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3화
183. 과거(3)
-시련이 시작되었습니다.
-시련에서의 죽음은 현실에서도 죽음을 의미합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든지 ‘영웅1’을 해방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허공에 떠 오른 시스템 메시지.
눈동자를 움직여 눈치껏 허공에 떠 오른 메시지를 지웠다.
‘식당인가.’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다.
“어이, 그걸 한입에 다 먹는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지.”
“흐하하하! 내가 누군데? 충분히 한입에 먹을 수 있어!”
“먹어봐? 먹으면 내 손에 장을 지도록 하지.”
샬런과 일런은 시끌벅적한 음식점에서 맥주와 만화에 나올 법한 거대 고기를 먹고 있었다.
그 모습에 확실히 식당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샬런, 안 먹어?”
“어, 어?”
“네가 좋아하는 닭이잖아. 설마 안 먹어?”
바로 앞에 익숙한 여자와 식탁에는 여러 음식이 있는 상황에서 샬런이 되었으니, 당황할 따름이었다.
애써 당황함을 숨기고 대답하며 포크와 나이프를 쥐었다.
“먹지, 내가 얼마나 먹는 걸 좋아하는데.”
“많이 먹어! 이번에 내가 돈 벌어서 쏘는 거니까!”
“이 정도는 순식간에 먹어 치울 수…….”
스승님보다 식탐은 못 하지만, 충분히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나름 대식가 중 탑에 속했으니까.
하지만 이건 강수호라도 불가능한 음식의 양이었다.
“뭐해? 안 먹어? 네가 좋아하는 것들로 다 시켰는데.”
“머, 먹을게.”
구운 닭부터 시작해서 돼지처럼 보이는 동물을 통으로 구운 음식. 그리고 샐러드, 수프, 다양한 종류의 고기.
“꿀꺽.”
마른침이 저절로 삼켜졌다. 과연 이 음식들을 다 먹을 수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포크를 쥐고 잘 익은 고기부터 집었다.
푸욱!
곧바로 입 안에 넣자, 식당 요리사의 솜씨가 좋은지 아주 부드럽게 씹힌다.
왈칵!
“……!!”
평소 먹을 수 있는 소고기나 돼지고기 같은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거 뭐야?”
“뭐긴 뭐야. 오늘 우리가 잡은 거대 돼지잖아.”
“맛있다…….”
“당연히 맛있지. 샬런, 네가 먹고 싶다 해서 토벌했으니까. 마침 주변에 돼지 놈 때문에 피해 보는 마을이 있었고.”
익숙하다는 듯, 일렌이 말했다.
그때부터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돼지라고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맛이 나지 않는다. 전혀 다른 맛이다.
물론 맛없다는 소리가 아니다. 스승님이 해준 음식보다 맛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음식을 먹을 수는 없었다.
“후억! 배부르다!”
“벌써? 많이 못 먹네…….”
기도 끝까지 음식이 차올랐다.
샬런의 몸에 빙의해도 능력치까지는 같지 않나 보다.
‘배가 터질 것 같아.’
남은 음식은 전부 포장했다.
돈을 아껴야 된다나 뭐라나…….
식탁에 놓여 있던 남은 음식을 포장하는 사이 머릿속에 뭔가 빠르게 들어왔다.
-이 차원의 개념이 머릿속에 들어갑니다.
-샬런의 옛 기억이 머릿속으로 들어갑니다.
세계의 기억과 샬런이란 남자의 옛 기억.
샬런이 어디에 살았고, 이곳이 어디고, 어떻게 살았는지.
-모든 정보가 입력되었습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떠 오르자 머리의 두통이 시작되었다. 정보를 받아들이느라 뇌가 과열된 듯하다.
‘용병 일?’
시련이 정해 준 시간의 위치는 죽기 중상쯤.
용병 중에서도 1급에 위치한 샬런과 일렌.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며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소꿉친구.
어제 일 때문에 이 마을에 쉬려고 온 듯하다.
“샬런! 포장 다 했어! 이제 올라가자!”
어느새 음식 포장을 마친 일렌.
두통 때문에 머리를 짚다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벌써 일어난 과거의 일이긴 하나, 그녀가 이상하게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최대한 샬런 스승님답게.’
오기 전에 혹시 몰라서 스승님의 습관도 기억해 두었다.
스승님은 밥을 먹고 꼭 단 음료를 쭉 들이켠다.
“일렌, 잠시만.”
“맞다. 여기 음료수.”
언제 사 왔는지 그녀는 유리병에 들어 있는 음료수를 건넸다.
병을 잡고 3초 만에 원샷을 했다.
“후우! 이제 좀 시원하네!”
“이제 올라가자. 오늘 돼지 잡는다고 너무 뛰어다녔어.”
그러고 보니 일렌은 상당히 지쳐 보였다.
과거의 기억으로는 샬런 때문에 며칠 동안 움직이기만 한 듯하다.
포장한 음식을 들고 최대한 빨리 숙소로 올라갔다.
* * *
“어……. 장로님?”
“무슨 일이시죠.”
“우리는 뭘 하면 될까요? 여기에서만 있기 심심해서 말이에요.”
붉은 던전으로 변한 시련 앞에 선 나나호와 최서현이 물었다.
가만히 풍경만 감상하기에는 너무 심심했다. 뭔가라도 하기 위해서 장로에게 물었지만…….
“허허, 괜찮습니다.”
“그래도 주변에 있던 과일이라도 딸까요?”
“정말 괜찮습니다. 저희는 과일을 먹지 않습니다. 마나와 공기만 섭취하죠.”
“예? 그럼 저 과일들은…….”
“모두 나무의 것이죠. 아, 과일은 드셔도 상관없습니다.”
사과처럼 빨갛게 익은 과일들.
지금 당장 따 베어 물면 달콤한 과즙이 입 안에 퍼질 것이다.
“아니에요, 여기 오래 있을 생각으로 음식은 많이 들고 왔어요.”
“맞아요! 저희 진짜 괜찮습니다!”
음식은 그다지 필요 없다.
강수호에게 듣기로는 시련에 들어가고 나면 엘프들은 죽는다고 했다. 그런데 엘프들은 아직 죽지 않고 던전 앞에 서 있었다.
“다들 던전을 지키고 계시네요?”
나나호의 질문에 장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사명이니까.”
“사명요?”
“나는 시스템과 거래를 했어. 우리의 종족을 대가로.”
“…….”
언뜻 강수호에게 들은 말이 있었다.
악마들로 인해서 전 차원에서 사라진 엘프 종족을 살리기 위해서 시련을 지킨다고.
“안 무서우세요?”
누군가를 위해 죽는다는 것.
한 번도 해 본 경험은 없지만, 무서울 것이다. 두렵고 앞이 캄캄해 최서현이라면 쉽게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니, 못할 것 같았다.
‘나는 무서운데.’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
화장실이 급한 상태에서 3분만 걸으면 화장실이 나온다. 그 상태에서는 빨리 가기만 하면 된다 생각하겠지만, 화장실이 있는 걸 모르면 그럴 수 없다.
그냥 달릴까, 아니면 사람이 없는 곳에서 해결할까.
여러 가지 선택지가 놓이고 두려움에 잠식된다.
“하하, 무섭죠.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건 불로불사나 하는 짓이니.”
“그런데 왜…….”
“말했지 않았습니까? 저희 종족은 멸종했습니다. 다시 살릴 수만 있다면 이 짓은 평생 할 수 있을 것니다.”
“…….”
장로는 올곧은 길을 가는 걸 선택했다. 다른 곳으로 새지 않고 두려움이란 감정을 배제하고.
“대단하세요.”
장로의 거짓 없는 말에 최서현이 한마디 내뱉었다.
대단하고 용감했다. 벼랑 끝에 선 자가 이렇게까지 신기해 보일 줄은 몰랐다.
“심심하다지?”
“아, 예!”
분위기를 바꾸며 장로가 물었다.
시련 앞에 가만히 서 있기에는 심심할 터.
“이리로 오십시오.”
장로가 그녀들을 안내했다.
강한 그녀들을 놓아두기에는 인력이 아까웠다.
장로가 향한 곳은 마을의 중앙이었다.
“나무?”
나무를 몇 그루를 벤 건지, 마을 중앙 가득 쌓인 나무들.
그런 나무들을 가리키며 장로가 말했다.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서 방벽을 세워줄 수 있겠나?”
“옙! 걱정하지 마십시오!”
최서현이 힘차게 외쳤다.
그 정도쯤이야 쉽다.
이런 나무는 한 손가락으로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
두 팔로 아무리 들어도 전혀 움직여지지 않는다.
아무리 무거운 거라도 대부분 가볍게 들었었는데 신기했다.
이 나무가 도대체 뭐길래 이리 무거운 건지.
“아, 깜빡했구만.”
장로가 머리를 긁적이며 다가와 한 손으로 가볍게 나무를 들더니 바리케이드 쳐진 부분을 가리켰다.
“자네들은 쉽게 들지 못할 걸세. 엘프들의 손길만 허락하거든.”
“…….”
“자네들은 바리케이드가 괜찮은지 보기만 해주면 되네.”
나무가 살아 있는 생명체라며 손길을 거부한단다. 이상하다 생각할 수 있지만, 이곳은 시련이 있는 던전이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옙! 나나호 님! 저랑 같이 바리케이드…….”
나나호도 안 될 거라는 생각에 그녀를 불렀지만.
“어…… 저는 되는데요?”
“오호, 이런 인간은 처음 보는구나.”
물리계 헌터가 아닌 나나호가 나무를 아주 쉽게 들고 있었다.
자연(S급)이란 재능 때문일 터.
“자네는 나를 따라와 줬으면 하네.”
“예! 최서현 님. 저희 나중에 밥 먹을 때 봬요!”
“수고하세요!”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각자 역할을 잘 수행하기만 되는 법.
마치 심심하기도 했으니…….
‘열심히 해야지!’
열심히 하기로 했다.
시간은 대략 오후 3시. 던전에 들어온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간에서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일을 시작했다.
* * *
“으으, 춥다.”
“그러게. 두꺼운 이불 들고 오길 잘했다. 그렇지?”
“응응!”
어느새 숙소에 들어와 침대에 누운 그들.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침대가 하나밖에 없다는 점이다.
“추운데 왜 계속 떨어져? 나한테 좀 꽉 붙어.”
“어, 어? 어…….”
기분이 오묘했다.
7살 때까지만 엄마랑 같이 자본 게 전부.
‘그래도 춥긴 하니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워낙 춥기도 하고 딱 붙어 있으면 따뜻하니까.
‘겨울인가.’
밖의 날씨는 겨울이다.
시린 눈보라가 불어닥치는 한 겨울.
여기 겨울은 특히 한파가 심한지 숙소 내부임에도 온도가 영하 5도. 불을 피워도 1도 정도가 전부.
이렇게 잘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하암~ 샬런, 나 먼저 잘게. 너무 피곤…….”
“…….”
금방 잠이 든 일렌.
정신이 멀쩡한 강수호는 조용히 그녀를 쳐다봤다.
‘잘 주무시네.’
5초도 안 돼서 잠에 빠진 그녀.
10분 정도 침대에 누워 있다가 깊이 잠이 든 그녀를 보고 침대에서 나왔다.
‘확인해야 할 게 많아.’
시련 안으로 들어온 지 3시간밖에 되지 않았다.
기억은 문제 되지 않으나 능력이 문제였다.
“마법이…….”
밖으로 나와 곧장 마법을 발현했다.
원래라면 1초도 안 돼서 나와야 할 파이어볼이란 마법이…….
-‘영웅1’의 신체에 마나 통로가 있지 않습니다.
-마나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마나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마나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
…….
…….
무수히 떠 오르는 시스템 메시지.
상태창도 열리지 않는 걸 보니 마법은 사용할 수 없나 보다. 지금까지 얻은 스킬도 마찬가지.
“상당히 힘들어지겠는데.”
힘들어질뿐더러, 익숙해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거다.
일단 소화된 몸부터 움직였다.
“후우! 후우!”
한 동작, 한 동작이 부드럽게 움직인다.
원래 몸도 좋았는데, 지금의 몸은 마치 신이 빚은 듯한 몸.
‘몸은 최상.’
하지만 아쉽게도 마법은 사용할 수도, 통로를 만들 수도 없다.
마나 불감응증.
‘그래서 스승님이 마법을 못 사용했던 거구나.’
몇만 년이 지나도록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가진 병. 하지만 그 병이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힘.
펑!!
“……신기하네.”
주먹 한 번 휘두른 거 가지고 허공에 파동이 생긴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방향을 다른 방향으로 꺾을 정도로.
한참을 연습하고 있을 때쯤.
“안 자?”
“몸 좀 풀려고. 너무 뻐근해서. 이제 들어갈 건데…….”
어느새 샬런 옆으로 다가온 일렌.
둘은 다시 숙소 위로 올라갔다.
평생 같이 붙어 있던 둘. 한 시라도 같이 있지 않으면 상당히 불안해하는 것 같다.
“응! 자자!”
기쁜 듯 숙소로 달려가는 일렌.
그런 그녀를 보다 깊은 생각에 빠졌다. 빙의해도 샬런의 몸속에 남아 있는 사랑 때문이다.
그런 그녀를 잃은 기분이 어떨지, 그 마지막이 어떨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