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슈퍼스타-73화 (73/225)

# 73

과거여, 응답하라 (3)

***

“흐음, 드라마는 아니죠.”

팬-마케팅팀 회의실에 도욱과 오백호 실장이 도착했을 때, 회의실에는 조애니 팀장뿐 아니라 이강연 선생도 함께였다.

인사를 나눈 후 오백호 실장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도욱에게 드라마 제의가 들어온 것이냐 묻는 오백호에게 조애니 팀장이 드라마는 아니라고 답했다.

“시트콤이에요. 여기, 기획안이에요.”

조애니 팀장이 테이블 위에 가제본 기획안을 올려놓았다.

도욱이 기다려 온 ‘그’ 드라마가 맞았다.

방송사 TBN의 드라마 역사를, 아니 케이블 방송사 드라마의 역사를 새로 쓸 드라마였다.

조애니 팀장이 부연 설명했다.

“K.K 방송 같이 한 신윤호 PD 알죠? 신 PD가 준비하는 시트콤이라고 하네요.”

“시트콤이요?”

시트콤이라는 말에 무섭도록 진지했던 오백호 실장의 얼굴이 조금 가벼워졌다. 드라마와 시트콤. 둘 사이에는 확실히 무게의 차이가 있었다.

한때는 시트콤이라는 장르가 평일 저녁이나 주말 밤을 가리지 않고 시청자들의 선택을 받기도 했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방송가에서 시트콤은 사라졌다. 연이어 기대했던 시트콤들이 흥행에 참패하면서 리얼리티 예능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신 PD랑 방송작가들이 서너 명이 모여서 쓰는 거라더군요.”

게다가 방송작가와 드라마 작가는 전혀 다른 직업군이었다. 시트콤은 제대로 된 연기를 보여줄 만한 장르는 아니었다.

기획안을 넘겨보던 오백호 실장이 턱을 쓸며 물었다.

“도욱이에게 들어온 역할이 뭔가요?”

“남자 주인공인 김민기 역할이요.”

“흠······. 주인공이라지만 요즘 같은 때 시트콤을 한다라······. 전 잘 모르겠습니다.”

오백호의 회의적인 반응에 조애니 팀장이 도욱을 슥 한 번 보고는 끄덕였다. 도욱은 기획안을 한 장 한 장 꼼꼼하게 살피는 중이었다.

[프로그램 형태: 주간 시트콤

방송 시간: 60분(30분×2회)

기획의도:

80년대를 추억하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 90년대로 귀환한다!

IMF를 딛고 일어선 99년도의 서울, 밀레니엄을 앞둔 청춘들은 들떠 있었다.

그리고 찬란했다.

현재는 3n세, 평범한 직장인이 된 우리들.

지금은 세상에 찌들어 구질구질하지만. 1999년도엔 달랐다.

준비하라! 파란만장한 1999년의 삶을 다시 살 순간을!]

형태만 달랐을 뿐, 기획의도를 보면 확실히 도욱도 재미있게 보았던 신윤호 PD의 ‘준비하라 1999’가 맞았다.

‘처음 기획은 시트콤이었구나······.’

도욱은 생각하며 다음 내용을 훑었다. 기획안이라 그런지 원래 알고 있던 내용과 다른 부분들이 꽤 있었다.

도욱이 고개를 들자 조 팀장과 오 실장이 대화를 이어갔다. 오백호 실장이 회의적인 반응일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를 말했다.

“윤기도 쇼미더허니에 나가긴 하지만 도욱이까지 개인 활동을 하게 되면······.”

힛 엔터는 그룹 활동 초반에는 아무래도 개인 활동에 대해 제약을 두는 편이었다. 개인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걷잡을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그룹 활동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정윤기가 나가는 ‘쇼미더허니’야 래퍼 경연 대회라 일회성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았다. 인기를 얻게 돼도 정윤기의 활동 영역이 가수의 영역에서만 넓어질 것이었다. 조금 더 나가야 예능이었다.

그러나 연기는 달랐다.

아이돌 그룹 멤버들이 괜히 아주 작은 배역이라도 하나 맡아 하게 되면 ‘연기자 병’이라 불리는 병에 걸리고, 다른 멤버들의 팬들이 연기하는 멤버를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가요계나 예능과는 판이하게 다른 분위기가 그들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오백호가 도욱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시트콤 하나 한다고 도욱이 그룹 활동에 영향을 끼칠 만큼 달라질 거라고는 생각 않았다.

“한번 시작하면 섭외가 물밀 듯 들어올 텐데, 좋은 작품 있거나 방송사 쪽에서 강력하게 나오면 거절하긴 더 힘들어 질 거고······. 시기가 이른 감이 있습니다. 연기자로서도 충분히 준비됐다기보단 이제 막 학교에 들어가기도 했고요.”

오백호는 오히려 도욱의 능력을 믿고 있었다. 도욱이 연기를 하게 되면, 작품의 흥행을 떠나 도욱 자체는 인정받을 것임을, 관계자들이 연기자로서의 도욱을 놓치려 들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다.

괜히 앞서 걱정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준비가 안 된 상태니 시트콤 정도로 연기 활동의 간만 보는 것도 나쁘지 않죠.”

조애니 팀장이 말하자 오백호가 곧바로 반박했다.

“그러기엔 너무 주연입니다. 아이돌이 연기에 주연까지 한다고 일단 욕부터 먹고 들어갈 텐데.”

“오 실장님은 완전히 반대하는 거군요.”

“일단은 그렇습니다.”

“사실 저도 비슷한 생각이에요. 처음으로 하는 본격적인 연기 도전이니까 더 신중해야죠. 처음 갖는 이미지, 아주 오래 가는 법이니까.”

힛 엔터에서 도욱에게 연기를 시킬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뮤직비디오 주연으로 내세우고, 도욱이 대한예술종합학교 연기과에 진학하고 싶다고 했을 때 선뜻 지원해준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이후에 제대로 연기자로 키우고 싶었다. 정극으로 데뷔시켜 미니드라마 주연 자리까지 올리는 게 목표였다.

도욱 같은 인재가 흔치 않다는 건 회사 전체가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바였다.

그때 이강연 선생이 입을 열었다.

“두 분 걱정하시는 것처럼 보니까 이게 시트콤이라 연기가 가벼워질 순 있어요.”

세 사람이 이강연 선생에게 집중했다. 아무래도 연기 쪽에 있어선 유수의 스타들을 키워낸 이강연 선생이 더 전문가였다.

“시트콤이라고는 해도 캐릭터가 정말 좋아요.”

“캐릭터······.”

조애니 팀장이 동의한다는 듯 끄덕였다.

도욱은 등장인물 설명 중 도욱에게 들어왔다는 김민기 역의 설명이 있는 페이지를 펼쳐 놓았다.

“대본을 봐야 더 확실히 알겠지만, 도욱 군이 정말 잘 소화해낼 수 있는 배역이에요. 멋있는 남주 흔하다고 하지만, 막상 찾아보면 흔하지 않아요.”

이강연 선생은 작품 외부적인 요인보다 내부적 요인에 집중했다.

[전교 1등을 놓친 적 없는 수재. 공부만 잘하는 전형적인 모범생은 아니다. 천재 타입으로 훤칠한 외모에 운동이면 운동, 공부면 공부 아무것도 놓치지 않는 완벽한 엄친아.

완벽할 것만 같은 인생이지만, 어린 시절 부모님을 잃었다. 형과 둘뿐이다. 형을 실망 시키지 않으려고 뭐든지 잘하는 만능 인간이 되었다.

다른 것 다 잘하느라 매일 책상 위에 러브레터와 음료수가 쌓이는데도 여자에게는 관심이 없다. 몸만 다 컸지 남자가 아니라 아직은 그냥 애다.

그런 민기의 옆에 존재하는 단 하나뿐인 여자.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소꿉친구, 왈가닥 이연주. 그런 연주의 관심사는 아이돌뿐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아무도 모르는 사이. 민기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연주에게 민기는 사랑을 느낀다. ‘우리 이제 친구 그만하자!’]

확실히 완벽한 캐릭터였다. 너무 완벽해서 매력이 없을까 싶으면, 부모님을 일찍 잃었다는 아픔이 존재했다.

게다가 오랜 단짝 친구를 좋아하게 되는 설정부터가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캐릭터 설정이었다.

‘괜히 인기가 있었던 게 아니지. 그런데······.’

도욱은 인물 관계도를 살피다 미간을 찌푸렸다.

초기 설정이고, 아직 시트콤이어서 그런지 인물 간의 관계가 도욱이 아는 것과 달랐다.

도욱이 알기로 여자 주인공인 연주가 남주인 민기, 민기의 친구, 민기의 형. 세 사람과 아슬아슬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며 과연 현재 남편은 누구인가? 하는 궁금증을 자아내는 역할이었다.

그런데 현재 설정된 인물 관계에는 민기도 연주에게만 일편단심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연주의 친구와도 미묘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 부분은 빠져야 해. 남주의 매력이 반감된다.’

그러나 그건 출연이 확정된 이후의 문제였다.

우선은 결정자인 조애니 팀장와 오백호 실장의 부정적인 반응을 걷어내야 했다. 그래도 이강연 선생이 긍정적인 반응이라 다행이었다.

“도욱 군, 본인 생각은 어때요.”

조애니 팀장이 도욱에게 물었다.

“음······. 저도 이 선생님 말씀대로 캐릭터가 너무 좋아서 한번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이전에 신 PD님과 호흡도 잘 맞았고.”

오백호 실장이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도욱이 먼저 말을 이었다.

“물론 그땐 리얼리티 프로그램이었지만요. 미팅 해보고, 대본 1, 2부 정도 받아보고 결정하는 게 전 좋을 것 같은데. 힘들까요?”

“하긴 아무리 시트콤이라지만, 대본도 안 받아보고 확답하긴 힘들겠지.”

조애니 팀장이 동의하며 정리했다.

“어차피 오늘은 결정하기보단 의견 나누는 정도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걱정하던 것과 오 실장님이 걱정하는 부분이 같다는 것은 일단 확인했고. 그렇지만 역할이 좋다는 것도 알겠고.”

오 실장이 끄덕였다. 오백호도 마냥 반대인 것은 아니었다. 긍정적인 효과가 더 크다면 당연히 도욱이 출연하는 게 맞았다.

“더 생각해보기로 하고. 다음 주쯤 신 PD쪽과 미팅 잡아 보죠.”

조 팀장이 자리를 정리했다.

도욱은 회의실을 나서며 이강연 선생에게 따로 고마움을 전했다. 대한예술종합학교 합격 후 연락을 하긴 했었지만, 일본 활동으로 따로 찾아보지는 못한 상태였다.

깍듯하게 자신을 선생으로 모시며 감사해하는 도욱에 이강연은 살풋 미소를 띠었다.

“첫 연기 데뷔도 작품 선택 잘해 봐요.”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회의실로 나와 케이케이 멤버들이 모여 있을 숙소로 다시 돌아가며, 도욱은 오백호에게 넌지시 말을 던졌다.

“백호 형.”

“그래, 도욱아.”

“맨투맨 멤버 중 하나가 <해와 달의 연인> 들어간 거 혹시 들으셨어요?”

“어? 들었지. 하여튼 아라 엔터에서 꽂기도 기가 막히게 꽂았더라. 조연이지만, 연기 처음 하는데 공중파 사극이라니.”

연예계 대부분의 소식을 접하는 오백호지만, 맨투맨 관련 소식은 더욱 신경 써서 체크하고 있었다. 오백호는 도욱이 서준의 연기 도전에 자극을 받은 건가 싶었다.

“그렇지만 네가 너무 조급할 건 없다. 까봤는데 망하면 오히려 이미지에 먹칠만 하는 거야. 괜히 아이돌 연기에 대해 안 좋은 말 더 많아질 수도 있고.”

도욱이 끄덕였다.

“얼마 후면 첫화 방영하니까 저희는 그쪽 반응 보고 결정해도 될 것 같아서요.”

“아······. 좋지!”

역시나 도욱은 괜히 조급한 마음으로 연기를 하겠다고 나서는 게 아니었다. 되레 서준 쪽 결과를 보고 결정하자는 말에 오백호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도욱의 어깨를 두드렸다.

도욱은 오백호와 마주보며 미소 지었다.

‘해와 달의 연인도 대박이 나고, 서준의 이미지도 올라가겠지. 아이돌 연기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은 오히려 그쪽에서 깨주는 거야. 나는 그걸 이용한다.’

***

그 시각. 힛 엔터테인먼트의 주요 인사인 권흥조 제작이사는 청담동의 고급 일식집에서 오늘의 약속 상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의 만남으로 힛 엔터테인먼트의 미래가 바뀔 수도 있다는 생각에 권 이사의 목이 타들어갔다.

그때 다다미 방 문이 열리며 상대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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