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
1막 1장 (4)
“너무 눈이 부셔― 반짝거려―”
익숙한 멜로디와 함께 도욱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오!”
“엇!”
“이거 그거 아냐?”
의외의 곡 선택에 관객석이 술렁였다. 도욱이 시작한 노래는 얼마 전 큰 인기를 얻은 여자 아이돌 그룹의 노래였다.
해당 곡을 부른 여자 아이돌 그룹은 이 곡으로 여자 아이돌 그룹으로서는 최초로 몇 달 동안 연속 1위를 차지하고, 놀라울 정도의 앨범판매량을 기록했었다.
거기에 이 곡의 후렴구에 손동작을 반복하는 춤까지 인기를 끌며 전국민이 나서서 안무를 따라하는 등 한마디로 ‘열풍’을 일으켰다.
도욱은 빠른 템포의 댄스곡이었던 ‘Oh my!’를 감성적인 어쿠스틱 버전으로 편곡해 부르고 있었다.
“Oh my, my, my, my, my―”
모두가 다 아는 곡이었기 때문에 후렴구가 되자 반사적으로 입을 모아 따라 부르는 관객들이 많았다. 노래를 따라 부르는 관객들과 호흡하며 도욱은 노래를 이어갔다.
화음 진행은 그대로였기 때문에 관객들은 쉽게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었다.
관객들은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도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신나고 발랄한 곡인 줄로만 알았던 ‘Oh my!’가 이렇게 서정적인 버전으로 편곡될 수 있다는 것에 놀란 것이다.
“슬픈 것 같아, 막.”
“그러니까. 아, 목소리 너무 좋다. 진짜.”
“어떻게 이걸 이렇게 바꿀 생각을 했지?”
“그니까······.”
관객석에서 감탄이 이어졌다.
그때 쾅, 하며 피아노 건반 여러 개를 동시에 짚은 도욱이 ‘Oh my!’에 다른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여자 솔로가수의 댄스곡이었다. 경쾌한 리듬의 피아노 연주가 시작되자 관객석에서는 자연스럽게 리듬에 맞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짝, 짝- 리듬을 맞춰주는 관객들을 바라보며 도욱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Oh my!’를 시작으로 도욱은 여자 아이돌 그룹과 솔로 가수들의 노래까지 다섯 곡 정도를 짧게 메들리로 불렀다.
노래가 완전히 끝나자 박수가 쏟아졌다. 손가락으로 휘파람을 불어대는 사람들도 있었다.
생각지 못했던 곡 선정과 편곡에 사람들은 뜻밖의 선물을 받은 듯한 기분으로 들떴다.
알고 있던 노래들이 전혀 다른 분위기의 곡으로 재탄생한 것을 듣자 관객들은 어떤 ‘희열’을 느꼈다. 곡을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을 알게 된 기분이었다. 또 편곡된 곡 자체가 워낙 좋았다.
거기에 더해진 도욱의 감미로운 음색, 깔끔한 노래 실력, 훈훈한 분위기 모든 것이 맞아 떨어지며 완벽한 무대가 되었다.
관객과 호흡하는 모습까지 보여주어서 관객들의 만족도는 최고를 찍었다.
“와~ 정말 대단한데요?!”
유희원이 마이크를 든 채 무대 위로 걸어 나왔다.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그랜드 피아노를 뒤쪽으로 치우고 의자 두 개를 들고 나와 도욱과 유희원이 앉을 자리를 마련했다.
유희원의 눈이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이러한 음악 프로그램의 MC인 만큼 유희원도 유희원대로 굉장히 명성 높은 뮤지션이었다.
가수로 데뷔했지만, 가창보다는 작곡 쪽에서 더 진가를 발휘하는 이였다.
그런 유희원이 보기에도 도욱의 편곡 실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원곡의 이미지를 아예 죽이지 않으면서 자신에게 딱 맞게 편곡해 왔다. 이렇게 편곡한 곡들을 당장 음원으로 내도 될 듯했다.
“하하, 감사합니다.”
“아니···. 이거 진짜 반칙 아닌가? 이렇게 생긴 사람이 작곡에 노래까지 잘해버리면······. 나는 설 자리가 없어지는데?”
유희원의 말에 도욱이 겸손한 표정으로 웃었다.
“웃으니까 정말 눈이 부신 느낌이네요. 남자인 저까지 반하겠어요. 케이케이 멤버들은 도욱 씨한테 반한 사람 없나요?”
유희원의 농담에 관객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좋은 무대 정말로 감사합니다. 정말, 이 프로그램 이름이 유희원의 홀리데이이지만요. 제발 가지 마 들을 때는 정말 홀리······ 제가 다 홀리해지는 느낌이었어요.”
계속되는 유희원의 칭찬에 도욱이 어쩔 줄 몰라하며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유희원은 도욱도 좋아하는 음악가였다. 유희원의 작곡한 곡들 중 김우연이 부른 몇 곡은 도욱이 백 번쯤은 들었던 곡도 있었다.
“정말 영광입니다. 이 자리에 선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제가 존경하는 선배님께 칭찬을 들으니까요.”
“아, 이 사람. 겸손한 스타일이네요, 또. 거만한 컨셉으로 나가도 될 것 같은데, 실력이!”
유희원이 말에 또 한 번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도욱도 소리 내어 웃었다.
‘유희원의 홀리데이’의 재미에는 좋은 음악을 보고 듣는 재미도 었었지만, 이렇듯 유희원의 입담도 한몫했다.
“이 메들리 편곡이랑 무대는 저희 프로그램 위해서 특별히 준비하신 거라고······.”
“네. 관객 분들께 어떤 노래를 들려드리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제 노래만 들려드리기보단 관객분들과 더 함께 즐길 수 있는 노래를 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제 노래는 다른 곳에서도 많이 하니까.”
“고마워요, 진짜. 이렇게까지 성의 있게 준비해오면 저도 뭐라도 해야 될 것 같고 너무 부담이긴 한데!”
유희원이 넉살을 떨자 도욱이 아니라며 손사레를 저었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유희원은 진심으로 성의 있게 준비해와 자신의 프로그램에 좋은 무대를 보여준 도욱에게 감명을 받은 상태였다.
유희원이 자리에서 갑작스럽게 일어서며 말했다.
“아니, 제가 정말 부담스럽긴 한데 그만큼 고맙기도 해서요.”
“네?”
“실례가 안 된다면 도욱 씨 노래 ‘Darling’을 제가 연주곡으로 연주해 봐도 될까요? 선물로 드리고 싶은데.”
도욱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관객석에서는 ‘오오’ 하는 기대감 어린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유희원이 저벅저벅 걸음을 옮겨 그랜드 피아노로 다가갔다. 피아노 의자에 앉아 손을 풀기 시작했다.
예정에 없던 연주였다. 그러나 종종 유희원이 음악적 영감을 받으면 연주를 하는 일이 있었으므로 제작진들은 당황하지 않고 음향을 조정하고, 카메라 위치를 재조정했다.
관객석에서 박수가 나왔다.
박수를 받으며 유희원이 ‘Darling’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도욱이 여자 아이돌 그룹의 댄스곡을 편곡했듯, ‘Darling’도 유희원의 손에서 유희원의 방식대로 연주되고 있었다.
후렴구가 반복되는 부분에서 유희원과 도욱의 눈이 마주쳤다. 도욱이 마이크를 들고 보사노바가 가미된 느낌의 ‘Darling’을 부르기 시작했다.
곧장 연주곡으로 바꾼 유희원도 대단했지만, 갑작스럽게 바뀐 곡의 흐름을 읽어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도욱도 대단했다. 놀라움의 탄성이 이어졌다.
녹화 현장이 달달함으로 녹아들고 있었다.
도욱은 잠깐의 토크를 마치고 자신의 곡인 ‘Darling’ 원곡 무대를 했다. 그날의 엔딩 무대였다.
도욱이 무대에서 내려오며 ‘유희원의 홀리데이’ 녹화는 마무리되었다. 녹화장을 빠져 나가는 관객들의 표정은 모두 상기되어 있었다. 모두 도욱에게 홀린 듯 도욱의 칭찬을 입이 마르도록 하고 있었다.
마지막 댄스 무대까지 인상 깊었기 때문이었다.
무대를 내려온 도욱에게 유희원이 직접 찾아와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
“김우연이 하도 자기 제자라고 자랑을 해대서 얼마나 잘하나 했는데, 방송에서 볼 때보다도 훨씬 잘하네요.”
“선생님이요? 하하. 감사합니다. 정말로. 아까 연주도 너무 좋았어요.”
“아니에요. 도욱 씨 보니까 내가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이 진짜 많이 들었어. 자극이 됐어요.”
유희원이 덧붙였다.
“혹시 나중에 기회 되면 우리 앨범에도 참여해줘요.”
“네? 물론입니다. 언제든 불러만 주세요.”
“이 약속 잊어버리면 안 돼요!”
당연한 말씀 마시라고 도욱이 깍듯하게 답하자 유희원이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
‘유희원의 홀리데이’ 방송이 나가고 나자 예상대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특히 도욱이 했던 메들리 무대는 마이튜브에 편집되어 올라가면서 몇 만 뷰를 금세 넘어버렸다. ‘유희원의 홀리데이 레전드 무대’라고 치면 도욱의 무대부터 가장 먼저 떴다.
거기에 ‘Oh my!’를 도욱 식으로 커버한 곡들도 우후죽순으로 올라왔다. ‘Oh my!’가 다시 한 번 차트에 진입하는 등의 나비효과를 불러오기도 했다.
앞으로 도욱의 음악 세계가 기대된다는 전문가들의 평가도 뒤따라 올라왔다.
도욱은 음악 방송 전 프로그램에서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성공적인 첫 솔로 앨범 활동이었다.
“수고 많았다, 도욱아.”
“수고했어!”
마지막 음악 방송이 끝나고 스태프들이 지나가며 도욱에게 인사를 건넸다. 활동이 잘 마무리된 만큼 분위기는 무척이나 좋았다.
“자, 박수 한 번 치고 갑시다!”
오백호 실장의 목소리가 대기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코디들과 댄서팀 모두 환호하며 진심 어린 박수를 보냈다. 도욱은 허리 숙여 자신의 활동을 도와준 이들에게 인사했다.
그렇게 마지막 음악 방송을 마치고, 도욱은 오백호 실장과 함께 차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혼자 활동해보니까 어땠어? 힘들지?”
오백호 실장이 차를 출발시키며 물었다. 뒤편에 앉은 도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힘들더라고요. 아무래도 여러 명이서 나눠하던 걸 혼자하니까.”
“그래. 그래도 잘했다.”
“그리고 멤버들 없으니까 외롭기도 하고······.”
“복작복작하니 시끄러워도 애들 있는 게 낫지?”
“그럼요.”
도욱은 멤버들을 생각하며 답했다. 팬카페에 올릴 셀카를 찍을 때도 옆에서 이 각도가 낫다, 저 각도가 낫다 코치해주던 멤버들이 없으니 더 어색한 기분이었다.
도욱은 어느덧 사람 사이에 섞여 지내는 게 편안해진 자신이 놀라웠다.
‘영혼이 바뀐 채로도 시간이 꽤 가고 있구나······. 확실히 달라지고 있어. 미래도, 나 자신도.’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오백호 실장이 백미러로 도욱을 확인하곤 말했다.
“최 기자한테 연락 왔었다.”
“······벌써요?”
“어, 뭐 정확히는 더 찾아봐야 하겠지만 대충 실마리를 잡은 모양이야.”
“그렇군요.”
“파보니까 서강준만 관련된 게 아닌 모양이래.”
“아······.”
도욱은 끄덕였다. 악이 무서운 건 그런 것이었다. 악은 전염성이 짙었다. 하나로만 끝나는 악은 없었다. 두 개로, 세 개로 수만 개로 번져나가기 쉬운 성질의 것이었다.
“크게 터뜨릴 수 있겠네요.”
“그렇지. 나는 다만······.”
오백호 실장이 조금 찌푸리며 말했다.
“너는 깊게 연관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넌 말을 흘린 것만으로도 네 친구를 위해서 할 일을 다 한 거야. 다음 일은 최 기자한테 맡겨두고.”
친구가 아니라 도욱, 자신의 일이었다.
그러나 걱정이 되는 오백호 실장의 마음도 잘 알아서 도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복 당하지 않으려고 힘을 키우고 있는 거다. 누구에게든 후환은 없어야 해.’
생각하며 도욱은 가방 속에 넣어 두었던 시나리오를 꺼냈다.
<가제 : 푸른 고래>
드디어 시나리오를 검토할 시간적 여유가 생긴 것이다.
도욱은 가만히 시나리오 첫 장을 넘겼다.
한 장, 두 장 읽어 내려가던 도욱의 눈이 질끈 감겼다. 윤성아 감독의 <가제 : 푸른 고래>의 내용은 악몽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