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 외전 역전의 제나 26
CCC크루의 첫 공식 활동.
대표적으로 운동 컨텐츠를 다루는 '김이응'과의 합방이었다.
"와…."
일행과 함께 목적지에 도착한 권지현이 입을 벌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봄과 여름의 중간에 있는 시기.
선선한 공기가 상쾌하게 느껴진다.
청아한 하늘이라는 바다를 구름들이 유유자적 유영하고 있었다.
태양은 느긋하게 따사로운 햇살을 흩뿌린다.
그 햇살은 맑게 흐르는 강에 닿자 빛가루가 되어 반짝였고, 곳곳에 피어 있는 꽃에 닿자 다채로운 광채로 거듭난다.
가지각색 활동적인 복장으로 달리는 사람들.
어디든지 갈 수 있는 것처럼 자유롭고 또 활기찬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들이 주기적으로 주변을 지나쳐갔다.
어제 하루종일 비가 내려 날씨가 흐렸던 것도 그렇고.
여지껏, 어두운 방 안에 틀여 박혀 있었던 것도.
혼자였던 것도 그렇고.
마치 그 모든 게 없던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좋아!'
권지현은 오늘-
아니지.
앞으로 모든 일이 잘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흐리멍텅한 그녀의 눈이 장소에 흘러넘치는 활력을 가득 퍼 담기라도 한 듯 의욕적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림자에 갇혀 있던 꽃이 햇빛을 받기 시작한 듯, 그녀의 웅크려진 분위기가 차츰 만개해 나가고 있었다.
"오, 지현 씨! 왠지, 그 신발도 그렇고 츄리닝도 그렇고. 새것 같은데, 맞슴까?"
"아, 그, 넹… 맞아용…."
"이 찌질이, 제대로 된 신발도 옷도 없길래. 어제 나가서 급하게 새로 맞췄지. 무슨, 준비물 챙기는 것마냥."
"헝… 이, 있는뎅…."
"있다고? 뭐, 그 누더기들? 하. 그게 신발이랑 옷은 무슨. 시발이랑 조-"
"어허! 랭귀지! 아무튼, 희은 씨. 어때요. 우리 지현 씨 잘 어울리죠?"
"으흠~ 희은 씨~?"
"…누나."
"완전! 잘 어울리심다! 맨날 여기서 달리시는 분이라 해도 믿겠슴다!"
"하, 달리는 꼬라지 보면 그 말 쏙 들어갈걸?"
"헝…."
"아핫! 어쨌거나, 여러분. 슬슬, 준비합시다!"
머지않아 방송이 시작됐다.
김희은은 얼핏 춤을 추는 듯 경쾌하면서도 능숙하게 스트레칭을 하며 방송을 진행했다.
"크~ 아무리 봐도. 달리기 딱 좋은 날씨 아님까~?"
-ㄹㅇ; 오늘 날씨 쩔더라
-날씨 ^^ㅣ발이 어제 내가 오랜만에 놀러나갈땐 요실금 걸린것마냥 툭하면 비 싸지르더만 -ㄹㅇ; 걍 시원하게 한번에 싸지르면 호감인데 너무 짜잘하게 내려서 ㅈ같았음-사실 김이응이 하느님이라 오늘 방송때문에 어제 남은 물기 다 짜내서 화창하게 만든 거임 ㅇㅇ;
-엄마 들었지? 교회는 엄마나 가 나는 하느님이랑 다이렉트로 소통하고 있으니까 -보낼 수 있을 때 어머니랑 시간 많이 보내~ 나처럼 늦기 전에 -ㅠㅠㅠㅠㅠㅠ
-엄마 사랑해요
-핸드폰 놔두고 여기다가 엄마 사랑한다 ㅈㄹ하는 ㅄ들은 뭐냐? 엄마 하늘나라에 계셔서 김희은 하느님한테 전달해달라는 거냐?
-여기 사탄도 있네
-정상회담 ㄷㄷㄷㄷㄷ
-이야 근데 날씨 좋긴 해 ㅇㅇ;; 오랜만에 함 나가볼까 외출한지 좀 댔는데 -얼마나 댔는데
-첫눈이 언제 내렸었더라
-세상에
"그러고 보니, 재훈이는 요즘에도 조깅하고 그러낭?"
김희은이 스트레칭을 하면서 고개를 돌린 겸 옆에 선 최재훈에게 물었다.
"옹? 그걸 어떻게 아셨대요?"
"그때 방송에서 조깅하는 거 보여줫었자낭~"
"네? 아~ 그때. 그, 제가 방송 처음 할 때?"
"응, 그거. 그거."
"오호~ 아니, 잠깐… 그때, 제가 조깅하는 시간이었으면 새벽이었을 텐데, 그걸 챙겨보셨다고요?"
"그게 왜~?"
"그 시간에 제 방송 챙겨볼 정도면, 오늘은 합방이 아니라 거의 팬미팅이라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그런가!? 는, 농담~ 당연히 편집 영상으로 본 거지~ 아핫! 여러분, 보셨어요? 재훈이 완전 연예인 병 말기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팬미팅 ㅇㅈㄹㅋㅋㅋㅋㅋ
-인중에 꿀밤마렵긴 하네 ㅋㅋ
-추컷아 숨하다..
-아 냅둬 ㅋㅋ 한창 그럴 때잔어 ㅋㅋ
"아핫! 재훈이 엄청 혼난다~ 어떡해~ 불쌍해서~"
"아니, 저기요. 연예인 병이라니. 한창 예민하고 복잡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낭랑 18세의 섬세한 영혼에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 말인지 아시나요?"
"뭐래니~ 누가 들으면 내 탓인 줄 알겠다~? 자업자득이야 재훈아~ 요즘 잘 나간다고 너무 거만해졌어~ 저기 저 봐, 삼피 씨 겸손한 모습 보고 본받으란 말이야."
"응? 나?"
스트레칭을 하던 삼피가 피식, 특유의 비웃음을 그렸다.
"난 겸손할 필요 없는데? 쟤처럼 어중간하게 잘 나가는 게 아니라?"
"지금 보고 느끼셨겠지만, 이미 충분히 본받고 있습니다."
-크
-캬
-어우야 ㅋㅋㅋ
-자신감 ㅁㅊ다 ㅁㅊ어
-ㄹㅇ; 삼피정도면 거만할 자격 있지
-근데 조컷은 좀 ㅋㅋ;;
-ㄹㅇ ㅋㅋ;; 애매하지 ㅋㅋ;;
-아 ㅋㅋ 본받을 거면 개쩌는 능력부터 본받아야지 거만함을 본받고 앉았누 ㅋㅋ-아 ㅋㅋ 능력은 본받을수가 업잔아-병신tv) 푸슝파쓩 책을 사놓고 표지만 읽는 새끼가 있다!?
"그렇다는뎅~?"
"섭섭하네…."
"자 그러면, 여러분. 다들 준비되셨슴까? 오늘 저희가 달릴 코스는 지금 옆에 보이는 맑은 강 따라서 쭉 달리다 다리가 나오면, 거길 건너서 다시 여기로 돌아오는 무난한 평지 코스임다! 아마도, 대충 30분 정도가 걸리지 않을까 싶슴다!"
원활한 방송.
아주 좋은 분위기.
그 안에 권지현은 없었다.
'아, 지, 지금!'
그렇기에 권지현은 권지현은 몇 번이고 그 방송에 자신도 녹아들고자 시도해 보려 했으나-
'아, 아니… 아닌가 봐….'
자신이 끼어들면 저 분위기가 망가지는 게 아닐까.
자신이 없기에 저렇게 분위기가 좋은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그녀를 주저하고 망설이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
권지현은- 온라인이 아닌 현실에서 남들과 어울리는 법을 알지 못했다.
자신을 드러내는 법을 알지 못했다.
권지현이 당한 괴롭힘은 그녀를 지독하게도 망가트려 놓았다.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걷는 평탄한 길을 걸으면서도 계속해서 넘어지게 만들 만큼.
권지현은 두 사람과 함께하는 매 순간,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그 사실을 자각하곤 했다.
휘청거리고 넘어지곤 했다.
"음… 그러면 얘 끼고는 40분 정도 걸리겠고-"
"뭐 임마? 그럼 얜?"
"어… 지현 씨 끼고는… 45분?"
"하, 찌질아. 그렇다는데. 어떻게 생각하냐?"
그럴 때마다, 둘은 기꺼이 발을 멈추고 그녀를 기다려주었다.
그녀가 다시 넘어질지라도 일어서서 나아갈 수 있으리라 믿어주었다.
"그, 그…! 40분에 맞출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권지현이 마침내 용기 내어 시청자들에게도 들릴만큼 씩씩하게 외쳤다.
"하, 뭐야. 나한텐 비벼볼 만하다, 뭐 그건가?"
"느, 네!? 아, 아뇨! 그, 그게 아니라!"
"오, 지현 씨. 삼피 따돌리겠다 선언~"
"오오오, 지현 씨 멋지심다! 기대하겠슴다!"
"헝…."
-??? 저거 누구임
-아 맞다 권지현도 있었지 참 ㅋㅋ
-아니 ㅋㅋ 난 그냥 근처에서 스트레칭 하고 있는 사람인줄 알았는데 -ㄹㅇ ㅋㅋ 뭔데 계속 저기 있나 싶었는데 권지현이었누?
-존재감이 너무 없어서 존재감이 넘치는 사람 ㅋㅋㅋㅋㅋㅋㅋ
"아핫! 그럼 여러분, 슬슬 출발해 보겠슴다~"
그 이후, 권지현은 자신을 드러내어 분위기와 무리에 녹아들고자 서툴지만 열심히 노력할 수 있었다.
남들에겐 아주 당연하고 소소한 일이었다.
하지만 권지현에겐 아니었다.
그녀는 게임에서 [레벨업!]을 했을 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지만, 그보다 더욱 실감나며 풍부한 고양감을 느꼈다.
권지현의 기준에서 오랜만의 격렬한 운동이었다.
입에 피맛이 돌고, 거친 호흡에 기관지가 바짝바짝 마르는 게 느껴졌다.
그녀가 당장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힘들어하고 있다는 사실이 방울져 떨어질 만큼 흐르는 땀과 거친 호흡으로서 겉에 드러났다.
그럼에도 그녀는 싫은 소리를 하며 힘든 내색을 하지 않고-
"헥- 헥-"
거리며, 열심히 달렸다.
그 모습은 어딘가 골든리트리버를 연상시켰고.
기분 탓인지.
숨이 넘어갈 듯 힘들어하는 그 모습은, 행복해서 웃는 것처럼 보였다.
김희은은 시선이 그녀를 향할 때마다 흐뭇한 미소를 짓곤 했다.
또, 제나는 시선이 그런 김희은을 향할 때마다 흐뭇한 미소를 짓곤 했다.
"지현 씨, 괜찮으심까!? 후! 너무 힘들면, 후! 속도 좀 줄일까요!?"
"느, 넹!? 헥- 아, 그- 헥- 저, 저는 괜찮으니까! 헥- 신경쓰지 마세욧…! 헥-!"
"지현 씨야 말로 신경 안 쓰셔도 됨다. 후! 이게 뭐, 경주도 아니고. 후! 아까부터 지현 씨 힘드셔서 한마디도 못 하시고 계시잖슴까, 후!"
"아, 그, 그러면… 헥- 그럴…까용…? 헥-"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후. 헤이, 김이응. 얘 오늘 죽고 새로 태어날 생각으로 여기 온 거니까- 후. 죽일 생각으로 밀어붙여- 후. 오늘부터 맨날 조깅할 생각이라니까, 달리는 방법도 좀 제대로- 후. 알려주고."
"오!!! 지현 씨!!! 그렇게 대견한 마음가짐이라니. 정말이심까? 후!"
"그러고 보니 저도 그렇게 들었던 것 같기도 함."
"헝… 그, 그런가봐용… 헥-"
"아핫! 그런가봐용은 뭠까! 지현 씨 너무 귀여우신 거 아님까!"
네 사람은 마치 오랜 친구처럼 부드럽게 어우러졌다.
덕분에 방송의 분위기는 시종일관 화기애애하며 생동감 넘쳤고, 그날 CCC의 첫 공식 활동은 '김이응 실시간 방송 최고 시청자 수 갱신'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성황리에 마무리되었고.
이후, 그들은 한마음이 되어 뒤풀이를 외쳤다.
"제가 이 근처에 아는 맛집이 있슴다!"
김희은이 마치 유치원 교사가 병아리들 통솔하듯 손을 들고 앞장서 안내했다.
아무런 생각 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나선 제나 일행은 뒤늦게 아차 싶었다.
누가 인싸 아니랄까 봐.
김희은이 그들을 안내한 장소는 북적거리는 번화가 한복판에 위치한 고깃집이었던 것이다.
이동하는 내내 얼굴을 따갑게 했던 주변의 관심이, 가게에 앉아 자리를 잡는 순간 멎기는커녕-도리어 폭발했다.
"미친, 저거 삼피 같은데?"
"뭐?"
"저기 저- 블론드."
"어, 미친 진짜다!"
"어, 삼피다!!!"
"뭐 삼피?"
"미친, 저건 김이응 같은데?"
"야, 야야! 저기 저거! 그, 숨컷 아니야!?"
"대-박! 실물 미쳤나 봐!"
"응? 근데 저건 누구야?"
"아! 권지현! 그 있잖아-"
자리나 방이 따로 나누어져 있지 않아 안 그래도 소란스러웠던 가게가 들끓기 시작했다.
모든 이목이 제나 일행의 자리로 집중됐다.
"삼피 언니!!!!!!!!! 저희랑 합석해요!!!!!!"
"어우, 술 냄새. 저리 안 가? 그리고, 언니 같은 소리하네, 나 18살이야. 정신 차려."
"그, 숨컷 님 혹시 사진 한 장…."
"헝…."
"아, 어지럽네… 헤이 김이응… 이게 최선이야…?"
"아핫! 대박! 삼피 씨 완전 개 잘나가!"
사태가 진정된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여러분~~~ 숨컷이랑 제나 씨 그래도 아직 학생인데 무서워하잖아요~~~ 좀 가만히 냅둬욧!!!"
"맞아맞아~~~ 이 못된 어른들아~"
"큭큭큭큭, 와 개신기해 진짜."
흥미를 잃은 건지, 좀 진정이 된 건지.
사람들이 겨우 제나 일행을 내버려 두기 시작했다.
"어후 진짜, 아찔했다. 그죠?"
"아핫! 그래도 뭔가 재밌지 않았슴까!?"
"네! 와, 완전…! 저 이런 곳 처음인데, 와… 대박 신기하당… 이런 분위기구나…."
"아휴, 좋단다."
아직 식사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그들은 벌써 기진맥진했다.
그러면서도, 그 표정엔 즐거움이 묻어나왔다.
"아, 이럴 땐 술이라도 마셔야 되는데. 이거 죄송합니다, 저희가 아직 민짜라."
"괜찮아 재훈아! 누나도 어차피 술 안 마셔~"
"저, 저도요…!"
"이거 원. 끼리끼리 논다고. 술 못 마시는 찌질이들만 모였구만."
"그러면 너도 찌질이가 되는데?"
"나는 술 마실 줄 아는데?"
"자랑이 아닐 텐데?"
"아핫! 여러분, 고기 다 익었슴다. 먹읍시다!"
"고기 엄청 잘 구우신다…."
"에헴! 집게 경력만 20년임다!"
"와아…."
"아핫! 그 박수 뭠까! 방금 완전 물개 같았슴다 지현 씨!"
불판이 몇 번 더 갈리고, 잔이 몇 번 더 비워졌을까.
"앗, 언제 시간이 이렇게 됐대."
가게에 들어선 이후 처음으로 시간을 확인한 그들이 깜짝 놀랐다.
그 누구도 흐름을 느끼지 못했는데 어느새 훌쩍 흘러간 시간.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흔히 겪는 현상이었다.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
"이야, 오늘 정말 재밌었슴다! 방송할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저도 너무 재밌었어요… 이런 거 처, 처음이라…."
"아핫! 우리 지현이는 다 처음이래~ 귀여워~"
"헝… 헤어지기 너무 아쉽다…."
"에이~ 너무 아쉬워하지 마~ 오늘만 날인 것도 아니잖아~"
"그, 그런가요…?"
"그럼 그럼~ 언제든지 또 이렇게 같이 놀자궁~ 방송이든, 사석이든~"
"지, 진짜요…!?"
"흑… 이렇게 지현 씨도 날 놔두고 인싸 세계로 가 버리는구나."
"느, 네!?"
세상 밝게 마무리를 준비하는 그들에게선 조금의 아쉬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정말로 아쉽지 않아서가 아니라, 더없이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았다.
탁.
제나가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김희은에게 시선을 향했다.
"헤이."
"응~?"
그렇게 준비해두었던 제안을 건넸고-
"아핫!"
김희은은 기다렸다는 듯 반갑게 특유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건배!"
""""""
일곱 개의 잔이 일제히 출렁거리며 CCC크루 회식의 시작을 알렸다.
"크~ 끝장나는구만. 오늘은 이린 씨도 있어서 그런가? 맥주 맛이 더 좋네~ 이 친구야~ 얼굴 보기가 왜 이렇게 힘들어~"
"맞슴다! 맞슴다!"
"…저는 여러분 같은 방송인이 아닙니다만."
"아~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이린 씨도 우리 크루원 아니냐고~"
"엄밀히 말하자면은… 예, 아니죠."
"아 그럼 엄밀히 말하지 마~"
"그러면 크루원이 아니라 친구인 걸로~"
"아~ 그러면 되겠구만~"
"…굳이 따지자면 친구도-"
"에헤이! 그럼 굳이 따지지도 마!"
"맞슴다! 맞슴다!"
"어? 뭐야, 권지현."
"느, 넹…?"
"너 머릿결이… 너, 내가 준 거 안 쓰고 있지?"
"엥…? 열심히 쓰, 쓰고 있는데…용?"
"뭐? 쓰고 있다고? 그런데 왜 또 머리털이 개털이 된 건데? 너, 또 머리 감고 제대로 안 말렸지? 빗질은?"
"헝… 그, 그게…."
"하… 어떡해… 갑자기 열 오르네…."
"어, 얼음물 갖다 줄까…?"
"약 올리니?"
"헝…."
거리낌 없이 절친한 동료들.
"그래서, 지금 또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할 건데?"
"넹…?"
"그때 그랬었다며. 제나가, 왜 자기가 너한테 그렇게 신경 쓰는 것 같냐고. 이유 억지로 짜내서라도 답하라니까, 너가 방송 열심히 하는 모습에 감동 받아서 그런 것 같다며."
"그렇, 지용?"
"그러니까, 만약에 지금 니가 그때로 돌아가면. 뭐라고 대답할 것 같냐고. 니 매력이, 뭐라고 말할 것 같냐고."
"어… 글쎄용…어…제 매력이라… 저, 저는 모르지만… 뭔가 있지 않을까용…? 헤헤…."
자신이 알던 모습으로 돌아온 권지현.
제나는 생각했다.
드디어.
자신이 바라던 모든 게 이루어졌다고.
그렇게, 자신이 원하던 순간으로 되돌아왔다고.
자신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행복했던 그 순간.
그렇기에, 변화가 두려워 영원하다 믿어 의심치 않고 안주하기를 결심했었던 그 순간.
훗날, 영원하다는 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용기를 내지 못했음에 격렬하게 후회했던 그 순간으로.
후회의 시발점.
지금 비로소, 그 지점에 다시 설 수 있었다.
"…."
제나가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최재훈을 바라봤다.
"하하하, 응?"
그 시선을 느낀 최재훈이 제나에게 시선을 향했다.
"뭐야, 얜 또 왜 이렇게 화나 있어. 아닌가? 이게 원래 표정인가?"
'이런 썅….'
이미 결심을 굳히고 또 굳힌 바였다.
그런데.
저 얼빠진, 그런데도 빌어먹게 마음에 드는 상판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 결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저 녀석이 자신을 바라보는 얼굴.
자신을 대하는 태도.
너무나도 만족스럽고 또 행복한 지금의 이 모든 게-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변해버리는 건 아닐까 그 무엇보다도 두려워-이전의 제나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
그렇기에, 이번엔 다를 것이다.
이번엔 그보다도 더욱 두려운 게 있었기에.
바로, 이전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제나는 눈짓으로 조용히 최재훈을 불러내며 밖으로 나왔다.
건물의 뒷편.
주변에 가득한 조명에도 다 지워지지 않는 밤의 어스름이 시원한 공기와 함께 그녀를 감싸주었다.
덕분에 조금이지만 차분해질 수 있었다.
뒤이어 제나를 따라 어스름으로 들어온 최재훈.
그가 무슨 일이냐며 눈으로 제나에게 물었다.
제나는 한동안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좋아.'
그러며 재차 마음을 다잡은 뒤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방금 전부터 묘하게 눈치를 보던 최재훈이 흠칫 놀라며 몸을 긴장시켰다.
언제든지 제나의 공격에 대비할 수 있도록.
"…뭐하냐?"
"아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길래."
"…."
제나가 입을 벌린 채로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하…."
이내, 고개를 숙이며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며 푹 한숨을 내쉬더니-
"큭큭큭…."
그 상태로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 아니… 또 왜 그래… 무섭게…."
눈치 드럽게 없는 최재훈이 불안과 공포에 몸을 떨었다.
이내, 다시 고개를 든 제나.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곧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처럼 비장하게 굳어 있던 그녀의 표정은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특유의 비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야."
그녀가 모든 짐을 벗어던진 듯 홀가분하게 말했다.
"너, 나 어떻게 생각하냐?"
"응…? 뭐?"
예상치 못한 흐름.
예상치 못한 질문.
최재훈이 당황하여 갈팡질팡했으나-
"나 어떻게 생각하냐고."
제나는 그에게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뭐, 어떻게 생각하긴. 음. 그, 뭐냐… 띠, 띠꺼워도 멋진 녀석…?"
그가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
"아니."
"응?"
"그거 말고."
"이거 말고…?"
"나한테 넌 어떤 사람이냐고."
제나의 말에 최재훈은 다시 시선을 그녀에게 향했다.
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이내,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친구, 가. 아닐까?"
"…."
제나의 표정이 굳었다.
아주 잠시였다.
그녀는 곧장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 겨우 친구? 시리어슬리? 그거면 충분해?"
"응? 충분, 하냐니?"
"나 같이 멋진 여자랑 겨우 친구인 걸로 만족하냐고."
특유의 미소를 짓고 있지만, 그 미소는 평소와 달리 어딘가 불안정해 보였다.
"뭐, 아니면. 니 눈엔, 내가 그렇게… 별로냐…?"
오만할 정도의 자신감은 온데간데 없고, 어딘가 불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최재훈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낯설게 바라보다가 쓰게 웃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니, 임마. 그럴 리가 있냐. 넌 내가 아는 여자 중에- 아니지,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멋진 사람이야."
'아….'
마치 달래는 듯한 어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마음이 닿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신의 마음과, 저 사람의 마음이 닿지 않을 정도로 멀다는 사실을.
'썅….'
제나가 고개를 숙였다.
"…."
최재훈이 그런 그녀를 착잡하게 바라보더니 팔을 툭툭 쳐 줬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도 위안이 되지 않는 위로를 이어간다.
"이거 하나 만은 알아둬. 말했다시피. 너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멋진 사람이야."
'그만….'
짜증난다.
속이 더부룩할 정도로 짜증이 나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만약 네가-"
제나는 더 이상 들어줄 수가 없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만하라-!"
그렇게 와락 일그러진 얼굴로 최재훈의 말을 끊었다.
"-…어? 뭐?
끊었는데,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 뭐라고?"
"어?"
"아, 아니. 방금 뭐랬냐고."
"방금?
"만약 네가- 다음에 뭐랬냐고!"
최재훈은 너무나도 낯선 제나의 위태로운 모습에 당황해하며 그녀의 말에 답했다.
"네가, 레즈비언만 아니었으면… 이라고."
"…."
절벽에 몰린듯 절박했던 제나의 표정이 변해갔다.
"하."
그렇게, 헛웃음을 터뜨리더니-
"유, 뻐킹! 이디엇! 뻑!"
최재훈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모습은 어찌 보면 머리 끝까지 화가 차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기도 했고.
어찌 보면 안도돼서,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잉…?"
"누가 레즈비언인데 이- 하… 됐다. 말 해 봐야 뭐하냐. 야."
좌우지간, 제나는 그렇게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여유와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잘 어울리는 평소의 모습을 되찾고, 최재훈을 장난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눈 감아 봐."
"어? 눈? 갑자기, 왜?"
"내가 레즈비언 아니란 거 증명해 줄게."
"어? 뭐, 어떻게…?"
"닥치고 감기나 해!"
"앗, 넵!"
최재훈이 지시를 따라서 질끈 눈을 감았다.
제나는 호기롭게 다가가 그의 앞에 섰다.
눈을 감은 그를 바라보며 그대로 천천히 얼굴을 갖다 대더니 그의 입에 입맞춤을-
"…."
하려는데.
두 입술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제나의 얼굴이 시시각각으로 붉어져, 닿기 직전엔 정말로 폭발하는 게 아닐까 싶은 수준이 되었다.
결국 그녀의 입술은 경로를 틀어, 최재훈의 볼에 안착했다.
그 감촉에 흠칫 몸을 떨며 눈을 뜬 최재훈이 제나를 바라봤다.
"돼, 됐냐…!?"
허세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모습을 하고 있는 그녀를 말이다.
최재훈이 자신의 볼을 매만지며 당황하길 잠시.
"하."
그가 아주 짓궂게 웃었다.
"모르겠는데?"
"…뭐?"
"모르겠다고 임마."
"아, 아니 뭔-…!"
"하, 아니. 이걸로 도대체 뭘 하겠다고."
전세가 역전됐다.
최재훈이 방금 전 자신처럼 당황한 제나에게 여유로운 태도로 말했다.
"야, 됐고. 내가 어떻게 하는지 제대로 알려줄게. 그러니까-"
"…응?"
"…이번엔 니가 눈 감아 봐."
"…."
제나의 눈이 한계치까지 커졌다.
그리곤, 서서히 감겼다.
"…."
방금 그도 이랬을까.
자신의 심장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다.
눈이 감았는데도, 그가 다가오는 게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 닿는게 느껴-
"…응?"
그녀가 흠칫 몸을 떨더니, 자신의 볼을 매만졌다.
눈을 뜨고 의아하다는 얼굴로 최재훈을 바라봤다.
"…."
방금 전 제나처럼 당장 얼굴이 폭발할 것처럼 붉어져 있는 그를 말이다.
"…."
"…."
"…뭐하냐?"
"…뭐가."
"제대로 알려준다며?"
"…다시 생각해 보니까. 충분한 것 같아서."
"…뭐?"
둘이 어딘가 얼이 빠진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큭…."
"하."
그러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고.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에게 다가갔다.
이번엔 눈을 감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에도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둘은 웃으며, 서로가 웃는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충분한 것 같다며?"
이내, 그게 질렸는지 제나가 짓궂은 얼굴로 최재훈에게 말했다.
"너야말로 돼, 됐냐?! 며."
최재훈 역시 짓궂은 얼굴로 그녀에게 응수했다.
똑같이 얼굴을 새빨갛게 하고서는,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제나와 최재훈의 시청자가 지금 그들의 모습을 보았다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싸우지 말고 X스(키스ㅎ)해~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말이다.
"자, 그럼."
제나는 생각했다.
역시 용기 내기를 잘했다고.
"슬슬 들어갈까?"
이제는 더 이상 망설이지도, 후회하지도 않겠다고.
그녀가 최재훈의 손을 붙잡은 뒤 깍지를 끼었다.
>외전 - 역전의 제나 END
후기
안녕하세요 독자님들.
글싸개입니당
이렇게 또 제나의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찾아뵙습니당
먼저, 외전을 끝까지 따라와주신 독자님들께 감사와 함께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결국 완결 편에서까지 지각을 저질러 버렸네요
그래도 덕분이라 해야 할까요...
썩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왔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기는 합니다.
원래는 마지막 이야기를 전해드리기 이전에
최재훈과 제나의 자퇴, 차현하와의 합방, 방민아와의 합방.
달라진 최재훈 일가의 일상.
그 네 가지 이야기를 거쳐갈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고심 끝에 과감하게 스킵하기로 결정했죠.
속도감을 챙기면서 여운을 남기기 위한 나름대로의 시도였는데... 막상 그렇게 하고 나니 또 너무 급한 건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남기도 합니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니, 첫 편당 결제 연재의 완결이라는 상황에 쫓기듯이 쓴 느낌이 아예 없다고는 못할 것 같네용.
역시 아직 갈 길이 많고 배울 것도 많구나 느낀 외전 연재였습니다.
정말 보람차고 또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제 예상보다도 많은 독자님들이 읽어주신 덕분입니다.
재차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더욱이.
끝가지 따라와 주신 독자님들껜 심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따듯한 격려의 말, 성원과 후원을 보내주신 독자님들껜 심심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사랑합니다!
오늘 완결한 뒤 문득 생각이 나서 본 글의 연재 시작일을 확인하니 어머나세상에
2월 8일이 연재 시작일이더군요
2월 8일에 연재를 시작하고
다음 해 2월 9일에 외전 연재가 마무리되다니
이거 참 재밌는 우연이구나 싶었습니당
어쩌면 CCC크루가 다시 모인 것처럼 이것도 운명일지도 모르겠네용.
제나의 이야기가 일단락된 현 시점.
많은 분들께서 다른 아이들의 외전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주셨습니다.
그에 대해 답해드리자면 현상태로선
'언젠가 쓰지는 않을까용?'
그렇게 밖에 말씀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현재로서는 쓰고 싶은 이야기를 다 짜냈다는 느낌이거든요!
그런 고로, 제 다음 글은 외전이 아닌 신작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옙!
그러면.
제 신작이 당당히 독자님들께 소개드릴 수 있도록 궤도에 오르는 그 날, 다시 찾아뵙는 걸로 하고.
본 글싸개는 이만 여기서 인사드리겠습니다.
행복하세욧!
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