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눈 떠 보니 1% (2)
#눈 떠 보니 1% (2)
최대한 이상함을 감추려 보명은 종일 별말 없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평소 모습과도 크게 차이가 없었던 것 같다. 다행이었다.
점심시간을 지켜보니 윤진성을 비롯해 두어 명의 아이가 강도욱과 친한 인물들 같았다. 시끄럽고 껄렁대 보이긴 해도 노는 것에 대한 관심이 다른 아이들보다 더 많을 뿐, 아예 질 나쁜 부류는 아닌 듯했다.
벌써 다 알고 있는 수학공식들을 배우며, 보명은 시계를 확인했다.
‘다섯 시. 겨우 학교가 끝날 시간이구나.’
이쯤 되자 보명은 대충 강도욱의 학교생활을 파악했다. 평소 수업 태도가 엉망이었는지 도욱이 멀뚱히 칠판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선생들이 웬일로 수업을 듣고 있냐고 한마디씩 했다. 윤진성도 의아한 듯 안 자냐고 물어왔다.
가만히 있어도 친한 친구들이 몰려 들어와 낄낄대고, 복도를 지나가면 힐끔 거리는 여자애 한둘쯤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강도욱이 입을 다물고 있어도 대부분 강도욱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거나, 잘 대해주었다.
‘정말로 부러운 삶이다.’
서강준까진 갈 것도 없이, 강도욱 정도만 되어도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이었다.
가진 외모만 본다면 강도욱은 분명 더 큰 인기를 끄는 스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엔 노력이 부족했다. 가진 게 많음에도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던 생각도 없던 게 연예인 강도욱이었다. 그런 강도욱이 보명은 이제야 조금 이해가 됐다.
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이 정도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노력할 필요가 별로 없는 것이다.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리자마자 윤진성이 후다닥 책을 가방에 구겨 넣었다. 종례까지 하고 나면 학교는 끝이었다.
“저, 윤진성.”
보명은 오늘 처음으로 먼저 진성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강도욱에 대해 일상적인 정보는 하나도 없으니 어떻게든 친구인 윤진성으로부터 그에 관한 정보를 알아내야 했다.
“어? 왜.”
“나 학교 끝나면 뭐 해?”
“뭐 또 술 마시자고? 오늘은 안 돼. 나 학원 가야지. 오늘도 빠지면 엄마한테 끽-.”
“···그럼 난 뭐 해?”
“뭐? 아, 이 또라이. 이제 별. 네가 학교 끝나고 뭐하는지를 나한테 묻는 거냐?”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정말로 학교가 끝나면 무엇을 하는 게 강도욱의 일상인지까지는 알 방법이 없었다. 강도욱도 가야 할 학원이 있을 수도 있었다.
“피방 가든가. 가면, 현철이 놈도 있을걸?”
“피씨방?”
윤진성이 말하는 것들은 전부 누굴 만나 먹고 노는 것들이었다. 학원에 다닌다거나 하는 얘긴 없었다.
‘흠. 강도욱이 데뷔를 언제 하더라.’
보명은 곰곰이 햇수를 세었다.
‘열아홉! 강도욱은 열아홉에 데뷔한다!’
지금의 시간상으로 케이케이는 내년 6월에 데뷔한다. 따져 보면 강도욱은 열아홉에 데뷔한 게 됐다.
지금이 9월이니까 내년 6월인 데뷔까지는 일 년도 채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강도욱의 하루를 보면 연예계에 가게 될 것 같은 느낌은 전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데뷔하게 되는 거지?!’
***
보명은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강도욱의 휴대폰으로 그동안의 통화기록과 메시지들을 샅샅이 살폈다. 덕분에 자세히 강도욱의 주변 인물들과 평소 생활 등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뭐야··· 완전 놀기만 했네.”
메시지함에는 온통 게임과 여자 친구 등 노는 얘기뿐이었다. 얼마 전 잠깐 사귀었던 옆 학교 여자애와 헤어졌다는 사실은 있어도 공부에 관련한 이야기는 일절 찾아볼 수 없었다.
교수인 부모님은 강도욱을 무척 자유분방하게 키우고 있는 게 분명했다. 강도욱의 어머니에게서 온 메시지에는 집에 늦게 들어가니 저녁 잘 챙겨먹으라는 연락 정도가 전부였다.
“아이돌을 할 생각은 어떻게 한 거지?”
케이케이가 데뷔했을 때 잡지에 실린 인터뷰를 본 적이 있었다. 맨투맨이 데뷔한 직후였고, 신인상을 받은 맨투맨의 대항마가 될 그룹이라 초반에는 대대적인 언론플레이도 했기 때문에 인터뷰도 많았다.
‘거기에 데뷔 관련 일화가 있었을 텐데···. 그때 좀 더 유심히 읽어둘걸.’
후회 아닌 후회가 찾아들었지만 우스운 얘기였다. 케이케이 멤버의 몸속으로 자신이 들어오게 될 줄 당시에 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여전히 하루 정도 계속되는 꿈인 것도 같았다.
‘정말로 이게 현실이라면, 내 몸은 어떻게 된 걸까? 죽은 건가?’
무언가 시간이든 영혼이든 뒤틀리고 바뀐 것이라면, 그쪽은 어떻게 됐을지. 그쪽부터 찾아보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보명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러나 생각뿐이었다.
이곳의 김보명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기억들은 종이 한쪽 끝이 찢어진 것처럼 잘려나가 있었다. 이곳에서 보명을 찾아낼 만한 신상 정보들, 대학 이름이라든가, 살던 동네 이름이라든가 하는 것들만 떠올리면 정신이 아득해졌다. 마치 ‘진짜 보명’의 몸은 찾을 수 없게 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정류장에 멈췄던 버스가 다시 출발하려 시동을 걸고 있었다. 보명은 황급히 일어나 벨을 누르며 소리쳤다.
“헉. 아저씨! 잠시만요. 내릴게요!”
기사 아저씨의 눈총을 받으며 겨우 강도욱의 집 앞 정류장에 내릴 수 있었다. 버스가 보명을 두고 쌩하니 다음 정류장을 향해 달려나갔다.
“뒤죽박죽이네, 정말. 후···.”
머리가 아파왔다. 고개를 저어 정신을 가다듬었다. 버스정류장, 어두운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은 더 이상 멍청해 보이지 않았다. 날카로운 눈매 덕에 고뇌에 차 날이 선 듯한 모습이었다. 외모가 달라진 것만으로도 그런 느낌이었다.
‘나는 지금 강도욱이다. 이게 꿈이든, 주어진 기회든, 어쨌든 지금은 강도욱이니까···!’
보명은 고등학교 1학년일 때의 자신을 떠올렸다. 신체와 정신에 가해진 폭력의 여파는 실로 무서운 것이었다. 서강준과 그 무리가 보명의 주변에서 사라졌음에도 보명은 어두운 얼굴을 하고 내내 웅크린 채 살아야만 했다.
조금 구부러져 있던 어깨를 폈다. 어깨를 펴자, 아직 덜 자랐음에도 단단한 상체가 더욱 잘 드러났다.
보명은 그 모습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김보명의 어두운 과거 따위와는 먼 강도욱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인지 이전처럼 쉽게 마음이 무너지진 않았다.
보명은 자신이 나약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보명 자체가 그렇게 약한 사람은 아니었다. 폭력을 이겨내고 삶을 계속해서 살아간 것만으로도 보명은 강한 인간이었다. 보명이 몰랐을 뿐.
집에 돌아와 보명은 도욱의 방에서 조금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래 봐야 책상 서랍에서 도욱이 모아놓은 밀키웨이 앨범들과 스냅 사진 등이 다였지만. 어쨌든 지금으로선 도욱과 연예계를 엮어 볼 유일한 접점이었다.
‘설마 밀키웨이를 좋아해서 아이돌을 하게 된 건가? 밀키웨이를 보러 방송국에 갔다가 캐스팅? 방송국 앞에라도 가야 하나··· 후.’
보명은 밀키웨이 1집 앨범 CD를 꺼내 CD 플레이어에 넣고 틀었다. 경쾌하고 발랄한 소녀들의 음성이 방 안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새로운 기적을 기다리지 마.
눈앞에선 우리의 거친 길은 알 수 없는 미래와 벽.
바꾸지 않아. 포기할 수 없어.
보명은 저도 모르게 책상 위에 손가락을 두고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고개를 끄덕이다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문득 노래는 어떻게 부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입을 열었다.
“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윽.”
엉망이었다.
데뷔 후 강도욱의 노래 수준이 그럭저럭 봐줄 만했던 건, 짧은 기간이었어도 보컬 트레이닝을 받았기 때문인 듯했다. 보명은 입을 꾹 다문 채 잠시 고개를 숙였다.
엉망으로 뱉어진 노랫소리. 어린 시절 여기저기 노래 꽤나 한다는 소리를 들었던 김보명의 노랫소리는 아니었다.
“역시. 이건 내 몸은 아니니까······.”
어쩐지 민망해졌다. 비록 남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가수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부풀어 있었다. 그것을 보명은 방금 전 깨달았다. 남의 몸을 뺏은 듯했고, 왠지 염치없게까지 느껴졌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강도욱의 몸에 들어와 있는 동안에는 최선을 다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보명 자신의 못 이룬 꿈이나 복수심 때문이 아니라도 말이다.
지이이이잉― 지이이이잉―
교복 바지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울린 건 그때였다.
서현 누나.
메시지함에서 본 적 있는 이름으로 강도욱의 사촌 누나였다. 근처 대학에 다니는 대학생으로 가끔 강도욱에게 밥을 사 주는 등 제법 친했다. 외동인 강도욱에게는 친누나 같은 존재였다.
‘이걸 받아도 되나.’
보명은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난다고 해서 보명이 완벽하게 강도욱을 흉내 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완벽하게 흉내 내고 싶어도 강도욱의 열여덟이 어땠는지 알아낼 자료도 없었다. 상대가 조금 이상함을 느끼더라도 자꾸 부딪히는 게 나았다.
“여보세요?”
-바로 받네? 어디야. 학교 끝났지?
“어. 집.”
사람이 변했다는 것을 최대한 덜 티내려다 보니 말이 짧아졌다. 보명은 등 뒤로 식은땀이 다 날 것 같았다. 또다시 학교에서처럼 긴장이 됐다.
-집이야? 마침 잘됐네. 잠깐 나와 봐. 할 말 있어.
“어디로?”
-저녁 안 먹었지? 너네 집 앞 패스트푸드점으로 내가 갈게. 십 분 뒤에 나와. 내가 쏜다!
“알았어.”
-오! 웬일로 고분고분? 햄버거 먹고 싶었나 보네?
전화 너머로 강서현이 의아해하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강도욱은 주변 인물들에게 약간은 싸가지가 없었던 게 분명했다.
“무슨 할 말인데.”
-아, 일단 나와 봐. 나 삼십 분 정도면 도착하니까. 알았지?
“어.”
보명은 부러 무뚝뚝하게 답했다. 그게 강도욱 본래 모습이었기 때문에 강서현은 이상함을 느끼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
“너 연예인 안 해볼래?”
“···연예인?”
주문한 햄버거 세트를 들고 와 자리에 앉자마자 서현이 얘기를 꺼냈다.
‘사촌 누나인 강서현이 연예계 관련 종사자라 아이돌로 데뷔하게 되는 건가? 아니, 강서현은 아직 평범한 대학생에 불과하다.’
콜라에 빨대까지 꽂아 내밀며 강서현이 도욱을 향해 눈을 빛냈다.
“한 달 후에 힛에서 오디션 있다고 공지 떴거든! 거기 나가보는 거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