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8화
188. 눈보라(2)
“여기만 그러네.”
목적지의 중간쯤에서 잠시 발을 멈췄다.
눈보라는 선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더 이상 거세지지 않았다.
이건 대마법사 일렌도 쉽게 경험해 보지 못한 자연재해였다.
“누가 일으키지는 않았겠지?”
“아마도? 이 정도 눈보라를 일으키려면 나보다 10배는 강해야 할걸?”
자연재해가 아닌 게 이상했다.
그 정도 마법을 다룰 줄 안다면 최소 대마법사다. 일렌도 쉽게 캐스팅할 수 없는 대마법.
자연재해라 보는 게 맞다.
“계속 가자.”
일단 잠자리부터 찾아야 했다.
숙소까지 얼어붙어서 가지고 있던 것들 대부분이 사라졌으니까.
* * *
“마을 전체가 얼어붙었다는 말입니까?”
큰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도시의 기사 단장에게 말했다. 묵고 있던 마을 전체가 얼어붙어 이곳으로 왔다고.
“무슨 말도 안 되는…….”
당연히 그 말을 쉽게 믿어 줄 리 없었다.
아무리 1급 용병의 말이라지만 마나 폭풍이란 자연재해는 극히 드물게 일어난다.
마나를 많이 사용하는 마탑에서는 종종 일어나는 자연재해지만, 변방의 마을에서 일어나는 경우는 전혀 보지 못했다.
“이걸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마나 폭풍, 눈보라가 사실이라면 도시도 안전하지 않았다.
“일단 기사들과 병사들을 보내겠습니다. 믿어보죠.”
무려 1급 용병의 말이니 거짓말일 가능성은 극히 적었다.
한 번 믿어보기로 하고 병사와 기사 몇 명을 붙여 보냈다.
“돈은 있으십니까?”
정리를 마치고 기사 단장이 그들에게 물었다.
마을이 얼어붙은지라 가진 건 아무것도 없다. 한 마디로 몸 쓰는 거 말고는 이곳에서 생활할 만한 돈이 없다는 것.
“도와 드리겠습니다.”
다행히 기사 단장과 이곳의 영주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 대신 저희 도시를 도와 줄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 대신 그들도 도움을 필요로 했다.
작은 마을, 큰 마을, 도시, 제국. 크기가 크든, 작든 겨울은 항상 위험하다.
여기에 기사 몇천 명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1급 용병이 오다니.
‘이곳에 정착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번 겨울은 특히 혹독하다.
1급 용병의 도움을 받으면 큰 피해 없이 겨울을 마무리할 수 있을 터.
“당연합니다. 숙소하고 먹을 것만 조금 신경 써주시면 모든 도와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급 용병분들은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샬런이 고개를 끄덕이자 일렌이 대표로 손을 내밀며 말했다.
1급 용병이라도 모든 걸 다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서로에게 이득인 상황이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제 부하놈들이 숙소로 안내할 겁니다.”
“반갑습니다! 1급 용병분들!”
어느새 문 앞에서 나타난 기사들.
‘지구로 치면 B급 헌터쯤 되는 건가.’
수준이 대충 예상이 간다.
자리에서 일어나 기사들을 따라 숙소로 도착했다.
외진 마을에서 묵었던 숙소와 비교해 5배는 넓은 숙소.
“오래 걸어서 그런지 피곤하네. 샬런, 너는 안 쉬어?”
“괜찮아, 잠시 주변 좀 둘러보려고.”
“너무 무리하지 마! 내일 우리 마수 방어해야 하는 거 알지?”
“알아. 그냥 주변만 둘러보려고.”
도시가 커서 그런지 난방이 이전에 묵었던 마을보다 잘 된다.
춥긴 추웠으나, 버틸 정도는 되었다.
머릿속에는 이 도시를 한 번 온 기억이 있었으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제국의 일 때문에 둘러보지도 못하고 바로 떠났으니.
“금방 갔다 올게.”
숙소를 빠져나왔다.
문밖을 나오자마자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잘 익은 겨울 사과 봉지 하나에 5브론즈밖에 안 합니다!”
“유일하게 잘 익은 벼가 10브론즈! 쌀밥 드시고 싶은 분들은 사가요!”
발걸음을 몇 번 옮기니 시장에 들어온 듯 꽤나 시끄러웠다.
사람 사는 세상, 지구와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혹독한 한파가 불어닥치지만 먹고 살기 위해선 밖으로 나와 돈을 벌어야 한다.
시장을 지나쳐 거대한 벽으로 시선을 옮겼다.
‘크네.’
도시 전체를 방어하는 거대한 벽.
난생처음 보는 풍경에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1급 용병 신분증을 이용하여 벽 위로 올라갔다.
‘눈밭이네.’
벽 바깥은 눈밭으로 가득했다.
새하얀 눈만이 가득한 세상.
성벽 위에서 앉아 멍하니 쳐다봤다.
여기가 뚫린다는 상상은 전혀 할 수 없었다.
“이건 발리스탄가.”
벽 위에는 거대한 석궁, 대포, 마법 무기들이 널려 있다.
이 정도 무기라면 벽이 뚫리는 게 신기할 정도다. 거대한 도시인 만큼 무기 수준 또한 높았다.
한참 주변을 둘러볼 때쯤, 벽 밖에 보이는 마수들.
“상당히 많네.”
워낙 빨리 지나쳐 도시에 도착하여 있었는지도 모를 마수들.
각기 다른 동물의 형태를 띤 마수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공격 안 해 오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나.”
조금은 소름이 돋았다.
저만한 수가 성벽에 부딪히면 굳건한 성벽도 버텨내긴 어려울 듯하다.
과연 이 무기들로 막을 수 있을까 고민부터 들었다.
“내일부터라고 했으니, 이제 쉬어야겠네.”
더 이상의 고민은 하지 않기로 했다.
고민해 봤자 시간만 쓸데없이 낭비할 뿐이었다.
발을 옮겨 숙소로 향하자 어느새 편안히 누워 잠이 들어 있는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많이 피곤했나 보네.’
오면서 워낙 마나를 많이 사용해서 그런 듯하다.
발로 찬 이불을 덮어주고는 그녀의 옆에서 함께 잠들었다.
* * *
어제와는 다르게 새파란 하늘과 쨍쨍한 햇빛이 그들을 비춘다.
짙은 안개가 있던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풍경.
“반갑습니다, 기사 부단장입니다.”
“저도 반갑습니다. 저는 샬런이라 하고 이쪽은 일렌입니다.”
“반가워요.”
“반갑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녀도 기사 부단장의 손을 맞잡았다.
기사 단장이 총괄 지휘관이라면 부단장은 병사를 지휘하는 중요 체계를 지닌 사람이다.
“1급 용병들을 만나게 되어서 영광이군요.”
부단장이란 사람의 눈이 별처럼 반짝거렸다.
전 세계 고작 다섯 명밖에 되지 않은 1급 용병. 그런 이들이 무려 두 명이나 도시에 왔으니 흥분할 수밖에 없을 터.
“일단 해야 할 일부터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1급 용병은 처음 본지라……. 그러면 바로 계획을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멍한 표정으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그에게 말했다.
이곳에 겨울 동안 머물 수 있다는 것에 지불한 대가를 되도록 빨리 처리하고 다시 숙소로 들어가고 싶었다.
워낙 찜찜한 문제가 있기도 했고.
“일렌 님은 마법사들과 함께 성벽 위에서 지원해 주실 수 있습니까?”
“예, 그거야 쉽죠.”
“그러면 샬런 님은 저와 단장님과 함께 앞으로…….”
후방에서 활약하기 좋은 대마법사는 뒤로.
원래라면 강수호도 앞으로 나가 그들과 함께 싸우겠지만.
띠링!
-일렌의 옆에 있겠습니다.
-앞으로 나와 함께 싸우겠습니다.
“…….”
세상 전체가 멈추며 허공에 떠 오르는 메시지.
‘사망 변수’라는 메시지는 떠오르지 않았지만, 확실했다.
‘둘 중 하나를 무조건 골라야 하나.’
둘 중 하나를 골라도 위험한 건 같을 것이다.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
당장은 밖으로 나가 싸우는 게 유리하겠지만, 혹시 모른다. 이 맑은 날씨에 다시 눈보라가 칠지…….
“일렌의 옆에 있겠습니다.”
결국 결정했다. 그녀의 옆에 있겠다고.
-사망 변수를 회피했습니다.
세상이 다시 돌아가는 것과 동시에 떠 오르는 시스템 메시지.
“알겠습니다. 지금은 마수밖에 나타나지 않아 그다지 위험하지도 않으니까요.”
“고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단장도 크게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강수호가 들어간다면 상황이 전보다 나아질 뿐, 크게 어려워지진 않을 터다.
아쉬운 티를 내긴 했지만.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부단장이 거대한 성문을 지나 밖으로 나갔다.
강수호도 성벽에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음? 네가 왜 여기 있어?”
“혹시 몰라서. 눈보라가 불 수도 있잖아.”
“그래? 뭐, 저쪽도 크게 상관없기도 하고, 우리는 너한테 보호받아서 좋지.”
마법사들도 오히려 좋아하는 눈치였다. 마수 중에 원거리 공격을 하는 돌연변이가 있으니까.
뿌우우우!!
“준비하자.”
이야기가 대충 끝내자 거대한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귀 전체를 울릴 정도의 울림.
‘시작이네.’
쿵! 쿵!
뿔 나팔 소리와 동시에 성벽이 울린다.
“키에에에에!!”
“크아아아아!”
원인 모를 괴성을 질러대며 달려들기 시작한 마수들.
그 앞에는 수십 만의 병사와 기사들과 성벽이 세워져 있었다.
“시작할게요!”
“익스플로전!”
“아이스 볼!”
마나를 두 손에 모아 마법을 캐스팅하기 시작한다.
각기 다른 속성의 마법들이 마수들에게 부딪친다.
‘상당히 강하네.’
아무리 높아도 5서클 정도 되는 마법.
상당히 강한 마법이라 생각될 수 있겠지만.
“아이스 붐.”
그녀가 마법을 캐스팅하자 주변의 마법사들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9, 9서클 마법?”
“이걸 살면서 내 눈으로 보게 되다니…….”
8서클 대마법사인 그녀가 캐스팅하기에는 마나가 아직 부족하다.
하지만 최상급 마석 몇 개만 이용한다면 고위급 마법도 캐스팅할 수 있다.
콰콰콰콰콰쾅!!
거대한 얼음 구덩이가 마수들에게서 떨어졌다.
최소 100만 마리가 넘은 마수 절반 이상이 일렌의 마법에 의해 사라졌다.
‘대단하네.’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지만, 대단했다.
스승님이 사랑했던 연인의 실력이 이 정도라니.
‘무섭네.’
그 때문에 공포감이 먼저 들었다.
이런 괴물 같은 여자와 샬런을 죽인 이는 도대체 얼마나 강한 것인지…….
‘천마보다 강하다는 건가.’
천마의 힘을 아직까진 보지 못했다. 정확한 건 천마보다 강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
“허헉! 샬런, 나 좀 잡아줘!”
일단 이 상황부터 집중하기로 했다.
최상급 마석과 몸에 지닌 마나를 전부 다 사용한 결과였다.
그만큼 9서클 마법은 극에 도달한 인간만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
그녀를 부축하고는 근처 의자에 앉혔다.
“성벽 좀 둘러보고 올게.”
“그래, 빨리 갔다 와. 나 배고프니까 빵 좀 들고 와 주면 좋겠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잔심부름도 해야 하고 할 일이 많았다.
‘여기는 괜찮은 것 같고, 여기도 문제는 없고.’
성벽이 단단한지 한참을 살폈다.
곧 있으면 마수들이 성벽으로 밀고 들어올 테니까.
한참을 살펴보다 문제가 없다는 걸 알고 빵을 챙겨 가려 하자.
“……!!”
저 멀리서부터 하얀 안개가 천천히 도시를 향해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