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이슈메이커 (5)
급히 뛰어가던 여자가 도욱이 부르는 소리를 들었는지 뒤돌아보았다.
도욱이 빨간색 베레모를 내밀자 여자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도욱은 이곳이 미국, 뉴욕인 것도 잊고 한국말을 해버렸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여자가 검은머리에 한국인과 비슷한 외형을 하고 있어서 더 헷갈렸던 것도 있었다.
도욱이 건넨 베레모를 받은 여자가 인사했다.
“Thank you, I am in a hurry······ 어?!”
유창한 영어 발음으로 말을 남기던 여자가 도욱의 얼굴을 확인하곤 더욱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강도욱 군?”
“······네?”
여자는 생김새대로 한국인이었다. 자연스러운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자신을 알아보는 여자에 오히려 도욱이 더 놀라 얼떨떨해졌다.
“팬이에요. 뉴욕 오신 거예요?”
“네? 네에.”
여자가 자꾸만 아래로 기우는 옷더미를 한차례 들어 올리며 물었다.
“설마 패션 위크 참가하세요?”
도욱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끄덕였다. 여자가 세상에, 하는 감탄사를 뱉었다.
“몰랐어요. 전혀. 아하! 루카스 씨 패션쇼 참석하시는 거예요?”
“네. 맞습니다.”
“와우. 잘됐네요. 더 얘기나누고 싶은데 아래서 편집장님이 기다리셔서. 아, 소개도 안 했네. 저는 패션잡지 에디터 사라 정이예요. 아마 쇼에서 만나게 될 테니까 그때 명함 드릴게요. 지금은 손이 없어가지구···.”
여자가 정신없이 빠르게 말을 늘어놓았다. 길고 빠르게 말하다 보니 유창한 한국어 발음에서 약간의 어색함을 느낄 수 있었다.
사라가 아쉽다는 듯 곧 보자고 인사를 했다.
“그······ 엘리베이터까지 나눠서 들어드릴게요.”
“앗, 그래주시면 고맙구요. 정말 젠틀하시네.”
도욱이 사라가 들고있던 짐의 반 정도를 나눠 들었다. 어차피 시간이 있으니 로비까지 짐을 들어다 주고 싶었지만, 아래에 팬들이 아직 있을지도 몰랐다.
“감사합니다. 그럼.”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가 내려간 후, 도욱은 덩달아 정신이 없어졌다.
저녁 시간.
호텔 근처의 레스토랑에서 스태프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도욱은 호텔 복도에서 만났던 사라의 이야기를 꺼냈다.
패션잡지 에디터이니 혹시 스타일리스트인 한정아가 알까 싶어서 물어본 것이었다.
“사라 정이요?”
“네. 한국계인 것 같은데 아시나 싶어서요.”
미트볼을 한입 베어 물며 묻는 도욱에 한정아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으음? 잘 모르겠는데. 생각보다 이쪽에도 한국계가 많아서.”
“그렇군요.”
“한 다리만 건너면 다 알겠지만. 별로 유명한 사람은 아닌 가봐요.”
도욱은 끄덕였다.
“짐 들고 갔다는 거 보면 말단일 가능성이 높겠는데요? 에디터라고 다 에디터가 아니라서.”
한정아가 이어서 가볍게 말했다.
“네에. 혹시나 싶어서 물어본 거였어요. 루카스 패션쇼에 오는 것 같으니 만나게 되면 알 수 있겠죠.”
도욱의 말에 맞은편에서 스파게티를 포크로 돌돌 말고 있던 이대형 팀장이 말했다.
“여기가 패션쇼 열리는 데 근처라 같은 호텔에 묵는 관계자들 많을 거예요.”
도욱은 이대형 팀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도욱 씨 안다니까 괜히 반갑네요. 혹시라도 내일 만나면 기사 잘 써달라고 해야곘어요.”
확실히 붙임성 있는 인물이었다. 이대형 팀장의 말에 도욱이 옅게 미소 지었다.
도욱은 혼자 호텔 룸에 앉아 쉬는 동안 며칠간 함께하게 될 이대형 팀장에 대해 생각했다. 다른 직원들에게 대하는 것과 너무 달라서도 안 됐다.
도욱은 기본적으로 먼저 다가가는 성격은 아니었어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쉽게 친해지는 친화력을 발휘했다. 직원들과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언제까지 아라 엔터테인먼트에서 왔다는 이유로 이대형 팀장을 경계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쉽게 티가 날 것이었고, 이대형 팀장이나 밖에서 보기엔 이유 없는 경계일 것이다.
그래서 도욱은 이대형 팀장에 대한 태도를 달리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오히려 가까운 사이가 되어서 이대형 팀장의 속내를 알아보고자 했다.
“그럼 일정은 어떻게 되나요?”
식사를 어느 정도 마무리한 도욱이 내일의 자세한 일정에 대해 물었다.
“아. 일단 저희 팀이 열 시 정도까지 도욱 씨 방으로 갈게요. 기본적인 준비만 그 전에 끝내주세요.”
한정아가 먼저 답했다.
내일 쇼는 두 시였다. 내일은 루카스 쪽에서 보내온 의상을 토대로 스타일링을 할 예정이었다.
도욱은 관람객이 앉을 수 있는 자리 중에서도 가장 쇼를 보기 좋은 VIP 배정받았다. 루카스의 쇼에 오는 관계자들에게도 눈도장을 찍을 필요가 있었다.
이대형 팀장이 다음 일정을 말했다.
“쇼는 두 시지만 그전에 길에서 사진도 좀 찍어야 할 거예요. 그리고 패션쇼 끝난 후에는 간단히 한국 잡지사와 인터뷰 예정되어 있어요. 뉴욕에 온 소감이나, 패션쇼 후기를 물을 거예요.”
“답변을 준비해야겠네요.”
도욱의 말에 이대형 팀장이 부언했다.
“내일 제가 예상 질문이랑 답변 작성한 것 드리긴 할 텐데 아무래도 도욱 씨 본인 감상이면 더 좋겠죠.”
“네. 팀장님이 주시면 참고하도록 할게요.”
“그래요. 아, 도욱 씨 영어는 어느 정도 해요?”
“영어 말씀이십니까?”
영어라는 말에 도욱이 조금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도욱도 어느 정도 영어를 할 줄 알았지만, 유학을 다녀온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수능 시험과 입사 시 토익 시험을 위해 공부한 것이 전부였다.
회화에 능통하다고는 절대 할 수 없었다. 한국에서라면 어느 정도 한다고 답했겠지만, 여기는 뉴욕이었다. 레스토랑 주변에서 대화하는 소리도 모두 영어였다.
도욱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라 한 발 물러나게 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냥 조금 알아듣는 정도인데······. 할 줄 알아야 할까요?”
“아, 아니에요. 너무 그렇게 긴장하지 마세요. 다니다 보면 즉석에서 인터뷰 들어올 수도 있는 거고. 사진 찍자고 제의가 들어올 수도 있는 거라서. 간단하게만 할 줄 알면 돼요.”
도욱이 크게 안심하며 표정을 풀자 이대형 팀장이 소탈하게 웃었다.
“어차피 제가 옆에 있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진 않아도 돼요.”
“다행이네요.”
“그리고 모레는 ‘마크러스’ 쇼 관람 예정이에요. 뉴욕 패션위크에선 메인이 되는 쇼라고 할 수 있으니까······.”
“마크러스 쇼요?”
이대형 팀장의 말에 도욱이 되물었다. ‘마크러스’라면 뉴욕 출신 디자이너가 런칭한 브랜드로 최근 십여 년간 미국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브랜드 중 하나였다.
뉴욕을 출발할 때만 해도 ‘마크러스’ 쇼를 관람한다는 이야기는 없었던 터라 도욱으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마크러스 쇼에 간다구요?!”
“오······.”
한정아나 옆에 있던 구철민 역시 놀란 듯했다. 사실 구철민은 마크러스가 얼마나 대단한 브랜드인지는 인지하지 못했으나, 갑작스럽게 새로운 스케줄이 추가된 것에 놀란 것이었다.
“그게 저도 아까 연락받고 알았어요. 유성패션 이유민 대표가 특별히 자리 마련해두었다네요.”
도욱은 이유민 대표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 인사라도 따로 드려야겠네요.”
“네.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 마크러스 쇼는 맨앞줄은 아니고 그 뒷줄이에요.”
“참석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데요.”
도욱이 웃으며 말하자 한정아가 작게 박수 치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그럼요~ 보기만 해도 좋지. 지난 가을 패션위크 때 갔었는데 진짜 좋았어요.”
마크러스 쇼를 보았던 당시를 떠올리기만 해도 좋은 기억이라는 듯 한정아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온 패션 잡지팀 두어 개 추가로 인터뷰 잡혀 있어요.”
“네.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게 제 일인데요, 뭐.”
이대형 팀장이 빙긋 웃으며 답했다.
***
다음 날, 루카스의 성공적인 뉴욕 데뷔를 함께한 도욱은 매우 뿌듯한 심정이었다.
개인적인 인연을 차치하고서라도 넓디넓은 뉴욕 땅에서 한국인이 당당히 성공하는 모습을 보니 기쁜 것이 당연했다.
거기에 루카스의 쇼에서는 반가운 얼굴도 볼 수 있었다.
도욱의 기억 속에서는 예능에서 활약하는 성숙한 이미지의 인물인 모델 주혜진이었다. 얼마 전부터 세계 무대를 배경으로 활동을 시작한 주혜진은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카리스마가 풀풀 풍겨났다.
도욱은 패션쇼 무대를 보며 가요 무대에서와는 또 다른 열정을 느꼈다.
폭발하는 열정이라기보단 차분하고도 뜨거운 열정이었다.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진 런웨이를 걷는 모델과 그 모델이 입고 있는 옷들에서는 분출하지 않아도 보이는 열정이 있었다.
그것이 도욱에게는 또 큰 자극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루카스가 나와 인사를 할 때는 박수가 쏟아졌다.
성공적인 쇼였음이 분명했다. 도욱 역시 진심 가득한 박수를 보내다 맞은편 자리에 앉은 이유민 대표의 얼굴을 보았다.
‘가서 인사를 해야겠군.’
하지만 이유민 대표는 쇼가 끝나자마자 비서와 함께 바삐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인사할 틈도 없었다.
거기에 도욱도 인터뷰가 잡혀 있어 루카스와만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쇼장을 빠져나와야 했다.
쇼장을 빠져나오자 인파 속에는 수많은 포토그래퍼들이 있었다. 근처에 있을 구철민과 이대형 팀장을 찾으려 두리번거리던 도욱은 조금 놀랐다.
‘어, 저 사람은!’
고개를 돌려 시끄러운 쪽을 바라보면 거기엔 항상 도욱도 얼굴을 알 만한 해외 유명인들이 손을 흔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Hey!”
도욱은 웅성거리며 부르는 소리에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도욱의 앞에도 포토그래퍼 몇이 서서는 도욱을 찍고 있었다. 길거리 사진을 찍는 이들은 자연스러움도 무척이나 중시했기 때문에 이들은 이미 도욱이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는 장면을 찍은 후였다.
이번에는 제대로 포즈를 취해달라는 이도 있었다.
도욱은 옷이 최대한 잘 드러날 수 있도록 정면으로 서서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포즈를 취했다.
오늘 도욱은 루카스가 보내온 커다란 스웨터 위에 선명한 파란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핑크색 머리까지 하고 있으니 화려한 패션 피플들 가운데에서도 나름 눈에 띄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데는 성공한 셈이었다. 게다가 도욱의 몸 비율이 워낙 좋았다. 옷 소화력이나, 얼굴, 몸. 뉴욕에 와서도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도욱이 포즈를 취하자 여기저기서 셔터 소리가 났다. 다른 쪽에 있던 이들도 몰려와 도욱을 찍기 시작했다.
이미 패션쇼장에 오던 길에서부터 도욱을 찍어 간 포토그래퍼들이 많았다.
“도욱 씨, 이쪽으로.”
어느 정도 사진을 찍었다고 판단한 이대형 팀장이 도욱을 불렀다. 한국 잡지사가 인터뷰를 따려고 도욱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나저나 저 사람들은 도욱 씨가 누군지 모를 텐데 이미 반응이 좋네요.”
“하하, 정아 팀장님께서 옷을 잘 입혀주신 덕분이죠.”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에요. 쇼 들어가기 전에 찍힌 사진이 벌써 인터넷에 올라왔어요.”
“벌써요?”
“네. 것두 유명 패션 블로거가 SNS에 프리뷰 격으로 업로드한 건데. 한국 팬들한테도 알려지면서 반응이 엄청나요.”
이대형 팀장이 찾아놓은 화면을 도욱에게 보여주었다.
한국팬들이 이 사람은 한국의 유명 가수라고 영어로 달아놓은 댓글이 여럿 보였고, 외국인들은 이 핑크머리 소년은 누구냐, 정말 핫하다는 반응이 다수였다.
“좋네요.”
“잘하면 외국 잡지에도 실리겠어요. 저 포토그래퍼들 중엔 잡지사에 사진 넘기는 이들도 많을 테니까.”
그렇게 된다면 바랄 게 없었다.
***
다시 다음 날. 마크러스 쇼에 입장하기 전, 도욱은 어제는 볼 수 없었던 사라 정을 만날 수 있었다.
장소는 파크 애비뉴 아모리였다. 군부대를 갤러리로 바꾼 곳으로 기묘한 분위기와 현대적인 웅장함을 자랑했다.
초대된 셀러브리티들과 스태프들 사이에서 사라 정은 쉽게 분홍 머리를 한 도욱을 발견했다.
도욱은 마크러스 쇼에 맞게 푸른색 셔츠에 쓰리피스 정장을 입은 상태였다.
사라는 곧 부러질 듯한 하이힐을 신고, 빨간 투피스를 입고 있었다. 새빨간 입술까지 완벽했다. 이렇게 다시 보니 패션 잡지 에디터답게 무척이나 세련되고 화려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선글라스를 낀 단발머리의 백인 여성이 차가운 얼굴을 하고, 팔짱을 낀 채였다.
사라가 무어라 여성을 향해 설명하는 게 보였다.
도욱 쪽을 가만히 보며 선글라스 안쪽에서 이미 도욱을 훑은 듯한 백인 여성은 별다른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다시 뒤돌아섰다. 사라가 민망한 듯 도욱에게 눈짓을 하곤 여성을 뒤쫓았다.
실내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백인 여성이 가는 길을 힐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도욱은 미간을 찌푸리며 백인 여성이 누구인지 기억해내려 애썼다. 영화에서 본 적 있는 듯했다.
‘영화배우인가? 아니다······. 설마 ‘bombe’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