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1화
211. 양유혁(1)
‘빌어먹을.’
시련 던전에서 나온 강수호가 속으로 비속어를 뱉었다.
한 달 만에 50번은 넘게 시련을 탐험했다. 하지만 여전히 천마의 약점 같은 건 찾을 수 없었다.
찾는다더라도 그 약점은 다음 시련에 이미 완전히 극복된 후였다. 이제 더 이상 편법을 사용하여 스승님을 만날 수도 없고…….
“다시…….”
머리가 어지러워도 상관 하지 않고 또다시 시련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유물을 던지고 몸을 안으로 집어넣으려 하자 누군가 강수호의 발걸음을 막아선다.
“……무슨 짓입니까?”
시련 던전을 관리하는 엘프 장로.
한시가 급한 상황인데 앞을 막자 저절로 인상이 구겨졌지만, 막은 이유를 깨닫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들어가시면 죽으십니다.”
“……크윽!”
말과 동시에 밀려오는 고통.
쉬지 않고 시련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뿐만 아니라, 스승님의 힘까지 무리하게 계속해서 받아낸 터라 몸 상태가 말이 아니다.
“조금 쉬셔야 합니다.”
하루라도 시간을 내어 쉬어야 한다.
장로의 말에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급하다고는 하나, 쉬어줘야 머리가 돌아가는 법.
“후우……. 밖 상황은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습니까?”
팔을 눈에 기댄 채로 물었다.
한 달 동안 이곳에서 모든 일을 해결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고, 밖의 상황을 알아야 시간을 맞출 수 있다.
“큰 일은 없었습니다. 각 나라에서 악마들이 자주 출몰하는 것 빼고는요. 한 달간 시련 던전을 습격한 적도 없군요.”
“그거참 다행이군요.”
의외로 희소식이었다.
가끔씩 여러 나라에서 악마들이 들이닥쳤을 뿐, 시련 던전 습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몇 시간 정도는 쉴 수 있겠군요.”
“저희가 지키고 있을 테니 편히 주무십시오.”
“…….”
장로의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고작 30초도 안 돼서 잠이 든 것.
‘정신력을 그 정도로 낭비하셨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하루에 두 시간만 자고 한 달 동안 오직 시련에만 몰두했다.
식사도 마나가 전부.
장로는 나뭇잎으로 만든 천막을 통해 햇빛을 막아주고는 던전 밖으로 향했다.
* * *
촤아아!
파도가 치는 태평양 한가운데.
한 달 전만 해도 길드 배들 몇 척이 있던 시련 던전 앞은 어느새 거대한 요새를 갖추고 있었다.
“엘프 장로님!”
경비를 서고 있던 나나호가 장로를 부르며 다가왔다.
여러 적과 싸워서 그런지 전에 비해 능력을 컨트롤하는 데 더욱 익숙해졌다. 이제는 요새 주변의 바닷물을 몇 초간 들 수 있을 정도였다.
나나호가 조심스레 장로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강수호 님은요?”
“방금 잠이 들었습니다.”
“휴우……. 다행이네요. 과로사로 죽는 거 아닌가 걱정했거든요.”
“허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꿀잠을 주무시고 계십니다.”
장로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래 보지 않아 어떻게 될까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개인적인 감정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다. 강수호가 죽으면 세상은 악마에게 지배되는 거나 다름이 없으니까.
“그것보다…… 오늘도 조용하군요.”
“아, 네. 신기하게도 시련 던전만 습격을 안 받았어요.”
나나호와 장로가 검게 물든 바다와 하늘을 쳐다봤다.
휘황찬란한 요새가 있는 것치고는 조용한 태평양 한가운데.
이 요새가 만들어지고부터 던전은 단 한 번도 습격받지 않았다.
요새 때문이 아니다.
대부분의 나라에선 바리케이드를 더 높게 쌓고, 다양한 공성 무기들을 장착해 이것보다 더 튼튼한 요새를 만들어 둔 상태였다.
‘뭔가 준비하고 있는 것 같단 말이야.’
그런데도 계속 나라만 공격하고 있었다.
무슨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할 터.
“그런데 지금 순찰할 시간 아닙니까?”
“아! 깜빡했어요! 금방 다녀올 테니 여기 계세요! 혼자 있어서 무섭단 말이에요!”
“천천히 다녀오십시오.”
그전에 코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한 달간 습격이 오지 않았다고는 하나, 혹시 모르는 일이다. 이때를 틈타 공격해 올 수도 있으니까.
“이제 끝나겠구나.”
장로가 검게 물들인 밤하늘을 쳐다봤다.
자신 또한 검은 밤하늘에 점을 찍은 듯 반짝이는 별이 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드디어 이것도 끝이구나.’
막상 끝에 도달하니, 잔뜩 기대되거나, 공포감에 사로잡힐 것 같던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저 ‘끝’이란 것밖에 없었다.
평생 이어질 것 같던 일의 끝은 생각만큼 두렵지 않았다.
그저 이 일이 빨리 끝나길 바랄 뿐이었다.
오늘도 조용히 지나가길 바라며 나나호가 오길 기다렸다.
* * *
“커헉!!”
온몸이 마그마로 채워진 듯 뜨거웠다.
쉽게 숨을 내쉴 수도 없고 뱉을 수도 없었다.
이렇게 살아 숨 쉬는 것조차 행운이라 생각할 정도의 고통이 반복된다.
하루, 이틀, 삼일……. 한 달이 지났을 때 몸은 엉망진창이었다.
“쿨럭! 쿨럭!”
몸 안에 들어간 뜨거운 액체가 뱉어졌다.
보기만 해도 느껴지는 강력한 마기의 기운.
‘몸을 아예 마기에 담근건가.’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지만, 억지로 정신을 차리며 캡슐을 깨부쉈다.
콰직!
“크윽!”
캡슐의 부서진 파편이 양유혁 몸에 박힌다.
이제 막 마기를 받아들인 상태라 그런지 작은 유리 파편에도 깊은 상처가 났다.
“빌어먹을!”
양유혁이 크게 소리치며 박힌 유리 파편을 빼냈다.
피가 뿜어지며 바닥을 적셨지만, 금세 멈췄다.
“후우……. 회복력 하나는 끝내주네.”
찢어진 살이 1초도 안 되어 복구되었다.
높은 농도의 마기를 받아들였음에도 끝까지 살아남았기 때문일 터다.
신기한 점이 있다면 바로 정신이다.
“멀쩡하네?”
이곳에 와 자신에게 말을 건 악마에게 듣기로는 정신을 잃는다고 들었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무차별적으로 주변을 부서트릴 거라면서.
‘일단 나가자.’
지금 당장 그 이유를 알아내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정신을 차리고 있는 지금이 도망칠 수 있는 기회다.
‘빌어먹을 놈.’
자신을 키워주고 낳아준 아빠라지만, 억지로 독을 집어넣다니.
양유혁도 한계에 도달했다. 이제는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마기가 가득 채워져 가벼운 몸으로 당장 이곳을 벗어나려던 그때였다.
터벅.
“……!!”
계단 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
느낌이 좋지 않았다.
‘최상급 악마 두 명인가.’
자신이 강해졌다고는 하나,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악마들이 위험한 놈들인 건 확실했다. 힘이 어느 정도까지인지 확인하지도 못했고.
일단 숨기로 결정했다.
부서진 캡슐 쪽으로 몸을 숨겼고, 마기를 주변에 흩뿌려 인기척을 지웠다.
“이제 마지막 전쟁이 곧 있으면 시작…… 어?”
막 지하에 도착한 최상급 악마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있어야 할 자리에 한 사람이 없었으니까.
“…….”
침묵에 잠긴 주변.
최상급 악마는 순식간에 기감을 넓혀 양유혁을 찾으려 했다.
“찾았어?”
“……여기에는 없어. 나간 것 같은데?”
“망했네.”
“…….”
최상급 악마의 기감에 잡히지 않는 건 당연했다. 양유혁이 뿌린 마기뿐만 아니라, 주변에는 진득하고 농도가 짙은 마기가 가득했다.
악마들은 양유혁이 이미 도망쳤으리라 생각하여 빠르게 지하 계단을 올라갔다.
“위험했어.”
양유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계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더 이상 느껴지는 기척은 없었다.
빠르게 계단을 올라가 이제 막 출구에 도착할 때쯤이었다.
“……!!”
출구가 악마의 피와 살점으로 칠갑 되어 있었다. 아까 봤던 악마들의 것이 확실했다.
‘누구지?’
악마와 같은 편은 아닐 거다. 누군가 양유혁을 구하러 와 준 것이 분명했다.
확신에 가득 찬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는데, 소름 끼치는 느낌이 들었다.
‘뭐야?’
도와주러 온 사람이 아니다.
마기를 다루는 양유혁조차 역겨울 만큼 마기가 코끝을 찔렀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는 순간, 장신의 남자가 보였다.
“여기서…… 뭐 하는 거지?”
“…….”
키가 좀 큰 악마인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악마일 텐데, 느껴지는 감각만으로는 거대한 산. 아니, 차원 전체를 보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강자. 지금껏 봤던 이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한 놈이다.
최상급 악마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크고 검은 뿔.
“마, 마왕?”
그를 향해 더듬거리며 말했다.
말도 안 된다. 마계에 있는 그가 지구에 오는 건 말이 안 된다. 만약 온다고 하더라도 많은 시간과 리스크가 든다.
마왕이 여기 있다는 건 단 하나.
“멍청한 놈. 아버지란 놈과 다르게 생각이 짧군. 여기는 마계다.”
“…….”
하긴 이 정도로 농도 짙은 마기를 구할 수 있는 건 마계밖에 없다.
도망치는 건 불가능하다.
악마의 피로 질척거리는 손이 양유혁의 어깨에 닿았다.
“꽤 빨리 깨어났군.”
입이 찢어지도록 미소 지었다.
그에 소름이 돋았다.
‘죽는다.’
칼끝이 목젖에 닿는 기분이었다. 콘크리트를 부은 것처럼 온몸이 굳었다.
그 시간이 한참 이어지더니, 곧이어 소름 끼치는 살기가 사라졌다.
“허, 허억!”
“살기 조금 흩뿌렸다고 정신을 못 차리는 꼴이라니.”
한심한 듯 양유혁을 바라봤다.
예비 천마가 될 녀석의 힘이 그다지 강하지 않은 터다.
그래도 뭐 어쩔 수 있겠는가. 마지막 천마의 부탁인데.
“따라와라.”
“…….”
양유혁에게는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굳은 몸을 조금씩 풀어가며 마왕의 뒤를 따라나섰다.
‘떨지 마.’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
심호흡을 반복하며 몸을 진정시켰다. 여기서 멍청하게 떨다가는 저 손이 목을 뚫을 것이다.
마왕은 그러고도 남을 놈이니까.
계단을 한참 내려가자 다시 캡슐이 가득한 곳에 도착했다.
“오호……. 그래도 천마의 아들이긴 한가 보구나. 이 정도 마기의 농도에도 정신을 차리는 것 보니.”
흥미로운 듯 부서진 캡슐을 쳐다봤다.
마왕은 자신조차 견디기 힘든 무저갱의 공기를 섞었다. 그걸 마시고도 버틴 게, 흡족스러웠다.
‘쓸 만한 말이 되겠군.’
한껏 미소 지었다.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한 말.
필요하지 않을 수 있으나, 있어도 나쁘지 않을 거다.
다시 새로운 걸 정비할 때, 이끌어 가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면 편할 테니.
바닥에 흩뿌려진 마기와 유리 파편들을 뒤로 다른 캡슐에게로 시선이 갔다.
‘여기는 여전하군.’
캡슐 안에 들어 있는 여자 두 명.
언뜻 보면 천마에게 이상한 취향이라도 있을까 생각이 들 정도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건 그런 이상한 취향 같은 게 아니다.
“이리로 오거라.”
“크윽!”
억지로 양유혁의 목덜미를 잡고 캡슐 앞으로 끌고 갔다.
목덜미를 잡고는 그대로 캡슐에 붙였다.
“잘 보거라. 너도 아주 잘 아는 여자일 거다.”
“그게 무슨……!!”
도대체 뭔 소리인가 싶었다.
잘 아는 여자일 거라니?
금발 머리의 아름다운 외모. 저런 여자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쳐다보자 흥미를 잃었는지 잡고 있던 목덜미를 놓아주었다.
“재미는 천마나, 너나 똑같구나.”
“커헉! 쿨럭!”
마왕은 그제야 숨을 편히 쉬는 양유혁을 무시하고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다.
‘이건 아직도 있네.’
금발 머리의 여자 옆에 존재하는 또 다른 여자 때문에 골치 아팠던 일이 기억난다.
지금은 어차피 기억을 모두 잃어버렸지만.
“따라와라.”
다시 양유혁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보여줄 게 한참이나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