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8. 외전 역전의 제나 23
방송이 끝난 이후에도 스튜디오의 열기는 좀처럼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이고, 재훈 학생, 제나 학생! 오늘 진짜 너무-!"
보라돌이는 최재훈과 제나에게 아무리 해도 모자라는 듯 끊임없이 극진히 예를 표했다.
둘과 같은 입장인 다른 참가자들에겐 불쾌할 수도 있는 특별 대우였으나, 그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방송인으로서 합방에 참가했으나, 언젠가부터 스스로를 어필하는 걸 완벽하게 잊고 둘에게 열중하고 있었던 그들이었으니 말이다.
둘이 지금 이 순간의 주인공이라는 의견에 이의를 표할 이들은 없었다.
그때, 아직도 넋이 나가 있는 한유성의 동료인 CTB의 정글러 '사이커' 이연우가 최재훈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최재훈 씨?"
"네?"
"오늘 진짜, 대단하셨어요."
최재훈을 바라보는 이연우의 눈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이고 있었다.
다른 누군가가 보면, 이연우가 프로 지망생이고 최재훈이 성공한 프로이라 착각할 광경이었다.
최재훈에게 있어 눈앞에 있는 이연우는 LKL 4위팀인 CTB의 핵심 멤버 중 한 명이자 크게 성공한 프로게이머로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상'이라 할 법한 사람이었다.
그가 도저히 닿을 수 없을 거라 여긴 아득히 높은 위치에 실제로 서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이렇게 자신을을 우러러보며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자신이 동경하던 사람에게 동경을 받는다.
최재훈이 저도 모르게 만면에 미소를 띄우며 답했다.
"이연우 선수가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영광이네요."
그 말에 이연우가 눈썹을 튕겼다.
"절 아세요?"
"아유, 모를 수가 없죠. 한유성 선수랑 같이 CTB 상위권에 올려놓으신 사이커 선수를. 이번 시즌. 대단하셨던 거 아시죠? 진짜, 존경합니다."
"아유, 뭐. 존경까지야."
최재훈이 단순히 겉치레 식으로 말하는 게 아님을 느낀 이연우가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멋쩍어하며 뒷목을 긁더니 이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재훈 씨가 방금 그 존경하는, 한유성 선수 이긴 거예요. 아시죠?"
"에이, 겨우 랭크 게임이데요 뭘."
김연우는 겸양을 떠는 최재훈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에이, 겨우 랭크게임에서 이긴 거라고 생각 안 하시는 것 같은데?"
"에헤이~"
"하하, 아무튼. 방금 재훈 씨 플레이 본 사람들은 다 느꼈을 거예요. 재훈 씨, 반드시 프로 되실 수 있을 거라고. 미리 축하드려요."
이연우가 웃으며 내민 손을, 최재훈 역시 웃으며 맞잡았다.
둘은 그게 마치 존중을 표하는 방법이라 약속이라도 되어 있는 양, 서로의 손을 억세게 쥐었다.
"그리고, 미리 말하는데. 나중에 만나면 좀, 살살 부탁드리려요. 저희 유성이 대회에서는 체면 좀 살려주세요."
"뭐? 아니, 형! 뭐라는 거야!"
"큭큭큭. 뭐라는 거긴 임마. 정신 차렸으면 가자. 여러분, 오늘 재밌게 놀다 갑니다."
이연우가 참가자들에게 인사를 건네곤 스튜디오를 나섰다.
뒤늦게 그 뒤를 따라가는 한유성이 도중에 멈춰섰다.
그렇게 최재훈을 바라봤다.
"…."
이전과는 다른 의미로 복잡한 표정.
한유성은 잠깐 동안 그런 표정으로 최재훈을 바라보더니-
꾸벅.
그리곤 최재훈을 한 번 더 바라본 뒤에야 스튜디오를 나섰다.
'인정 받은 거라 보며 되려나?'
지금까지 그의 태도에서 느껴졌던 꺼림칙함이 더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일련의 상황으로 그에 대해 어느정도 알게 된 최재훈은 그 미묘한 태도가, 한유성 나름대로 존중을 표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재훈아?"
다음은 어느새 방민아가 바로 옆까지 다가와 있는 방민아였다.
그녀가 싱긋 웃으며 말없이 손을 건넸다.
최재훈은 홀린 듯 그 위로 핸드폰을 올려놨다.
방민아는 자신의 번호를 입력한 핸드폰을 그에게 돌려줄까 말까 하다가, 그가 양손을 내밀자 그제서야 그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재훈이, 앞으로 유명해진다고 누나 모르는 척 하는 거 아니지?"
"아이고, 설마요~"
"그래? 그러면 누나가 연락 보냈는데 답 안 해주는 일은 없겠네?"
"아이고, 물론입죠~"
"누나가 방송에 나와달라하면 바로 나와주겠고?"
"아유~"
"누나가 부르면 바로 나오고?"
"아이…응?"
"오케이, 그러면 그런 걸로 알고. 다음에 또 보자?"
일방적으로 말한 뒤 윙크를 하며 떠나는 방민아의 뒷모습을, 최재훈은 멍하니 바라봤다.
"이야 부럽네~"
그런 그에게 누군가가 어깨동무를 걸었다.
차현하였다.
"나도 우리 재훈 동생이랑 친해지고 싶은데~"
그녀가 최재훈의 어깨에 매달린 채 음흉한 미소를 띠며 그를 올려봤다.
그의 어깨에 걸쳐둔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최재훈이 당황하여 어찌 반응해야 할 지 감을 못 잡자, 그녀가 과장되게 서글퍼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그런데 우리 재훈 동생한테는 생각이 없나 보네~ 그래~ 우리 재훈 동생도 남자라고, 여자 가린다 이거지~ 아~ 속상하다 속상해~ 나도 민아 씨 처럼 가슴이이랑 엉덩이가 아주 그냥-"
"아, 아니 이 아줌마 갑자기 뭐라는 거야!?"
"아~ 나도 어렸을 때 고기랑 우유 좀 열심히 먹을 걸~ 그래야 민아 씨 처럼~"
술주정뱅이처럼 중얼거리는 차현하.
뒤늦게 상황을 이해한 최재훈이, 자신의 어깨에 걸쳐진 그녀의 손에서 핸드폰을 뺏어와, 다급히 번호를 입력하곤 돌려줬다.
그러더니 그제야 핸드폰을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미소짓는 차현하.
"후~ 그래도 다행이야~ 우리 재훈 동생이 착해 가지고. 민아 씨 같은 여자 있는데도 나랑 놀아 준다는 거 보면~"
"아니, 도대체 뭐라는 건지…."
"뭐라는 거긴~"
드디어 최재훈에게서 떨어져 그와 마주 선 차현하가 그에게 주먹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이거지~"
최재훈이 거기에 주먹을 내밀어 맞대자, 그녀는 이번엔 그 주먹을 제나에게 내밀었다.
"제나 동생도 그렇고."
제나 역시 피식 미소지으며 그 주먹을 맞댔다.
"오~ 받아줄 줄 몰랐는데~ 이거, 오늘 아주 수확이 좋구만? 귀여운 동생이 둘이나 생겼네."
"동생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워허~"
나머지 사람들과도 한 번씩 주먹을 맞댄 그녀가 문 앞에 서서 호쾌하게 인사했다.
"자 그럼, 다음에 또 봅시다들~ 특히 재훈이~ 아디오스~"
일련의 흐름 때문일까.
최재훈은 차현하가 떠나자 자연스럽게 다음 시선을 김희은에게 향했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그녀는 뒷짐을 진 채 상반신을 빼곰 내밀어, 최재훈의 바로 밑에서 동그랗고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최재훈이 헛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핸드폰을 내민다.
그러면서도 멋쩍은지 변명하듯 말한다.
"왠지, 다들 하니까 나도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라~"
"아니 뭐, 의무적으로 하실 필요는 없긴 한데."
최재훈의 말에 김희은이 뾰루퉁한 얼굴이 되더니 어깨로 그를 툭 밀었다.
"그러기야~?"
"아니, 뭐. 어쨌거나, 저야 좋죠."
"응? 좋아? 뭐가?"
"희은 씨 같이 멋진 분이랑 인연 생기는 거니까요."
최재훈이 그렇게 말하며 핸드폰을 돌려줬다.
하지만 여전히 뒷짐을 진 채로 핸드폰을 받질 않는 김희은.
그녀가 장난기 가득 담긴 얼굴로 말했다.
"희은 씨~?"
"…희은 누님."
"누님~?"
"…누나."
"아핫!"
그제야 발랄하게 웃으며 핸드폰을 받은 그녀는, 제나를 비롯한 다른 이들과도 번호를 교환한 뒤 출구쪽으로 깡총 뛰듯이 이동해 되돌아보며 인사했다.
"그럼 여러분, 오늘 즐거웠슴다~~~ 바이바이~~ 재훈이 바이바이~~~"
최재훈이 김희은을 따라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그렇게 김희은까지 떠나자, 최재훈은 제나를 보며 말했다.
"우리도- 응?"
제나가 소위 '썩소'라 일컬어지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좋냐?"
"넹…?"
"아주 그냥, 입이 귀에 걸렸네."
"제가용…?"
그렇게 최재훈이 삐질삐질 진땀을 흘리며 눈치를 보길 잠깐.
제나가 턱짓하며 말했다.
"나한테도 해 봐."
"뭐, 어떻게용…?"
"걔네한테 했던 거."
최재훈은 그녀의 말을 가까스로 이해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누…님?"
고개를 비스듬이 꺾고 바라보던 제나가 반대쪽으로 고갤 꺾었다.
"…누나?"
"제대로."
"제나… 누나?"
"말 절지 말고 제대로."
"제나 누나."
"국어책 읽냐?"
"제나 누나?"
"표정, 뭐, 띠껍냐? 맞짱 뜰래?"
"제나 누낭~?"
제나는 무표정인 사진을 프로그램으로 편집한 듯 어색하게 웃고 있는 최재훈을 잠깐 동안 바라보더니 피식하고 웃었다.
흡족스럽게 고갤 주억거렸다.
"나쁘지 않네. 앞으로 그렇게 불러. 자, 그러면-"
제나가 스튜디오 안을 살펴본 뒤 최재훈을 팔뚝을 툭 두드렸다.
"우리도 슬슬 가자."
"예, 엉님."
"…."
"누나."
둘이 보라돌이의 극진한 배웅을 받으며 스튜디오를 나섰다.
다사다난했던 합방이 마무리됐다.
* * *
방송이 끝난 다음날 일요일 아침.
어제의 일을 상의하기 위해 이린의 집에 모인 최재훈과 제나.
"또 불 꺼 놓고 있네."
"지구를 많이 사랑하시나봐."
둘이 오늘도 어김없이 커텐이 쳐진 채 불이 꺼져 있어 어두운 거실에 들어선 그때-
-빰빠밤 바밤 빰바밤 빠밤 빰빠밤 바밤 밤
축하 음악의 대명사가 된 노래가 요란하게 반겼다.
케이크 위에 꽂힌 촛불들이 거실 내부를 은은하게 밝혔다.
그 옆에서 꼬깔모를 쓴 이린이 핸드폰을 재생시키더니-
-팡!
-팡!
소위 '생일 폭죽'이라 불리는 조그만한 폭죽들이 터지는 소리가 재생됐다.
최재훈과 함께 동시에 헛웃음을 터뜨린 제나가 이린에게 물었다.
"뭐하냐…?"
"실제 폭죽 소리는 너무 시끄러워서요."
"아니, 그거 말고. 지금 이거, 무슨 시츄에이션이냐고."
"아."
제나에게 사무적으로 대답하던 이린이 최재훈을 보며 '느에헿'하고 웃었다.
촛불만 켜져 있어 특히나 음침하게 느껴지는 그 모습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축하드려요, 재훈씨….”
"축하요?"
"프로 데뷔하는 거요. 정말 간절하게 원하셨었잖아요…."
"아~ 난 또. 아이고, 감사합니다. 이렇게 또, 깜짝 이벤트를."
"감동받으셨나요…?"
"제 감동이 전해지지 않았나요? 잠시만요… 지금 바로 슬픔을… 금방… 눈물을… 짜내 보겠습니다…토가시… 연재… 언재해…."
"와~"
짝~짝~짝~
힘 없이 흐느적거리는 박수를 치는 이린과 최재훈을 보며 제나가 코웃음을 쳤다.
"하, 깜찍하네. 아 맞다. 어이. 근데 저거, 현관에 있는 무식하게 큰 상자는 뭐야? 저것도 뭐, 깜짝 선물인가?"
"아,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무래도 택배가 잘못 온 것 같아서, 제가 잠깐 맡고 있는 것 뿐이니까요."
"아, 그러셔."
그때, 이린이 쓴 것과 같은 꼬깔모가 최재훈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그걸 집어 하난 자신이 뒤집어 쓰고, 또 하나는 제나에게 건넸다.
그녀가 질색했다.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테이블에 꼬깔모를 내려 놓는 최재훈.
그렇게 제나를 제외하고 둘만 꼬깔모를 쓰는 구도가 되었다.
"…."
제나는 그게 또 괜시레 마음에 안 들어, 신경질적으로 꼬깔모를 뒤집어썼다.
뿔난 얼굴에, 정말로 뿔이 얹혀졌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최재훈은 음흉한 미소를 지어 입 모양이 'W'가 되어 있었다.
"뭐."
으르렁 거리며 노려보는데, 그 모습에-
"아니, 귀여워서."
최재훈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할 뿐이었다.
"…아, 빨리 촛불 쳐 불고 불 켜기나 해!"
그를 노려보던 제나가 고개를 푹 숙이더니 버럭 성을냈다.
"뭐, 축가 같은거라도 불러야 하지 않나?"
"어… 그런데 이럴 때 부를 만한 축가가 뭐가 있었죠…."
"어… 그러게요? 생각해 보니, 생일 축하합니다 말곤 딱히 모르겠네."
고민에 잠기는 최재훈.
이내, 그가 박수로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짝~
짝~
짞~
짝~
"프로~"
짝~
"입단~"
짝~
"프로~"
짝~
"입단~"
이린이 곧장 따라했고.
둘이 눈치를 주자, 제나 역시 마지못해 따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두운 장소에서 흔들리는 조그만한 촛불에 의지해 반주 없이 맥아리 없는 박수를 치며, 맥아리 없는 축가를 부르는 그들의 모습은.
"""프로~"""
짝~
"""입단~"""
짝~
"""프로~"""
짝~
"""입단~"""
짝~
동굴 안에서 비밀스럽고도 사악한 의식을 거행하는 사이비 교도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썅, 이게 뭐하는 건지."
제나가 자괴감 섞인 한숨을 내쉬어도 아랑곳 않는다.
의식은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 * *
의식이 끝나고.
그들은 갈기갈기 찢어발긴 제물(케이크)을 담은 접시를 들고 이린의 작업 PC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자, 그렴. 열게요…."
"도키도키…."
"하 참나, 이게 뭐라고."
이린이 신중하게 작업을 이행했다.
그러자-
메일함이 펼쳐졌다.
레오레 세계 최강국인 대한민국의 리그인 LKL을 대표하는 팀들이 보낸 입단 제의 메일들로 가득 차 있는 메일함이 말이다.
최재훈은 이게 한 치의 착오도 없는 눈물의 감동 실화인 걸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럴 수밖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감히 꿈꾸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었던 세계였다.
그런 세계에서 먼저 자신에게 무수한 악수 요청을 보내오고 있었다.
최재훈은 자신의 세계가-
세상이 바라보는 자신이라는 존재가 크게 변했음을 실감했다.
신경이 쩌릿거리고 피부가 오싹했다.
뇌가 얼어붙는 듯한 쾌감이 엄습했다.
'최고'가 자신의 진가를 인정해 주었다는 사실이 기뻐서?
'…아니.'
그들의 인정으로써.
'내가….'
스스로의 가치를 확실하게 입증해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기에.
자신과, 자신을 믿어준 사람들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니.'
옳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기에.
이 승리는 다른 누군가가 인정해 줌으로써 주어진 게 아니다.
자신이 스스로 쟁취해낸 것이다.
자신을 믿어준 사람들이 있었기에.
기쁨에 몸서리치다 다시 고개를 든 최재훈의 눈이 더욱 강렬하고 올곧게 빛나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이린과 제나의 표정에 자연스럽게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이내, 최재훈이 황홀한 얼굴로 화면을 쓰다듬는 시늉을 하며 중얼거렸다.
"내 사랑스런 새끼들… 형이 너희 내용 좀 탐미해도 될까…?"
그를 바라보는 이린과 제나의 표정이 자연스럽게 싸늘히 굳었다.
"아니, 좀. 이럴 땐 입 좀 다물고 있으면 안 될까?"
"확실히… 갑자기 깨는 게 좀 있긴 하네요…."
그렇게, 최재훈은 한껏 들떠서 메일을 개봉했다.
그 내용을 낭독해 나갔다.
이린과 제나가 흥미진진하게 그 내용을 경청했다.
머지않아 마지막까지 남겨둔 TC1 메일을 마지막으로, 모든 메일을 확인한 뒤.
최재훈이 운을 뗐다.
"쓰… 그래서,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린과 제나는 고민에 잠겨 있었다.
최재훈에게 있어 어떤 선택지를 고르는 게 가장 득이 될지 머릿속의 계산기들을 총동원해 계산 중이었다.
"일단 이 팀들은 제외하는 걸로 하자."
제나가 일부 메일들을 선택한 뒤 '숨김'처리를 했다.
"거기엔 저도 동의합니다."
최재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프론트 차원에서 선수들의 이미지에 피해를 입히는 컨텐츠를 제작한다거나.
인선과 관련해서 인맥, 학연, 지연 논란이 존재한다던가.
설비가 너무 열악하다던가.
근본적으로 문제가 존재한다 평가되는 팀들이었다.
"그렇게 남은 팀들 중에서 조건만 놓고 보자면 얘네들이 있겠고, 커리어만 놓고 본다면 얘네들이 있겠는데-
제나가 메일 하나를 가르켰다.
"얘네 넷은, 그걸 다 만족시키네."
바로 TEAM BAY와 TC1를 비롯한 LKL 4강팀이었다.
"명불허전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크, 내 살면서 본 것 중에 가장 호화로운 뷔페구만."
"뭐, 어쨌거나 중요한 건 니 의견이겠지만."
제나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물어봤다.
"이제와서 묻는데. 너, 마음속으로 따로 정해 놓은 팀이라던가 있어?"
"딱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것 저것 가릴 처지가 안 됐던 사람이었어가지고. 2군 팀에서 연락만 왔어도 울부짖으면서 팬티 찢고, 바로 설거지 담당 자진했다."
"으이구, 자랑이다."
"그러면, 가장 좋아하는 팀은 어떻게 되시나요?"
"그것도, 저는 딱히 어떤 팀을 딱 찝어서 응원한다기보단. 선수 따라서 가는 편이라. 그래서, 지금 가장 선호하는 팀 고르자면 역시-"
최재훈이 TC1의 메일을 가리켰다.
"여기겠지?"
"역시."
제나가 역시는 역시라며 피식 웃었다.
"페이스."
"응? 페이스? 얼굴? 갑자기 왜?"
"아."
그리곤 아차 말문이 막힌다.
아직 데뷔하지 않은 건지,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 건지.
이 세계엔 페이스가 존재하지 않았다.
제나는 그 사실에 새삼 복잡한 감흥을 느끼며, 화제를 전환했다.
"어쨌든. 그래서, 결국 너가 들어가고 싶은 팀은 TC1이다?"
잠깐의 고민 뒤 최재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호, 왜 TC1이 마음에 안 드셨을까?"
"마음에 안 든다기보다는-"
최재훈이 머릿속으로 생각과 말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욕심이 생기대?"
"욕심?"
"TC1은 나 없어도 항상 우승하는 팀이잖아?"
"오호~"
"그러니까-"
"팀의 우승에 얹혀가는 게 아니라, 팀을 우승시키고 싶다?"
이린이 화들짝 놀라며 최재훈을 바라봤다.
그는 한동안 가만히 있더니 이내- 씨익.
특유의 여유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에 제나가 실소를 터뜨렸다.
속으로 몹시 흐뭇해하면서도, 겉으론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
최재훈의 자신감을 시험해 볼 생각으로 넌지시 던져 봤다.
"이야, 최재훈. 그건 너무 간 거 아냐? 며칠 전까지만 해도 2군조차 꿈도 못 꿨던 코찔찔이 혼자서 팀을 우승시키겠다니. 시리어슬리?"
그 도발에 최재훈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응."
그리곤 곧바로 덧붙인다.
"그러니까-"
손을 내밀며
"같이 가자."
"…뭐?"
당황한 제나에게 이번에도 역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말한다.
"내가 우승시켜줄게."
"오…."
이린이 눈을 반짝이며 제나의 반응을 살폈다.
"…."
그녀가 서서히 무표정으로 되돌아오더니-
"큭큭…."
정말로 우습다는 듯.
정말로 가소롭다는 듯.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뭐, 니가 날 우승시켜주겠다고?"
어찌 보면,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제나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고개를 들어 올려 최재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제대로, 다시 말해."
한쪽 눈썹을 끌어올린 그에게 도발적으로 선포한다.
"제발, 나 좀 우승시켜 달라고. 제발, 나랑 같이 가 달라고. 제발-"
이미 올라간 한쪽 입꼬리를 더 높이 끌어올리며-
"날 평생 버리지 말아 달라고."
도발적으로 말했다.
"정중하게 부탁해 봐. 생각 없긴 한데, 혹시 몰라? 니 하는 거에 따라서 마음이 변할지?"
최재훈이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람이 기껏 폼잡으면서 말했는데, 이러기야?"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피우는 제나.
"하…."
최재훈이 헛웃음을 터뜨리더니,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그대로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낮아진 눈높이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부특흠느드…."
이를 악물고 말했다.
"만족흐니…?
하지만 들은 척도 안 하는 제나.
잠깐을 망설인 최재훈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제나 누나…제발… 절… 평생… 버리지 말아주세요…."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린 채 딴청을 피우던 제나가 눈동자만 힐끔 돌려 그를 쳐다봤다.
둘의 눈이 마주쳤고-
"…큭!"
둘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 진짜…."
간신히 웃음을 멈춘 제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알았어. 그렇게 부탁하니. 들어줄게. 제발, 평생, 버리지 말아 달랬나?"
뱀 같이 가느다래진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며 그렇게 말하는 제나의 모습에, 최재훈은 목에 무언가가 채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 * *
"그래서, 뭐 어떻게. 언제든지 입단 테스트 보러 오라는데, 내일 바로 갈까?"
"뭐하러?"
"응?"
"급한 건 쟤넨데, 우리가 급할 거 있나?"
"오…. 여유… 개멋져…."
"느긋하게~ 해. 느긋~하게. 머리 빳빳하게 들고, 입단 테스트 보러 와 보던가~ 하는 저것들이. 안달 나서 바닥에 엎드리고, 제발 와 주십쇼!!! 할 때까지.
계약서를, 우리 메모장처럼 자유롭게 사용하라 할 때까지. 게다가- 우리가 지금 입단 테스트 통과해서 입단한다고 바로 경기를 뛸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러니까 한동안은- 느긋하게 우리 할 일이나 하면서, 걔네 애 좀 태우자고."
"우리 할 일?"
"방송."
"아."
"안 그래도 어제 일로 우리 방송 난리가 났으니까, 물 들어올 때 노 한 번 제대로 저어 보자고. 마침, 딱 좋은 컨텐츠도 있겠다."
"딱 좋은 컨텐츠?"
"어제 걔네랑 합방 얘기 나왔었잖아."
"그, 형식상 한 얘기 아니셨을까?"
"하, 형식상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어제 그렇게 좋아서 누님들~ 헤벌레~거리더만."
"아니, 왜 또 얘기가 그렇게 돼요…."
"됐으니까, 빨리 연락이나 해 봐."
"아, 얘기가 나온 김에. 삼피 님. 그때 부탁하셨던, 특정 방송인들을 찾는 일에서 마지막 한 분인 권지현 씨에 대해서입니다만-"
"오, 어떻게 됐어?"
"모든 방송 플랫폼과 미튜브를 찾아봤지만, 결국 말씀하셨던 권지현 씨로 추정되는 방송인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
표정이 복잡해진 제나를 보고 이린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이시죠?"
"어?"
"무슨 이유로, 그 방송인분들과 접점을 가지려 하시는 건가 갑자기 의문이 들어서요. 방민아, 차현하, 김희은 씨 같은 경우엔 워낙 인기가 많고 유명한 방송인이라서 그렇다 쳐도. 말씀하셨던 권지현 씨 같은 경우엔, 방송을 하는지 안 하는지조차 불분명한 사람인데. 무슨 사연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혹시…!?"
"헛소리 지껄일 거 아니까 그냥 닥쳐."
"넵."
"그런데, 사연이라…."
제나가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하더니 아련한 미소를 지었다.
"뭐, 됐어. 방송 안 하는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지. 지 나름 대로 잘 살고 있지 않겠어?"
그렇게, 제나는 마지막 동료에 대한 미련을-
똑.
똑.
똑.
"응?"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주 소심한 노크 소리.
잘못 들었나 싶다가도-
똑.
똑.
똑.
"뭐야, 누구 또 올 사람 있어?"
제나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은 이린이 인터폰을 설정해 문 앞을 비췄다.
-어…!
인터폰이 켜진 걸 확인한 방문자가 극도로.
극-도로 소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실례합니다….
-죄송합니다만, 저기….
-혹시 그… 죄송한데….
-이상한 물건이… 여기로 잘못 오지 않았나요…?
-아니라면 정말 실례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응?"
미묘하게 다르다.
원본보다 몇 배는 쭈구린 듯한 목소리에 태도.
그런데 왜일까, 제나는 혹시나싶어 인터폰으로 다가가 그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허."
"응? 왜 그러시죠?"
운명.
제나는 그따위 거창한 개념을 추호도 믿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보니 아무래도 생각을 달리 해야만 할 것 같았다.
-헝… 왜 대답이 없으시징….
인터폰 화면에 꼬리 달린 익숙한 쭈구리의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