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6화
196. 천마(2)
“뭐야? 언제 나간 거야?”
“……밖에서 맛있는 냄새가 나길래 빨리 나가 봤지.”
“어휴, 먹보.”
갑자기 그가 사라져서 놀랐는지 한참 찾고 있었던 모양이다.
일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것보다, 결정했어?”
“다른 도시로 옮기는 거?”
“어, 여기에 너무 오래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원래라면 옮겨야 하는 게 맞았다.
일렌의 말처럼 가장 안전한 제국으로 이동하고 싶지만, 말처럼 쉽게 되는 게 아니었다.
“여기서 조금 더 머물다가 가자.”
“그래? 뭐, 악마 간부가 나타났다는 것 말고 위험한 건 없으니까.”
다행히 일렌은 거주지를 옮기지 않는 것에 대해 크게 신경 쓰는 것 같지는 않다.
어차피 위험 요소들은 전부 사라졌기에, 조금 더 쉴 수 있다는 생각에 오히려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흐암~ 그러면 오랜만에 낮잠이나 더 자야겠네~ 샬런, 너는 낮잠 안 잘 거야?”
“어, 나는 밖에 풍경 좀 구경하게.”
“나 몰래 뭐 먹고 들어오는 건 아니겠지?”
“맛있는 거 보이면 사 가지고 들어올테니까 걱정하지 마.”
“오케이~ 자고 있을 테니까, 천천히 와.”
그녀를 안심시켜 놓고 밖을 나섰다.
한시가 바쁘다.
‘최대한 빨리 전투를 준비해야겠어.’
천마의 전투는 이기려고 하는 전투가 아닌 약점을 파악하기 위한 전투다.
‘시스템의 말로는 그 사람이 천마인 것 같았지…….’
시스템의 말에 천마가 누군지 대충 예상은 갔다.
가까이 지내면서도 멀게 지내는 한 사람.
‘일단 준비하자.’
생각을 떨쳐내고 몸을 빠르게 움직였다.
이런 대도시에 영주가 없어진 지금, 대부분의 기사가 제국으로 향했다.
천마는 일렌과 강수호가 상대해야 할 판이다.
가게에 가서 다양한 도구들을 사기 시작했다.
* * *
‘여긴가.’
햇볕이 쨍쨍한 나무 위에 앉아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내려다보는 한 남자.
‘기껏 교황으로 만들어 줬더니, 피해만 끼치군.’
아주 살짝 인상을 구겼다.
일렌과 샬런.
이곳에서 제일 강한 그들을 지하 벙커에 묶어 두고 죽일 수 있었다.
그 기회를 교황 한 명 때문에 모두 망치다니.
‘내 눈이 틀린 걸 탓해야지, 어쩌겠어.’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순 없기에, 체념하고 나무에서 내려왔다.
어차피 고작 두 명밖에 되지 않는다.
아무리 강해도 고작 두 명이다.
“드디어 좀 쉬겠군.”
영혼 없는 눈빛으로 도시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더러운 오물이 묻었을 때는 누구도 싫어하고 역겨워한다.
하지만 그 오물이 묻는 것이 반복되면 어떨까.
역겨운 것도 어느새 익숙해지고 자기 것이 된다.
결국에는 그 오물 속에 살게 되어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된다.
그것이 영혼 없이 걸어가는 남자, 천마였다.
‘언제 볼 수 있을지.’
그가 오물과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목적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 짓을 계속할 정도로 중요한 목적이 말이다. 이제는 그 목적도 점점 잊혀져 가고 있긴 했지만.
“도착했군.”
상념에 빠진 채로 걷자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누구냐?! 신분을 밝혀라!”
“…….”
두 명의 문지기가 문을 지키고 있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사기가 만땅인게 육안으로도 느껴질 정도였다.
‘귀찮게.’
천마는 문지기를 무시하고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벌레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
죽어도, 살아도 벌레니까.
“멈춰!”
“…….”
“신분을 대라고! 어디서 도시에서 온 놈이야? 겨울에 어떤 미친X이 이동하는 거지?”
하지만 천마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들이 하는 일은 도시를 방문하는 이들을 검사하는 것.
겨울은 제국조차 힘든 시기이기 때문에 특히 더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
그를 막아 세우고 명단을 찾기 시작했다.
‘블랙 리스트인가?’
혹시 모르는 일이다.
저 남자가 세계적 범죄자면 지금 당장 알려야 한다.
그를 멈춰 세우고 리스트를 한참 뒤적이고 있자…….
“없는 것 같…… 음?”
블랙 리스트 마지막 칸에 남자의 사진이 있었다.
순간 눈이 잘못됐나 싶었다.
‘제일 마지막 칸이면…….’
세계적 범죄자 중에서도 가장 밑 칸. 가장 아래 칸에 위치한 이라면 한 명밖에 없었다.
“천…….”
콰직!
말을 채 다 잇기도 전에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주먹.
얼굴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짓이겨졌다.
“어, 어?”
옆에 있던 다른 문지기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입이 열리지 않았다.
남은 문지기는 괴물보다 더한 괴물을 본 듯, 몸이 잔뜩 굳었고.
스걱!
툭.
“귀찮군.”
눈을 감지도 못한 채로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끼이익.
천마는 시체를 아무렇게나 발로 차고 문을 열었다.
거대한 문을 열자 주민들이 보였다.
‘즐거워 보이는군.’
이들은 제일 힘든 마수와 악마의 진격을 막아 내었다.
중간에 더욱 힘든 일이 있었지만, 그것조차 큰 무리 없이 막아 냈고.
하지만 그보다 몇 배는 더 큰 폭풍 하나가 남아 있었다.
“무, 문지기가……!!”
“…….”
성문 앞을 지나가던 주민이 천마의 손에 묻은 피와 죽은 문지기를 발견했다.
천마는 움직이지 않았다.
패닉에 빠진 주민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면 더 이득이기 때문이다.
“치, 침입자다!!”
“정말 고맙군. 귀찮게 찾지 않아도 되겠어.”
일렌과 샬런을 찾기 위해 귀찮게 거대한 도시 전체를 뒤질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모두 물러나십시오! 저희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전투를 준비하거라!”
“옙!”
“깜빡했군. 이런 것도 있었지.”
순식간에 천마를 둘러싼 기사단.
천마는 흥미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둘러싼 기사단의 수를 세 보았다.
“하나, 둘, 셋……. 전부 백 명이군. 그다지 많지 않아.”
“방심하지 마라! 상대는 세계 최고의 범죄 조직 보스, 천마다!”
“으아아아!!”
하지만, 기사단 전체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천마에게 달려들었다.
천마는 그 상태에서도 무표정했다.
‘강한 놈은 없나.’
천마의 반의반도 못 되는 하찮은 것들.
천마의 날카로운 검이 그들의 목을 향해 휘둘러졌다.
“죽어……. 커헉!”
“느려 터졌다. 굼벵이도 이리도 느리지 않거늘…….”
고개를 젖히는 것만으로 가볍게 피해 준다.
그러고는 그대로 맨손으로 심장을 강탈해 간다.
심장 부근에서 뿜어진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며 바닥을 적신다.
“미친…….”
어찌나 잔인한지, 달려들던 기사들의 몸이 순간 경직되었다.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 길게는 수십 년, 적게는 수년 동안 검을 갈고 닦아야 한다.
그만큼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할애해야 기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평범한 병사 1,000명의 힘을 지닌 기사가 맨손으로 한 남자에 의해 죽었다.
‘이건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식은땀을 흘리는 기사단장도 그들이 처한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그들은 그저 시간을 끄는 말에 불과했다.
‘빌어먹을.’
인상을 잔뜩 구겼다.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푸욱-!
“커, 커헉…….”
그저 시간을 버티는 것.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었다.
* * *
‘10분 만에 왔어?’
공기를 타고 코끝으로 들어오는 질척한 혈향.
시간이 지날수록 피 냄새가 짙어지고 있었다.
‘빨리……. 빨리…….’
작업 속도를 올렸다.
죽는 건 거의 확실하다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죽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샬런, 밖에 짙은 피 냄새가……. 지금 뭐 하는 거야?”
“너도 빨리 준비해. 천마가 왔어.”
“……천마?!”
천마라는 말에 일렌의 눈이 크게 뜨였다.
뒤에서만 움직이던 천마가 직접 움직이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그놈이 왜 움직여?”
“나도 모르겠어. 일단 마법부터 준비해 줘. 지금 기사단이 막고 있긴 한데, 시간을 오래 끌지는 못할 것 같아.”
“알겠어.”
샬런의 몸으로는 최후의 전투나 마찬가지였다.
3분 정도 시간이 더 흘러가자, 기사들 대부분의 기척이 사라졌다.
‘5분은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하지만 그동안 천마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을 정도의 준비를 끝마쳤다.
“샬런! 주변에 마법진 다 깔아놨어!”
“갈게.”
그녀도 바닥에 마법진을 그려 준비를 마친 모양이다.
‘10분 정도는 싸울 수 있겠다.’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급하게 준비했다고는 하나, 작은 도시 하나 정도는 날릴 수 있을 정도의 마법진을 그렸다.
하지만 상대는 천마다.
‘큰 타격을 줄 순 있겠지.’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
천마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괴물.
그런 괴물을 고작 두 명이서 죽이는 건 말도 안 된다.
일단은 약점을 찾아야 한다.
‘시스템의 말처럼 이 과거는 미래로 이어지지 않을 거다. 약점을 찾기만 하면 돼.’
함정을 설치할 시간은 없었다.
다급히 만든 함정보다 더 나은 무기.
“됐다.”
-건틀릿이 강화되었습니다.
-건틀릿이 강화되었습니다.
…….
…….
…….
간단한 행위면서도 능력을 뻥튀기시킬 수 있는 방법이다.
“가자.”
이제 기사는 두 명밖에 남지 않았고, 그 두 명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두 명 다 팔 하나가 날아간 채, 겨우 정신만 붙잡고 있었다.
“후우……. 그래.”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강수호 뒤를 따라갔다.
* * *
“4분, 5분도 버티지 못하다니. 쓰레기들이군.”
“크, 크헉……. 허헉!”
팔 하나가 사라진 채 억지로 정신을 유지하는 기사 단장.
그 주변은 동료의 시체로 가득했다.
유일하게 살아 있는 건 부단장 한 명뿐.
“도, 도망치십시오…….”
“젠장.”
상태는 기사 단장보다 더 심각했다.
양팔 모두 절단되어 쓰러진 상태에서 혼자 일어설 수도 없었다.
‘포기할 수 없다.’
기사 단장은 이를 꽉 깨물고 검을 잡았다.
어차피 여기서 도망쳐도 금방 따라잡히고 말 거다. 차라리 시간을 끌다 죽는 것이 도망치는 것보다 몇 배는 나을 것이다.
“그 끈기 하나는 벌레보다 좋군. 좋다, 상으로 한 번에 보내주도록 하지.”
“으아아아!”
어차피 죽은 목숨이기에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내달렸다.
부단장은 기사 단장이 죽을 거라 생각했다.
“드디어 왔군.”
“어, 어?”
갑자기 몸이 붕 뜨지만 않았어도.
다행히도 기사 단장은 팔 하나만 날아갔을 뿐, 더 이상의 심각한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기사 단장은 제 몸이 공중에 뜬 이유를 곧 깨달을 수 있었다.
“빨리 도망치십시오.”
“가, 감사합니다!”
일렌이 그를 지켜준 거다.
“흐읍!”
기사 단장은 쥐고 있던 검을 바닥에 내팽개쳐 두고 부단장에게로 달려갔다.
평생을 가지고 다니던 검이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커, 커헉!”
“조금만 참아라!”
동료의 목숨이 그 무엇보다 소중했다.
양팔을 전부 잃었다지만, 힐러한테 부탁하면 충분히 재생할 수 있을 터.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달려 도시를 빠져나가 힐러에게로 향했다.
“오랜만이군.”
“…….”
해맑게 웃는 천마를 마주할 수 있었다.
수정 구슬에서 들었던 목소리 그대로.
‘하하…….’
천마의 얼굴을 확인한 강수호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질적인 목소리. 그런데도 뭔가 친근하고 익숙한 듯한 목소리.
천마의 목소리를 듣고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양시훈. 당신이었군.”
“……내 이름을 어떻게 안 거지?”
과거에도 지금도 변함없는 한 가지.
천마가 양시훈이란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