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
Sensation (2)
모두가 가던 길을 멈췄다. 도욱도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단발머리 여학생은 내쳐진 손 그대로 들고 서 있었고, 석지훈은 무서울 만큼 굳은 표정이었다. 석지훈의 시선이 바닥 아래로 향했다. 아프기도 하고, 기분도 상한 단발머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 아파. 씨······.”
박태형에게 붙어 있던 단발머리의 친구가 다가와 괜찮냐고 물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대로 자리를 떠날 수도, 그렇다고 사생팬들에게 사과를 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먼저 석지훈의 팔목을 잡아챈 건 단발머리였다. 단발머리의 손이 팔에 닿자 석지훈이 소리를 내며 뿌리친 것이었다.
땅바닥만 보고 있는 석지훈을 뒤에 서 있던 정윤기가 살짝 밀었다. 도욱이 석지훈 쪽으로 가려던 때였다.
“빨리 가자. 늦겠다.”
석지훈은 정윤기에게 밀려 못 이기는 척 앞으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어수선한 분위기의 팬들을 향해서는 안형서가 어색한 웃음으로 대처했다. 다들 방금 전보다 더욱 걸음을 빨리했다.
석지훈은 뒤에서 팬들이 자신을 쏘아보고 있다는 걸 느꼈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팬들도 잘못한 게 맞지만, 석지훈의 반응도 조금 과한 감이 있었다. 사실 팬들이 만지려고 드는 건 기분은 나쁘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드려야 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도 소리를 지른 석지훈을 나무라는 사람은 없었다.
“예전에 팬한테 한 번 맞은 적 있어. 지훈이가.”
“마······ 맞았다고?”
안형서의 설명에 박태형이 놀라 되물었다.
사실 석지훈의 과민 반응에 이유를 나중에 기획사에 들어오게 된 박태형과 도욱을 제외하곤 모두 알았다. 두 사람이 기획사에 들어오기 전, 사무실 앞에서 석지훈을 기다리던 팬 중 하나가 석지훈을 때린 적이 있었다.
아역으로 이름을 알렸던 데다 훈훈한 외모로 석지훈은 꽤 많은 연습생 팬들의 관심을 받았다. 그중 고등학교 1학년 정도밖에 안 된 여학생이 있었다. 마른 체형에 여리여리한 모습으로 매일 찾아오지만 조용히 인사만 하고 가던 편이라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원래 석지훈은 기본적으로 팬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편이었다. 성격상 안형서처럼 나서서 팬 서비스를 해주지는 못해도 다가오는 팬들은 막지 않았다. 편지나 선물도 모두 받아주고, 이름을 얘기하면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아는 척을 해주기도 했었다.
밤늦은 시간에서야 연습을 마친 안형서와 석지훈이 연습실을 나선 어느 날이었다.
너무 늦은 시각이라 팬들도 많지는 않고, 극성스러운 팬 두어 명만 힛 엔터 사옥 앞에 서 있었다. 그들에게 시간이 늦었으니 집에 얼른 가라고 안형서가 한마디 하기도 했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기 위해 골목을 돌았을 때였다. 갑자기 날아온 가방이 석지훈의 등을 쳤다.
“아·········ㄱ!”
석지훈이 등을 맞고 휘청거리고, 안형서가 놀란 사이. 순식간에 여학생이 석지훈의 뺨을 치고는 왜 자신의 인사를 받지 않았냐며 소리를 지르곤 달려가 버렸다. 석지훈의 뺨에서는 손톱에 긁힌 자국과 함께 피가 조금 흘렀다.
차마 팬인 여학생에게 맞대응할 수도 없었던 석지훈과 안형서는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여학생에게 선 채로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그냥 어두워서 못 봤던 건데 말이야. 약간······ 아니 많이 이상한 팬이었어. 나중에는 또 울면서 사과하긴 했는데, 더 무섭더라. 나도 놀랐는데 지훈이야말로 많이 놀라고 상처를 받았던 것 같아.”
연습생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한 이야기였다고 안형서가 덧붙였다.
“놀랄 만하네요.”
도욱의 말에 박태형도 고개를 끄덕였다.
거칠기로 유명한 연예계 스태프들에게 어린 마음에 이래저래 상처를 받아왔던 석지훈이다. 그래도 팬은 자신을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따듯한 마음으로 대해 왔는데, 그 일은 석지훈으로 하여금 팬이라고 꼭 그런 것만도 아니라는 걸 깨닫는 계기가 됐다.
“평소엔 그래도 괜찮은데 요즘 많이 피곤해서 예민해진 걸 거야. 너희도 너무 걱정하지 마.”
웬일로 안형서가 형답게 박태형과 도욱에게 말했다.
실제 나이로 따지면 도욱은 멤버들의 큰형이거나 막내 삼촌 정도의 나이였다. 그렇기 때문인지 멤버들이 정신적으로 성숙해가는 모습을 볼 때면, 도욱은 어쩐지 뿌듯해지곤 했다.
그만큼 멤버들에게 정이 들어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석지훈······. 앞으로 팬들과 큰 문제는 없어야 할 텐데.’
생각하며 도욱이 연습실을 둘러 봤다.
연습실에 도착한 멤버들은 각자 흩어져서 연습 준비를 위해 몸을 푸는 중이었다. 석지훈도 묵묵하게 다리를 길게 뻗어 몸 풀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
‘Very Sorry’의 첫 음악 방송 무대 날.
인생가요 방송을 앞두고 멤버들은 머리를 하러 샵을 찾았다. 리허설이 이른 오전부터 있었기 때문에 새벽같이 샵에 와야만 했다.
비몽사몽으로 부은 눈을 제대로 못 뜨는 멤버들을 위해 샵 스태프가 스킨에 적신 차가운 화장솜을 우선 멤버들의 눈 위에 올려 놓았다. 한 명씩 머리를 감겨 주고, 스타일링을 시작할 때까지도 멤버들 대부분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오백호도 샵 구석 테이블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샵 스태프들도 피곤하긴 마찬가지였다. 평소보다 손길이 더욱 분주했다.
도욱을 담당하게 된 노란 탈색머리의 스태프가 드라이를 해주며 말을 걸었다. 스케줄 때마다 같은 샵에 오기 때문에 이미 친분은 있는 상태였다.
또 도욱은 최대한 관계자들과 원만하고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애썼기 때문에 스태프들 사이에서도 인성이 바른 인물로 통했다.
“도욱이 너 이제 부자되겠다?”
“부자요?”
“그래~ 타이틀곡 네가 썼다며. 저작권료 장난 아니잖아~!”
“아······. 용감한외동 피디님이랑 같이 쓴 건데요.”
“나눠가져도 대박이지 뭐. 뮤비 나온 거 봤는데 딱 봐도 대박!”
스태프의 칭찬에 도욱은 애매한 미소로 답했다.
음원에 이어 ‘Very Sorry’의 뮤직비디오가 공개되자 반응은 배로 더 뜨거워졌다. 잘 닦인 고속도로와 같이 잘 뽑힌 뮤직비디오에 사람들은 무대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냈다. 안무 버전 뮤직비디오를 보고 싶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뮤직비디오 화면의 시작과 끝이 도욱의 얼굴이었다. 덕분에 뮤직비디오 시작 섬네일도 도욱이었고, 사람들은 도욱의 얼굴에도 열광했다.
작곡에도 참여하고, 얼굴도 완벽한 도욱을 사기캐라고 칭하며 찬양하는 댓글들이 수두룩했다.
“아무튼 축하해! 오늘 1위 후보라며. 그럼 벌써 대박 난 거지.”
도욱은 거울에 비치는 제 얼굴을 한 번, 뒤에서 에센스를 발라주는 스태프를 한 번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컴백과 동시에 1위 후보.
며칠 전 소식을 들었을 때는 멤버들 모두 믿지 못했다. 소식을 전하는 오백호조차도 많이 놀란 채였다.
방송 점수가 전혀 없는 상태였다. 겨우 며칠 집계된 음원 점수와 음반 점수, 그리고 투표만으로 후보에 올라갔다.
“아, 고맙습니다.”
“대스타 돼도 모른 척하면 안 되는 거 알지?”
“물론이죠.”
“넌 안 그럴 것 같긴 하다만······. 이 일 하다 보면 사람 일을 알 수가 있어야지.”
중얼거리는 스태프에 도욱은 자신은 절대 안 그럴 것이라고 스태프를 달랬다. 피곤할 텐데 자기가 오히려 푸념을 했다며 스태프가 머리 손질을 끝낸 후 도욱에게 말했다. 도욱이 괜찮다고 했는데도 스태프는 미안하다며 샵 한편에서 간식들을 챙겨주었다.
***
SVS 방송국 인생가요 스튜디오 리허설 현장.
케이케이의 컴백 무대를 지켜보는 스태프들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미리 안무 영상을 전달받고 촬영에 대한 계획을 세웠던 촬영 감독도 카메라 리허설을 해보곤 박수를 쳤다.
“껄껄, 오늘 완전 그림 나오겠어!”
늘 피곤에 절어 있어 현장에서 웬만한 일로는 웃지 않는 촬영 감독이 소리 내 웃자 촬영팀 스태프들이 수군댔다.
리허설이었음에도 생방송처럼 최선을 다한 멤버들의 사복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본방 의상은 검은색 수트였다. 워낙 팬들에게 반응이 좋아 남자 아이돌이라면 한 번씩은 다 입어 본다는 수트 의상. 그러나 똑같은 의상이어도 누가 입는가가 중요했다. 교복 광고 촬영 때부터 몸을 다져 놓은 케이케이 멤버들의 수트 핏은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리허설 현장을 모두 지켜본 인생가요 현 피디도 흡족하며 다음 팀을 무대에 올리라고 지시를 내렸다.
세트가 바뀌는 사이 케이케이 멤버들이 내려와 스태프들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우렁차게 퍼지는 케이케이 멤버들의 목소리에 스태프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생방 때도 이만큼만 해줘라, 얘들아!”
현 피디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모두 현 피디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오백호도 현 피디에게 다가와 감사 인사를 전했다.
“신경 많이 써 주세요, 피디님.”
“오 실장은 욕심도 참 많아! 어떻게 더 신경 씁니까?”
장난으로 핀잔을 주는 현 피디에 오백호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여기 저기 원하는 곳이 꽤 있었던 케이케이가 컴백 무대로 인생가요를 선택한 건 두 가지이유였다. 하나는 한 회뿐이었지만 스페셜 MC를 세워준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서였고, 다른 하나는 현 피디가 내어준 무대 시간이었다.
현 피디는 크게 날 뻔한 생방송 사고를 막아준 도욱의 공을 잊지 않았다. 또 케이케이의 인기가 그냥저냥 지나갈 인기가 아니라는 걸 빠르게 판단했다.
때문에 힛 엔터 측에 통 크게 6분짜리 컴백 무대를 제안했다. 광고 시간을 제외하면 50여 분 남짓한 방송 시간에서 6분을 할애한다는 것은 신인에게는 정말로 큰 기회였다. 현 피디는 케이케이에게 그만큼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케이케이는 방송용 노래 편곡 없이 완곡으로 두 곡을 부를 수 있게 되었다.
힙합 장르에 가까운 ‘Something’과 팝 댄스이자 타이틀곡인 ‘Very Sorry’. 두 곡이었다.
“하하. 현 피디님이 신경 써 주신 것 다 알죠. 언제 한번, 아시죠?!”
오백호가 술잔을 꺾는 손동작을 하며 현 피디를 향해 웃어 보였다. 현 피디가 오백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럼, 그럼. 말로만 하지 말고 날짜 잡으라고~!”
오백호는 알겠다고 답하며 멤버들을 데리고 대기실로 향했다. 공중파 음악 방송 피디자리는 시청률이 어떻든 권력이 있는 자리였다. 가수들이 곡 홍보를 할 만한 곳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접대 자리는 그 권력을 누리는 자리였다.
몬스터를 키울 때도 종종 현 피디를 접대한 적 있었다. 오백호는 얼른 케이케이가 대형 가수가 돼서 현 피디에게 굽실대지 않을 날만을 기다렸다.
케이케이라면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멤버들은 대기실로 돌아오자마자 뻗어 버렸다. 리허설만으로도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와중에 도욱은 김우연을 따로 만나기 위해 대기실 밖으로 나왔다.
오늘의 1위 후보는 케이케이. 그리고 김우연이었다.
메시지로 안부 겸 이야기를 나누긴 했지만, 방송 전에 김우연과 만나는 게 좋겠다고 도욱은 생각했다. 자신의 우상이자 꿈이었던 김우연과 같은 무대뿐 아니라, 함께 1위 후보에 오르게 되니 도욱은 진심으로 감격스러웠다.
‘감격스럽다는 말을 해 봤자 선생님은 핀잔만 주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욱이 김우연의 대기실을 찾았을 때 김우연은 방송국 근처로 점심을 먹으러 간 터라 자리에 없었다. 어차피 방송 전이면 만날 수 있을 테니 서두를 것 없었다.
도욱은 김우연 대신 복도에서 김우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남자들을 보게 됐다.
“그 나이에 왜 여태 못 떴었겠냐. 다 성격 때문이야.”
“진짜 오지게 성격 더러워. 아까도 대뜸 반말로 이래라저래라 하더라.”
금연 구역에서 담배를 태우며 김우연의 욕을 하고 있는 건 3집이나 냈지만 아직도 제대로 이름을 알리지 못한 남자 아이돌 그룹의 멤버들이었다.
실력 없는 아이돌들에 대한 비판을 센 어조로 한 탓에 김우연은 일부 아이돌 그룹 관계자들에게 미운 털이 박혔다.
‘정말로 실력이 없는 사람들이 찔리는 거겠지.’
도욱은 인상을 찌푸리며 돌아섰다. 그런 도욱을 발견한 남자 중 하나가 도욱을 불렀다.
“싸가지 봐라?”
시시껄렁한 말투가 양아치와 다를 바 없는 말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