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맹공격 (1)
“강도욱입니다.”
“반가워요.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여기서 보는군요.”
서중원 본부장이 도욱과 악수를 나눴다.
도욱은 서중원 본부장과 손이 맞닿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서강준이 악마라면, 그 악마를 낳은 이다. 그런 인간과 잠시지만 손을 잡아야 하다니.’
손이 썩어들어가는 느낌이었으나 도욱은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평소보다 조금 무표정이었을 뿐이었다. 다른 어른들을 대하듯 깍듯하게 인사했다.
서중원은 도욱을 날카롭게 살폈다.
아라 엔터테인먼트에서 야심차게 내놓은 그룹, 맨투맨. 맨투맨의 앞길을 방해하고 있는 케이케이. 케이케이가 맨투맨을 앞서나가 신인상 수상자까지 된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강도욱이라는 인물의 존재 때문이었다.
‘이런 인재를 우리가 놓치다니 안타깝군. 어쩌다가 힛 엔터 같은 곳에 가게 된 거지······.’
아라 엔터테인먼트의 실질적인 사장이자 본부장으로서 먼저 드는 생각은 그것이었다.
맨투맨의 무대를 보기도 했고, 유성전자 광고 속의 모습을 보기도 했지만, 막상 만나 보니 훨씬 더 도욱은 괜찮은 인물이었다.
카메라가 다 담지 못하는 잘생김은 물론이고, 무언가에 집중한 듯한 눈빛에서는 어떠한 ‘기백’마저 느껴졌다.
자신의 아들인 서강준에게서 느끼기 힘든 무게감이 있었다.
‘그런데 작곡까지 잘한다고 하니. 아까운 인재인 건 사실이야.’
서중원은 도욱과 인사 후 돌아서며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 회사에 있었어도······. 강준이 성격에 저보다 잘난 인간을 가만두었을 리도 없지.’
서중원은 제 아들을 잘 알았다. 본인이 그렇게 키워낸 것이었다.
안하무인이어도 좋다. 그러나 안하무인으로 살고 싶다면 최고여야 한다.
그리고 안타까워해봤자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강도욱은 힛 엔터테인먼트 소속 연예인이었다.
서강준이 동시대 톱 연예인이 되기 위해선 밟아야 할 무수한 인물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돌아선 서중원의 눈매가 뱀과 같았다.
그런 서중원의 뒷모습을 보는 도욱은 가슴 한편이 뜨거웠다.
‘서강준······ 서강준의 몰락만이 아니다. 저 악마를 낳은 근원 또한 무너뜨려야 해.’
뒤이어 문이 열리며 TBN 방송국 사장과 드라마국 국장이 들어섰다.
“엇······. 사장님, 국장님!”
신윤호 PD가 빠른 걸음으로 문앞으로 가 그들을 맞이했다.
그러한 인사에 출연진들은 나이 지긋한 두 중년의 정체를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대형 인사의 등장에 전출연진들이 당황해하며 자리에서 우물쭈물 일어섰다.
마침 그 앞에 있던 서중원 본부장이 두 사람과 인사했다.
“서 본부장이 먼저 와계셨네그려.”
“네. 사장님. 주민아 씨 오는 길에 같이 왔습니다.”
“아하! 주민아 씨! 오랜만입니다.”
한편에 서 있던 주민아가 눈치껏 다가와 사장과 인사를 나눴다. 국장과도 제법 다정한 모습을 연출했다.
위쪽 인사들과는 인연이 없는 출연자들은 멀뚱멀뚱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특히 오디션으로 발탁된 여자주연배우와 매니저도 없이 조촐하게 리딩 현장을 찾은 도욱이 이 자리에 가장 동떨어져 있었다.
“사장님께서 어쩐 일로······.”
신윤호 PD가 묻자 그제야 사장이란 자가 출연진들에게 인사를 하며 말했다.
“이번 드라마에 기대가 아주 큽니다. 그래서 인사 차 나왔습니다.”
신 PD가 인사를 하고, 작가들도 감사하다 인사하자 출연진들도 뒤를 이었다.
사장급에서 격려를 나올 만큼 기대작이긴 한 모양이었다.
사장은 도욱과 여자주인공, 주요 출연진들과 원로 배우 몇과 인사를 한 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반복했다.
인사치레 같은 것들이었다. 도욱은 조금 피곤함을 느꼈다.
“그럼 그만 방해하고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시 한 번 잘 부탁합니다.”
사장이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자 국장이 그를 보좌하며 문을 열었다. 서중원 본부장도 함께였다.
“가시죠, 본부장님.”
“예. 오늘 식사는 제가 예약해뒀습니다.”
“아, 우리 서 본부장이 추천하는 식당은 항상 맛이 최고야!”
세 사람이 문밖에서 멀어지며 복도에서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서중원 본부장은 TBN 사장과 국장에게 접대하는 자리를 갖는 모양이었다.
조금 어수선한 분위기를 다시 정리한 후, 본격적인 대본 리딩이 시작되었다.
“1부 1씬입니다!”
조연출이 외치고는 지문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시끄러운 교실 안. 정신 없이 뒤엉켜 놀고 있는 남고생들의 모습. 교실 뒤편에서는 말뚝박기를 하고 있고, 책상에서 엎드려 자고 있는 학생도 있다.
교실 전경을 비춘 후, 엎드려 자고 있는 학생의 등 클로즈업.
“야, 민기! 민기! 일어나!”
첫 대사는 김민기의 친구 역이었다. 어깨를 흔드는 시늉을 하며 대사를 쳤다.
연극배우로 유명했기 때문에 한동휘가 연기를 자연스럽게 잘할 것쯤은 모두 예상하고 있었지만 역시나였다.
대사 하나만 쳤음에도 불구하고, 짓궂은 남고생이 재현되는 듯했다.
도욱은 침을 한 번 삼켰다.
잠에서 막 깨어난 듯한 목소리를 내야 했다. 흠흠, 소리가 나지 않게 목안으로 소리를 가다듬은 듯 첫 대사를 쳤다.
“왜. 무슨 일인데.”
막 잠에서 깨어난 듯한 낮은 목소리가 도욱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오?’
처음으로 도욱의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듣게 된 출연진들은 속으로 조금 놀랐다.
“네가 지금 잘 때냐? 옆반 난리났다!”
“옆반이 왜.”
“연주, 네 불알친구가,”
“왜 또 누구 오빠 따라간다고 담이라도 넘었어?”
한동휘와 도욱의 대사들이 물흐르듯 진행됐다.
별다른 스킬을 요하는 부분은 아니었지만, 모두들 느낄 수 있었다.
‘잘한다!’
한동휘에게 전혀 밀리지 않을 만한 자연스러움이었다. 게다가 저음의 목소리가 너무나 듣기 좋았다.
연기 좀 한다는 출연자들은 이미 이 드라마의 성공을, 아니 드라마는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연기자 강도욱은 언젠가 성공할 것임을 점칠 수 있었다.
***
얼마 전 대한예술종합학교에 합격하며 큰 이슈를 불러 일으켰던 도욱의 연기 도전은 또 한 번 이슈를 만들어냈다.
<케이케이 강도욱, TBN 드라마 ‘준비하라 1999’ 주연 발탁!>
<강도욱 첫 연기 도전! “케이케이 음악만큼이나 좋은 드라마 만들겠다.”>
<예능대세 PD의 드라마 도전······ 과연?>
<조연들의 반란, ‘준비하라 1999’. “새로운 드라마 될 것”>
<연기돌 서준 행보 이을까? 강도욱의 연기 도전이 기대되는 이유>
도욱의 예상대로 <해와 달의 연인>에서 서강준이 호평을 얻어준 덕분에 최근 아이돌의 연기 도전에 대한 대중들의 여론이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도욱은 대한예술종합학교 입학으로 이미 어느 정도 연기력이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형성돼 있었다.
도욱의 드라마 촬영에 대한 응원 댓글이 기사마다 다수 달렸다.
그러나 도욱 자체에 대한 휘발성 강한 이슈였을 뿐, 드라마 자체에 대한 기대감은 그리 크지 않았다.
등장인물들이나 기획 의도 등을 보면 알 수 있듯 요즘 잘나가는 젊은 남녀 주연의 미니시리즈 드라마도 아닌 가족극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도욱은 드라마가 큰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았다.
‘어차피 첫 방송을 하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승승장구. 최고치 시청률을 매일매일 갱신하는 나날일 거다.’
미래를 안다는 건 때로 사람을 안일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욱은 그러지 않기 위해서 정신적인 안정감만 어느 정도 취한 후에는 자신이라는 ‘변수’에 대해 늘 생각했다.
‘내가 들어가서 될 드라마를 안 되게 만들 순 없지.’
그렇게 또 노력했다.
사전제작으로 진행되는 덕분에 바쁘긴 했지만, 그래도 생방 촬영을 하는 다른 드라마 스케줄에 비하면 나은 편이었다.
“도욱아, 오늘은 다음 씬까지만 촬영한대.”
“그래요?”
1999년도의 동네 풍경을 그대로 재현해둔 세트장 한구석. 다음 씬 촬영을 위해 스태프용 의자에 앉아 대본을 보며 대기하고 있던 도욱에게 구철민이 다가와 말했다.
구철민은 힛 엔터테인먼트에 새로 입사한 로드매니저였다.
매니저치고는 체격이 크지 않고, 비리비리한 편이었지만 오백호 실장의 까다로운 면접을 통과한 인물이기도 했다.
허해 보이는 겉과는 달리 경호에 있어 상당한 실력자라는 얘기가 있었다.
어쨌든 구철민을 고용함으로써 오백호 실장은 한시름을 덜게 되었다.
도욱이나 정윤기의 개인 스케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구하게 돼서 천만다행이었다. 새로 들어온 구철민은 우선은 도욱의 드라마 촬영 스케줄 관리에 투입되었다.
“한 열 시면 끝나겠는데?”
“그러게요. 다행이네요.”
도욱은 시간을 확인하며 생각했다.
오늘은 정윤기가 녹화한 ‘쇼미더허니’ 첫방이 있는 날이었다. 멤버들이 숙소에 모여 다같이 보자고 했다.
첫방송에 대한 기대로 휴대폰 단체방이 들썩들썩했다.
도욱도 정윤기의 방송에 기대를 갖고 있었다.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녹화분까지에 의하면 정윤기는 현재 생방송 공연 진출자가 된 상태였다.
생방송에서는 공연장 투표에 의해 당락이 결정되고, 당장 다음 주에 있을 첫 공연에서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출연자 중 열 손가락 안에는 들게 되는 것이었다.
‘큰 이변만 없다면 준우승까지도 노려볼 만해······.’
도욱은 생각하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내일은 드라마 촬영은 없는데 급하게 다른 촬영 스케줄이 잡혔어.”
“스케줄이요?”
“어. 저번에 오 실장님이 말하셨던 케이케이 단체 치킨 광고. 스케줄 조정하다 보니 내일밖에 안 돼서 내일 찍는다더라고.”
“아······.”
도욱은 끄덕였다. 스치듯 들은 기분이었다. 최근 치킨 광고는 교복 광고를 이어 대세 아이돌이라면 한 번쯤 찍어야 할 광고가 돼 있었다.
구철민은 괜히 자신이 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옆에서 도욱을 지켜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짧은 시간에도 충분히 도욱의 바쁜 삶에 대해 파악할 수 있었다.
구철민이 대기를 하며 쉴 때도, 도욱은 끊임없이 대본을 숙지하거나 음악을 들으며 곡 구상을 하곤 했다.
전역 후 첫 직장이었다. 평범한 대한민국 남자로서 아이돌들에 대해 쉽게 돈 번다는 생각도 가졌었던 구철민이었다. 그러나 도욱을 보며 결코 쉽게 버는 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잘나가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고 구철민은 생각했다.
“오랜만에 쉬는 날인데, 미안하다.”
“네? 형이 왜 미안해요!”
“하하. 그냥. 괜히 미안하고 그러네.”
구철민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는 사이 조연출이 다가와 곧 촬영 재개한다고 도욱에게 알려왔다.
도욱이 의자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촬영장 한쪽에서 스태프의 휴대폰 벨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제 촬영 들어가는데 벨 켜놓은 거 누구냐, 개념없이!”
소리친 건 촬영감독이었다. 촬영감독은 촬영장에서 가장 나이도, 경력도 많은 이였다. 계속되는 촬영으로 신경이 곤두선 촬영감독의 외침에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벨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나섰다.
그러는 동안에도 벨소리는 끊임없이 울렸다.
벨소리 곡은 유명한 샹송 곡이었다.
얼어 붙은 분위기와는 별개로 워낙 유명한 샹송이었기 때문에 도욱은 속으로 저도 모르게 벨소리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촬영팀 스태프 중 하나가 외치며 얼른 휴대폰을 껐다.
“씬 43 들어가겠습니다! 모여주세요!”
조연출이 외쳤다. 도욱은 대본을 구철민에게 넘기고, 세트장 안으로 들어섰다.
팟, 꺼져 있던 조명이 켜짐과 동시에 도욱의 머릿 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