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1막 1장 (3)
“고마운 일이요······?”
도욱이 벙 찐 채 물었다.
“네. 아, 제 소개도 안 하고 너무 본론부터였죠. 일단 제 이름은 윤성아입니다.”
윤성아는 케이케이가 교복 CF 촬영을 하던 당시 도욱이 작은 위로를 건넨 적 있는 이였다.
도욱으로서는 서러운 일을 당해 울고 있는 이를 지나치기 힘들어 베푼 아주 작은 호의였으나 받는 입장에서는 가슴에 남을 만한 일이었다.
때문에 윤성아는 늘 좋은 마음으로 케이케이가 성장해 나가는 것을 TV로 지켜보고 있었다.
교복 CF를 찍을 때만 하더라도 떠오르는 신인이었던 케이케이는 이제 아이돌 중에서는 가장 톱급의 위치에 있는 그룹이었다.
꼭 도욱의 일이 아니었어도, 교복 CF를 찍는 모습을 보며 윤성아는 케이케이가 충분히 더 잘될 거라고 확신하기도 했었다.
“다시 만나게 돼서 너무 반가워요.”
“아, 네······. 저도. 그런데 여기엔 어떻게.”
도욱이 의문을 가진 채로 물었다.
“성아도 자네와 전공은 다르지만 내 제자 중 한 명일세. 아무튼 자네에겐 선배인 거지.”
정 교수는 두 명 제자의 만남을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았다.
윤성아는 도욱과 마찬가지로 대한예술종합학교 출신이었다.
연기 전공이 아닌 연출 전공이었지만 연기 전공과 연출 전공이 팀을 구성해 단편영화를 만드는 수업에서 정 교수로부터 지도를 받았었다.
정 교수가 수업 시간에 윤성아와 토론 형식으로 윤성아의 팀이 제출한 단편영화에 대해 깊이 이야기한 적이 있을 정도로 윤성아의 연출 실력은 무척이나 뛰어났다.
연출 전공 교수들 사이에서도 윤성아는 촉망받는 학부생이었다.
도욱도 정 교수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우선 대한예술종합학교에 연기를 하겠다고 온 학생들 중 정말로 흔치 않은 ‘아이돌’ 출신이었다.
‘아이돌’이 어떻게 연기 전공으로 들어올 수가 있냐고 입학 때부터 말이 많았었다. 학교 위신을 깎아먹을 거라는 둥 재능만 있다면 누가 됐든 공정하게 입학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둥 교수진들끼리도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나 이제 그런 말들은 쏙 들어간 상태였다.
우선 도욱은 어렵다는 실기 시험, 가장 까다로운 교수들 사이에서 뽑힌 만큼 연기력이 상당했다. 어디서 대충 연기를 배웠다는 학생들보다도 훨씬 나았다.
도욱은 연기를 할 때 세간에서 흔히들 말하는 ‘쿠세’나 ‘쪼’ 그러니까 괜한 버릇들 없이 깨끗했다. 가르치는 입장에서는 나쁜 버릇들을 없애는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되니 편안했다.
연기의 문제를 떠나서라도 도욱은 훌륭한 학생이었다.
수업 들을 때도 항상 허리 꼿꼿하게 세우고 바른 자세로만 앉아있는 연기 전공 학생들에게는 잘 찾아보기 힘든 모범생적 면모가 있었다.
“선배님이셨군요. 선배님이라고 하면 될까요?”
도욱의 말에 윤성아가 털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졸업한 지도 꽤 됐는데요, 뭐. 그리고 선배 대접 받기엔 초면에 너무 초라한 모습부터 보여 가지고······.”
윤성아가 뒷말을 흐렸다.
“아닙니다, 선배님.”
도욱이 얼른 윤성아가 무안함을 느끼지 않도록 부정했다.
“사회 나가니까 힘들지? 학부생 때가 좋았을 거다.”
“그러니까요.”
정 교수의 짓궂지만 이해가 담긴 말에 윤성아도 웃으며 동의했다.
“돈 벌겠다고 시작한 일인데 버는 돈보다 흘린 눈물이 많았다니까요.”
“그 고생했으니까 또 이렇게 기회 온 걸지도 모르지.”
“네. 거기서 일할 땐 다시 영화 쪽 오니까 기도 살고 좋네요!”
사실 도욱이 교수실에서 윤성아를 처음 보고 뒤늦게 알아차리며 조금 놀랐던 건 윤성아의 인상이 도욱이 보았던 것과는 달랐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무언가 털어내버린 듯 안색까지 밝아져 훨씬 보기 좋았다.
“제가 하고 싶은 건 독립영화였는데 그건 돈이 안 된다고들 난리니까······. 상업 광고 쪽으로 틀어보려고 한 거였거든요. 그때.”
윤성아의 설명에 도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성아는 영화판에서 연출부로 일하다 다시 상업 광고판 막내로 들어갔었다. 영화와 광고는 같은 영상물 작업이긴 해도 전혀 다른 바닥이었기 때문에 막내 생활부터 새로 배우며 경력을 쌓았다.
워낙 기본적인 감각이 좋았기 때문에 나름 재능도 발휘할 수 있었다.
연차가 쌓이니 설움만큼 돈도 나름 벌 수 있었다. 그러나 윤성아가 가장 잘할 수 있고, 가장 하고 싶었던 건 역시 영화였다.
“······그래서 틈틈이 써서 투고했던 시나리오가 있었는데 투자가 결정됐어요.”
“독립영화 투자 받아내기가 하늘에 별 따긴데 운이 좋았지.”
정 교수가 설명을 덧붙였다.
도욱은 끄덕이며 윤성아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제가 무슨 도움을······.”
“저한테는 정말 특별한 일이 될 거라 이렇게 정 교수님 빽까지 이용해서 연락드렸어요. 회사로 연락하면 아무래도 까일 것 같아서. 하하.”
“네?”
“연기······ 제대로 해보고 싶다고 정 교수님한테도 말하셨다고······.”
“네, 맞습니다.”
“그럼 저랑 같이 해보는 건 어때요.”
윤성아의 물음에 도욱은 눈을 깜박였다. 윤성아가 들고 온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가제 : 푸른 고래>
시나리오였다.
도욱은 침을 한 번 삼켰다. 연기를 시작하면서도 독립영화 출연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드라마나 상업 영화 정도에 출연해 이름을 알리고, 대작을 만들어내는 일들만을 생각했던 도욱이었다.
‘푸른 고래······. 처음 들어보는 영화다. 독립 영화계에서는 유명해도, 내가 너무 이쪽에 문외한이었어서 모르는 것일 수도 있고······.’
시나리오를 도욱의 앞으로 내밀며 윤성아가 말했다.
“바쁜 건 알지만, 검토라도 해주시겠어요?”
“아······.”
“다른 건 솔직히 모르겠지만, 도욱 씨 연기 인생엔 분명히 도움이 될 거라고 자신해요.”
그 모습을 보던 정 교수가 말했다.
“그래, 한 번 읽어보게. 자네 출연했던 드라마만큼 명성은 못 얻어도 연기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볼 계기가 될 걸세.”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회사랑도 상의를 해봐야 하는 문제라.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물론 그래야겠죠. 일단은 보기만 해줘요. 감상 말해주면 더 좋고요.”
윤성아의 말에 도욱이 끄덕였다. 도욱은 시나리오를 챙겨 들었다.
‘과연······.’
두꺼운 종이의 질감이 손가락에 닿는 느낌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서강준의 다음 선택은 드라마다. 드라마에 비하면 독립영화로 주목받긴 힘들겠지······.’
어느 정도 위치에 올랐지만, 오히려 그다음이 더 어려웠다. 더욱 신중하게 생각해야만 했다. 선택에 따른 무게감이 달랐다.
‘하지만 나만의 길을 만들어나가는 것도 중요하니까······. 읽어보고 결정할 일이겠지만.’
도욱의 미간이 좁혀졌다.
***
KVS 방송국 공개 녹화 현장.
도욱은 떨리는 마음으로 무대 뒤에서 대기 중이었다. 리허설도 이미 성공적인 상태로 마친 상태였지만, 보통의 음악 방송과는 다른 음악 방송이라는 것이 도욱을 떨리게 하고 있었다.
엊그제 학교에 들렀을 때 받은 시나리오는 아직 펼치지도 못한 상태였다.
새로운 무대를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밤새 준비한 무대 때문에 도욱은 리허설을 할 때만 해도 무척이나 피곤한 상태였지만, 실제 무대에 오르는 시간이 되자 긴장 때문에 피곤도 느낄 수 없었다.
솔로 활동으로 발라드까지 음악적 영역을 넓힌 도욱은 얼마 전 ‘유희원의 홀리데이’ 섭외를 받게 되었다.
오늘이 바로 그 ‘유희원의 홀리데이’ 녹화가 있는 날이었다.
“이번 회차에 오신 방청객 여러분들께서는 그야 말로 ‘계를 타셨’는데요.”
MC인 유희원의 목소리가 울리자 방청객들이 ‘오오’ 하는 기대감 섞인 환호를 보냈다.
“저희 프로그램에는 잘 오지 않는 인기 아이돌이 다음 출연자입니다.”
특히 여자 방청객들의 기대감이 올라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이돌이라는 얘기에 실망한 듯한 기색을 보이는 방청객들도 있었다.
이곳에 온 사람들은 정말로 ‘잘하는’ 음악을 듣고 싶어 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유희원의 홀리데이’는 토요일 밤 열한 시에 방송되는 심야 프로그램이었다. 워낙 밤늦은 시간에 하는 음악 프로그램이다 보니 시청률은 한자리였지만, 음악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는 무척이나 중요한 프로그램이었다.
일단 ‘유희원의 홀리데이’에 출연한다는 사실 부터가 음악적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됐다.
아이돌이나 대중가요 위주의 출연진들로 구성되는 일반 음악방송과 달리 ‘유희원의 홀리데이’에는 음악성 있는 인디 밴드, 가창력이 뛰어난 가수들, 한국인들은 아직 잘 알지 못하는 외국 가수들이 주로 출연해 무대를 꾸몄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예술성 높은 무대가 만들어지기 마련이었다.
거기에 한국 방송에서는 찾기 힘든 음향에도 무척이나 신경을 쓴 방송이었다. 라이브를 하기 최적화된 무대였다.
때문에 기라성 같은 발라드 가수들의 레전드 무대들 중에는 상당수가 ‘유희원의 홀리데이’ 무대에서 탄생한 것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이돌 가수들의 출연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일단 AR을 전혀 깔지 않고 라이브로 무대를 소화할 수 있는 아이돌 가수들이 몇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곡들이 춤을 춰야 하기 때문에 힘든 부분이 있는 게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발라드 곡을 커버에서 부른다고 해도 발라드 가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가창력을 가진 이가 잘 없었다.
최고의 인기를 누린 사방신화도 작년 연말에 처음으로 출연한 게 전부였다.
그런 면에서 도욱의 음악성과 음악 세계를 알리고, 또 한 번 인정받을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무대였다.
“강도욱 씨를 소개합니다.”
유희원의 소개와 함께 도욱이 계단을 밝고 무대 위로 올라 서기 시작했다. 도욱을 환영하는 박수와 신기해하는 함성 등이 쏟아졌다.
확실히 평소 음악 방송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팬들이 쏟아내던 함성과는 다른 종류의 함성이었다.
무대 위에는 도욱의 무대를 위한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다.
도욱은 떨리는 마음으로 관객들에게 인사하고는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았다.
도욱이 준비해 온 노래는 두 곡이었다. 한 곡은 자신의 노래인 ‘제발 가지 마’였다.
피아노에 손을 올려 전주를 시작하자 관객석에서 눈을 감는 이가 나오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감미로운 전주였다.
도욱의 피아노 실력이 물론 피아니스트나 전공자와 같이 뛰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작곡 공부를 하면서 상당한 실력을 갖춘 상태였다.
거기에 도욱 특유의 감수성이 더해지면서 원곡의 연주와는 다른, 조금 더 처연한 느낌이 되었다.
코드를 누르며 도욱이 노래를 시작했다.
도욱이 부르는 ‘제발 가지 마’에 사람들은 감정을 이입할 수밖에 없었다.
“가, 지······ 마······.”
마지막 가사를 띄엄띄엄 늘어뜨려 부르며, 한숨과 함께 곡이 마무리되었다.
‘제발 가지 마’의 곡이 끝나고 나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그냥 들어도 좋았는데 가까이서 들으니까 더 좋아.”
“라이브도 진짜 잘한다. 목소리가 꿀이다, 꿀.”
“와······.”
말을 잇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다.
가만히 뒤편에서 도욱의 노래를 듣고 있던 유희원도 깊이 숨을 들이 마쉬었다. 최근 들어본 어떤 이십 대 가수의 노래보다 노욱의 노래가 좋았다. 기술적인 면에서나 감정적인 면에서나 모두 뛰어났다.
박수 속에서 도욱은 한 번 웃어보였다.
“꺅!”
도욱의 웃음을 본 여성 관객 중 한 명이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커다랗게 터진 비명과도 같은 소리에 웃음이 한차례 터졌다.
훈훈해진 분위기 속에서 도욱은 준비해 온 다음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도욱이 밤을 새게 만든 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