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
미래를 향해 달려라 (2)
어디 선가 본 듯한 인상의 여학생이었다.
‘누구지? 어디서 봤더라······.’
기억을 되짚던 도욱은 언젠가 강서현이 보내 준 사진 속에서 보았던 인물이라는 걸 기억해냈다.
‘설마!’
도욱이 잠시 놀라 멈춘 사이 말을 걸었던 여학생이 답했다.
“아니요. 물리학과 학생은 아닌데. 물리학과 애랑 친구여서요.”
긴 머리의 여학생이 그렇게 말하자 카메라는 도욱과 여학생을 함께 잡기 시작했다.
도욱은 그 옆에 선 단발머리의, 아마도 ‘김보명’이라는 이름을 가졌을 학생이 너무나도 신경 쓰였지만 지금은 방송 중이었다.
“아! 그런가요? 그럼 연락 좀 부탁드릴게요!”
“네네! 잠시만요!”
긴머리 여학생이 수줍어하며 휴대폰으로 자신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 연결 후 여학생이 물리학과 학생에게 빨리 도서관 앞으로 오라고 성화를 부렸다. 중요한 일이 있다고, 오면 너한테도 아주 좋은 일일 거라고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재촉부터 했다.
그 옆을 ‘달려맨’ 주요 멤버인 하명훈이 지나갔다.
하명훈은 지난 번 유한도전 때 청재킷 사건으로 도욱과도 인연이 있었다.
“뭐야, 뭐야. 설마 학생들이 나서서 도와주는 거야?”
“아하하.”
“이건 불공평해!!!”
도욱이 웃자 하명훈이 소리를 지르며 빠르게 도욱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는 사이 통화를 마친 긴 머리의 여학생이 도욱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저 친구 지금 온다고 하는데······. 오기 전에 사인 한 번만······.”
“네! 해드릴게요!”
“꺄아― 저희도 해주시면 안 돼요?”
긴머리 여학생 옆에 있던 다른 학생이 물었다. 도욱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다 해드려야죠. 전부 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여학생들이 연신 감사 인사를 하며 제각각 가방에서 주섬주섬 노트를 꺼냈다. 주변에 몰린 학생들은 부러움에 웅성댔다.
“학생들은 무슨 과예요?”
“영어영문학과요!”
“아아. 전부 같은 과예요?”
“네.”
도욱은 자연스럽게 학생들에 대해 물었다. 긴머리 여학생과 그 친구가 번갈아 가며 답했다.
“이름이?”
“이유리요.”
“설수정이요!”
슥슥, 이름을 써놓고 이제 눈 감고도 그릴 수 있는 사인을 하며 도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마지막 학생인 단발머리 학생만 남아 있었다. 도욱은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물었다.
“···학생은요?”
“김···보명이요.”
“아.”
스윽, 슥. 마찬가지로 이름과 사인을 다이어리에 해주며 도욱은 보명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유심히 보았다.
그렇게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단지 착각일 뿐인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예전의 자신과 닮은 듯도 한 얼굴이었다.
한 마디 제대로 된 말 하지 않는 조용한 성격도 그랬다.
도욱이 가만히 보명을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유리야!”
뿔테 안경을 쓰고 체크 남방을 입은 여학생이 자신을 이유리라고 소개한 학생을 불렀다. 이유리가 부른 물리학과 여학생이었다.
“어, 야 빨리 와!”
“헉. 강도욱.”
물리학과 여학생이 저도 모르게 도욱의 이름을 성까지 붙여 부르다 헉, 하며 입 틀어막았다.
“내가 너한테 좋은 일이라고 했잖아.”
“헉, 어떡해! 팬이에요!”
사전 미션은 물리학과 학생과 코끼리 코를 열 번 돌고, 손뼉을 다섯 번 연속해서 치는 것이었다. 타임 제한이 있는 미션이었기 때문에 빨리 시작할수록 유리했다.
“물리학과 학생 맞으신가요?”
“네 맞아요!”
확인을 위해 달려맨 스태프가 학생의 학생증을 확인했다. 물리학과 학생이 맞았다.
도욱은 과 확인이 끝나자 곧바로 양해를 구하며 물었다.
“네. 감사합니다. 혹시 같이 게임··· 가능하실까요?”
“게임이요? 네, 네. 할게요!”
물리학과 학생이 신나서 대답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고 나섰다.
“그럼 일단 저쪽 소운동장으로 같이 가시죠!”
“네!”
기이한 우연이고, 인연이었다.
도욱은 단발머리를 한 김보명을 다시 한 번 눈에 담고는 아쉬운 발걸음을 뗐다.
***
사전미션에서 성공한 건 도욱을 포함한 안형서, 김원과 ‘달려맨’ 멤버 김동국은 ‘5초 정지’를 한 번 외칠 수 있는 찬스를 얻게 됐다.
‘달려맨’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 등 뒤에 붙어 있는 이름표를 떼어내는 것으로 그 사람을 탈락시키고 마지막까지 자신의 이름표를 사수한 사람이 우승하는 게임이었다.
‘5초 정지’ 찬스는 상대가 자신의 이름표를 떼려 할 때 5초 정지를 걸어 도망가거나 설득할 시간을 버는 정도의 찬스였다.
엄청나게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잘만 사용하면 쓸모가 있을 수도 있었다.
어둑하게 어둠이 깔린 교정,
학생들도 많이 집으로 돌아가 한산해지자 본격적인 촬영을 진행했다.
“오늘의 본미션은 ‘스파이를 찾아라!’입니다. 케이케이와 달려맨 멤버들 중 단 한 명이 오늘 스파이 역할을 배정받았습니다.”
스파이라는 말에 멤버들이 웅성댔다.
“스파이 역을 맡은 인물에게는 제작진이 사전에 고지해 드렸고요. 나머지분들은 그 스파이가 누군지 찾아내셔야 합니다.”
“어떻게 찾습니까?!”
나재석이 물었다.
“30분에 한 번씩 방송을 할 겁니다. 탈락된 사람이 누군지, 그 사람이 스파인지 아닌지요. 스파이는 물총으로 몰래 여러분의 이름표를 쏴서 적실 겁니다. 떨어진지도 모른 채, 방송으로 탈락 여부를 확인하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다른 때처럼 무턱대고 상대의 이름표를 뜯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마지막에 남는 게 스파이가 될 수도 있었다.
최대한 스파이가 아닌 사람은 많이 살아남아 있어야 했다.
모두 머리를 바쁘게 굴리기 시작했다.
도욱도 미션을 이해하곤 끄덕였다. 우선은 실제로 해보고 눈치껏 판단해야 할 것 같았다. 이중에 누가 스파이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나재석이나 김동국같이 스파이 일을 잘할 것 같은 인물에게 제작진이 스파이를 맡겼을 수도 있었고, 오히려 의외의 인물이라고 생각할 만한 케이케이 멤버에게 맡겼을 수도 있었다.
케이케이 멤버들이 서로의 눈치를 봤다.
정윤기가 안형서를 보며 눈을 찌푸리자 안형서가 자긴 아니라는 듯 손을 저었다.
“벌써부터 의심들 하지 마시고요! 케이케이 팀워크 좋다더니 뭐야!”
배광수가 괜한 딴지를 걸며 웃음을 자아냈다.
“왜 그러세요, 저희 사이좋습니다.”
정윤기가 어색한 서울말을 쓰며 반박했다.
“그럼 미션 시작하겠습니다!”
제작진의 알림과 함께 본격적인 미션이 시작됐다.
처음 5분은 각자 숨거나 멀리 떨어지는 데 쓰였다. 5분 후부터가 본격적인 게임 시작이었다.
도욱은 어쩌다 보니 막내인 석지훈, 나재석과 같은 방향으로 향하게 됐다.
“두 분··· 설마 아니죠?!”
나재석이 함께 가면서도 물었다.
“아니, 아니에요!”
석지훈이 당황해하며 아니라고 답했다. 너무나 당황해하는 모습이라 더 의심을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나재석은 이내 하하 웃고 말았다.
“막내분이 많이 긴장하셨네.”
“그것도 아니에요!”
석지훈이 아니라는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굴어서 도욱조차 석지훈을 조금 의심하게 됐다.
그러나 석지훈이 너무 긴장했던 것일 뿐, 스파이는 아니었음은 얼마가지 않아 알 수 있게 됐다.
30분 후 흘러나온 첫 방송에서 흘러나온 탈락자가 바로 석지훈이었기 때문이었다.
“석지훈 아웃! 석지훈, 스파이가 아니었습니다.”
도욱과 다른 방향으로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 사이에 당한 모양이었다. 도욱이 빈 강의실에 숨으려고 문을 열 때였다.
근육질의 김동국이 다가와 도욱 등 뒤의 이름표를 잡아떼려 손을 뻗었다.
“5초 찬스!”
도욱이 찬스를 외치는 타이밍이 더 빨랐다.
뒷걸음질로 최대한 멀리 도망가며 도욱이 외쳤다.
“선배님, 전 정말로 아닙니다! 선배님이 스파이신 게 아니라면 제 이름표를 떼시면 안 돼요!”
“아니. 강도욱 군이 요즘 제일 대세 아닙니까? 제작진이 스파이로 했을 게 틀림없어!”
“네?”
그저 육감에 의한 것이라는 말이었다.
5초 찬스가 끝났지만, 설득은 애초에 불가했다. 도욱은 멀어진 김에 도망치기 시작했다.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는 도욱을 김동국이 미친 듯이 쫓아왔다. 맹수의 추격을 당하는 날짐승이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남들이 보기엔 맹수와 맹수의 대결이었다. 카메라맨들이 헉헉댈 정도로 두 사람은 빠르고 잽쌌다.
달려맨 최고의 멤버인 김동국보다 한 발 더 빠르게 도욱은 캠퍼스 안을 누비며 달려 다녔다.
결국에는 먼저 지친 김동국이 도욱을 포기했다. 도욱은 김동국과 동맹을 맺고, 우선 다른 인물들의 이름표를 떼며 스파이를 찾아내기로 작전을 세웠다.
그때 두 번째 탈락 방송이 나왔다. 이번엔 안형서와 정윤기, 배광수까지 세 사람이었다. 세 사람이 서로를 의심하다 이름표를 뗀 모양이었다. 물론 세 사람 모두 스파이가 아니었다.
이제 남은 인물도 몇 없었다.
이들 중 스파이가 누구인지 생각하며 도욱은 땀 흘리며 여기저기를 누비고 다녔다.
땀을 뚝뚝 흘리며 교정을 달려다니는 도욱의 모습은 생각보다 더 괜찮은 그림이었다.
도욱 담당 카메라맨은 도욱을 촬영하며 어느 때보다 고생하고 있었지만, 가장 많은 분량이 나올 것임을 확신했다.
그리고 시간이 경과하자, 도욱과 김동국, 조용히 눈에 띄지 않은 덕분에 살아남은 박태형만이 생존자가 되었다.
도욱과 김동국은 다시금 중앙도서관 건물 앞에서 마주쳤다.
이번에 둘은 둘 중에 하나가 스파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이 물러서지 않고 서로의 이름표를 떼어내려는 순간이었다.
마지막 방송이 흘러나왔다.
“탈락자 발표합니다. 강도욱, 김동국. 아웃. 생존자, 박태형. 스파이의 승리입니다.”
방송에 대기하고 있던 탈락자들도, 서로의 이름표를 움켜쥐고 있던 도욱과 김동국도 벙찔 수밖에 없었다.
그때 도욱과 김동국의 뒤쪽에서 형광색 물총을 품에 숨긴 박태형이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걸어 나왔다.
박태형은 별로 누군가를 공격하려는 의지도 없이 도망만 다녔기 때문에 모두 스파이라는 의심을 지운 지 오래인 상태였다.
“태······ 태형이, 너?”
“헐.”
“박태형이, 인마.”
케이케이 멤버들의 충격은 달려맨 멤버들의 충격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심지어 정윤기는 안형서를 의심하며 박태형에게 안형서의 이름표를 떼라고도 했었다. 그래서 정윤기가 안형서를 붙잡고 있는 동안 박태형이 안형서의 이름표를 뗐었다.
나머지 사람들의 이름표에는 모두 몰라 다가가 물총을 쏘는 것으로 처리한 박태형이었다.
“오늘 정말 놀라운 활약을 보여주셨습니다.”
제작진이 말하며 박태형에게 박수를 보냈다.
나재석을 비롯한 달려맨 멤버들도 엔딩 멘트를 하며 감탄했다. 정말 꿈에도 몰랐다는 식이었다.
물총 생김새도 이제야 처음 봤다고 다들 호들갑을 떨었다.
‘태형이가 몸놀림이 좋은 건 알았지만······. 편집본으로 나가면 대단하겠는걸.’
도욱은 생각하며 박태형이 부상으로 상품권을 받는 것에 박수를 쳐 주었다.
그렇게 출연진들의 박수 속에서 촬영이 마무리됐다.
멤버들 중 누군가 하나라도 활약해 이름을 남긴다면, 충분히 땀 흘린 보람이 있는 방송이라고 도욱은 생각했다.
게다가 도욱으로선 방송을 떠나서도 의미가 있었다.
***
촬영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서도 멤버들은 박태형에게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속일 수 있느냐 묻기 바빴다.
가장 먼저 탈락해 종일 탈락자석에만 있어야 했던 석지훈이 박태형에게 너무하다는 듯 항의했다.
석지훈은 이름표를 떼인 것도 아닌, 그저 물총을 맞아서 자기가 죽은 지도 모르고 도망을 다니다가 방송을 듣고 탈락을 안 것이었다.
“너무 무방비하게 있었······.”
석지훈은 제 나름대로 도망 다닌 모양이었지만, 박태형 보기엔 너무 무방비했다.
박태형의 말에 다른 멤버들이 웃었다.
멤버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샤워를 마친 도욱은 제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인터넷을 켜 현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페이스노트에 접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