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이슈메이커 (4)
***
뉴욕의 존에프케네디 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
14시간이라는 시간이 과연 만만찮다는 것을 도욱은 깨닫고 있었다. 이전의 삶에서도 이렇게 긴 비행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나름대로 장거리 비행일 때는 편하다고 하는 비즈니스 좌석에 앉아서도 이렇게 힘든데, 이코노미 좌석에 앉아 있을 스태프들은 얼마나 힘들지 도욱은 걱정이 됐다.
수면용 안대를 벗고 화면을 눌러 확인해 보니 도착하려면 아직 5시간이 더 남아 있었다.
‘꽤 잤다고 생각했는데······.’
도욱은 좌석 아래의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비행기에 오르기 전까지도 도욱은 케이케이의 3집 앨범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결정된 뉴욕행이었지만, 케이케이의 일정에는 차질이 없어야 한다는 게 도욱의 확고한 입장이었다.
뉴욕으로 출발하기 전, 다음 앨범의 큰 틀이나 방향성 등이 잡혀서 다행이었다.
현지와 함께하는 박태형의 ‘더블 퀵’ 음악방송도 정리에 들어가던 차였다. 두 팬덤의 힘으로 각종 음악방송에서 1위를 휩쓸었고, 음원 성적도 10위권 내에서 순항중이었다.
박태형 개인 역시 무대 아래에서는 순둥순둥한 성격이지만 무대 위에서는 섹시하고 카리스마 있는 모습을 보이며 ‘반전남’으로 인터넷상에서 20대 팬들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도욱이 이어폰을 귀에 꽂고 미리 작업해두었던 파일을 켜던 때였다. 이어폰에서는 3집 앨범 타이틀곡이 될 노래의 베이스가 작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불이라도 켜고 해요. 눈 상하겠어요.”
화장실을 다녀오던 이대형 팀장이었다.
이번 뉴욕행의 동행인은 팬-마케팅 팀장인 이대형이었다.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들은 이코노미석에 타고, 이대형 팀장과 도욱만 비지니스석에 탑승했다.
이대형 팀장까지 동행할 일인가도 싶었지만, 마케팅 관련 일이었고 알고 보니 이대형 팀장이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다녀와 영어에 능통하다고 했다.
“아.”
도욱이 끄덕이며 독서등을 켰다. 밤 비행기라 비행기 안은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어두운 상태였다.
“더 안 자요? 도착하면 바로 아침일 텐데. 더 자는 게 낫지 않겠어요?”
이대형 팀장이 속삭이듯 물었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잘 만큼 잔 것 같아요.”
“그래요? 그렇다면 다행인데. 곡 작업하는 거예요?”
“네.”
아직 이대형 팀장을 경계하는 도욱과 달리 이대형 팀장은 도욱과 친해지기 위해 꽤 노력하는 중이었다.
현재 힛 엔터테인먼트 일이 임원진 중에서는 권흥조 제작이사, 소속 연예인 중에서는 도욱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쉬엄쉬엄해요.”
“네. 감사합니다.”
이대형 팀장은 도욱을 살피고는 뒤쪽 이코노미석을 확인했다.
이코노미석에는 구철민을 비롯한 스태프들뿐 아니라 도욱의 팬들도 있었다.
비행기를 타기 전, 몰려든 도욱의 팬들 때문에 도욱과 스태프들은 꽤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냥 따라붙은 어린 팬들도 많았고, 전문가용 카메라를 들고 와 서로 밀쳐대며 더 가까이서 도욱을 찍으려 난리인 팬페이지 마스터들도 있었다.
소위 ‘찍사’라고 불리는 팬페이지 마스터들이 스트로보까지 장착한 채 플래시를 터뜨려대는 통에 표정을 굳히지 않으려 했던 도욱조차 조금 찌푸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매니저인 구철민이 팬들에게 여러 번 주의를 주기도 했지만, 팬들이 너무 많았다.
“도욱아!!!”
“여기 좀, 여기 봐줘!”
“강도욱!”
“아, 씨! 밀지 말라고!”
“모자 벗어라!!!”
“헐, 모자 아래 머리색깔 달라진 것 같은데?”
“야! 꺼지라고! 카메라 들지 말라고 씨바라!”
“뉴욕 잘 다녀와~!”
시끌벅적한 팬들 사이를 빠져 나오며 구철민은 인상을 쓰다 돌아서선 한숨을 쉬었다. 그새 팬이 더 늘어 도욱 혼자 출국하는 데도 이 정도니 앞으로 케이케이가 단체 출국할 때는 어쩌나 싶은 걱정뿐이었다.
일본이나 중국까진 이해했지만, 미국까지 가는 데에 어떻게 알았는지 같은 비행기를 예매해 둔 팬페이지 마스터들도 서넛 있었다.
탑승을 하기 위해 게이트 앞에 서며 이대형 팀장이 감탄했다. 약간의 피곤함도 묻어나는 말투였다.
“정말 대단하네요.”
“사방신화는 더 심하다고 들었습니다.”
구철민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구철민의 말에 이대형이 잠시 생각하며 둘을 비교했다. 한창 인기가 많아진 사방신화의 미국 스케줄에 이대형 팀장이 동행한 일이 있긴 했다. 비슷한 상황이었다.
“글쎄요. 비슷한 것 같은데요.”
“오······. 그런가요?”
“예. 인기가 정말 나날이 높아지는 것 같네요~”
힛 엔터테인먼트가 정책적으로 아라 엔터테인먼트에 비해 팬들에게 우호적이고 적극적이었던 것이 팬페이지 마스터 같이 ‘생산자’적 팬들이 많이 생겨난 원인 중 하나였다.
팬들을 오히려 이용해 소속 가수를 홍보하는 일은 힛 엔터테인먼트가 몬스터를 키우면서 알게 된 노하우 중 하나였다.
아라 엔터와 같은 대형 기획사는 팬들이 굳이 사진을 찍어 커뮤니티 같은 곳에 올리고, 자체적으로 홍보해주지 않아도 방송을 통해 홍보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그리고 신비주의까진 아니어도 연예인과 팬 사이에 어느 정도 거리감을 두기를 원했다. 사실 90년대나 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그게 먹히는 정책이었다.
그러나 현재 팬들은 양방향 소통을 원했다. 힛 엔터테인먼트는 그러한 팬들을 잘 이용해 다른 팬들을 모으는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물론 그 때문에 늘어난 극성 현장팬들 때문에 곤욕을 치를 때도 있었지만, 어쨌든 긍정적인 효과가 아직까지는 더 컸다.
“와서 느낀 건데 팬-마케팅을 정말 잘하는 것 같아요. 여기가.”
이대형 팀장의 말에 구철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철민도 입사 후 오백호 실장이나 회사의 실무진들을 보며 배우는 게 많았다.
도욱의 뉴욕행은 루카스의 초대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루카스의 브랜드인 ‘키스, 루카스’가 이번 뉴욕 패션위크에서 쇼를 하게 된 것이다.
뉴욕 패션위크라고 하면, 런던, 밀라노, 파리와 함께 세계 4대 패션위크라고 불리는 패션위크였다.
뉴욕 패션위크는 뉴욕 중심부에서 열리는, 패션계에서는 영향력이 어마어마한 행사였다.
루카스가 하필 그중에서도 뉴욕을 노리고 참여하게 된 건 뉴욕 패션위크의 색깔 때문이었다.
뉴욕이라는 도시의 특징처럼 뉴욕 패션계 또한 다른 곳보다 도시적이고, 세련된, 실용적인 패션을 추구하는 곳이었다. 그러한 이미지와 루카스의 패션 세계는 잘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 있었다.
패션위크 기간 동안에는 길거리에 수많은 패션 피플들이 자신을 뽐내며 길을 누비고, 이름만 들으면 고개를 끄덕일 만한 셀러브리티들 또한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패션쇼장 내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길거리에서도 쉽게 패션 피플들의 화려한 패션을 보고, 즐길 수 있다는 것이 패션위크의 매력이었다.
각종 패션 관련 잡지 기자들, 포토그래퍼들도 뉴욕으로 몰려들어 패션 피플들의 패션을 사진에 담고, 기사화하는 일에 열을 올렸다.
그러한 대단한 행사에 루카스가 참여한다고 하니 감탄이 저절로 나오는 일이었다.
뉴욕에서의 첫 패션쇼를 열며 루카스는 한국에서의 첫 런웨이를 떠올렸다. 루카스는 개인적으로 도욱이 참여해줘서 더 의미 있었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지금보다 도욱의 인지도가 낮았지만, 그런 것은 루카스에게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루카스가 보는 건 이미지이고, 아우라였다. 도욱에게는 그런 것들이 있었다.
때문에 뉴욕 패션쇼에 도욱을 모델로 세우지는 못하더라도, 도욱이 이 뜻 깊은 자리에 꼭 와주었으면 한다는 게 루카스가 전해온 메시지였다.
도욱으로서는 너무나 좋은 제안이었다.
이미 한국 패션계는 뉴욕 패션위크에 진출한 한국인 디자이너에 열광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루카스의 브랜드를 좋아하던 사람들은 이제 완전히 루카스를 찬양하고 있었다.
그러한 와중에 도욱이 뉴욕 패션위크에 참여한다면 온갖 패션잡지는 루카스와 도욱으로 도배될 것이 분명했다.
‘7days’ 광고 모델을 하며 어느 정도 구축해가던 패셔니스타로서 도욱의 이미지 또한 더욱 부각될 것이 분명했다.
때문에 회사나 도욱이나 흔쾌히 루카스의 초청을 받아들였다. 역시나 잘 맺어둔 인연들이 많은 도움이 되고 있었다.
‘루카스의 브랜드는 유성패션의 도움을 받아 정말 빠르게 성장하는구나······.’
도욱은 소식을 듣고 생각했다.
인맥이 중요한 패션계였다. 뉴욕 진출 또한 유성패션의 힘이 없었다면, 조금 더 늦어지거나 힘들어졌을 일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인맥만으로는 되지 않는 곳이 패션계이기도 했다. 루카스의 뛰어난 재능이 유성패션의 힘을 받아 제대로 힘을 발휘한 일이었다.
실제로 유성패션 이유민 사장 또한 패션계 동향을 알아볼 겸, 직접 뉴욕 패션위크에 참여한다는 소식이었다. 한국의 난다 긴다 하는 패션계 사람들 대부분 이 기간엔 뉴욕에 발을 들이는 게 당연했다.
도욱은 한국 패션계에서 패셔니스타로 인정받는 일 외에 조금 더 얻어갈 일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잡아야 한다.’
***
존에프케네디 공항에 도착한 도욱과 스태프들은 긴 비행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호텔로 향했다.
미국에 도착한 시간은 점심 시간쯤이었다.
오늘까지는 호텔에서 잘 쉰 다음, 내일 있을 루카스의 쇼에 참석하는 일정이었다.
내일은 루카스의 쇼에도 참석하게 되겠지만, 더해서 스트리트 패션을 찍는 포토그래퍼들의 눈에 드는 것도 중요했다.
큰 욕심까진 아니었지만, 어쨌든 회사 입장에서도 이번 뉴욕 방문에 조금 더 의미를 부여해보자는 생각이 있었다.
이대형 팀장도 적극 동의하며 스타일리스트팀도 본래 케이케이 무대의상을 스타일링하던 팀이 아닌, 새로이 더 스트리트 패션에 강하고, 뉴욕 패션계에서도 일한 적 있었던 이를 급하게 섭외해왔다.
도욱은 호텔 로비에 도착해 쓰고 있던 진회색 비니를 벗었다.
비행기에서 내린 후 호텔까지 따라붙는 팬들이 두어 명 있어서 모자를 다시 쓰고 있던 도욱이었다.
“와. 진짜 인상이 달라 보인다.”
룸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구철민이 말했다.
도욱의 머리색깔은 옅은 분홍색으로 염색되어 있었다. 검은 머리를 탈피해 밝은 갈색까진 활동하면서 염색한 적 있었지만, 이런 탈색머리는 꽤나 파격적인 머리였다.
잘 어울릴까 싶었는데 분홍색 머리도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게다가 머리색과 눈썹색이 옅어져서인지 인상이 한층 부드럽고 가벼워 보였다.
“전 아직 어색하네요. 어울리는지도 잘······.”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도욱이 쑥스럽다는 듯 말했다.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 한정아가 손을 저으며 극찬했다.
“아~ 내가 추천한 색이지만 너~~~무 잘 어울리니까 걱정 마요~!”
“하하. 그럼 다행이고요.”
도욱은 이미 비행기 안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시 한 번 옷을 갈아입은 후였다.
한국에서는 잘 시도하지 않았던 과한 액세서리들이 도욱의 옷 여기저기에 매달려 있었지만, 전혀 언밸런스 해보이지 않고, 어울렸다.
기회만 된다면 이번 패션위크 기간뿐이 아니라 계속해서 스타일링을 해주고 싶을 만큼 패션 소화능력이 대단했다.
“그럼. 들어가서 쉬세요.”
“너야말로 푹 쉬어! 내일 힘들지도 모르잖아.”
“네.”
구철민을 비롯한 스태프들과 인사한 후, 도욱이 자신의 룸키를 들고 룸으로 향할 때였다.
도욱의 방 옆에서 여자 한 명이 뛰어 나왔다. 옷을 한 무더기 든 여자는 검은머리를 하고 있었다. 달려나가던 여자가 얼마 못 가 옷더미 가운데 모자 하나를 떨어뜨렸다.
도욱은 모자를 집어들고 여자를 불렀다.
“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