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3)
“루카스 형?”
멀리서 봐도 루카스는 루카스였다.
여전히 까마귀 같은 차림새를 고집하고 있었다. 어두운 골목길에서 홀로 만났다면, 죽음을 전하러 왔다고 해도 믿었을 것이다.
“도욱이 오랜만이지······.”
오백호 실장과 루카스는 무언가 논의 중이었던 듯 회의실 테이블 위에는 A4 용지가 여러 장 쌓여 있었다. 또 모델들이 의류를 입고 찍은 사진들도 보였다.
“일단 앉아봐라.”
루카스와 인사를 나누는 도욱을 오백호가 테이블에 앉혔다.
케이케이 데뷔 활동 당시 루카스는 정말로 훌륭한 스타일링을 해주었다. 각 멤버들의 개성을 살리면서도 통일감을 주어 무대를 해치지 않았다. 오히려 무대를 돋보이게 하는 스타일링이었다.
또 스트리트 패션에 강점을 가진 신인 디자이너답게 스트리트 브랜드들을 많이 사용해 각종 브랜드에서 협찬도 받았다.
루카스의 세련된 스타일링 덕에 케이케이는 노래뿐 아니라 스타일까지 모두 한 발 앞선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또 평상시 입는 ‘사복 패션’에도 조언을 많이 받아서 개인적인 센스도 키우는 계기가 됐다. 물론 워낙 자기 개성이 뚜렷한 김원은 아무도 못 말리는 수준이라 아무런 발전도 없이 여전히 난해한 옷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고 있지만 말이다.
“축하부터 해야겠어. 루카스 씨가 브랜드를 곧 런칭하신대.”
“정말이요? 축하드립니다!”
“그렇게 됐어······. 고맙다.”
루카스가 눈썹 아래까지 내려 온 앞머리를 손으로 흐트러트리며 답했다. 앞머리를 가르자 드러난 찢어진 눈매가 날카로웠다.
케이케이 스타일리스트로 활동하면서도 루카스는 디자인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덕분인지 대기업 산하의 패션업체에서 루카스의 브랜드에 투자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과정 중에 어려움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사람도 주변에 많이 모아야 했고, 디자인적인 고민도 많았다. 투자자와의 마찰도 있었다. 그러나 각고의 노력 끝에 루카스는 자신만의 브랜드를 런칭하는 영광을 앞두고 있었다.
‘키스, 루카스인가······!’
루카스가 런칭하게 될 브랜드의 이름은 ‘키스, 루카스’. 다이아몬드 모양이 심볼이었다. 심볼을 떠올리며 도욱이 생각했다.
얼마 안 가 평범한 화이트 셔츠에도 키스, 루카스의 다이아몬드 모양 심볼이 손톱만 하게 달려있기만 하면 비싼 값에도 불티나게 팔리게 될 터였다.
“런칭 행사에 너희를······ 초대하고 싶었어······. 예전부터 생각했어.”
“저는 감사하긴 한데!······.”
초대 소식에 기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도욱은 오백호를 쳐다보았다.
“스케줄 확인 중이긴 한데 아마 될 것 같아. 연예인 중엔 유일하게 너희 스타일리스트였는데 너희가 빠지면 안 되겠지.”
활동 기간은 아니라 스케줄에 큰 무리는 없었다. 공백기에 팬들에게 떡밥을 줄 좋은 스케줄이기도 했다. 패션 행사에 참여하는 건 처음이니 도움도 많이 될 거라고 오백호가 말했다.
“도욱아 그리고······ 너를 모델로 세우고 싶은데······.”
“네?”
루카스가 테이블 위에 있는 모델컷 사진들을 정리해서 도욱의 앞으로 내밀었다.
자신이 입는 옷은 검은색뿐이었지만, 실제로 디자인한 옷들은 루카스를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의문을 가질 정도로 산뜻한 느낌이었다. 강렬한 원색들이 곳곳에 잘 섞여들어 개성도 살아 있었다.
“멋있네요.”
감탄하듯 도욱이 중얼거렸다. 역시나 다이아몬드 모양이 옷마다 박혀 있었다.
루카스가 그중 한 장을 짚었다. 선명한 푸른색과 옅은 회색이 섞인 스웨트 셔츠와 진한 회색의 바지를 입은 모델 사진이었다.
“이 옷을 입어주면 좋겠는데······.”
“설마 런웨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형?”
“어어······.”
“제가 어떻게 런웨이를······!”
도욱이 진심으로 놀라 물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초대야 당연히 괜찮지만, 괜히 모델도 아닌데 런웨이에 섰다가 우스워질 수 있단 말이지.”
오백호도 그 부분에 대해선 부정적인 입장이었던 건지 놀란 도욱의 옆에서 거들었다. 앞머리를 내리고 있어 루카스가 어떤 눈인지 잘 가늠이 되진 않았지만, 입매만큼은 단호했다.
키스, 루카스에 투자한 패션업체에서는 런칭 행사에서의 화제성을 원했다.
루카스는 디자인 업계 쪽에서는 이미 상당히 인정받는 디자이너였다. 루카스가 졸업한 뉴욕 디자인학교 출신들이 업계에 많이 포진해 있었고, 루카스의 한국에서는 흔치 않은 북유럽 감성에 매료된 이들도 많았다. 때문에 업계 쪽의 거물 인사들은 이미 행사에 대거 참여 예정이었다.
또 대기업 산하 패션업체가 참여한 이상 셀러브리티들의 참석도 문제없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회사 쪽에서는 더한 대중의 관심을 원했다. 명품이 아닌 중-고가로 형성된 키스, 루카스의 제품들이었다. 판매를 위해선 대중들이 브랜드를 인식할 만한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확실히 ‘잘나가는 브랜드’로 인식되는 게 중요했다.
그런 방식의 일환으로 회사 마케팅팀 쪽에서 먼저 런웨이에 톱급 연예인을 세우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루카스는 자신의 브랜드 런칭쇼에 단지 유명하다고 해서 이미지와 맞지 않는 연예인을 세우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설전이 오가던 가운데 루카스가 모델로 제안한 인물이 케이케이의 멤버 도욱이었다.
회사 쪽에서 제안한 톱급 연예인 정도는 아니었지만, 케이케이는 최근 가장 핫한 연예인이었다. 루카스가 제안한 만큼 브랜드의 이미지와 맞는 건 물론이었고, 회사가 바라는 화제성도 어느 정도 충족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네가 꼭 서 주면 좋겠는데······. 보통 패션쇼와는 달리 길거리를 걸어가는 컨셉이라······ 모델 워킹을 할 필요도 없어······.”
루카스의 설명을 듣고 나자 도욱도 왜 굳이 루카스가 자신에게 모델을 제안해 왔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키스, 루카스는 런칭과 동시에 각광을 받으며 세계적으로 뻗어나갈 브랜드였다. 패션쇼에 서게 되면 도욱도 어쨌든 주목을 받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주목받는다고 다가 아니다. 잘하지 못하면 오히려 이미지만 깎이겠지. 오 실장님도 이 부분을 걱정하는 것일 테고. 결과를 알 수 없는 부분들이 하나둘씩 생기는구나······. 잘 결정해야 한다.’
고심하던 도욱이 사진을 훑어보며 물었다.
“길을 걷는 컨셉이 어떤 식인 건지 더 자세히 설명 부탁드립니다. 우선은 알아야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루카스가 전체적인 무대 구성부터 컨셉을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루카스의 설명을 도욱과 오백호가 경청했다.
***
‘키스, 루카스’ 브랜드 런칭 기념 행사 당일.
행사 및 패션쇼는 신사동 가로수길의 3층짜리 대형 편집숍에서 이루어졌다.
1층에 포토월이 설치됐고, 식전 행사의 느낌으로 포토타임이 있었다. 패션쇼는 3층에서 이루어졌다. 패션쇼가 끝나면 2층에서 애프터 파티가 있을 예정이었다.
케이케이 멤버들은 루카스가 보내온 키스, 루카스의 옷들을 하나씩 입고 저마다 다른 스타일로 스타일링을 했다. 루카스는 케이케이 멤버들의 이미지를 고려해 알맞은 아이템들을 보내주었다.
와중에 김원이 루카스가 보내온 흰색 셔츠 위에 자신의 개인 소장 상품인 새빨간색 손수건을 두르겠다고 해서 코디들은 손수건을 빼내 숨기기 바빴다.
단체 아이템으로는 로고가 박힌 컨버스화가 있어 모두 그 컨버스화를 착용한 채였다.
포토월에서 손을 흔들며 사진을 찍고 있는 여배우를 보며 안형서가 입을 벌렸다. 케이케이 멤버들은 뒤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진짜 쩌네, 마.”
촌스러운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정윤기도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무대 뒤에서 쟁쟁한 가수들은 많이 만났었다. 그러나 배우나 다른 분야의 셀러브리티들을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그나마 인생가요 MC인 설레임이 그들이 본 유명 배우의 전부였다.
“저, 저 사람······.”
석지훈이 3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중년 남자를 가리키며 놀라서 말까지 더듬었다. 안형서가 수더분한 인상의 남자를 보며 의아했다.
“누구길래 그래! 그냥 아저씨 같은데?!”
“그냥 아저씨가 아니에요, 형! 루이베네 수석 디자이너였던 사람이에요. 요즘엔 한국 방송에 자주 나와서 얼굴 봤어요.”
패션 관련 방송을 자주 보는 석지훈이었다. 평범한 차림인 듯했지만 모두 명품이었다. 루이베네라면 가방 하나에 몇 백만 원에서 심할 때는 일천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 브랜드였다.
“와······. 루카스 형 출세했네.”
안형서가 중얼거리며 도욱을 보았다. 도욱은 평소보다 더 과묵한 상태였다.
“도욱이가 저렇게 긴장할 때도 있고. 도욱아 너무 긴장 하지 마! 잘할 거야.”
“맞아요, 형.”
안형서와 석지훈의 격려에 도욱이 눈을 들었다.
루카스의 설득 끝에 도욱과 힛 엔터테인먼트는 모델 제의를 받아들였다. 루카스의 말대로 전문적인 모델 워킹을 하는 것도 아니라 어느 정도 연습으로 가능한 런웨이였다. 노력이라면 자신 있었다.
좋은 기회였다. 도욱은 좋은 기회를 놓칠 마음이 없었다. 어느덧 자신감이 충만해진 도욱이었다.
‘그래, 잘해내면 된다.’
한 시간여 후 시작된 런웨이.
처음으로 키스, 루카스의 옷들이 공식석상에서 선보여지는 순간이었다. 루카스는 무대 뒤편에서 모델들의 옷을 손보고 있었다. 쇼를 앞두고 루카스의 신경은 한껏 예민해져 있었다.
합해 35벌의 착장 의상이 있었고, 도욱은 엔딩 바로 전, 34번째로 무대에 서게 됐다. 다른 모델들이 두세 번씩 무대에 서는 것에 비하면 도욱은 한 번만 무대에 서면 되는 셈이었다.
모델 아닌 도욱이 런웨이에 서게 된 것에 대해 물론 아니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모델들도 있었다. 자신들의 자리를 뺏은 셈이니 당연했다. 따가운 시선을 도욱은 아무렇지 않게 견뎠다.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니었고, 단지 시선일 뿐이었다.
반면에 스페셜 모델이라는 개념이라 생각해 별달리 생각 않는 모델들도 많았다. 오히려 아이돌 멤버의 등장에 신기해하며 친해지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었다.
헬퍼와 함께 옷을 가다듬는 루카스의 손길이 섬세했다. 옷의 디테일들을 보면 루카스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들이 있었다.
‘같이 선 모델들을 위해서··· 무엇보다 이 디자이너를 위해서라도 런웨이에 폐가 되진 말아야겠다.’
다짐하고 있을 때, 루카스가 목을 가다듬고 외쳤다.
“잘 부탁드립니다!”
모델들과 헬퍼들의 박수 소리와 함께 쇼가 시작되었다. 무대 앞, 런웨이 쪽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런웨이 뒤편의 분주한 분위기는 호수 위의 백조를 연상케 했다. 빠른 시간에 옷을 갈아입고 소품을 준비하는 모델과 스태프들로 거의 난장판이었다.
한 번만 무대에 서면 되는 도욱은 차례를 기다리며 난장판의 한복판에서 대기했다.
무대 위에는 갖가지 낙엽들이 깔렸다. 앞선 모델은 자전거를 끌고 걸어갔다. 더 앞에는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무대를 활보한 모델도 있었다.
도욱에게 주어진 소품은 시계였다. 도욱은 자연스럽게 걸어 나가 약속을 기다리는 듯 시계를 확인하고, 다시 되돌아 들어오면 됐다.
도욱의 차례였다.
도욱은 루카스와 연기 경험이 있는 데다 패션쇼를 많이 본 석지훈에게 도움을 받아 며칠 동안 수천 번 걷는 연습을 했다.
사실 자연스럽게 걷고, 가만히 서 있는 게 가장 힘든 연기 중 하나라고 석지훈은 말했다. 어색해보이기 십상이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연기자 중에는 그냥 서 있는 연기를 못해 굳이 벽에 기대 서 연기를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 부분에 대해 생각하며 도욱은 몸을 자연스럽게 쓰는 것에 대해 연구했다.
‘자연스럽게, 이곳은 거리이고, 나는 그저 걷는다.’
객석에 앉은 케이케이 멤버들을 비롯한 각 분야의 셀러브리티들의 눈이 도욱에게 집중됐다.
키가 자란 도욱의 키는 184cm.
모델들보다는 훨씬 작은 키였지만, 도욱은 남다른 비율을 자랑하며 크게 머리를 모두 넘기고 깔끔하게 착장을 마친 도욱의 외모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도욱이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눈길이 도욱의 다음 발걸음으로 쏠렸다.
***
마지막 모델이 런웨이에 서며 런웨이가 마무리됐다. 루카스가 나와 인사를 하자 박수갈채가 끊이지 않고 쏟아졌다. 모두 키스, 루카스의 의상을 극찬했다. 예정된 성공이었다.
런웨이 뒤에서 모델들과 인사를 나누고, 의상을 갈아입은 후 도욱은 뒤늦게 애프터 파티에 참석했다.
먹기 아까울 정도로 예쁘게 장식된 디저트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섞여 있어 케이케이 멤버들을 한눈에 찾기 힘들었다. 어느 쪽에 있냐고 연락을 해보려고 휴대폰을 들 때였다. 도욱의 뒤쪽에 서 있던 여자가 급하게 길을 지나가 자신도 모르게 도욱을 밀쳤다.
“엇!”
그 바람에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이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도욱을 밀친 것도 모르고 여자는 바쁘게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놀라서 황망히 여자의 뒷모습을 보던 도욱이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주우려고 할 때였다.
“여기요. 선물 받은 휴대폰을 이렇게 함부로 해도 되는 겁니까?”
휴대폰 액정에 미세하게 금이 가 있었다. 도욱에게 휴대폰을 내민 건 중후한 느낌을 풍기는 중년의 남성이었다.
감사 인사를 하려던 도욱은 그대로 동작을 멈췄다. 남자는 휴대폰을 만든 ‘유성전자’의 사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