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이슈메이커 (6)
“도욱 씨!”
도도하게 사라지는 백인 여성과 그 뒤를 따르는 사라를 멍하니 보고 있던 도욱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돌아봤다.
유성패션의 이유민 대표였다. 이유민 대표 역시 마크러스 쇼라는 점을 감안한 듯 평소보다 더 신경 쓴 듯한 차림새였다. 모던한 디자인의 마크러스 코트가 아주 잘 어울렸다.
오늘 마크러스 패션쇼에 이유민이 오게 된 건 마크러스 쪽과도 돈독한 친분이 있어서였다. 유성그룹이 글로벌 그룹으로 성장하고 있었으므로 유성그룹의 일원들은 세계에서도 꽤 입지를 다져나가는 중이었다.
도욱은 얼른 허리 숙여 인사하며 감사를 전했다.
“아, 대표님. 여기서 뵙네요. 좋은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회라뇨. 이게 다 전략이죠. 도욱 씨 우리 모델인데, 얼른 더 세계 시장에서도 성장하려면 많이 보고, 여기에서 눈도장도 찍고.”
숨김없는 이유민 대표의 말에 도욱이 그린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 루카스 분위기도 너무 좋고, 도욱 씨도 벌써 반응이 꽤 있던데요?”
“네? 무슨 반응······.”
“한국에서야 말할 것 없고, 여기 블로그에도 사진 올라왔다면서요.”
“아.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역시 이유민 대표는 세심하게 관련 이슈들을 체크하고, 파악하고 있었다.
“보니까 오늘 착장도 너무 멋있네. 여기 중요한 사람들 다 오는데 적어도 다섯 명 이상은 도욱 씨한테 관심 갖지 않을까?”
“하하. 설마요.”
“난 내 눈을 믿어요.”
이유민 대표는 확고했다. 도욱도 봐온 게 있었고, 미리 패션 유행이나 흐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보는 눈이 있다고는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전문가는 아니었기 때문에 확신하기 힘든 부분들이 있었는데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전문가의 확신이 도욱에게도 힘을 실어주었다.
패션쇼장으로 걸어나가며 이유민이 물었다.
“그런데 서서 뭘 그렇게 보고 있었어요?”
“아. 다름 아니라 bombe 편집장을 본 것 같아서요.”
“bombe 편집장? 그, 명성 높은 조이 윈투어 말이에요?”
“네. 단발머리에······.”
“조금 아까 지나가는 것 같긴 했는데. 도욱 씨도 봤구나. 포스가 대단하죠?”
역시 도욱이 제대로 본 게 맞았다.
얼마 전 한국에서도 개봉해 큰 인기를 끌었던 영화 <악마의 패션>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었다. 영화의 모티브가 된다는 건 그만큼 어마어마한 영향력이 있다는 것이었다.
패션잡지계의 톱이라고 할 수 있는 ‘bombe’지의 편집장을 오랫동안 맡아왔고, 편집장 자리에 있으면서 bombe지를 한 단계 끌어올린 인물이기도 했다.
그녀가 맞다고 하면 맞는 거고,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거였다. 적어도 패션계에선 그랬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울고 웃는 디자이너가 뉴욕에만도 수두룩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명품 브랜드의 디자이너들도 어떻게든 조이에게 잘 보이려고 했다.
조이의 평가는 곧 패션계의 평가가 됐고, 하이패션 소비자들의 평가가 됐다.
그런 한 분야를 쥐락펴락하는 영향력을 가진 인물인 만큼 풍겨내는 기운이 대단했다. 감히 옆에 가 말을 걸어 보지 못할 만큼 얼음 성벽으로 둘러싸인 것처럼 차가워 보였다.
실제로도 그러한 차갑고 냉철한 성격이 영화 <악마의 패션>에서 주요한 갈등 요소가 되기도 했다.
‘그만큼 일에 있어서도 완벽을 추구하는 거겠지.’
도욱은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그렇더라고요. 그런데······.”
이유민 대표가 말해보라는 듯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그 조이랑 같이 일하는 사람이 한국계더라고요?”
“어? 그래요?”
“네. 저를 알더라고요. 사라라고 하던데.”
이유민 대표가 누군지 생각해내려는 듯 잠시 말이 없어졌다.
조이의 옆에 있던 에디터였다. 조이의 측근일 수 있었고, 최소 bombe 본사 에디터라는 이야기였다.
“음······. 아직 나한테도 들어온 얘기가 없는 것 같아요.”
이유민 대표라고 해서 잡지사 내부사정까지 속속들이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직 기사 한 줄 내보낸 적 없는 에디터라면 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한국계라니 알아보는 게 좋겠네요.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이유민 대표가 빠르게 머리를 회전하는 게 도욱에게까지 느껴졌다.
“좋은 정보 고마워요, 도욱 씨.”
“아, 아닙니다. 별로 정보도 아니고······.”
“도욱 씨까지 안다고 하니 알아두면 정말 좋을 것 같은데? 냉정한 프로의 세계라고는 해도 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 인연을 무시하기 힘들어요.”
맞는 말이었다. 그건 한국에서만 통하는 얘기가 아니었다. 미국이든, 세계 어느 나라든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건 무척이나 주요하게 작용했다.
괜히 고위층일수록 인맥 관리에 열을 올리는 게 아니었다.
이유민 대표와 도욱은 런웨이가 펼쳐질 내부로 들어왔다.
“아마 끝나고는 내가 또 정신 없을 거라. 나중에 한국에서 봐요.”
“네. 그럼. 조심히 돌아오세요.”
“그래요. 도욱 씨도 한국 잘 돌아가고. 그럼.”
이유민 대표와 헤어진 도욱은 스태프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
‘KANG’이라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카드가 의자 위에 올라와 있었다.
금빛이 도는 카드를 집어들고는 자리에 앉았다.
곧 무대가 어두워지고 런웨이를 위한 조명으로 조명이 바뀌었다.
거대한 조형물들이 여기저기 세워진 가운데 흰색 런웨이 위로 마크러스의 로고가 뜨고, 이후에 모델들이 한 명씩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장내는 뜨겁게 고요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무섭도록 진지하게 마크러스가 발표하는 새로운 옷과 모델들의 워킹에 집중해 있었다.
부러질 듯한 힐을 신고도 캣워크를 유지하는 모델들을 보며 도욱은 감탄했다.
한편으로는 왜 사람들이 맨 앞줄을 선호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확실히 어제보다 시야가 좁구나.’
그나마 다행인 점은 루카스가 했던 쇼보다 마크러스는 공간 활용을 더 넓게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앞사람에 의해 도욱의 시야가 잠시 가려진 사이, 도욱은 맞은편을 보다가 금발의 편집장, 조이와 눈이 마주쳤다.
사실 눈이 마주쳤다고 하는 데에는 어폐가 있었다. 조이와 도욱의 거리가 상당했다. 그저 고개가 도욱 쪽일 뿐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눈이 마주친 것도 같은데······.’
도욱은 생각하다 조금 우스워졌다. 무대 아래의 팬들이 서로 자신을 쳐다봤다고 하던 게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실제 도욱은 조명 때문에 눈이 부셔서 아무도 보지 못했었다.
‘내가 너무 유명 인사의 눈에 들어 보이고 싶어서 안달하는 것 같군. 요행을 바라기보단 하던 대로 걷던 길을 걸으면 될 일인데······. 나도 조금 쉬운 길을 가고 싶은 건가.’
도욱은 자조하며 고개를 젓고 이내 쇼에 집중했다.
조이의 차가운 표정에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옆에 있던 사라만이 조이가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 정도의 눈치는 있어야 조이의 옆에서 조이를 돕는 에디터가 될 수 있었다.
***
마크러스의 쇼가 끝난 후, 바깥으로 나온 도욱은 사진을 요청해 오는 몇몇 포토그래퍼들을 향해 자세를 취했다.
그래도 어제 하루 해봤다고, 조금 더 익숙해져 있는 상태였다.
정장을 영하고, 트렌디한 모습으로 훌륭하게 소화한 도욱을 향해 카메라 렌즈가 집중됐다.
이어서 간단한 마크러스 쇼 소감을 묻는 이도 있었다.
도욱은 짧은 영어였지만 최선을 다해 답변했다.
마크러스 쇼를 본 도욱은 역시나 실용적이고, 깔끔한 디자인들이란 생각에 박수를 치고 나오던 터였다.
이제 예정된 인터뷰들을 하러 갈 차례였다.
그때 낯익은 목소리가 도욱에게 물었다
“도욱 씨, 바로 가 보셔야 하나요?”
사라였다. 사라의 옆에는 포토그래퍼로 보이는 구릿빛 피부에 턱수염이 멋들어진 남자가 사진기를 어깨에 메고 있었다.
“아, 사라 씨. 여기서 보네요.”
“아까는 저희 편집장님이 계셔서 또 제대로 인사를 못 했어요.”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사라가 검은색 카드지갑에서 자신의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역시나 bombe지의 에디터였다.
“제가 일 시작한 지는 한 달도 안 돼서 따끈따끈한 명함이에요. 도욱 씨한테 드릴 수 있게 돼서 영광이네요.”
“네? 아닙니다. 저를 알아봐 주시니까 오히려 신기해요.”
“교포 2세라서 미국인이긴 한데, 아무래도 문화가 그렇다 보니 K-POP에 관심이 많아요. 요즘 케이케이 노래 듣는 거 정말 좋아하거든요.”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아, 얘기가 길어졌네. 여긴 저희 포토그래퍼 제프리구요.”
한굮어였지만 자신을 소개하는 것을 알았는지 포토그래퍼인 제프리가 손을 흔들었다.
“Hi~!"
“Hi, good to see you.”
도욱의 짧은 인사에 제프리가 시원스럽게 웃었다.
“오, 도욱 씨 영어 하실 줄 아시나 봐요!”
“아주 조금입니다. 그냥 학교에서 배운 영어예요.”
“아니에요. 발음도 정말 좋구. 아, 또 다른 얘기. 저쪽 횡단보도 쪽 가서 도욱 씨 사진 제대로 몇 장 찍으려고 하는데 괜찮으세요?”
도욱이 눈을 크게 떴다.
“아까 편집장님한테 도욱 씨 한국에서 정말 유명한, 페이머스 팝 싱어라고 소개했거든요.”
“아······.”
“별 관심 없으신 것 같더니 도욱 씨 스타일이 좋았다고 하시더라구요.”
의외의 말이었다. 내부에 들어가기 전 로비에서 도욱과 마주쳤을 때도 조이는 차갑기만 했었다.
“He’s cool. 이라고 딱 한마디 하셨는데.”
도욱은 눈만 깜박였다. 인사치레인가 싶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이 같은 인물이 인사치레라는 것을 할 리 없었다. 사라는 그 말의 의미를 설명했다.
“맘에 드셨다는 거예요. 도욱 씨 사진 찍어 가면 스트리트 패션 지면에 한 장은 무조건 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bombe 본사 편집장의 컨펌이었다.
뉴욕 패션위크에 관한 기사는 전세계 bombe 어디에든 실릴 것이었고, 뉴욕 본사에서 보낸 사진들이 실릴 게 자명했다.
도욱은 제프리의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사라는 어떻게든 실리게 될 수많은 인물들 중에서도 도욱이 가장 인상에 남을 사진을 남기기 위해 여러 가지로 포즈를 제시하고, 옷매무시를 다듬어주었다.
사진을 다 찍고 고맙다는 인사 후에, 사라에게 사인까지 해줄 무렵에는 도욱을 알아본 한인 여성들이 도욱에게 사인 요청을 해왔다.
도욱은 뉴욕 길거리 한복판에서 사인을 해주며 생경한 기분을 느꼈다.
‘세계적인 스타가 되면 또 어떤 기분일까······.’
마지막으로 사라와 가볍게 옹을 한 후, 도욱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힛 엔터테인먼트 스태프들에게로 향했다.
얼마 후, 전세계 bombe 잡지는 물론이고, 여러 잡지 매체에는 도욱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한국에서는 사진 한두 장뿐이지만, 패셔니스타라는 칭호를 달고 세계적인 잡지에 실린 도욱에 대한 기사를 수십 개씩 쏟아냈다.
팬들도 도욱에 대한 자부심이 찌를 듯 높아지고 있었다.
국내에서 도욱은 이제 함부로 넘볼 수 없을 만한 위치의 패셔니스타가 되어 있었다.
***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
기내식을 먹으며 도욱은 이대형 팀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뉴욕에서의 성과가 기대 이상이라는 이야기였다. 이대형 팀장은 자신보다 도욱이 스스로 한 일이 더 많은 것 같다고 도욱을 칭찬했다.
그러나 도욱은 뉴욕에서의 짧은 며칠 동안 스타일리스트 한정아나 이대형 팀장의 도움 없이는 이렇게 순조롭게 스케줄을 소화해낼 수 없었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제가 고맙습니다. 팀장님.”
이대형 팀장의 유능함은 패션은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니었음에도 유명 패션 블로거들을 미리 파악해, 도욱에게 알려주는 등의 작은 노력에서부터 알 수 있었다.
“하하, 그런데 도욱 씨.”
“네?”
“혹시 제가 못미더우신가요?”
갑작스러운 이대형 팀장의 직구였다. 도욱은 이대형 팀장의 속내를 파악하기 위해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아라 엔터에서······ 왔기 때문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