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단 한 번뿐인 영광 (3)
“오랜만이네요, 형.”
“얼굴 좋아 보이네?”
조정민이 기획사를 나가 맨투맨의 백댄서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도욱은 조정민이 무언가 다르게 마음을 먹었길 바랐다.
누군가를 괴롭히는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마음가짐을 가졌길 말이다.
그러나 조정민의 표정과 말투에서 도욱은 자신의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조정민이 건들거리며 도욱의 어깨를 툭툭 쳤다.
도욱은 말없이 조정민을 물끄러미 보았다. 조정민이 인상을 찌푸렸다. 조정민의 뒤편에는 케이케이의 강도욱과 아는 척을 하는 조정민을 보며 백댄서들이 저들끼리 수군댔다.
“다른 애들은 어딨냐?”
“대기실에요.”
“박태형 그 새끼는 잘 지내나 보지?”
“······.”
“벙어리 됐냐?”
도욱은 더는 조정민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사람의 본성이란 게 쉽게 바뀌지 않는구나······.’
데뷔를 코앞에 둔 연습생에서 백댄서가 되고도 조정민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했다. 백댄서가 나쁘다는 게 아니었다. 조정민은 전문 백댄서가 아닌 아라 엔터의 예비 연습생 신분이었다.
아라 엔터는 워낙 인기 아이돌을 많이 배출한 대형 기획사였다. 스타 등용문이라 불리는 기획사였기 때문에 정식 연습생이 되는 것도 경쟁률이 어마어마했다. 정식 연습생이 되는 게 데뷔를 하는 것만큼 힘들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그런 아라 엔터의 정식 연습생이 되기 위해 조정민은 맨투맨의 백댄서로 예비 연습생을 자처한 것이다.
도욱이 그런 상황에 처했더라면 묵묵히 자신의 갈 길을 가기도 바빴을 것 같았다.
‘시비나 걸고 다닐 게 아니라 말이지.’
도욱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욱의 한숨에 발끈한 조정민이 무어라 더 말을 하려다 삼켰다.
뒤쪽에서 백댄서들이 대기실 복도를 지나는 맨투맨 멤버에게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언제까지 잘되나 두고 보자.”
조정민이 이를 꽉 깨물며 낮게 중얼댔다. 도욱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더는 무어라 충고해줄 가치도 느끼지 못했다.
“도욱이! 여기 있었네.”
백댄서들과 인사를 나누며 도욱에게 다가 온 건 오빈이었다. 화장실에 다녀오던 오빈은 자신의 백댄서와 함께 서 있는 도욱을 발견하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케이케이도 나온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보네!”
“그러게요, 형. 잘 지내셨어요?”
“그럼. 잘 지냈지! 근데 아는 사이······?”
두 사람 다 애매하게 답을 미루자 오빈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
조정민이 오빈 쪽을 향해 인사하곤 뒤로 물러났다. 다시 백댄서 무리에 섞여드는 조정민의 뒷모습을 보며 도욱은 고개를 작게 저었다.
‘랑데부 프로젝트’의 결과가 무척이나 좋았기 때문에 이벤트성으로 한두 번 ‘랑데부 프로젝트’ 게릴라 공연 같은 것도 이루어졌다.
때문에 광고 촬영이 끝난 이후에도 두어 번 만날 기회가 있었고, 특히나 같은 업계에 종사하는 오빈과는 더 친해졌다. 오빈의 친화력도 크게 작용했다.
오빈은 광고 촬영을 하며 느낀 도욱의 성실하고 진중한 인간성에 순수하게 반해 있었다.
도욱은 ‘맨투맨’과 친해진다는 것에 조금 불편한 기분을 느꼈다. 맨투맨은 자신이 꺾어야만 하는 상대였다. 복수 상대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고쳤다.
맨투맨을 이기고 가요계 탑의 자리에 오르는 건 가수가 된 이상 어차피 가져야 할 목표였다. 다른 케이케이 멤버들만 봐도 그랬다.
그들에게는 맨투맨이 복수 상대가 아니었고, 어떠한 개인감정이 없었음에도 신인상 후보에 함께 오르고 계속해서 라이벌 그룹으로 지목되자 맨투맨을 이겨야 한다는 말들을 종종 하곤 했다.
‘일단 데뷔한 이상, 최고가 되고 싶은 건 본능 같은 거겠지.’
오빈도 마찬가지일 텐데, 전혀 그런 내색이 없었다. 꿍꿍이가 있다기 보단 그룹이나 일적으로 이기고 싶은 라이벌 의식과 개인적인 친분 관계를 명확히 구분하고 있는 것이었다.
웃고만 지내 때로는 덩치에 비해 실없어 보이기까지 하는 오빈이었지만, 도욱은 그런 점에서 오빈을 존중했다.
‘내 복수 상대는 맨투맨이 아니라, 서강준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도욱은 오빈에게 어느 정도 마음을 열었다.
오빈이 무언가 할 말이 있는지 주변을 살폈다. 백댄서들이 지나간 복도에는 오빈과 도욱뿐이었다.
평소의 오빈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머뭇거림’이었다.
“빈이 형?”
“아. 말을 해야 되나. 막상 이렇게 도욱이 네 얼굴 보니까 말해야 될 것 같고.”
으으, 앓는 소리를 내며 오빈이 자신의 옆머리를 쥐어뜯었다.
“뭔데요?”
“너희 쪽 회사에서는 별말 없어?”
도욱의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에 오빈은 더욱 절망적인 얼굴이 됐다. 차라리 도욱이 알고 있었다면, 자신이 말하지 않아도 되니 편했을 것이다.
“나도 자세히는 몰라. 회사에서 자꾸 신인상은 당연히 우리 거라는 식으로 말하니까······. 이상해서.”
아직 인터넷 투표 기간이 2주 가량 남아 있었고, 앨범 집계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한 게 없는 상황이었다.
“솔직히 우리가 받으면 나도 좋지. 하지만 찝찝한 건 싫은데.”
도욱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지 알 것 같았다. 오빈이 자신이 쥐어뜯었던 옆머리를 털어 정리했다.
“너도 알잖아, 우리 회사.”
많은 말이 포함된 한마디였다.
***
아라 엔터테인먼트 본부장 서중원. 내부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서강준의 부친이 서중원임을 알고 있었다.
서강준이 서중원 본부장 덕에 데뷔를 하게 된 건 아니었다.
실력적인 면에서 최고의 노래나 춤을 추는 건 아니었지만, 서강준은 이미 최고의 얼굴을 가졌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서중원 본부장의 친아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서강준은 그야말로 ‘꽃미모’를 자랑했다.
때문에 아라 엔터의 정식 연습생이 되고, 데뷔를 하는 데까지는 따로 뒷말이 나오지 않았었다.
그러나 문제는 오히려 서강준 데뷔 이후부터였다.
서중원 본부장이 맨투맨에 쏟는 자본은 다른 그룹보다 월등히 많았다. 아라 엔터에 이미 자본이 충분했고, 맨투맨이 투자할 가치가 있는 그룹임은 분명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할 때가 있었다.
또 데뷔 이후 달라진 서강준의 건방진 태도도 문제였다.
철저히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태도로 다른 멤버들의 속을 썩였다. 그러나 쉽게 불만을 표하지도 못했다. 서강준에게 밉보인다는 건 서 본부장에게도 밉보인단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내부의 사정은 내부 사람들끼리 쉬쉬하는 중이었다. 괜히 말이 잘못 새나갔다가는 자신들이 도리어 큰일을 당할 터였다.
“실장님, 서 본부장님 저번에 SVS 가셨던 거 담판 지으러 간 거예요?”
“어휴, 그래. 오늘도 접대 골프잖아. 사방신화 출연 안 시킨다고 그랬다던데. 맨투맨 신인상 안 주면?”
“앗, 그럼 핑키걸스 대상 때도 돌던 소문이 진짜에요?”
“말해 뭐해. 핑키걸스 지혜인지 엄청 예뻐하셨잖아.”
“세상에······.”
본부장실 앞 두 명의 비서들은 자신들끼리 속닥거리며 서 본부장의 뒷거래에 대해 떠들기 바빴다.
“김 비서 어디 가서 입 조심하는 거 알지?”
“당연하죠! 제가 무슨 경을 치려고. 근데 제가 조심하면 뭐해요. 알음알음 소문 다 나서 알 사람은 알 텐데요, 뭘.”
“하긴. 그런 건 다 어디서 소문나는지 몰라.”
그때 본부장실 문이 열리며 골프웨어를 입은 서 본부장이 나왔다. 속닥거리던 두 사람이 차분한 얼굴로 일어서 본부장을 마중했다.
“본부장님, 로비에 차 대기시켜놨습니다.”
“흠, 그래.”
실장이 본부장에게 다음 스케줄에 대해 간략히 말하는 동안 김 비서는 얼른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 대기시켰다.
“난 라운딩 뛰고 바로 들어갈 거니까 알아서들 퇴근해.”
“네에, 알겠습니다.”
서 본부장이 이번 SVS와 맨투맨 신인상을 걸고 담판을 걸 수 있었던 건 케이케이와 맨투맨의 격차가 아직까진 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신인상은 어떤 가수나 연기자든 한 번밖에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상이었다. 그만큼 의미가 있었다.
물론 신인상 후보에도 못 올랐다가도 나중에 떠서 대상까지 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사방신화의 인기를 이어갈 아라 엔터의 ‘적장자’ 타이틀을 걸고 나온 맨투맨이 신인상을 놓친다는 건 아라 엔터의 명성에 흠집이 날 일이었다.
아라 엔터 본부장으로서도 자존심이 상했고, 맨투맨에게 쏟은 자본금도 있는 만큼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사실 이렇게 맨투맨의 자리를 위협하는 그룹이 있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됐다. 그러나 이미 케이케이라는 그룹은 맨투맨을 위협하고 있었다.
‘여기서 더 벌어지지 않기 위해선 신인상을 반드시 받아야 해.’
그래야 사람들의 인식에 맨투맨의 인기가 케이케이에 뒤지지 않고, 오히려 월등하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게 서 본부장의 생각이었다.
***
[도욱 오빠, 안녕하세요!!!
이 편지를 읽으실지는 모르겠지만ㅠㅠㅠㅠㅠㅠㅠㅠ
오빠를 너무 사랑하는 지영입니다!!!
용돈 모으고는 있는데 팬 사인회는 너무 비싸서 못 갈 것 같고
회사로 편지 보내면 못 받아보실까봐ㅠㅠ... 죄송해요.
근데 편지랑 선물 꼭 전해드리고 싶었어요.
소원을 이루어주는 꽃 천 송이에요ㅎㅎ
이거 만들면서 너무 행복했어요!
케이케이가 이번 신인상 꼭 받았으면 좋겠어요ㅠㅠ
신인상 받고 웃는 모습 보면 제가 더 기쁠 것 같아요...
그래서 매일 매일 투표 열심히 하고 있어요!
오빠 노래 들으면 잠도 잘 오고 오빠 얼굴 보면 힘도 나고...
오빠가 제 보약이고 영양제고 비타민이고 삶의 활력소ㅠㅠㅠㅠㅠㅠㅠ
너무너무 사랑해요ㅠㅠㅠㅠ 도욱 오빠 몰랐던 때의 제 삶이 상상이 잘 안 돼요.
계속 좋은 노래 많이 부탁드려요!
오빠 피곤하겠지만 힘내요ㅠㅠ 저도 힘낼게요! 사랑해요♡♡]
도욱은 숙소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방금 전 받은 편지를 읽고 있었다.
콘서트가 끝나고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팬이 매니저와 경호원의 엄호를 뚫고 들어와 건네고 간 편지와 선물이었다.
교복을 입고 있는 한눈에 보기에도 앳된 여중생이었다.
편지나 선물을 건네도 되는 자리는 아니었지만, 어린 학생이기도 했고 순수한 마음에 이러한 것이라는 걸 알아서 도욱도 일단은 편지를 받았다.
받으면서 쫓겨나는 학생을 향해 다시는 이러지 말라고 말하자, 여학생은 고개를 백 번 정도 끄덕이며 끌려났다.
역시나 편지의 내용은 무척이나 귀여웠다. 건네준 선물도 색종이로 접은 꽃 천 송이였다.
명품 액세서리나 고가 브랜드의 옷, 전자기기에 보약까지. 값나가는 선물이 주를 이루는 선물들 가운데 정성들여 준비한 선물이 오히려 특별하게 느껴졌다.
“지인짜 대단하다. 진짜 천 개인가?”
안형서가 유리병에 든 꽃송이들을 보며 물었다.
“세 볼까?”
김원이 안형서를 거들고 나섰다. 숙소에 도착하면 진짜로 세어 볼 기세였다.
어두운 차 안, 팬의 편지를 다시금 읽으며 도욱은 오빈의 말을 떠올렸다.
‘아라 엔터에서 무언가 꾸미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대로 있을 순 없겠지······.’
도욱은 운전을 하고 있는 앞좌석의 오백호를 보았다.
***
다음 날 아침, 새벽 운동으로 생각을 정리한 도욱은 우선 오백호와 따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라 엔터 쪽에서 무언가 손을 쓰고 있다는 이야기에 오백호는 잠시 놀랐다가 이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라고 판단을 내렸다.
“그런 거라면······ 권 이사님 선에서는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군.”
“권 이사님이요?”
“그래. 알고 계시지만 방법이 없으실 수도 있고.”
그 뒷말에는 아직 아라 엔터에 비해 힘이 부족하다는 말이 생략되어 있었다. 도욱과 오백호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때 오백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권흥조 제작이사로부터 온 전화였다.
“허, 뭐 숙소에 CCTV라도 다셨나.”
오백호 실장이 중얼거리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이사님! 안 그래도 연락드리려고······.”
도욱이 가만히 오백호와 권 이사의 통화 내용을 기다렸다.
잠시간 권 이사 쪽의 말을 듣고 있던 오백호가 놀란 표정을 짓고는 물었다.
“네? 좋은 소식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