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
과거여, 응답하라 (5)
TBN 방송국.
본격적인 촬영을 시작하기 전, ‘준비하라 1999’ 출연진들이 전체 미팅이 있는 날이었다.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1부 대본 리딩을 하는 날이기도 했다.
하나둘씩 출연진들이 방송국 안에 준비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PD님.”
“도욱 씨! 일찍 왔네요.”
가운데 자리에 앉아 옆의 작가들과 대본을 두고 이야기를 하고 있던 신윤호 PD가 일어서 도욱을 맞이했다.
오늘 참여하기로 한 출연진 중 감초 역할로 나오는 젊은 배우 셋 정도를 제외하고는 가장 이른 출근이었다.
“제가 일찍 와서 준비해야 할 것 같아서요.”
도욱의 말에 벌써 자세가 됐다며 신윤호 PD가 박수치는 시늉을 했다.
출연을 결정하기까지 도욱과의 미팅은 신윤호 PD가 전담해 왔기 때문에 처음으로 도욱의 실물을 보게 된 작가들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도욱을 반가워했다.
“아, 어째 처음 보죠. 여기 우리 작가들.”
“안녕하세요. 좋은 대본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욱의 말에 작가들이 얼굴을 붉히며 악수를 청해왔다. 도욱은 두 명의 메인 작가는 물론이고, 남은 두 명의 보조작가들과도 한 명, 한 명 악수를 하며 빠짐없이 인사했다.
“신 PD님이 하도 칭찬하시고, 도욱 씨가 주인공으로 제 격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게 말씀하셨거든요~!”
“아하, 얘기는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PD님.”
“출연 결정해줘서 내가 고맙지!”
‘준비하라 1999’는 TBN에서 야심차게 기획한 프로였다. 대본이 너무 잘 나와서 회의 끝에 시트콤에서 드라마 편성까지 낸 프로이기도 했다.
그러나 TBN의 야심찬 마음과는 달리 ‘케이블 방송국에서 하는 새로운 형식의 드라마’라는 점 때문에 기존의 배우들에게는 별다른 어필을 하지 못했다.
캐스팅진이 다른 드라마에 비해 화려하지 못한 건 그러한 이유도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신윤호 PD의 야망이기도 했다. 엄친딸, 엄친아 같은 완벽한 캐릭터가 주인공들 캐릭터에 섞여 있긴 하지만, 어쨌든 ‘준비하라 1999’는 공감을 기반으로 하는 드라마였다.
다른 드라마처럼 ‘김민기’ 역이 완벽한 남자주인공이긴 해도 옆집에 살 것 같은 ‘엄친아’를 기반으로 했다.
이웃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족, 이웃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게 주요한 드라마의 목적이었다.
때문에 기존에 얼굴이 많이 알려진 배우로는 그런 설정을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을 거라는 게 신윤호 PD의 판단이었다.
때문에 일부러 주인공 몇을 제외하고는 연극과 독립영화 등지에서 주조연으로 활약하며, 연기력은 뛰어나지만 얼굴은 알려지지 않은 배우들을 적극적으로 섭외했다.
모두 훌륭한 연기자인 동시에 얼굴을 알리는 데 목마른 배우들이었다. 열정을 가지고 임해줄 게 분명했다.
도욱의 뒤로 도욱이 맡은 김민기의 친구들이 될 남자 배우들이 때에 맞춰 우르르 도착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오, 우리 주연 배우님. 반갑습니다.”
장난스럽게 인사를 받은 박동휘는 연극계에서 이름 난 인물이었다. 마냥 즐거워 보이다가도 연기를 시작하면 돌변했다.
“그러고 보니 진짜 우리 후배님이기도 하잖아?”
“벌써 친한 척 들어가는 거냐. 하여튼.”
박동휘에게 핀잔을 준 건 안재형이었다. 두 사람 모두 대한예술종합학교 출신 배우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도욱에게 더욱 호의적으로 다가왔다.
도욱은 출연진들의 정보에 이미 빠삭한 상태였다.
‘준비하라 1999’를 통해 모두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이후에 다른 드라마에서 주조연으로 활약하는 이들이었다.
모두 연기자로서는 도욱의 선배이기도 했다. 도욱은 선배님, 하고 부르며 출연진들과 인사를 나눴다.
콧대 높기로 유명한 스타 배우들이 없으니 분위기 흐리는 이 없이 모두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도욱의 상대역이 될 여자주인공도 곧 도착했다. 그녀는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오디션에서 뽑힌 주역이었다.
도욱보다는 여섯 살 정도 나이가 많았지만, 워낙 동안인 외모로 고등학생 역할을 해도 무리가 없을 듯했다.
이후에 젊은 출연자들의 부모 역할을 맡은 중년 배우들도 속속들이 도착해 자신의 배역 이름이 써진 자리에 착석했다.
둥그렇게 둘러진 테이블에 두어 명을 제외한 전 출연진이 마주 앉았다. 그 뒤편에는 배우들의 소속사 관계자들이 벽에 기대 서 있거나, 간이의자에 앉아 있었다.
소속사 관계자는 최소한으로 제한했음에도 출연진과 합쳐지니 그 수가 상당했다. 굉장히 넓다고 생각했던 리딩실이 꽉 들어찼다.
원래 아는 사이인 배우들끼리는 담소를 나누며 대본 리딩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도욱은 이미 전부 다 외워버린 대본을 다시 한 번 훑었다.
“안녕하세요―!”
높은 목소리로 인사하며 서브 여자주인공을 맡은 주민아가 리딩실로 들어왔다.
주민아는 도욱과 같은 아이돌 그룹 출신이었다. 주민아가 속한 그룹인 스위티걸은 케이케이보다는 2년 더 먼저 데뷔한 그룹으로 아라 엔터가 현재까지 보유한 세 개의 걸그룹 중 하나였다.
아라 엔터의 다른 두 개의 걸그룹보단 성적이 저조했지만, 유명세는 꽤 있었다.
그 주역이 주민아였다. 가수 활동보단 연기 활동으로 이름을 알렸다. 여기저기 안 나오는 드라마가 없다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조연급이었지만,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방송사인 TBN은 자신들의 드라마에 아라 엔터 소속 연예인을 하나 넣음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잘 알고 있었다. OST 사업은 물론이고, 홍보 활동에도 상당한 도움이 된다.
신윤호 PD도 너무 처음 드라마에 얼굴을 내비치는 이들만 주연진인 것도 이상하니, 주민아 정도는 넣어도 좋다는 계산이 있었다.
주민아가 서브 여주인공이라는 사실은 도욱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아라 엔터에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소속 연예인 모두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주민아 뒤로 들어오는 남자라면 얘기가 달랐다.
도욱은 남자를 보며 대본을 꾸욱 세게 쥐었다. 서중원 본부장이었다.
***
중학교 3학년.
서강준의 패거리가 보명에게 가하는 학교폭력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였다.
매일 오늘은 덜 괴롭길, 덜 아프길 기도하는 삶이었다. 서강준이 학교로 오는 길 교통사고를 당해 다쳐서 한동안 학교에 못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바보 같은 정도로 천성이 착해 빠졌던 보명은 그런 생각을 한 것만으로도 죄책감을 가졌다.
누군가가 다치길 바라는 나쁜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을까?
보명은 그날 유독 많이 맞았다. 보명이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며 반항했기 때문이었다.
평소에는 뒤에서 지시 내리는 일을 더 재미있어 하던 서강준이 오랜만에 보명의 복부를 발로 강타했다.
학교 뒤편의 골목에서 밤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보명은 그대로 피를 토했다. 패거리가 떠나가도 한 시간 가량을 찬 바닥에 누워 있어야 했다. 몸을 일으키기 어려웠다.
‘이대로는······. 정말······. 죽을지도 몰라.’
한 시간 반 정도가 지나서야 길을 지나가던 행인이 보명을 발견하곤 몸을 흔들었다.
그날 보명의 어머니는 온몸이 엉망이 된 보명을 보고는 기절할 듯 소리쳤다.
밤늦게까지 식당일을 하다 돌아온 어머니와 녹이 다 슨 철대문 앞에서 마주쳤다. 도저히 숨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게, 이게 무슨 일이니!”
혼비백산하며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 앞에서 보명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알게 됐다.’
못난 자신 때문에 어머니가 슬퍼하고 있었다.
슬펐던 마음은 분노가 됐다. 보명은 이 굴레에서 어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보명은 멍이 든 몸을 이끌고 다음 날 바로 학교폭력위원회를 담당하는 선생에게로 갔다.
선생은 상담실로 찾아온 보명을 보고 처음에는 무척이나 놀라 급히 보명을 챙겼다.
안타까운 얼굴로 어떻게 이제까지 참았냐며 보명을 격려했다.
“도대체 누가 이랬니? 어?”
“······선생님, 제가 말하면······.”
“걱정 마라 보명아. 조사가 필요하겠지만, 너 이렇게 만든 애들 강제전학 처리가 되든, 퇴학을 당하든 하게 될 테니.”
보복이 없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너무 두려웠으나 두려움 때문에 이대로만 있을 수도 없었다. 하는 데까지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8반 박준수, 조진혁······.”
선생이 이름을 받아 적으며 보명을 다독였다.
“9반 서강준이요.”
서강준의 이름에 선생의 손이 잠시 멈췄다.
여태까지는 교묘하게 폭력을 휘두르던 서강준이었으므로 그제는 너무 심했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최근 자신을 압박해오는 아버지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였다. 어쩔 수 없었다. 일이 커지면 아버지에게 탈탈 털리겠구나, 정도만을 걱정하던 서강준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학교폭력위원회에 보명이 신고를 해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교장이 직접 서강준의 아버지인 서중원에게 그 소식을 전했다.
이래서야 나중에 뭐가 될 거냐며 서강준의 아버지가 노발대발했다. 그러나 서강준은 서중원의 분노는 잠시일 뿐, 자신을 위해 서중원이 무슨 수를 써서든 없어 일로 덮어줄 것임을 알았다.
“교장 말로는 별다른 증거가 없다던데, 맞아?”
“당연하죠. 그 정도 처신은 하고 다닙니다. 아버지.”
“그게 무슨 처신이야! 하여튼, 쯧쯧. 알았다. 내가 처리하마.”
피해를 당한 증거는 있지만, ‘서강준 패거리가 했다’는 증거는 없는 상태였다. 보명의 진술뿐이었다.
그렇게 일단락되리라 예상하면서도 김보명에 대한 괘씸함에 서강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감히 나를 엿 먹이려 들어?’
서강준은 복도에서 보명과 마주치자 보명에게 시비를 텄다.
“나 신고했다며?”
보명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서강준을 피하려 들었다.
“그래, 해볼 수 있는 데까지 해봐야지. 그래서 너네 어머니는 이 사실 아시고?”
“······.”
“아버지는 쓰레기 줍느라 모르시나?”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로 보명의 감정을 건드리며 서강준이 도욱의 팔목을 붙잡았다.
“아시냐고 내가 묻잖아.”
“······놔!!!”
팔목을 옭아매며 팔을 꽉 누르는 서강준의 손을 도욱이 뿌리쳤다. 뿌리치며 자신에게 붙어서는 서강준을 밀었다.
약간의 힘을 주었을 뿐인데 도욱보다 계단 한 칸 아래 서 있던 서강준의 몸이 흔들렸다. 무게중심이 아래쪽으로 쏠리며 서강준이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헉!”
“꺄아―ㄱ!”
“헐, 서강준 아냐?”
“강준아? 괜찮아?!”
복도가 시끌시끌해졌다. 서강준이 고통에 찬 얼굴로 자신의 팔을 붙들고 있었다.
보명은 도무지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어 멍한 채 서강준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서강준이 비열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보명이 맞는 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보명이 밀어서 서강준이 계단 아래로 떨어져 팔이 부러진 걸 본 사람은 수십이었다.
서강준 쪽은 뻔뻔하게도 진단서를 끊어 보명을 고소했다.
보명의 어머니는 교장실로 찾아와 서강준의 부모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빌었다.
치료비를 받지 않고, 고소도 없는 일로 해주는 대신 서중원은 보명의 어머니에게 약속을 받아냈다.
다시는 학교 폭력이니 어쩌니, 불미스러운 일에 서강준의 이름을 다시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약속이었다.
***
도욱은 얼마 전에 꿈으로 꾸었던 일이 서중원의 얼굴을 보자 생생하게 재생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러나 이곳에서 이상 행동을 해서는 안 됐다.
신윤호 PD가 일어서며 서중원 본부장을 향해 인사했다. 엔터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서중원 본부장을 모두 알 만큼, 그의 위상은 상당했다.
“서 본부장님이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어쩐 일이긴요. 우리 소속 연예인 첫 대본 리딩 현장이니 격려 차 나왔습니다.”
“하하, 민아 씨가 아주 든든하시겠어요.”
주민아가 수줍게 웃어 보였다.
다른 출연자들도 매니저나 소속사 관계자와 함께였다. 그럼에도 서중원 본부장의 등장에 모두 위화감을 느꼈다.
주변을 둘러 본 서중원이 도욱을 발견하곤 도욱 쪽을 향해 말했다.
“이번에 주연 맡았다는 그 친구인가 봐요?”
“네, 케이케이 강도욱 씨에요.”
신윤호 PD가 도욱을 서중원에게 소개했다.
자리에서 일어 선 도욱이 서중원과 눈을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