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
과거여, 응답하라 (4)
“안녕하십니까.”
권흥조 제작이사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상대를 맞이했다.
“처음 뵙네요. 태화그룹 한국지사 홍운영입니다.”
“힛 엔터테인먼트 권흥조입니다. 반갑습니다.”
권흥조 이사와 홍운영 지사장이 명함을 주고 받았다. 두 사람의 비서가 문을 닫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두 사람이 착석하자 단정한 옷차림의 여종업원이 조용히 다가와 주문을 받았다.
“지사장님은 어떤 걸로······.”
“이사님 드시는 걸로 같이 시켜주십쇼. 허허.”
“아, 못 드시거나 하는 건.”
“없습니다.”
권흥조 제작이사가 여종업원에게 식당에서 가장 잘 나가는 것으로 가져다달라고 말했다. 이런 자리에서 흔히들 있는 일이라 여종업원은 당황하지 않고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따로 술이나 음료는 괜찮으십니까?”
여종업원이 묻자 권흥조 이사도 자연스럽게 홍운영 지사장에게 질문을 건넸다.
“가볍게 술 한잔 어떻습니까? 시간도 시간이고.”
“좋습니다. 사케 괜찮으세요?”
“좋네요! 사케.”
이번에도 권흥조 이사가 여종업원에게 사케 중 부드러운 것으로 골라달라 부탁했다.
여종업원이 뒷걸음질치며 나갔다.
홍운영 지사장은 흔히들 장군감이라 말하는 외양이었다. 짙은 눈썹에 큼지막한 이목구비가 호인의 인상을 주었다.
50대 중반의 나이였음에도 체격이 상당해 앉아있는 모습만으로도 위세가 대단했다.
목소리 또한 약간 걸걸하면서도 어조가 호탕하기 이를 데 없었다.
두 사람은 직접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약속을 정하며 두어 번 통화를 한 적 있었다. 유선상으로 들었던 목소리만큼이나 목소리가 좋다고 권 이사가 먼저 칭찬했다.
“허허허!”
듣기 좋은 칭찬이었는지 홍운영 지사장이 호쾌하게 웃었다.
“그러는 권 이사님이야말로 요즘 인기 있는, 그 뭐냐 부드러운 남자 스타일이시구려!”
돌아오는 칭찬에 권 이사도 입가를 올리며 웃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사사로운 이야기로 분위기를 풀 때쯤 음식들이 하나씩 나왔다.
“여긴 처음 와보는 곳인데 회가 아주 좋네요!”
홍운영 지사장이 회를 질겅질겅 씹으며 흡족해했다.
분위기가 딱딱하지 않고 생각보다 편안했다. 권흥조 이사는 내심 안도했다. 홍운영 지사장의 태도로 보아서는 긍정적인 답변을 들을 수 있을 듯했다.
잔에 술을 조금씩 따르며 본격적인 대화가 오갔다.
“저희 회사는 들어보신 적 있으셨는지······.”
“아, 사실 처음에는 생소한 이름이라 왜 저한테까지 서류가 올라왔나 했습니다, 허허.”
권 이사가 낮춰서 말했다지만, 홍운영 지사장의 답은 무례한 게 맞았다.
그러나 일부러 더 그러는 것임을 권 이사도 알고 있었다. 태화그룹이 갑이고, 힛 엔터테인먼트는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을이었다.
권 이사가 웃으며 답했다.
“태화그룹에서 엔터 쪽 투자를 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투자받고 싶어하는 회사가 아주 많으니까요.”
홍운영 지사장이 허허, 웃으며 ‘그건 그렇지요’ 하고 답했다.
태화그룹은 중국 기업이었다. 중국 상하이에 본사를 둔 투자회사로 중국 내에서도 50대 기업 안에 드는, 어마어마한 자본력을 소유한 기업이었다.
그러한 태화그룹의 주요 투자처는 게임, 영화, 드라마 등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이었는데 이번에 한국 지사에서 그 투자처를 확장한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권흥조 제작이사는 그러한 소문을 접하자마자 발빠르게 움직였다.
힛 엔터테인먼트의 사장조차 조금 터무니 없는 일 아니겠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권 이사는 도전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케이케이의 성장 속도를 보면 충분히······. 알아볼 거다.’
그러한 마음으로 권 이사는 태화그룹에 투자유치 제안서를 제출했다.
권 이사가 투자금을 유치할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케이케이의 빠른 성장도 영향을 끼쳤다. 대형기획사인 아라 엔터에서 나온 맨투맨의 성적을 케이케이의 성적이 조금씩 앞서나가는 상황이었다.
이런 때 주춤하거나 조금이라도 뒷걸음질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권 이사는 확고하게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현상황에서 힛 엔턴테인먼트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를 권 이사는 고민했다. 답은 분명했다. 다름 아닌 돈, 자본이었다.
자금력을 얼마나 운용할 수 있느냐에 따라서 뮤직비디오를 한 편 찍을 때도 퀄리티가 왔다 갔다 했다.
지금까지 케이케이는 본인들의 실력과 최소 자금으로 최대의 퀄리티를 뽑아낼 수 있는 전문 인력의 도움으로 어느 정도의 앨범 퀄리티를 유지해왔지만, 거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홍운영 지사장이 다시 한 번 자랑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는 본래 본사 사람이었다. 한국인이었지만, 중국 유학 후 태화그룹에 들어가 유능함으로 높은 자리에까지 올랐다.
이후에는 중국인인 태화그룹 사장의 막내조카와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한국지사를 설립하고, 지사장으로서 5년 전부터 한국에 들어와 일하고 있었다.
“저희 직원들이 성장가능성이 아주 높은 회사라고 하더군요. 그 ‘케이케이’라는 그룹 때문에요.”
“네, 맞습니다. 알아주시니 감사합니다.”
“허허, 기획사 쪽 일이라는 게 스타 하나 키워놓으면, 열 아들 부럽지 않은 것 아니겠습니까!”
홍운영의 말에 이번엔 권 이사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유성전자와도 함께 일했다고 하고.”
“네, 운이 좋았지요.”
“따로 중국 쪽 소셜네트워크 계정도 운영하고 있더군요. 봤더니 중국 쪽 반응도 상당하더군.”
그 부분은 조애니 팬-마케팅 팀장의 공이었다. 중국 시장 개척을 위해서는 따로 중국 쪽 네트워크를 잘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 조애니 팀장의 생각이었다.
조애니 팀장은 보는 시각이 넓은 인물이었다. 케이케이의 인기가 한국에서 어느 정도 생기자마자 일본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 개척에 나섰다.
권흥조 이사의 포부와도 맞닿아 있는 인물이라 아시아를 넘어 북남미, 유럽 시장까지도 생각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럼 역시······.”
권 이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안서도 아주 맘에 들더군요. 상품성도 있어 보이고. 그런데 투자 액수 부분이 조금 우리랑 안 맞더군요.”
“아 어떤······.”
“80억 정도를 기재하셨던데.”
“네. 사업 제안 파트 보시면 아시겠지만, 장기적으로 그 정도 자본금이 있을 때 가장 수익이 극대화된달까요.”
권 이사가 차분하게 답했다. 홍운영 지사장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우리 태화라고 해도 한 번에 다 쏟아붓기는 힘든 금액입니다.”
괜한 앓는 소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권 이사는 그런가요, 하며 물러서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러자 홍운영 지사장이 자신들의 계획을 설명했다.
“장기 투자를 하기엔 엔터쪽 사업들이 변동성이 심하지 않습니까? 허허.”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죠.”
“그러니 나눠서 투자를 하고 싶은데.”
홍운영 지사장이 권 이사의 표정을 살폈다. 권 이사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어떤 식으로 말씀이십니까?”
“일단은 40억 정도를 투자하려고 하는데······.”
권 이사는 저도 모르게 입을 잠시 벌렸다 다물었다. 사실 40억도 지금의 힛 엔터에게는 큰 돈이었다.
권흥조 이사는 여기저기 투자처를 알아 보고, 직원들과 함께 지난 한 달간 밤새워 제안서를 작성해 태화그룹에 컨택한 것이 헛수고가 아니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투자 수익을 보고, 목표치에 80% 이상 도달하면 다음 해에 40억을 재투자하는 것으로 하죠.”
홍운영 지사장이 덧붙였다.
“회수가 안 되면 더 말할 것도 없겠죠.”
권흥조 이사가 홍운영 지사장의 잔이 빈 것을 보고 사케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 투명한 액체가 잔에 가득해졌다.
“투자금 회수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그렇데 답하며 권 이사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대신 지사장님.”
“편하게 말씀하세요.”
“어차피 조건 달고 나눠서 투자하는 거라면 45억은 어떠신지요? 당초 제안드렸던 80억보단 적은 금액 아니겠습니까?”
말만 달리 했을 뿐 합하면 오히려 90억이 되는 셈이었다.
그러나 태화그룹 입장에서는 수익성이 좋지 않을 경우 발을 빼면 그만이었다. 권흥조 이사 입장에서는 그만큼 자신있다는 표현이기도 했다.
권 이사가 따라준 잔을 들어 마시며 홍운영 지사장이 고심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돌아가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상의해보지요.”
“감사합니다, 지사장님.”
깍듯하게 인사하며 권 이사가 고개를 숙였다.
“우리 권 이사님께서 아주 사업가 기질이 있으시구만!”
홍운영 지사장이 큰 소리로 외쳤다.
***
태화그룹이 우선적으로 힛 엔터테인먼트에 45억의 자금을 투자한다는 소식이 경제지를 통해 퍼져 나갔다.
케이케이의 상품성과 가치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권흥조 이사는 투자금 유치 확정과 함께 케이케이의 다음 앨범 제작에 대한 지시를 내렸다.
다음 앨범은 유통망을 더 확보하고, 해외 시장을 노려 제작 스케일을 키운다는 게 전체적인 내용이었다.
앨범제작팀 사람들은 덕분에 분주해질 수밖에 없었다.
원래 준비하던 앨범 컨셉부터 새로 새우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금이 생겼다는 건 해볼 수 있는 게 많아졌다는 뜻이었다.
자신들의 계획을 맘껏 펼칠 수 있는······. 말하자면 기분 좋은 분주함이었다.
“그러면 다음 앨범 일정이······.”
“일정에는 변동 없고 10월 컴백으로 생각중이야. 윤기 쇼미더허니 끝나고 곧바로 들어가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심준 팀장은 회의실에서 도욱과 다음 앨범에 관한 일정을 의논중이었다. 오백호 실장이나 리더인 정윤기와 의논하기 전, 우선은 멤버이기 이전에 다음 앨범의 프로듀서가 될 도욱과 의논하는 게 먼저였기 때문이었다.
“도욱이 네가 문제지. 연기 얘기도 오간다면서.”
“아직 확정은 안 됐어요. 얼마 전에 미팅을 다녀오긴 했는데.”
“그런 거야?”
도욱은 신윤호 PD와 있었던 미팅을 떠올렸다.
신윤호 PD는 시트콤이지만, 이전에 있었던 시트콤들보단 훨씬 색이 더 깊을 것임을 강조했다. 도욱을 캐스팅하고 싶어하는 신윤호 PD의 의지가 느껴졌다.
도욱이 ‘김민기’ 캐릭터의 캐릭터성을 위해 조금 수정되면 좋겠다는 의견을 언뜻 내비치자 자신도 그 생각중이었다고, 역시 도욱이 이 역할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고 화색을 띠었다.
“근데 연기를 하게 돼도 사전제작이라 10월 컴백에는 무리가 없을 거예요.”
“스케줄이야 그렇지만······. 곡 작업까지 할 수 있겠어?”
도욱은 이런 때를 대비해 쉬는 날에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준비해온 것이었다. 하루 24시간을 48시간처럼 사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 네가 할 수 있다고 하면 할 수 있는 거겠지만······. 너무 무리는 말고. 너 도와서 같이 작업할 사람 지금 구하고 있으니까.”
“네. 너무 걱정 마세요.”
도욱이 답하자 심준 팀장이 끄덕였다.
“그러면 10월에 컴백하는 거로 하고······.”
그때 심준 팀장의 벨이 울렸다. 잠깐만, 하고 양해를 구한 심준 팀장이 회의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도욱은 심준 팀장이 잠시 나간 사이, 휴대폰으로 인터넷 창을 켰다. 어젯밤 <해와 달의 연인> 첫 방송이 있었다.
결과는 첫 방송부터 ‘대박’ 그 자체였다.
초반부 아역들의 연기가 시청자의 심금을 울렸고, 후반부에 등장한 김주현의 비주얼과 연기가 극을 압도했다.
거기에 2분 남짓, 서강준이 등장한 씬들도 모두 깔끔했다. 비단 옷을 잘 차려입은 서강준의 모습이 시청자들로 하여금 서강준을 새로 보는 계기가 됐다. 성공적인 연기 데뷔였다.
오백호 실장도 이러한 반응을 확인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역시나였다. 때마침 오백호 실장에게 메시지가 도착했다.
[도욱 아직 앨범제작팀 미팅중이냐]
[무슨 일 있으세요?]
[끝나면 조 팀장 사무실로 와야겠다 너한테 들어왔던 신 피디 작품 포맷이 달라졌어]
[네?]
[드라마로 정식 편성 받았다고 연락이 왔네]
도욱은 오백호의 메시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촬영은 당장 다음 달 초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