와 김원은 그런 생각을 하며 도욱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고맙긴요. 다른 멤버들은 아직 못 들었죠?”
“어. 아직. 이따 오면 또 들려줘 봐야지.”
“네.”
세 사람이 연습실에서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 다른 개인 보컬 레슨을 받고 온 안형서가 연습실 안으로 들어왔다.
안형서를 발견하자마자 김원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안형서에게 오케이의 새 곡을 평가하라고 했다. 안형서는 들고 있던 가방도 채 내려놓지 못하고 멍하니 서서 정윤기와 김원의 랩을 들어야만 했다.
***
연습실을 나온 도욱이 향한 곳은 회의실이었다. 솔로 앨범 활동을 마무리했으니 이제 오백호 실장과 향후 스케줄을 논의할 시간이었다.
대략적인 일정은 있었다. 오케이가 활동하는 동안 개인 활동을 하다 오케이 활동이 마무리 될 때쯤엔 한국을 비롯해 일본과 중국 등 콘서트로 투어를 돌 계획이었다.
도욱의 개인 활동이라고 하면 연기자로서의 활동이었다.
‘준비하라 1999’ 이후 도욱에게는 섭외가 물밀듯 들어왔지만, 모두 거절한 상태였다. 지금은 ‘준비하라 1999’ 직후보단 덜했지만, 언제든 연락만 달라던 드라마 제작사가 여럿 있었다.
“너한테 들어오는 대본이 사무실에 쌓여있다, 쌓여있어. 도 대리랑 직원들이랑 검토해서 골라냈는데도 많아.”
“아, 그런데 오 실장님. 저한테 직접 들어온 제의가 있어요.”
“너한테 직접? 무슨 드라만데.”
“그게······. 드라마가 아니라 영화예요.”
“영화? 영화 제의가 들어왔다고?”
자판기에서 뽑아온 밀크커피를 마시던 오백호 실장이 놀라서 물었다. 드라마 쪽 섭외 연락은 많았지만, 아직까지 영화 제의는 전무한 상태였다.
물론 제의가 한두 건 있었지만, 거의 지나가는 행인 수준의 역할로 도욱의 이름만 빌리려는, 얕은 수를 써 영화를 띄우려는 이들이었다.
오백호 실장은 그러한 제의는 아예 카운트도 하지 않았다.
드라마 ‘준비하라 1999’에서 연기력을 확실하게 인정받은 도욱이라고 하더라도 아무래도 아이돌이라는 한계 때문인 듯했다. 영화계가 드라마계보다 이상하게 허들이 높았다.
오백호 실장은 영화계의 그런 콧대 높은 점을 우스워하는 관계자 중 하나였지만, 어쨌든 도욱이 영화 쪽으로도 영역을 넓힐 수 있으면 좋은 일이었다.
“네. 학교 선배님이 연출하시는 영환데 시나리오를 받았어요.”
“확실히 그 학교가 영화 쪽으로 다들 잘나가지.”
오백호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대한예술종합학교에 간 것은 도욱의 연기자 인생에 앞으로도 내도록 도움이 될 것이었다.
“감독 이름이 뭔데.”
“윤성아 감독님이신데······. 이번이 첫 작품이에요.”
“아······ 그래?”
신인 감독이라는 말에 오백호 실장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괜히 학교 인맥을 이용해서 별 볼 일 없는 영화에 도욱을 섭외하려 든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그런 걱정을 안다는 듯 도욱이 시나리오를 내밀었다.
“푸른 고래······. 제목이 어째······.”
“읽어봤는데 좋더라구요.”
“좋아?”
“네. 굉장히. 밀도 있고, 좋았어요.”
“도욱이 네가 보는 눈 있는 거야 나도 잘 알지만. 글쎄. 영화라고 해도 아무 영화나 찍을 순 없지. 도 대리가 골라놓은 드라마 대본들 중엔 지상파 미니 주연급 역할도 있어.”
도욱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받았어요, 그 대본들.”
“벌써 받았어? 맘에 드는 거 없었어?”
“사실대로 말하자면······ 네. 없었어요.”
얼마 전 도라희 대리로부터 검토 요청을 받은 대본들의 내용을 도욱도 알았다. 1, 2화뿐인 대본이었지만 도욱의 시선을 잡아끄는 드라마는 없었다.
이미 도욱의 마음이 <가제 : 푸른 고래>로 쏠린 탓도 있었지만, 실제로 아주 크게 대박이 나는 작품이 없기도 했다.
그럴 바에야 윤성아 감독과 영화를 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도욱의 답에 오백호 실장이 조금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는 규모가 어떻게 된대. 제작사는.”
“사실 원래 독립 영화인데······.”
“뭐?”
독립영화라면 일반 영화관에서는 상영도 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정말이지 오로지 ‘연기’만을 생각했을 때만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였다.
물론 오백호 실장도 전적으로 도욱이 원하는 방향의 활동을 하게 밀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수익성을 따져보지 않을 수 없었다. 회사는 이익을 내고자 하는 곳이었고, 회사가 아무런 이익 없는 일에 회사가 선뜻 손을 들어줄지도 알기 힘들었다.
‘도욱이라면 스케줄 하나 정도는 뜻대로 하게 해주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오백호 실장의 개인적인 마음만으로는 되지 않는 곳이 회사였다.
도욱은 얼른 <가제 : 푸른 고래>가 오백호 실장이 생각하는 영화는 아니라는 점을 어필했다.
“투자사가 생겨서 완전히 독립영화는 아니고요. 그렇다고 상업영화는 아니겠지만······. 영화관 상영도 할 예정인 것 같아요. 무엇보다 작품이······. 꼭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실장님.”
오백호 실장이 입을 꾹 다문 채 생각에 빠졌다.
자신의 앞에 놓인 시나리오 앞장을 펼쳤다 덮었다 하는 오백호 실장의 손가락에 근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너······. 서준은 이번에 드라마 새로 들어가는 거 알지?”
오백호 실장의 물음에 도욱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네. 알고 있습니다.”
“드라마랑 예술영화랑은 확실히 대중이 인식하는 정도가 다를 수 있어. 생각······ 하고 있는 거지?”
“네.”
심지 굳은 도욱이었다. 오백호 실장은 도욱의 결정을 최대한 따르는 쪽으로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물론 도욱도 도욱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는 부분들이 있었지만 아직 섣불리 말하긴 힘들었다.
“촬영 기간은 얼마나 되는데?”
“2주요. 2주면 돼요, 실장님.”
“그래. 한 번 위에 말해보자. 나도 시나리오 읽어볼게.”
“네.”
***
정환과 효원의 나이는 열여덟.
살면서 가장 불안정한 나이.
돌봐주는 가족 하나 없이 지방 공사장을 전전하며 돈을 버는 아버지와 사는 정환은 폭력서클의 우두머리이다.
효원은 그런 정환과 중학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던 동네 친구로 말수 없는 성격이다. 공부도 못하고, 성격도 튀지 않으니 효원은 반에서 존재감도 별로 없다.
효원의 삶에서 가장 튀는 부분은 폭력서클 우두머리인 친구, 정환의 존재이다.
정환이 학교 바깥에서 폭력을 휘두르고 다니는 걸 알면서도 효원은 딱히 말리지는 못한다. 그게 효원 자신에게 방어막이 되어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효원은 사실 마음 깊은 곳에 정환에 대한 질투가 있다. 힘이 권력인 남성세계에서 우위에 있는 정환에 대한 질투다.
그러는 정환도 효원에 대한 미묘한 열등감이 있다. 가족이 있는 평범한 삶에 대한 열등감이다.
두터운 줄 알았던 둘의 우정은 미묘한 감정들로 인해 금이 가기 시작한다. 한 번 금이 간 우정을 돌이키기는 너무나 힘들다.
기어코 정환은 효원에게도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여기까지가 <푸른 고래>의 전체적인 줄거리입니다. 다들 시나리오 봤으니까 이미 아시죠?”
윤성아 감독의 말에 한 자리에 모인 도욱과 상대 남자 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는 도욱보다 다섯 살 정도 많은 배우로 이미 독립영화만 세 편을 찍은 이였다.
“그럼 먼저 첫 장면 먼저 가 볼게요. 정환 역 대사부터.”
정환 역은 폭력서클의 우두머리인 만큼 거친 성격이었다. 첫 대사부터 욕설이었다.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도욱이 입을 열었다.
“뭘 쳐다 봐, 이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