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5. 외전 역전의 제나 20
"근데 진짜 뭐야?"
"앙? 갑자기 또 뭐."
"아니 이거, 닉네임 뜻. 숨…컷? 그렇게 읽는 거 맞나?"
"아."
오늘도 어김없이 지옥 훈련을 진행하던 도중.
자신의 닉네임을 보며 최재훈이 묻자, 제나 또한 그 닉네임을 바라봤다.
"어쨌거나. 갑자기 궁금해져서. 이게 도대체 뭔 뜻이길래-"
지옥 훈련이 시작되기에 앞서, 최재훈의 부계정인 '치킨퀸치퀸'은 '힘숨찐 쇼'를 진행해 닉네임 변경을 선행해야 했다.
최재훈은 그때, 닉네임을 변경했던 당시를 회상했다.
* * *
제나가 유레카! 를 외칠 것만 같은 기세로 무릎을 치더니 말했다.
"아, 맞다. 야. 숨컷. SOOMCUT, 어때? 좋지?"
이번에도 제나는-
-아니, 그 어감상 완벽해서 내 마음을 완벽하게 읽어낸 것 같은 닉네임은 뭐지!?! 역시 제나!!! 너만큼 날 잘 아는 사람은 없다!
-그런 격렬한 반응을 기대했다.
숨컷.
다름아닌 최재훈, 그의 분신과도 같은 닉네임이 아니던가.
그런데-
"숨컷? 뭐야, 그게. 진심이야? 그게 너의 최선이야? 개구린데? 아, 참고로 FROG가 아니고 SO TERRIBLE하다는 뜻임."
그런 말을 하면서 초성 [ㅎ]가 보이는 얼굴로, 이번에도 미래 자신의 센스를 답습했을 뿐인 애꿎은 제나를 놀리는 최재훈.
"…."
퍽!
퍽!
퍽!
그날도 어김없이 베개가 울부짖었다.
* * *
그렇게 등쌀에 떠밀려 SOOMCUT이라는 닉네임으로 변경하고 적잖은 시간이 지났다.
그런데 여전히 최재훈은 이 숨컷이라는 닉네임의 어디가 매력적인 건지, 도대체 제나가 왜 그렇게 강하게 밀어 붙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나마 뜻이라도 알자는 생각으로 최재훈은 제나에게 질문했다.
그러자 제나는 기가 찬다는 얼굴로 답했다.
"그걸 니가 나한테 물어보면 안 되지."
"그걸 니가 나한테 물어보면 안 되지, 라고 말하면 안 되지."
최재훈 역시 기가 찬다는 얼굴로 답했다.
속사정을 모르는 그로선 제나의 반응이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제나는 그런 최재훈의 표정이 띨빵하다고 생각하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도 모르겠어?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니가 모르면 누가 알겠냐."
"허허… 도대체 뭔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네. 아니, 너도 이 닉네임 뜻 모르는 거야?"
"숨컷…숨컷… 뭐, 대충 숨통을 끊어버린다는 소린가?"
"아니, 니도 뜻을 모르시면요. 도대체 왜 그렇게 닉네임을 고집하신 건데요. 도대체 어디가 좋아서."
제나가 물끄러미 바라본다.
반사적으로 주변의 베개를 쳐다보더니 가드를 올리는 최재훈.
"…뭐야, 갑자기."
"이런 분위기가 되면 보통 막, 베개로 줘패시길래."
"아니, 억울하네? 누가 들으면 내가 널 진짜 어떻게 하는 줄 알겠다. 니가 맞을 짓을 해서 맞는 것뿐인데. 가드 내려. 지금 니 가드가 무의미하지 않게 만들어버리기 전에."
"흑흑."
그런 최재훈을 바라보던 중얼거렸다.
"숨컷."
"응?"
그리곤 잠깐 동안 골몰히 생각에 잠기더니, 피식 웃었다.
"그 닉네임이 아닌 너는 왜인지 상상이 안 돼서."
어딘가 의미심장하며 도취된 듯한 모습.
최재훈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너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너가 그렇게 말하니까, 갑자기 나도 마음에 들기 시작하네. 숨컷."
"하."
둘이 동시에 나름대로의 기분 좋은 미소를 터뜨렸다.
그렇게 조금 더 온화해진 분위기 속에서 지옥 훈련이 시작됐다.
사실, 말이 지옥 훈련이지.
요즘 들어 제나가 최재훈을 가르치며 그를 잡아먹을 기세로 갈구는 일은 초반에 비하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최재훈의 실력을 처음 접했을 때.
제나는 그에게 아주 큰 기대를 가졌던 만큼, 그의 현 실력을 확인하고 아주 크게 실망했다.
걱정했다.
어쩌면 남녀역전 세계로 넘어와 그의 재능이 상승하긴 커녕 하락된 건 아닐까 하고.
그렇기에 더욱 엄격하게 가르친 바, 다행히도 기우임이 밝혀졌다.
최재훈은 한시라도 빨리 프로로 데뷔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며, 자신의 플레이 스타일을 강박적으로 프로 게임에 맞추고 있었다.
그게 바로 그의 실력이 현저하게 부족해 보였던 원인이었다.
제나가 아는 최재훈의 결점은 딱 하나였다.
딱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치명적이라, 그의 발목을 끈덕지게 붙잡았던 결점.
현저히 좁은 스타일의 폭.
그 때문에, 레오레에서 최재훈의 플레이 스타일은 솔랭과 암살자에 극한 되었다.
그런데 프로 게임과 메이지에 자신을 억지로 맞추려 하니.
안 맞는 옷을 넘어서, 구속구를 입고 있는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제나의 도움으로 그 구속구를 벗어던진 뒤,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옷을 입었다.
그는 중급 닌자 시험에서 모래주머니를 벗어 던진 어떤 송충이 눈썹처럼, 아니면 시간과 수련의 방에서 나온 외계인처럼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제나가 갖고 있는 게임에 대한-
깨달음은.
대부분이 최재훈과 함께 활동하며 그에게 배운 것이었다.
즉, 제나가 최재훈에게 전해주는 깨달음은.
한계까지 발전한 '최재훈'이라는 플레이어의 데이터라고 볼 수 있었다.
최재훈이라는 인간의 관점, 사고방식, 기준에서 구성, 조합, 확립, 발전되어 완성된 데이터.
그렇기에 최재훈은 제나의 가르침을 누구보다도 빠르고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때때로는 말 그대로,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깨우치기도 했다.
제나가 아직 알려주지 않거나, 미처 알려주지 못한 것들까지 스스로 깨우치곤 했다.
같은 기기에서 같은 기기로 데이터를 이식하듯.
'최재훈'의 정보와 최재훈의 재능이 맞물려 그의 학습은 비인간적인 속도로 이루어졌다.
그렇게 지금에 이르러.
최재훈은 제나의 기준에서 보아도 상당히 뛰어난 수준의 플레이어가 되었다.
제나의 이전 비유에 따르면-
이 시대의 챌린저 티어 플레이어들을 다이아몬드 티어 플레이어처럼 다룰 수 있는 수준의 플레이어로 거듭난 것이다.
아니지.
사실, 그 이상이었다.
지금 최재훈이 바라보는 세계는, 현재 챌린저보다 몇 단계는 높은 경지에 있는 최정상 플레이어들이 몇 년은 더 나아가야 보이기 시작할 세계였으니.
하여, 최재훈을-
아니지, SOOMCUT을 접한 이들이 보이는 반응은 대체적으로 두 가지였다.
제목 : 와 soomcut 임마 ㅋㅋ
내용 : 게임을 하도 ㅈ같이 해서 챌린저 애들도 대처를 못하네 ㅋㅋ
ㄴ : 뭐 게임 ㅈㄴ 설렁설렁 하는 것 같은데 애들이 뭔지를 몰라서 대처를 못함
ㄴ : 개오지는 날빌이고 ㄷㄷ
제목 : 나 숨컷식 날먹 암살자 함 해보려고 배우는 중인데
내용 : 아니 ㅅㅂ ㅋㅋ
이새끼 게임을 너무 ㅈ대로 해서
뭐 어떻게 따라하질 못하겠네
ㄴ : 그니까 ㅋㅋ
ㄴ : ㅈㄴ 그냥 침팬지식 플레이라니까? 이성이 있고 생각이 있으면 따라할 수가 없음 ㅋㅋ
ㄴ : ㄹㅇ ㅋㅋ 지금 메타에 암살자 고르는 것부터가 야수의 심장이지
ㄴ : 나도 꿀 함 빨아보려고 따라하다가 3연패함 ㅅㅂ ㅋㅋ
날빌.
'날로 먹는 빌드'의 약어로서, 정석에서 벗어나는 편법을 이르는 멸칭이었다.
그 날빌을 개발하여 소위 '꿀'을 빠는 플레이어다.
고로, 잘하는 게 아니라 특이한 플레이어라는 게, 숨컷을 접하고 보이는 반응 중 하나였다.
그리고-
제목 : 아니 근데 애들 숨컷 너무 내려치는거 아님?
내용 : 쟤 ㅅㅂ 승률 안 보임?
프로 부캐도 저 승률은 안 나올 건데
저걸 날빌 꿀빨충으로 내려치는 건 너무 에바 아닌가?
ㄴ : ㄹㅇ ㅋㅋ
ㄴ : 챌린저를 케이크처럼 쉽게 먹는 법을 개발했으면 그건 꿀빨충이 아니라 재능충이지 ㅋㅋ
ㄴ : 심지어 저거 보기에만 쉬워 보이는 거임 ㅇㅇ
제목 : 외국소 이 새끼 ㅋㅋ
내용 : 숨컷 빌드 따라해 보려다가 8연패 박고 다2 강등 해 놓고도 정신 못차리네 ㅋㅋ병신아 텔론 스킨 환불하라고!!!
ㄴ : 아니 근데 ㄹㅇ; 숨컷 저거 도저히 못 따라하겠더라
ㄴ : 지금 메타에 ㅅㅂ 정글이 정글링 안 하고 미드만 뒤져라 봐 주는데 근접챔인 텔론이 미드에 가서 뭘 하냐고
ㄴ : ㄹㅇㅋㅋ 맨날 라인전단계도 못 지나서 터짐
ㄴ : 플래 라인전도 버티기 힘든데 챌린저 라인전을 도대체 어떻게 버티냐고
ㄴ : 쟤는 심지어 버티는 게 아니라 이김 ㅋㅋ 툭하면 정글 1:1교환하거나 2:0으로 역관광함
ㄴ : 솔직히 내가 봤을때 숨컷 쟤는 그냥 즐겜충임 ㅇㅇ 메이지 하면 더 잘할듯
ㄴ : ㄹㅇ ㅋㅋ
아니다.
그 플레이 스타일에 대해선 명확한 평가를 내릴 수 없지만, 실력 하나 만큼은 존중받아 마땅한 플레이어다.
현 단계에서 함부로 평가해선 안 될 엄청난 실력자라는 게, 숨컷을 접했을 때 보이는 또 다른 반응이었다.
그 두 가지 반응 중.
현재로선 전자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숨컷의 플레이가 현재 레오레에서 정석으로 통하는 플레이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던 탓이다.
어떤 분야에서든 정석과 거리가 멀면 과소평가를 받기 마련이었다.
이해할 수 없어서, 혹은 인정하기 싫어서.
"이런 식이면, 정작 1위 찍어도 그렇게 임팩트 안 큰 거 아냐?"
지옥 훈련 도중 시작된 이야기.
최재훈이 현 사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하자 제나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니가 아직 챌린저 초입이라 그런 거고."
"응?"
"날빌이니, 꿀을 빠느니, 편법이니 뭐니. 만약 니가 프로급 최상위 플레이어들한테 이겨도, 1위를 찍어도. 계속 그렇게 지껄일 수 있을까?"
"시민을 죽이면 범죄자지만, 왕을 죽이면 왕이 된다. 대충 그건가?"
"비슷하네. EU메타도 처음에 나왔을 땐 편법이니 뭐니 무시당했던 거 알지?"
"들어본 것 같기도."
EU메타가 레오레에서 메타를 넘어선 절대적인 기준이며 '룰'로 확립되기 이전.
레오레를 주름잡고 있던 메타는, 레오레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던 AOS게임 '로타'에서부터 전해 내려오던 NA메타였다.
그런 유구한 NA메타가 자리 잡은 시대의 렐드컵에, 유럽 대표팀이 EU메타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당시 사람들은 유럽 대표팀을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았다.
지금 사람들이 최재훈을 대하듯.
하지만 EU메타로써 렐드컵 우승을, 세계 최고의 자리를 쟁취하자?
유럽 대표팀을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았던 이들이 그들을, EU메타를 어떻게든 이해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그처럼 시대를 앞서나간 혁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방법은 어려우면서도 단순했다.
현재를 넘어서는 것.
현재 레오레의 최고로써 군림하며 기준이라 할 수 있는 최정상급 플레이어들을 숨컷이 넘어선다면?
숨컷을 이해하기 싫어도, 인정하기 싫어도.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뒤쳐지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응?"
제나가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또 왜."
"아니, 방금 너가 그랬잖아."
-이런 식이면, 정작 1위 찍어도 그렇게 임팩트 안 큰 거 아냐?
최재훈은 그런 말을 하며 걱정을 내비췄다.
그 행동이 시사하는 바는 단순했다.
"당연히 1위 찍을 거라 생각하고 있나 보네?"
"응?"
최재훈이 방금 전 상황을 돌이켜보곤 쓰게 웃었다.
정말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 같은 건 감히 넘볼 수 없는 자리라 여겼던 랭킹 1위 달성을.
어느새 당연한 일이라, 시간문제쯤 정도라 취급하는 자신이 있었다.
어찌 보면 거만하다고 여길 수 있는 속내.
그런 속내를 들킨 최재훈은 멋쩍게 웃는 대신-
"내 뒤에 누가 있는데, 당연히 이 정돈 해 줘야지."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오만하다 느낄 정도의 자신감이, 불쾌하지 않고 유쾌하게 전달되는 미소였다.
그래서 제나는 유쾌하게 미소 지었다.
지금의 저 미소가, 자신이 기억하던 미소와 아주 닮았다 생각하고 말이다.
"근데, 찬물 끼얹어서 미안하지만- 가능하겠어?"
제나가 양손을 펼치며 고개를 까닥였다.
그렇게 자신을 강조했다.
"하."
그러고 보니, 지금 제나 역시 자신과 비슷한 속도로 점수를 올리고 있었다.
그 사실을 새삼 인지하자, 순탄할 거라 여겼던 길의 지평선에 거대한 장애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실제로 지금 몇몇 이들은 3P와 숨컷이 1위를 두고 경쟁하는 구도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적잖게 기대하고 있었다.
제나 역시.
그러한 구도를 염두에 두고 점수를 올리는 속도를, 방송 시간을 최재훈에게 맞춰 주고 있었다.
1위 결정전에서 숨컷과 만나기 위해.
그럼으로서 숨컷의 먹이가 되어주기 위해.
물론, 일부러 봐준다거나 해서 순수이 먹혀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최재훈은 아직 제나에게 배워야 할 게 남아 있었다.
아직, 이전의 '최재훈'을 따라잡지 못했다.
그러나.
제나는 지금 최재훈이 미성숙하다거나 미완성 상태라 여기지 않았다.
그는 그저 단순히 이전 '최재훈'이 걸었던 길을 계승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자신만의 독자적인 길을 개척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제나는 지금 최재훈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대략 알았으나.
그가 정확히 어떤 플레이를 보여줄 지는 가늠이 안 됐다.
더군다나.
제나가 최재훈이 적으로 맞닥뜨리면 게임의 양상은 둘의 에이스 대결로 진행될 텐데.
그 경우, 소위 '미드좆망겜'이라 불리는 현 메타에 따라 미드 라이너인 최재훈이 탑 라이너인 제나보다 기본적으로 더욱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제나는 기대하고 있었다.
어쩌면 최재훈의 자신의 기대를 넘어서, 자신을 넘어서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자신이 아는 '숨컷'이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됐으니까, 미리 사과해 둘게?"
"아닌데? 내가 더 미안한데? 나는 오과 할 건데?
"하… 시리어슬리? 이 장면에서 대사를 그따구로 밖에 못 쳐? 진짜… 쯧…."
장난스럽게 서로를 노려보던 둘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 * *
"이야 근데, 삼피 님 진짜 잘 나가시네~"
"뭐? 뭐야, 갑자기."
평소보다 빠르게 끝난 지옥 훈련.
둘이 해산하기 전 빈둥대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바닥에 정자세로 누운 최재훈이 휴대폰을 보고 있는 상태 그대로 말했다.
마찬가지로 침대 위에 정자세로 누워 있던 제나가 휴대폰을 보고 있는 상태 그대로 답했다.
"구독자가 뭔, 하루 만에 만 명이 넘게 늘어."
"구독자? 아. 하. 뭐, 이 정도야. 새삼스럽게."
"크… 미쳤다 미쳤어. 그냥 말도 안 된다, 진짜."
"참나."
제나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대화가 일단락되고 침묵이 찾아왔다.
"아니, 저기요."
그 침묵을 곧바로 최재훈이 깼다.
"뭐."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지. 방금 그 흐름에선 '아니야~ 재훈아~ 너야 말로 요즘 개 쌉 오지잖아~' 그런 대사라도 쳐 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 대사를 쳐 주기엔, 그다지 쌉 오지지 않잖아."
"…."
흐어엉.
최재훈이 가만히 있다가 배고 있던 베개에 얼굴을 박고 우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어딘가 꽉 막힌 울음소리에 불안함을 느낀 제나가 침대 밖으로 얼굴을 쏙 내미려 아래를 내려다 봤다.
"? 아니, 너 뭐하냐- 헤이! 미친! 베개에 이상한 거 묻히지 마! 뒤져 진짜!"
"아니거든? 나도 쌉 오지거든? 너가 이상한 거거든? 하루에 천 명 늘은 거면 많이 는 거거든?"
"에휴, 그래 그래. 정말 쌉 오지는구나."
"진심이 안 담겨 이짜나!"
"진심을 담아서 패고 싶으니까 그쯤 하렴."
"흑흑, 이런 폭력적인 지지배가 뭐가 좋다고."
그때 제나의 눈에 최재훈의 핸드폰 화면이 들어왔다.
3P 채널.
구독 중.
최근 영상 하단에 빠짐없이 보이는 붉은색 바가 끝까지 그려져 있었다.
최근 영상을 빠짐없이 끝까지 시청한 기록이었다.
"흐음~?"
제나의 눈과 입이 짓궂으면서도 의미심장한 곡선을 그렸다.
"?"
자신의 핸드폰 화면을 확인하고 그 표정의 의미를 눈치 챈 최재훈의 표정이 경직됐다.
"그러게~? 이런 폭력적인 지지배의 어디가 좋은 걸까~?"
"…."
먹잇감을 발견한 뱀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제나와 눈이 마주치지 않기 위해 최재훈은 시선을 부자연스럽게 구석에 박아 놓은 뒤 고정시켰다.
"응~? 나도 궁금하네~? 누가 좀 알려줬으면 좋겠는데~? 어디, 이 폭력적인 지지배 영상 하루도 빠짐없이 챙겨 보는 사람 없나~? 있으면 좀 물어보고 싶은데~? 이 폭력적인 지지배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길래, 그 매력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는 건지~?"
"하루도 빠짐 없이는 아니거든…?"
"아, 그러셔~? 그럼, 어디 한 번 줘봐."
"뭘."
"핸드폰. 확인해 보게."
"싫은데."
"왜 싫으실까~? 혹시 찔리는 곳이라도 있으신가~?"
"아닌데."
"그럼 못 주실 이유라도 있나~?"
"…니가 안 돌려줄까봐…?"
"내가? 왜~? 하루에 후원으로 몇 백 버는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개 재수 없네."
"그런 개 재수 없는 사람 영상을 하루도 빠짐없이 챙겨보는 사람은 도대체 뭘까~?"
"…하루도 빠짐없이는 아니거든?"
그때 제나가 문 쪽으로 획 몸을 돌리며 말했다.
"어, 아빠 왔어?"
최재훈이 인사하기 위해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서려했다.
그런데, 그가 시선을 향한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어느새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도 사라져 있었다.
제나에 손에 들려 있었다.
'최근 동영상'에서 '전체 동영상 보기' 페이지로 이동한 화면.
모든 동영상 하단에 빠짐없이 보이는 붉은색 바가 끝까지 그려져 있었다.
"어라~? 이게, 오류가 났나~?"
그녀가 입이 'w'모양이 될 정도로 한껏 우쭐거리며, 화면을 최재훈에게 보여줬다.
"…."
몸은 부들부들, 식은땀을 삐질삐질.
얼굴이 터질 정도로 붉어진 최재훈이-
"아! 야! 뒤질래!?"
몸을 날려 제나의 핸드폰을 낚아 챈 뒤, 몸을 돌려 옆으로 굴렀다.
제나가 급히 침대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탈환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최재훈은 신속하게 미튜브 앱을 실행시킨 뒤 자신의 채널로, 그리고 '전체 동영상 보기'페이지로 이동했다.
최재훈이, 방금 전 제나가 보여줬던 것과 똑같은 화면을 그녀에게 보여줬다.
'최재훈'채널의 영상을 하루도 빠짐없이 시청한 기록을 말이다.
그러면서, 방금 전 제나처럼 입이 'w'모양이 될 정도로 우쭐거리며 그녀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봤다.
"…."
그러자 제나가 방금 전 최재훈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몸은 부들부들, 식은땀은 삐질삐질.
터질 듯 붉어진 얼굴.
다른 게 있다면-
-퍽!
"악!"
그녀의 손에 베개가 들려 있다는 점이었다.
과연 이번은 최재훈도 맞고만 있진 않았다.
-퍽!
"악!"
최재훈이 베개를 들어 응수했다.
"이게!?"
"악! 죽어라 삼피!!! 너만 없으면 나는!!!"
"악! 죽어??? 이게 진짜, 뒤지려고-"
한동안 둘의 베개가 사정없이 울부짖었다.
* * *
"아, 맞다. 야. 여기."
귀갓길에 오른 최재훈을 제나가 마중 나왔다.
둘이 버스 정류장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던 와중, 제나가 무언가를 꺼내 최재훈에게 건넸다.
10만 원이었다.
최재훈은 10만원이 들린 제나의 손을 바라보다가-
"그동안 고마웠다."
"…뭐?"
"이제 진짜 그 돈 안 줘도 될 것 같아."
이내, 분위기를 잡으며 말했다.
마치 이별의 순간처럼.
제나가, 안돼욧! 그러지 마세욧!
그런 반응을 보이길 바라며.
"아니, 갑자기 또 뭐라 씨부리는 거야. 진짜, 뒤질래!?"
하지만 어림도 없었다.
제나가 씩씩하게 버럭 신경질을 내자, 최재훈은 그녀가 주먹이라도 든 것처럼 꼴사납게 쭈그러들었다.
"아, 좀! 감정 잡고 있는데!"
"감정은 뭔 년의 감정. 내가 똥폼 잡지 말고 걍 줄 때 쳐 받으라고 몇 번을 말해!"
"아, 아니! 진짜 괜찮아서 그렇다니까!? 아니 그, 내일! 응? 미튜브랑 그 후원액 정산되잖아!"
내일 정산되는 미튜브와 방송 활동의 정산액은 상상 이상은 아니었지만 기대 이상이었다.
거기엔 이린의 비현실적인 작업 속도가 크게 기여해, 미튜브 수익 절반을 그녀에게 배분해 줄 예정이었지만.
그걸 감안해도 여전히 엄청난 액수였다.
원래 같았으면 자신과 부모님이 몇 달은 일해야 벌 수 있었던 금액.
이 돈이면.
한동안 가족들이 여유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무언가에 쫓기듯 시달리며 살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최재훈이 멋쩍게 웃었다.
시선을 피하며 툭하고 내뱉었다.
일단 말을 하는데, 부끄러워서 듣지는 못했으면 좋겠다는 양.
"고마워, 네 덕분이야."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야."
하지만 그냥 넘어가 줄 제나가 아니었다.
그녀가 한껏 우쭐대며 말했다.
"아니, 뭐가 아무것도 아니야. 분명히 고, 고, 고, 고, 고, 고마워. 네, 네, 네, 네, 네 덕분이야. 제, 제, 제, 제나야. 이러는 거 들었는데."
"…말 안 더듬었거든?"
"말 안 둬둼웠궈둰~"
"제나야라고도 안 했거든?"
"안 했거둰~"
"…."
"어쭈~ 은인 꼬라보는 표정 봐라~ 한 대 치겠다? 그래, 이제 볼장 끝났다 이거지?"
"그럴…리가요."
"아닌 것 같은데~? 그게 아니면, 감사 인사도 하느니 마느니 어~? 임마, 짜샤~"
제나가 기분 좋게 실실거리며 최재훈을 툭툭 쳤다.
최재훈이 울 것 같은 얼굴로 바닥에 엎어져, 그녀를 향해 부복했다.
"제나 주인님…! 오랫동안 빌어먹게 신세 많이 졌습니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행인들이 웅성거리며 쳐다봤지만, 제나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웅크려 앉아 최재훈의 뒤통수를 콕 콕 찌르며 말했다.
"야, 야."
"말씀하시죠."
"평생?"
"평생…!"
"진짜?"
"진짜…!"
"흐음~"
제나가 최재훈의 머리를 거듭 콕콕 찌르며.
아주 만족스러워 보이면서도-
최재훈이 봤으면 왠지 모를 오한을 느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기억해 둘게~"
저 멀리에서 버스가 다가오고 있는 걸 확인한 제나가 최재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일어섰다.
지난 한 달 동안 최재훈의 몇 배에 달하는 수익을 올린 제나였다.
마음 같아선 'Shut up and take my money'라고 하며 그의 주머니에 돈을 쑤셔 넣고 싶었지만.
이제는 딱히 그런 고집을 부릴 필요가 없었다.
제나가 핸드폰을 열어 인터넷 방송 후원 앱을 실행시키더니, 한쪽 입꼬릴 끌어 올렸다.
그녀의 화면에 표기된 닉네임은, 최재훈이 '해장님'이라 기억하고 있는 아이디와 아주 비슷했다.
"오늘은 무슨 리액션을 시켜 볼까나~"
아주 짓궂은 표정을 한 제나가 아주 가벼운 발걸음으로 귀가했다.
* * *
"야, 최재은!!!"
"무요."
귀가한 오빠가 들어오지 않고 현관에 서서 부르자, 여동생이 어슬렁거리며 방에서 나왔다.
"나가자!"
"으딜요."
"아, 빨랑 대충 걸치고 나왐마!"
"하, 뭐야 귀찮게.
여동생은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방에 들어가 '빨랑 대충 걸치고' 나왔다.
"어디 가는 건데?"
그리곤, 오빠와 같이 밤길을 걸으며 시큰둥하게 물어봤다.
"가게."
그의 집에서 '가게'라 하면 대체로, 부모가 운영하는 치킨집이었다.
"가게는 갑자기 왜? 우리 째후니, 엄마아빠뽀꼬시뽀또요?"
"때찌가 마렵지만, 오늘의 오빠는 기분이 좋으니 봐주마."
"그러게? 왜 그렇게 기분이 좋아? 짜증나게."
"오빠가 기분이 좋으면 짜증이 나니?"
"응."
"으아아악!!! 너무 좋아!!!!!! 끼요오오오옷!!!!!!!!"
"으아아아악!!! 너무 싫어!!!!! 끼요오오오오옷!!!!!!"
머지않아 가게에 도착한 최재훈 남매.
"응?"
당연한 듯 텅 비어 있는 매장의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모친이, 갑작스러운 방문에 당황하면서도 자식들을 반겼다.
"아부지는요?"
"배달 갔지."
"아, 오케이. 기다릴게용."
자리에 앉은 아들의 모습은 의기양양하기까지 했다.
쟤 왜 저러니?
모친이 눈으로 딸에게 물었다.
몰라염. 미쳤나 본데염?
딸이 어깨를 으쓱이며 눈으로 모친에게 답했다.
머지않아 부친이 돌아옴으로써 가족이 한 자리에 모였다.
아들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내일, 드디어, 제, 첫, 정산금이 나옵니다."
"정산금?"
"재훈이가 그거 시작했잖아요. 그, 방송이랑 미튜브."
"아아."
"아, 그거 땜에 그렇게 신난 거였음?"
"아무튼, 재훈아. 축하한다. 너한테 의미가 큰돈이지?"
"그러니까요. 재훈이가 그, 게이머? 활동으로 처음 번 돈이니까요."
"알바 그만두고 방송 시작한다 했을 때 드디어 정신이 나가버렸구나 싶었는데, 이열~"
가족들은 평범하게 최재훈의 기쁨에 동감해 주었다.
액수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전업 게이머 활동의 첫 수익.
현실적인 관점에서 그다지 큰 기대를 안 한 것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지금 그의 모습.
집안의 형편이 어려워진 이후로도 최재훈은 밝은 모습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가족들은 그 밝은 모습 뒤에 숨겨진 그림자를 느낄 수 있었다.
웃고 있어도 웃고 있는 게 아닌 듯했다.
아주 오랜만이었다.
최재훈이 이렇게 표리 없이 순수하게 기뻐 보이는 건 말이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아무래도 좋았다.
그가 힘들게 아르바이트를 하여 살림에 보탬을 주는 것보다.
저런 모습을 보여주는 게, 가족들에겐 훨씬 더 큰 기쁨이 되었다.
"그래서, 얼마 벌었는디~?"
별 기대를 안했기에, 별 관심도 없지만 여동생은 굳이 질문했다.
아무리 미미한 성과일지라도 격려하고 축하해 주어 오빠의 기분이 조금이라도 더 좋아지게.
모친과 부친과 같은 생각을 하며 아들의 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막상 최재훈이 답하자 그들은 준비해 두었던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최재훈을 축하해 주지 못하고-
"…."
"…."
"..."
눈을 깜빡이며,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울 따름이었다.
"아니, 오빠. 장난치지 말고."
그리고, 뒤이어 최재훈이 핸드폰을 조작한 뒤 보여주자 눈에 힘을 집중 해 화면에 적힌 숫자를 세더니-
"…."
"…."
"…."
눈이 떡, 입이 쩍하고 벌어졌다.
"아, 아니. 재훈아…."
목소리와 눈이 사정없이 떨리는 부친이 다시 한번 숫자를 확인하더니 물었다.
"이거 혹시 그, 게임 머니나. 그런 거냐?"
그에 아들이 부친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아부지."
"응?"
다음은 모친을-
"어무니."
"어? 아들."
마지막으로 여동생을.
"흰둥아."
"멍멍…?"
그들을 한 번씩 쳐다본 뒤, 씨익.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 이제 여유 좀 가져도 될 것 같아요."
"끼아아아아아아악!!!!!!!!!!"
여동생이 기쁨의 비명을 내질렀다.
"아, 아니. 재, 재훈아…! 이게, 무슨…!"
"아니, 아들…! 어찌 된 일이야 이게!!! 자세히 좀 설명해 봐!"
모친과 부친은 꿈인지 생신지 갈피를 잡지 못하면서도,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최재훈은 마음껏 웃으며 그런 그들의 반응을 즐겼다.
그날, '가게'는 아주 오랜만에 일찍 문을 닫았다.
그날, 최재훈 일가는 아주 오랜만에 외식을 했다.
아주 오랜만에, 가족끼리 모여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여유롭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날, 방송을 켠 최재훈은 유달리 기분이 좋아 보였다.
* * *
SOOMCUT이 랭킹 2자릿수에 진입했다.
제나와 최재훈이 추정하길, 랭킹 1위 도달까지 남은 기간 약 1주.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그와 비교하면 '치킨킹치킹'은 몹시 부진한 속도였으나, 그럼에도 분명히 성장해 나가고 있었다.
암살자를 집중적으로 연습한다곤 하나, 실력의 절댓값이 올라갔기에.
자연스럽게 '치킨킹치킹'에서 메이지를 플레이 할 때도 그 성과가 나타났다.
600점, 챌린저의 문턱에 간신히 걸친 상태로 강등당하고 승급하길 반복했던 '치킨킹치킹'은.
지금에 이르러 800점이 되어 어엿한 챌린저가 되었고.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느리지만 분명하게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 인상적인 속도는 못 됐다.
그리고, 그리 인상적인 실력도 못 됐다.
그렇기에, '레오레'방송으로선 그리 인상적이지 못했다.
제나와 이린은 판단했다.
최재훈이 SOOMCUT의 정체가 자신임을 밝히기 전까지, 레오레가 아닌 다른 컨텐츠를 진행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그리하여, 최재훈과 제나가 이린의 차를 타고 도착한 장소-스튜디오였다.
스튜디오의 주인은 주기적으로 다른 방송인들을 초청하여 진행하는 토크쇼를 주력 컨텐츠로 내세우는, '보라돌이'였다.
보라돌이는 한 플랫폼을 대표하는 방송인 중 한 명이자, 대규모 미튜버로서 그 영향력은 실로 엄청났다.
하지만.
요즘 업계 최고 화제 인물인 '3P'만은 못했다.
구독자가 100만을 넘어가는 숱한 초대형 미튜버들이 모시기 위해 안간 힘을 썼으나, '최재훈'의 방송을 제외하곤 단 한 번도 다른 이들의 방송에 출연하지 않은 비싸신 몸.
그렇기에, 난리가 났었다.
그 3P가 먼저 연락을 보내오다니 말이다.
3P는 출연의 대가로 어렵진 않지만 꽤 까다로운 조건을 요구했으나, 보라돌이는 기꺼이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
스튜디오에 들어선 제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제나에게 익숙한 얼굴들.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얼굴.
그들은 모두 제나를 연예인 보듯 쳐다봤다.
그래서인지, 다음으로 최재훈을 보는 그들의 표정은 실로 미묘했다.
특히, 프로게이머가 포진되어 있는 남성진의 시선이 아주 강렬했다.