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9화
179. 시련 체험(2)
“…….”
주변이 어느새 익숙한 풍경으로 바뀌었다.
시원하게 흐르는 강물과 들판들.
“돌아왔나?”
말을 할 수 있는 걸 알고 돌아왔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곧장 장로에게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다시 해 주세요.”
“다시 말인가?”
“예, 마지막에 그 목소리.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아서 말입니다.”
“흠…….”
잠시 고민하던 장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다시 들어가면 되네.”
“그런데 혹시 다른 스승님의 과거는 볼 수 없습니까?”
들어가기 전, 다른 유물을 하나 건네주었다.
샬런의 유물을 넣고 그의 과거를 볼 수 있었기에 다른 스승님들의 유물을 넣으면 그에 맞는 과거를 볼 수 있다 생각했지만…….
“죄송합니다만 구원자님이 사용하신 건 체험판입니다. 유물이 있다 해도 다른 분의 과거는 볼 수 없습니다.”
“아…… 아쉽네요.”
불가능했다.
시련 체험은 오직 처음 사용했던 유물만이 가능한 모양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들어간 지 벌써 이틀이나 지났습니다. 또 들어갈 예정이십니까?”
“벌써요?”
시련에서는 고작 하루란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틀이나 소모되다니.
“시련과 현실의 시간은 두 배 넘게 차이납니다.”
“다음에 들어올 때도 똑같겠네요?”
“예, 변함이 없습니다. 정말 들어가시겠습니까?”
“……예.”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마지막에 갑자기 나타난 익숙한 목소리. 세상 전체가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유일하게 찾은 ‘익숙함’.
‘꼭 찾아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남자를 찾아야 했다.
꽤나 짙은 마기에, 마지막에 등장한 이가 악마 그 이상이라는 걸 깨닫게 해 주었으니까.
“들어가겠습니다. 만약 친구들이 여기 오면 먼저 한국으로 가달라고 이야기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시련 체험은 정신력이 극한으로 소모됩니다.”
“괜찮습니다. 정신력은 스승님들을 만날 때부터 단련되어서.”
그가 누군지 알아낼 때까지는 시련 체험은 끝내지 못할 듯하다. 잘하면 시련을 바로 시작할 수도 있다.
“가 보겠습니다.”
간단한 작별 인사와 함께 다시 시련의 던전에 들어갔다.
-시련의 체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유물에 의해 ‘영웅1’을 체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목적지는 ‘타일런 행성’.
다시 한번 떠 오르는 시스템 메시지.
그와 동시에 처음 봤을 때와 똑같은 장면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 * *
“허헉!! 힘들어 죽을 것 같아요……. 산은 좋은데 걷는 건 정말 싫어요.”
“드디어 찾았다! 찾느라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최서현과 나나호가 쪼그라든 폐를 펴며 돌에 걸터앉았다.
산 정상에 도착하자 던전이 보였다.
“여긴가요?”
“예, 일반 던전에서 느껴지지 않은 짙은 자연 마나가 느껴지네요.”
“정확하네요. 그러면.”
자연을 주제로 하는 재능을 가진 그녀가 직접 그리 말했으니 정확했다.
“그냥 들어가면 될까요”
“예, 위험한 건 없는 것 같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될 것 같네요.”
나나호의 말과 동시에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 * *
“와……. 지금까지 맡았던 어떤 자연보다 맑고 좋네요”
먼저 던전 안으로 들어간 나나호가 밝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어떤 자연도 이보다 맑고 깨끗할 수 없을 거다. 자연적인 것들이 한순간에 코로 들어오니 머리가 맑아진다.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아가려 하자.
톡.
“……?”
배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감촉.
감촉에 고개를 들고 그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손들어.”
“…….”
커다란 귀를 가진 여성 엘프. 그리고 그 주변을 둘러싼 다양한 엘프들.
문제가 하나 있다면…….
“손들어!!”
몇십 명이 넘어가는 엘프들이 무기를 겨누고 있다는 거다.
겉으로 느껴지는 힘 또한 평범하지 않았다.
“저기, 저희가 강수호를 찾고……!!”
설명하기도 전에 날아오는 나무 단검을 허리를 숙여 피해 내었다.
엘프들과 굳이 싸움을 일으키긴 싫었다. 그들이 마인이 스토킹하는 것도 알려 줬으니까.
“장로님이 올 때까지 묶어 놓자. 혹시 모르잖아.”
“그러지. 좋은 방법이야.”
“…….”
하지만 그들은 무조건 안전이 먼저다.
어느새 밧줄을 들고 와 그녀들을 묶기 시작하는 엘프들.
그때 마침 처음 봤었던 남자 엘프가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일단 미안하다. 어쩔 수 없다. 처음 마인들이 온 걸 겪으니 경계가 심해졌군.”
“어쩔 수 없지요. 그래서 저희는 언제 풀어 줄 수 있을까요?”
질문에 조금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장로님이 오면.”
어쩔 수 없는 과정인 듯하다.
엘프들의 반응을 보면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니, 작은 창고에 밧줄이 묶인 채로 기다리기로 했다.
“하암~ 피곤하네.”
“저도 피곤하네요.”
2시간 정도가 흘렀다.
이 정도 시간쯤은 버틸 만했다.
“언제 오는 거야.”
“저는 자고 있을게요. 오면 깨워 주세요.”
6시간이 지났을 때 나나호가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졌다.
“…….”
정확히 하루가 지났을 때 잊혀지지 않은가 싶었다.
그리고 또 하루가 지났을 때.
끼이익.
“……!!”
드디어 문이 열렸다.
갇혀 있던 창고가 너무 어두운 터라 오랜만에 보는 빛이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았다.
“자네들이군.”
문이 열리고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굴을 보지 않고도 장로의 목소리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수호는 어디 있습니까?”
“하암~ 드디어 오셨네요.”
잠에서 깬 나나호가 잔뜩 하품하며 일어났다.
드디어 집에 가나 싶었지만.
“손님분들을 여기에 계시게 한 것이 죄송하긴 합니다만, 돌아가 주셔야 할 듯합니다.
“……예!?”
처음으로 나나호가 놀란 티를 내었다.
하루 반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냥 가라니.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시련 체험에 들어갔습니다.”
“……?”
장로의 말에 더욱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어쨌든 여기 있어봤자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강수호 님이 돌아오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터이니.”
그 말을 끝으로 밧줄을 풀어주고 그녀들을 밖으로 내보내었다.
“……이게 무슨 상황일까요?”
“하하, 저도 뭐가 뭔지…….”
두 여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산에 버려졌다.
어느새 사라진 던전.
“일단 가야겠죠?”
“그래야 할 것 같네요. 일단 안전한 것 같으니까.”
어쩔 수 없이 먼저 한국으로 가기로 했다. 중국에서 할 것도 없으니.
“저희 먼저 쉬죠.”
“좋아요, 한국 가자마자 치킨이나 뜯을 겁니다!”
다시 해맑은 미소로 변한 그들이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똑같아.’
시련 체험 안에 들어오자 보이는 건 전과 똑같은 풍경. 그리고 똑같은 이야기.
“대장! 대장!”
“으으…… 우으?”
“대장? 그러니까 과식 좀 하지 말라니까. 먹다가 죽은 귀신은 저기 하늘나라에도 처음 보겠다.”
모닥불만 어둠을 밝히고 있는 저녁.
전과 다름이 없는 100% 일치한 밤이었다.
똑같이 숙면을 취하고 똑같은 이야기와 행동이 반복된다. 사랑하는 감정이 느껴지고 다시 잡담을 나누며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한참을 걷던 도중 다시 샬런이 몸을 멈췄다.
“쉿. 다들 멈춰라.”
“…….”
예상대로 악마가 나타나 그들을 위협했다.
하지만 한 명, 한 명이 전부 강한 엘리트들이기에 중, 하급 악마들에게 쉽게 죽을 리 없었다.
악마를 죽이고 시체를 처리하여 캠핑할 자리를 찾았다.
-시련 체험이 10초 남았습니다.
-돌아갈 준비를 마치시기 바랍니다.
10초밖에 남지 않은 시간.
그 시간에 강수호는 청력 감각 기관을 극한으로 끌어 올렸다. 익숙한 목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있도록 말이다.
쿵!!
얼마 남지 않아 땅이 울린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귀를 파고드는 듯하다.
“경고했을 텐데. 여기서 당장 나가라…….”
더러운 마기를 지닌 한 남자의 목소리.
고작 두 마디도 이어지지 않더니…….
-시련 체험이 종료되었습니다.
‘아놔.’
시련 체험이 종료되었다.
한숨을 잔뜩 내쉬었다. 두 번째 남자의 목소리를 들어도 그 주인을 알 수 없었다.
마치 목소리에 모자이크 처리가 된 것 같았다.
“다시 오셨군요. 이틀이 지났습니다.”
“다시 들어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틀이 지난 건 큰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마인들이 이곳을 쉽게 찾아낼 수는 없을 테니까.
저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을 찾기 위해 다시 시련 체험 안으로 들어갔다.
* * *
“갑자기 나타난 신기한 던전을 찾았단 말인가?”
“예, 하지만 지금 그 던전의 위치는 자세히 모르겠습니다.”
“왜지? 신기한 던전이란 건 한 번 갔다 온 거 아닌가?”
이사벨라의 이상한 대답에 질문을 던졌다.
‘던전의 위치를 자세히 모르다니? 그러면 신기하다는 건 어떻게 안 거지?’
앞뒤가 말이 안 되었으니까.
잠시 생각에 잠긴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던전이 이동했습니다.”
“던전이 이동했다?”
그녀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번씩 있는 경우이긴 하나, 종종 있는 경우는 아니었다.
1만 번의 한 번쯤.
하지만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상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상한 사람?”
“예, 신기하게도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귀가 컸습니다.”
“…….”
귀가 크다는 소리에 몸을 멈칫했다.
귀가 큰 사람이라면 딱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엘프다.’
평화의 상징을 뜻하는 엘프. 하지만 평화의 상징이라는 것과 다르게 강한 무력을 자랑하는 놈들.
‘엘프가 왜 여기에?’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그때 엘프 일족은 전부 멸망시킨 거로 기억하는데.
‘시스템 때문인가.’
유일하게 생각할 수 있는 건 시스템.
엘프 종족을 지키기 위해서 벌인 일인 듯하다.
“알겠다. 중국 전체를 뒤져보도록 하지. 자네도 가는 거고.”
“알겠습니다. 준비해 놓겠습니다.”
간단한 명령과 함께 집에서 사라지는 그녀.
소파에 앉아 타오르는 모닥불을 조용히 쳐다봤다.
‘시련만 찾으면 이 빌어먹을 짓도 이제 끝나는군.’
한없이 기다려왔던 순간이었다.
곧 결실을 맺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 시간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
천마는 한참 모닥불이 타오르는 것을 보다 금방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