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7화
187. 눈보라(1)
“하암~ 피곤하다…….”
엘프들과 지낸 지도 벌써 며칠이 지나갔다.
“못생긴 아저씨, 반가워요~”
“…….”
“아이야, 안녕?”
“…….”
이제는 그들의 무시도 어느 정도 익숙해질 지경까지 도달했다.
점심이 되자 전처럼 자리에 앉아 도시락을 깠다.
“라면이랑 김밥!”
밖에 나갈 일이 극히 적어 간단히 점심을 해결해야 했다.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김밥을 주섬주섬 먹고 있자.
“김밥은 참치김밥이 질리…….”
“누가 왔다!”
“…….”
퍽!
주르륵.
엘프가 달려가면서 뜨거운 물을 담고 있던 컵라면을 쳐 버렸다.
들판에 뿌려진 빨간 국물과 덜 익은 면.
“하하하하.”
김밥을 먹다 목 막힐 때 먹는 게 바로 라면 국물이다. 면과 함께 먹으면 그보다 환상의 조화가 없을 터.
그런 식사 시간을 엘프 한 명이 망쳐 버렸다.
“엘프님들?”
화를 참기 위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아무리 엘프들과 친해지려 한다고 노력한다지만, 이건 선을 넘어 버렸다.
“이거 어떻게 할 거…….”
“비켜!”
“커헉!”
엘프의 어깨에 손을 대자 턱을 향해 팔꿈치가 날아왔다.
너무 갑작스러운 공격에 전혀 반응하지 못하고 그대로 턱을 가격당했다.
“아야…….”
후끈거리는 턱을 붙잡았다. 평범한 엘프가 아니라 그런지 공격이 상당히 강하다.
정신을 차리고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자 주위에 있었던 엘프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음? 뭐야? 왜 아무도 없지?”
밖이라도 나갔나 싶어 던전 밖으로 나가려 하자.
“최서현 님.”
“음? 나나호 님? 엘프들은 다 어디 갔데요?”
나나호가 그녀를 붙잡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잘 만들어지고 있던 컵라면을 치고 가다니.
“지금 당장 찾아야 해요. 그놈들이 제가 먹고 있던 걸…….”
띠링!
말하는 순간 떠 오르는 시스템 메시지.
-던전을 이동시켰습니다.
“던전을 이동시켰다고?”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던전을 이동시켰다니……?
한참 의문이 생길 때쯤 사라졌던 엘프들이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내뱉는 한 마디.
“쓸모없는 것, 너는 좀 꺼져라.”
“…….”
퍽!
엘프는 최서현의 어깨를 밀치고 안으로 들어가 다시 방벽을 세우기 시작했다.
최서현은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볼 뿐이었다.
* * *
“아……. 갑자기 사라졌네.”
정상에 거의 도달했을 때쯤 닭살이 돋던 느낌이 사라졌다.
뭐가 있었다는 흔적도 없이 완벽하게.
“아…….”
허무하게 정상을 쳐다봤다.
여기까지 오는 데 많은 시체와 시간이 낭비되었다.
“개 같네.”
인상을 구기며 시체들 위에서 내려왔다.
진전이 없는 것이 아쉽긴 하나, 정상까지는 가 보기로 했다.
‘여긴가…….’
시체 없이 도착한 정상.
함정이 더 많을 것 같던 정상에는 와이어 줄 하나 보이지 않았다.
아마 그 기운이 사라지면서 함께 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
“진짜 개 같네!!!!”
화를 참지 못하고 뒤에 있던 시체에 흑마력을 발산했다.
사람들에게 흑마력을 들키겠지만, 상관없다.
펑!!
“후우……. 진정해야 해. 진정……. 제발 진정해야 해…….”
어차피 여기서 더 시간을 보낼 생각은 없었으니까.
일단 진정부터 하기로 했다.
이제 첫 시도일 뿐이다.
이번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왔기에 실패한 것.
다음에 온다면 들키지 않고 올 자신이 있다.
“일단 보고부터 해야겠지?”
정신을 차리고 미동도 없는 시체를 쳐다봤다. 여기서 더 움직였다가는 더 깊숙이 숨어버리는 수가 있다.
이사벨라라는 여자에게 보고를 올리고 천마에게 가면 된다.
-어디 있나요?
산에서 내려가려던 찰나, 머릿속으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
주변을 둘러보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아, 저 찾은 것 같아요.”
-찾았다고요?
“정확히는 놓쳤지만요.”
-놓쳤다고요? 어쩌다가요?
지금까지 일어났던 과정을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어떻게 해서 찾았고, 어떻게 해서 놓쳤는지.
-오호……. 그렇군요. 그러면 지금은 그 산 정상에 있는 거군요.
“그래요. 이대로 더 쫓을 수 있지만, 여기서 적당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눈치채서 더 깊숙이 들어갈 수도 있으니까요.”
모든 걸 설명을 들은 그녀는 그제야 납득했다.
여기서 더 깊숙이 찾다가는 오히려 손해를 볼 수도 있다. 천마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는 게 나을 터.
연락을 끊은 조한강이 자리에서 일어나 산에서 내려갔다.
* * *
“후우…….”
폐 안에 있던 이산화탄소를 뱉어내자 하얀 입김이 뱉어졌다.
숙소에 있는데도 주변이 너무 춥다.
“일렌, 장작을 더 때워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정도야? 나는 괜찮은 편인데.”
숙소 전체가 한기에 맴돌았다. 일렌은 괜찮은지 몰라도 샬런은 아니다.
“이, 일렌. 나 불 좀.”
“여기.”
신체가 강해도 일렌보다 추위를 많이 탄다.
아티펙트가 없는 샬런에 비해 일렌은 로브 같은 아티펙트를 여러 개 두르기도 했고.
“하……. 따뜻하다.”
그녀에게서 불을 받자 몸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든다.
영하 5도가 넘어가는 방 안에서 처음으로 온도가 영상이 되었다.
상온 8도.
“이제 살 것 같네.”
“따뜻하긴 하네. 내가 만든 불이 좀 대단하긴 하지.”
일렌도 만족한 것인지 해맑게 미소 지었다.
뼈가 시린 바람 대신 따뜻한 바람이 공기 중에 맴돈다.
“이제 자자.”
일렌의 말에 침대에 누웠다.
일렌도 따듯하지만은 않았던지, 샬런의 몸에 붙는다.
뭔가 조금이라도 감정이 있어 하는 행동이라 생각이 들겠지만…….
“코어…….”
“진짜 잘 주무시네.”
감정이 있기에 하는 행동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같이 다닌 터라 샬런의 옆은 엄마의 품처럼 편할 뿐.
5초도 지나지 않아 잠든 것이 그 이유였다.
‘하암~ 나도 좀 자야겠네.’
이제는 일렌처럼 강수호도 익숙하게 잠이 들었다.
감정이 깃들어 있어서 하는 행동이 아니라는 걸 아니까.
눈을 한 번 깜빡이자 금방 잠이 들었고 아침은 금방이었다.
“후으으으으…….”
눈을 뜨자마자 공기조차 얼릴 만한 한기가 느껴졌다.
느낌이 좋지 않아 일어나자마자 일렌을 깨웠다.
“일렌. 일어나.”
“우으으으. 추워…….”
그녀도 샬런과 마찬가지로 지독한 추위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뭐야? 어제 아무리 추워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인상을 잔뜩 구긴 채로 주변을 둘러봤다.
어느새 꺼진 장작불.
분명히 밤새 탈 정도의 장작을 넣은 것 같은데, 신기한 일이다.
“일단 나가자.”
“파이어.”
추위를 참을 수 없던 그녀가 불을 캐스팅했다.
그나마 추위를 던 상태로 숙소 밖을 나왔다.
그리고 방을 나오자마자 입을 굳게 다물 수밖에 없었다.
“…….”
“…….”
숙소 식당 전체가 얼어붙어 있던 것이다.
이런 일은 처음 겪은 일이 아니라 입을 쩍 벌렸다. 상당히 위험한 일에 휘말린 듯하니까.
“파이어.”
일렌은 가만히 있지 않고 불을 만들어 주변을 따듯하게 만들었다.
마나로 만들어진 불은 원래라면 얼음을 무시하고 숙소 전체를 태워야 했지만…….
픽.
“……뭐야?”
대마법사 일렌조차 당황할 기이한 모습이었다.
마력의 불이 고작 저런 얼음을 녹이지 못하고 꺼지다니.
강수호가 가까이 다가가 얼음에 손을 대었다.
‘차가워.’
얼음이라면 당연히 차가움이 느껴지겠지만, 이 얼음은 평범한 얼음이 아니다. 마나가 극도로 압축되어 있는 마력 폭풍에 집어삼켜진 눈보라.
아니면 누군가 인위적으로 발생시킨 눈보라. 하지만 첫 번째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인위적으로 발생시킨 것 같아.”
“이 외진 마을에 누가?”
“모르지, 일단 눈보라가 그칠 때까지 있자.”
섣불리 이동하는 건 바보 같은 행동이다. 눈보라가 그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이 상태로 눈보라에 들어갔다가는 눈이 몸 전체를 덮어 눈사람이 될 수도 있으니까.
휘이이이…….
“이제 멈춘 것 같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눈보라가 점점 멈추기 시작했다.
얼어붙은 창문을 통해 밖을 보니 안개도 사라져 밖이 환히 보인다.
얼어붙은 문을 열고 밖을 살폈다.
“처참하네…….”
먼저 밖으로 나간 일렌이 입을 열었다.
심각하다 못해 처참한 상황.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러게, 악마라도 우리 몰래 갔다 왔나.”
여러 가지 가정을 세웠지만, 모두 불가능한 것들이다.
짙은 마기를 지닌 악마가 나타나면 하급이라도 금방 느낀다. 아무리 자고 있었다고 해도 악마들을 느끼지 못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사실.
‘그러면 도대체 뭐지?’
아무리 생각해도 강수호의 머리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길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얼어붙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툭 치면 부서질 정도로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일단 마을부터 둘러보자.”
“응, 나도 탐지 사용해 볼게.”
마을에 뭔 문제가 있는지부터 살펴보기로 했다. 이 정도라면 악마보다 더한 놈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탐지에 느껴지는 건 없어.”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 일렌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탐지를 사용해도 주변에 느껴지는 인기척은 없었다.
‘눈보라를 일으키고 간 거거나, 그냥 자연재해인가.’
의심과 두려움이 들었다.
누가 이런 일을 저지른 걸까, 아니면 정말 평범한 자연재해일까.
낮은 확률이긴 하지만 마나 폭풍이 자연적으로 일어나기도 한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기에 최대한 조심스레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한참을 찾아본 결과.
“사람은 하나도 없네.”
살아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촌장조차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유령 마을이나 다름없다는 소리.
“일렌, 근처 도시 있어?”
“잠시만…….”
잔뜩 한숨을 내쉰 그녀가 지도를 꺼냈다.
마을이 이렇게 된 것은 안타깝긴 하나, 자신들이 먼저였다. 눈보라가 또 언제 불어닥칠지 모르기 때문에 대도시로 이동해야 했다.
“다행히 12시간 정도 뛰어가면 대도시 하나가 있네.”
다행인 건 근방에 대도시가 있다는 점.
물론 그들에게 근방은 최소 10일이 넘게 걸리는 거리를 뜻한다.
“가자.”
하지만 그들에게 그다지 오래 걸리는 거리는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최대한 빨리 도시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시련 던전을 찾았다고?”
“예, 예. 하지만 제가 멍청하게도 놓쳤습니다.”
“…….”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는 조한강을 쳐다봤다.
적어도 일주일은 걸릴 것 같다 생각한 시련을 벌써 찾았다니.
‘뛰어난 인재로군.’
한예림이 공을 들여 만들었다 하더니, 역시 뛰어난 인재다.
1만 마리가 넘어가는 시체들을 운용하다니.
“놓친 것이 아쉽긴 하지만, 아주 잘해주었다. 오늘은 쉬도록.”
“감사합니다.”
고개를 깊게 숙이며 사라지는 조한강.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소파에 누웠다.
“이곳도 끝에 도달하는 건가.”
정말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시련을 파괴하는 게 벅차긴 하겠지만, 악마와 마인들 수라면 충분히 가능할 터.
소파에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집을 나갔다.
“천마 님.”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예림을 향해 입을 열었다.
“모아둔 마인들을 모두 중국에 모두 푼다.”
“예, 알겠습니다.”
“그 대신 최대한 조용히 일을 처리해라. 소란을 부리는 놈들은 내 손으로 처리할 터이니.”
“알겠습니다. 그리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협회, 길드, 국가들이 아무도 모르게 진행해야 한다.
그들이 안다면 강한 압박이 들어올 테니.
“이만 가도록 하지.”
“들어가십시오.”
간단히 인사를 전하고 집에 들어와 수정구슬을 살폈다.
“도대체 이건 무엇인지…….”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이 수정구슬이 뭔진 모르겠다.
마왕의 말대로 지킬 수밖에.
이걸 지키지 않으면 평생의 시간을 낭비하여 목숨 바칠 이유가 없었으니까.
“쉬어야겠군.”
시련에 관련된 일들은 지운 채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