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
확장팩 (5)
“거기 강······ 도욱? 강도욱 씨 맞죠?!”
심준 팀장과 정윤기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여인을 보았다.
낮은 굽의 구두를 신고 있었음에도 여인은 키가 170cm는 돼 보였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아주 화려하게 생긴 미인이었다.
누군가를 닮은 듯도 했는데, 쉽게 생각나는 인물은 아니었다.
얼떨떨하긴 도욱도 마찬가지였다.
“네. 맞는데 실례지만 누······.”
혹시나 아는 사이인데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지, 실수라도 할까 도욱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인이 아차, 하며 손에 든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유성패션 대표 이유민······?!’
유성패션의 대표를 맡은 이유민은 유성전자 이철호 사장의 여동생이기도 했다. 도욱은 그제야 이유민이 제게 아는 척을 해 온 이유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흘낏 도욱이 건네받은 명함을 살핀 심준 팀장은 ‘유성패션’이라는 글자에 그제야 눈앞의 여자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유성패션 이유민 대표는 심심찮게 패션 잡지며 여성 잡지 인터뷰는 물론이고 심심찮게 신문 기사에 오르내리는 인물이었다.
수많은 재벌 2세 가운데 재벌가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킬 능력 있는 젊은 대표의 선두주자 중 하나였다.
실제로 유성패션은 파리 유학에서 돌아와 대표직을 맡은 이후 이미지 리뉴얼, 새로운 브랜드 런칭, 공격적인 마케팅 등을 펼치며 국내에서 5위에 머물던 유성패션을 3위의 자리까지 올려놓았다.
그런 이유민 대표가 도욱에게 아는 체를 하다니, 심준 팀장은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유민 대표가 도욱의 인사를 받으며 미안하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그래요. 반가워요.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혹시나 싶어서 차 세웠는데, 도욱 씨가 맞아서 다행이에요.”
이유민이 빠른 어조로 설명하다가 한 호흡 고르고는 사과했다.
“저번에는 내가 실례가 많았어요.”
지난 번 루카스 브랜드 런칭쇼 현장에서 도욱과 부딪친 일에 대한 사과였다. 이유민이 그날의 일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한 상태였다. 도욱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크게 문제가 있던 것도 아니고.”
“문제가 없긴요? 액정에 금이 갔다면서요. 정신 좀 차리고 다니라고 큰오빠한테 어찌나 혼이 났는지 몰라요.”
이유민 대표가 머쓱하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유성 기업 회장의 막내딸인 이유민은 늦둥이인지라 큰오빠라 부르는 이호철과는 나이 차이가 상당했다. 이호철이 젊은 시절 아이를 낳았다면 이유민만 한 아이가 있을 법한 정도였다.
30대 중반의 이유민 대표가 살짝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이자 20대 후반 정도로도 보일 정도로 어려 보였다.
“그날은 내가 바빠서 사과도 못 하고 갔어요. 미안해서 밥이라도 한 끼 사고 싶은데. 나보다 그쪽이 더 바쁠 것 같네요?!”
“사과는 신경 써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너무 거절하지 마요. 시간 날 때 꼭 연락 줘요.”
이유민이 뒤쪽의 심준 팀장과 정윤기를 흘끗 보고는 자리를 정리하듯 말했다. 명령조도 아니었는데 거절할 수 없는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도욱도 이유민 대표가 건네는 인사치레를 계속해서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듯해 알겠다고 답했다.
이유민 대표가 피식 웃으며 도욱에게 말했다.
“딱 보니까 예의상 수락이네요?! 연락 없으면 제 쪽에서 연락할게요.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그래, 나중에 꼭 봐요.”
이 대표가 손을 흔들고는 뒤쪽의 두 사람에게도 눈짓으로 인사했다. 성큼성큼 자신감 넘치는 걸음걸이로 세워두었던 스포츠카로 가 다시 차에 올라탔다.
경쾌한 엔진 소리를 내며 스포츠카가 빠르게 한적한 저택가를 빠져 나갔다.
“부자 동네긴 부자 동네다. 서태준에, 유성패션 대표까지 보네······.”
정신줄이 조금 느슨해진 채 심준 팀장이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번뜩 정신을 차린 듯 도욱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옆에 선 정윤기도 궁금하긴 매한가지였다.
“그게······. 우선 차 타시면 말씀 드릴게요. 별건 아니에요.”
“그래. 일단 타자! 서태준 공연 참가 소식도 얼른 회사랑 멤버들한테 알려야지!”
심준 팀장이 화이팅 넘치게 외치며 차문을 열었다.
***
케이케이의 두 번째 미니앨범이었던 ‘LAST DANCE’의 활동도 마무리가 돼 갔다.
이번 활동을 통해서 케이케이는 김원과 안형서가 간간이 예능 프로그램들을 돌면서 활동 영역을 넓혔다.
또 음악방송에서 4주 연속 1위를 차지하며, 지금까지 나온 모든 앨범, 모든 타이틀이 1위를 차지하는 영광을 누렸다.
케이케이는 사방신화의 컴백과 함께 1위 자리에서 내려오게 됐다.
아직까지 국내 탑 아이돌은 역시 사방신화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방신화는 이제 데뷔한 지 6년 차였다. 순환이 빠른 아이돌 탑 자리를 생각하면, 내년부터는 케이케이도 충분히 넘볼 수 있는 수준의 자리가 될 것이다.
사실 그 때문에 아라 엔터에서도 사방신화의 자리를 잇기 위해 맨투맨을 내보낸 것이기도 했었다.
“토미, 지금 우리 어때요?”
김원이 토미에게 영어로 물었다.
토미는 서태준이 잠적 후 미국에서 생활할 적 만난 안무가였다. 케이케이가 서태준의 공연에 댄스 퍼포먼스를 하게 되면서 케이케이를 돕기 위해 힛 엔터테인먼트 연습실로 출근 중이었다.
미국인인 토미와의 의사소통은 김원이 도맡았다. 안무를 배우는 일이라 많은 말이 필요한 건 아니었지만, 안무에 대한 평가나 의견 교환이 필요한 일도 있었다.
“뭐래? 잘했대? 굿, 굿, 그레이트?”
토미와 대화를 하고 온 김원에게 안형서가 물었다. 김원이 웃으며 답했다.
“어, 굿, 굿, 그레이트!”
“역시!”
“······이긴 한데.”
“그런데?”
“좀 더 유연하게 표현했으면 좋겠대. 지금은 너무 힘이 들어가 있는 것 같다고.”
김원의 말에 얘기를 듣고 있던 다른 멤버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가 ‘LAST DANCE’ 마지막 음악 방송 무대였다. 단 하루의 휴식도 없이 케이케이 멤버들은 곧장 본격적으로 서태준 공연 준비에 매진했다. 공연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 와 있었다.
방송 활동을 하면서도 케이케이 멤버들은 토미가 짜서 보내온 대형과 안무를 숙지한 상태였다.
조금의 연장 없이 계획대로 방송 활동을 하다가 들어간 케이케이에 대해 팬들은 아쉽다는 반응이었다.
어제 굿바이 무대에서 아쉬워하는 팬들을 보며 안형서를 비롯한 멤버들은 서태준의 공연을 통해 얼마 안 가 활동을 다시 시작할 것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다.
그러나 이 일은 철통 보안 속에서 최소한의 인원 외에는 아무도 모르게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 일이었다.
멤버들이 다시 한 번 토미의 의견대로, 이번에는 조금 더 힘을 빼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언어가 달라 말이 통하지 않더라도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는 게 있었다.
토미의 커다란 입술이 깨끗하게 호선을 그렸다.
실전처럼 세 곡을 연속해서 두 번이나 연습을 한 케이케이 멤버들의 연습복은 이미 땀에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이온음료를 한 병씩 입에 물고 바닥에 주저앉아 멤버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토미가 진짜 잘했대. 이대로면 며칠이면 완벽해 질 것 같대.”
김원의 말에 정윤기가 드러누우며 말했다.
“그래야지. 이렇게 죽기 직전까지 연습하는데.”
정윤기의 말에 석지훈과 안형서도 깊은 동의를 보냈다. 도욱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김원이 덧붙였다.
“태형아, 토미가 너는 자기 댄스팀에 데려가고 싶대.”
“네? 저······, 저요?”
이온음료를 삼키던 박태형이 놀라 되물었다. 정윤기가 웃으며 쑥스러워하는 박태형을 칭찬했다.
“와, 태형이 인마 스카웃 제의 받았다 안카나.”
“가면 안 돼! 태형아!”
안형서가 호들갑을 떨며 태형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나저나 서태준 선배님 무대라니······ 꿈인가? 누가 나 좀 꼬집어봐. 자랑하고 싶어서 미치겠다!”
“제가 꼬집어 드릴까요, 형?”
“아니 내가 그냥 혼자 꼬집을게 지훈아.”
석지훈과 안형서가 티격태격하는 걸 보며 정윤기가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아직 안 되는 거 알지? 마, 새어나가면 끽.”
안형서가 자신도 그 정도는 구분할 줄 안다며 정윤기의 잔소리를 원천 봉쇄했다.
케이케이의 출연은 공연 당일까지 비밀로 하는 것. 그것은 서태준이 케이케이의 출연 대신 내건 조건 중 하나였다.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서태준 저택에서 미팅을 하던 날, 서태준의 말에 심준 팀장과 도욱, 정윤기는 모두 긴장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조건이 너무 말도 안 되거나 부당하다면 케이케이 쪽에서도 무리할 생각은 없었다.
“네. 말씀해주십쇼.”
심준 팀장의 대답에 서태준이 말했다.
“케이케이 출연 소식은 아무도 몰랐으면 합니다.”
“당일까지 말입니까?”
“예. 무대에 서기 전까지. 케이케이도 인기가 있는 가수이고 하다 보니, 홍보가 되면 서로 좋은 일일 수도 있겠지만. 8년만의 공연입니다. 이번만큼은 제 음악을 듣는 이들만 모인 공연장에 서고 싶네요.”
쉬운 말로 케이케이 팬들이 자신의 공연에 섞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심준 팀장은 도욱과 정윤기와 눈빛을 교환한 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케이가 서태준의 공연에 섰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큰 홍보효과를 얻을 터였다. 공연이 끝난 후 그 공연장에 있던 기자들이 내는 기사들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어차피 케이케이 팬들을 위한 팬 서비스 차원의 공연이 아니었다. 또, 이후에 서태준 공연 실황 DVD가 출시되면, 무대 영상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게 된다.
“저희 쪽 댄스팀도 구해서 따로 연습은 시켜놓을 예정입니다. 만약 중간에 케이케이가 선다는 얘기가 새어나가면 즉시 반박기사를 내고, 저희 쪽 댄스팀 세우겠습니다.”
“좋습니다. 다른 조건은 없으신 건가요?······.”
“저희 쪽 안무가를 보내고 싶습니다. 곡 리믹싱이나 프로듀싱까지 제가 할 거고요.”
“물론입니다.”
8년 동안 소리 소문 없이 잠적하려면 이 정도 철저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생각보단 까다롭지 않은 조건들이었다.
그때 잠자코 듣고만 있던 도욱이 입을 열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도 있습니다, 선배님.”
중저음의 듣기 좋은 목소리에 서태준의 시선이 도욱 쪽으로 향했다. 서태준이 미간을 좁혔다 펴며 물었다.
“뭔가요?”
***
서태준 공연 연습을 마치고 케이케이 멤버들은 숙소로 돌아왔다.
석지훈은 자신만 실력이 조금 모자라다고 생각했는지 한 시간 정도 더 연습을 하고 오겠다고 했다.
도착하자마자 지쳐 잠든 멤버도 있었고,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모처럼의 휴식 시간을 만끽하고 있는 멤버도 있었다.
도욱은 샤워 후에 곧바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작업실에 스스로를 감금했다.
책상 위에는 팬들이 보내 준 피로회복제와 비타민 음료가 잔뜩 쌓여 있었다. 그중 비타민 음료 한 병을 집어 들어 마시며, 감겨오는 눈을 비볐다.
한 시간 정도 흘렀을 때, 도욱은 거실에 있던 안형서를 불렀다.
“뭔데?”
“편곡 1차로 끝나서요. 한 번 들어주세요.”
안형서가 재빨리 도욱이 넘긴 헤드폰을 썼다. 도욱이 음악을 재생시켰다.
도욱은 쉼 없이 달리고 있었다. 다음 앨범은 거의 공백기 없이 곧바로 낼 생각이었다. 앨범제작팀과도 협의가 끝났고, 멤버들과도 이야기가 된 상태였다.
도욱이 이렇게까지 서두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서태준의 공연이 끝나면, 케이케이도 큰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될 거야. 좋은 기류를 타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3분 8초의 시간이 지나고 헤드폰을 벗은 안형서가 엄지를 치켜세웠다.
“끝내준다. 도욱아 너 진짜 천재······. 도차르트······.”
도욱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칭찬을 물렸다.
‘이 곡은 안형서의 고음이 중요하다.’
고음을 낼 때의 음색 하나만큼은 안형서가 최고라 자부할 수 있을 만큼 좋은 음색을 갖고 있었다. 보물과도 같은 목소리였다. 게다가 기술적으로도 점점 발전해 예전에 비해 조금 더 편안하게 고음을 낼 수 있었다.
“어때요, 형? 이 정도까지 올릴 수 있겠어요?”
다시 헤드폰을 낀 안형서가 헤드폰 속에서 흘러나오는 멜로디에 집중했다.
“으음······.”
안형서가 목을 풀며 아아― 하고 음을 내 보았다.
‘정확해!’
도욱의 눈이 빛났다. 안형서가 했던 대로 도욱도 안형서에게 엄지를 세워 보였다.
‘이대로만 가면······. 할 수 있어!’
도욱은 정리한 파일을 메일로 보냈다. 받는 이를 서삼원으로, 참조에 심준 팀장을 넣었다.
서태준의 컨펌이 필요한 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